오늘은 리움 피에르 위그전이 종료하는 날이다

사람들은 전시 오프닝에만 주목하고 클로징은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

전시 시작하고 몇 주, 길면 한두달 바이럴되다가

전시 끌물에는 거의 사람들이 없다.

정말 마지막에 밀리고 밀린 숙제를 하러 가는 사람들이 있긴 있지만.

모네의 수련처럼 왠만큼 유명하지 않고서는 저물어가는 태양에 눈길을 주는 사람이 드물다.

전시의 쓸쓸한 뒷모습.

2025년 봄을 뒤흔들었던 한 전시가 오늘 끝난다.

새로 시작하는 전시들을 쳐내기에도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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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206418.html



다시 ‘씨너스’로 돌아가보자. ‘유럽의 흑인’이었던 아일랜드인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백인’이 된다. 미국 사회의 백인 우월주의에 동화되어 흑인들 위에 군림했고, 일부는 케이케이케이(KKK)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처럼 ‘백인성’이란 단순한 피부색이 아니라 정치적, 문화적으로 구성되고 획득되는 정체성이다. ‘씨너스’는 이런 역사를 뱀파이어가 된 아일랜드인을 통해 풀어낸다. 그렇다, 주크 조인트 앞에 찾아온 이들은 그냥 아일랜드인이 아니라 뱀파이어들이었다.




그러나 동화란 결국 흑인의 문화를 탈취하고 영혼을 빼앗아 무력화하는 과정일 뿐이다. 여기서 떠오르는 영화가 또 한편 있다. 21세기 블랙 웨이브 대표작인 조던 필의 ‘겟 아웃’(2017)이다. 이 작품에서 백인들은 흑인 신체의 강인함과 생명력을 탐하면서도 그들의 주체성이나 경험, 목소리를 철저히 지워버리려고 한다.



모두를 뱀파이어로 만들려는 아일랜드계 미국인들과 뱀파이어가 되지 않으려는 흑인들, 즉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사이에 한판 전쟁이 펼쳐진다. 그리고 아프리카계의 블루스와 아일랜드계의 포크가 스크린 위에서 자웅을 겨루게 된다. 이 영화의 장르는 호러가 아니라 뮤지컬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그리고 영화는 질문한다. “사악하다”는 것은 누구의 언어인가? ‘씨너스’는 이 단어를 다시 해석하자고 제안한다. 노예제로 인해 삶을 짓밟힌 흑인을 위로했던 건 음악과 종교였다. 음악이 사악한 것일 수 있다면, 그건 그 노래가 노예들을 위로하고, 그들 자신으로 남을 수 있도록 지탱해주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주크 조인트란 백인들에겐 지극히 사악한 공간, 두려운 공간이 되었다.



쿠글러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2022)에서 아프리카인과 아메리카 선주민의 이야기를 교차시켰다. ‘씨너스’에 이르러서는 그 위에 아일랜드계와 중국계 이민자들의 역사를 덧붙인다. 지금의 미국을 있게 했으되, 주류 역사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았던 이들의 사연을 초자연적 스펙터클과 함께 되살려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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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26주년, 결산 영수증을 보니 내가 좋아하는 출판사는 일본만화 번역전문 출판사 대원이다. 원피스 같은 시리즈물 100권짜리 구매로 갯수가 많이 카운트되었다.


하지만 2-3위는 사실상 같은 출판사고 합치면 대원보다 더 많다. 프린스턴대 출판사다. 같은 1권이라도 만화보다 독서시간이 훨씬 오래 소요되지만, 피어리뷰로 검증된 대학출판사에서 나온 영어원서만의 깊이가 있다. 


그중 가장 정수로 꼽을 수 있는 책은

2005년에 프린스턴대 출판사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며 나온

100권의 책으로 보는 100년(A Century in Books)이다.

프린스턴대 출판사가 출판한 8천 권의 책 중

가장 정체성을 잘 드러내고 독창적이고 오래남을 100권의 책을 엄선했다.



















리스트가 어마무시하다. 지성사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책투성이다.

한 책 한 책 다 영웅 레전드급이다.


한 출판사가 이런 대작을 다 보유하고 있었다니 새삼 경탄스럽다.

1922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의미로 시작해

1931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모던 건축

1940년 불완전성 정리와 연속체 가설로 유명한 괴델의 집합론

1943년 도상학의 거장 파노프스키의 알브레흐트 뒤러의 생애

1944년 폰 노이만과 모겐슈타인의 게임 이론과 경제행동

1945년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1953년 오이어바흐의 미메시스

1955년 한스 바론의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기

1957년 문학비평의 노스럽 프라이와 김영민 정치사상교수가 자주 언급하는 1957년 칸토로비츠의 왕의 두 신체

국제정치학과 외교사의 명저 1956년 외교관 조지 캐넌의 미소관계 분석

1963년  밀턴 프리드먼과 안나 제이컵슨 슈와츠의 미국금융/통화사

1966년 진화생물학의 거장 조지 윌리엄스의 적응과 자연선택

20세기 최고 막시스트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 유대종교학의 거숌 숄렘, 신화학자 조셉캠밸, 지성사의 포칵, 인ㄴ류학자 극장국가 느가라의 킬리포드 기어츠, 그렇게 계속 가다가 마지막에 스티븐 호킹도 나온다.

일일히 다 언급할 수가 없을만큼 거장들이다.

무분별한 마케팅으로 그 의미가 퇴색되고 오염된 거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책은 한 페이지에 한 꼭지로 책의 개요를 설명했다. 깔끔하고 좋은 설명이다. 


이런 해제서가 한국 출판계에는 이제 안 보인다.


서울대 권장도서로 인문고전 100선 읽기나 지식여행 출판사에서 일본책을 번역한 경제학, 종교학 세계명저 30선 같은 해제 번역서가 있지만 같은 출판사의 책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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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행복할까요?


치바현 유학생 구엔 티 투이씨(21세) = Nguyễn Thị Thúy


1. 이미 2016년 아사히 신문 기사에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10월 10일 기사. 페이스북에 돌아다니던 사진이었음) 지금 스레드에 또 올라와서 좋아요 1천을 받길래 인용해봤다.

10년 전과 비교해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2. 여기서 구엔이라고 되어있는 성씨는 베트남어로 응우엔이라고 읽고(성조는 별개로 끝이 두 번 꺾이는 특이한 성조) 한자로는 阮이라고 쓴다. 나라 이름 완, 혹은 원

일본어로는 응으로 발음이 시작하기 어색해서(받침에 가깝다) 원래 발음을 다 날려먹고 구엔이라 음차했다. 발음은 응우예↘↗ㄴ의 느낌.


3. 번역

나는 일본에 오기 전까지 일본은 위대하고 훌륭한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에 처음 왔을 때도, 거리의 발전된 모습이나 사람들의 풍요로운 생활을 보고, 내 조국인 베트남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느꼈고, 일본인들은 자신의 나라에 자부심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고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에 온 지 10개월이 지난 지금은, 실상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세계적으로도 자살률이 높은 나라 중 하나라고 한다. 일본인들은 좀처럼 웃지 않고, 언제나 뭔가 걱정거리가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전철 안에서는 수면 부족으로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자주 본다.


일본인들은 근면하고, 평생 열심히 일하며 지금의 일본을 만들어왔다. 하지만 회사나 조직에 대한 기여만을 생각하고, 자신이 이룬 성과를 스스로 누리는 것을 잊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베트남은 아직 가난한 나라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낙천적으로 살아가고, 좀처럼 자살을 생각하지 않는다.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곧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일본인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걸까. 행복이란 무엇일까. 그 해답을 일본인 스스로가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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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익 갤러리에서 했던 설원기전이다. 어떤 전시는 바로 글로 베풀지 않고 나중을 위해 남겨두어야한다. 내 안에서 생각이 발효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은 많은 질문을 낳아 관람 당시에는 다 답할 수 없고 이후에 시간을 두고 생각해봐야하기도 하다. 내 안에서 충분히 음미되고 발효될 때까지. 아이러니하게도 서사는 별로 없고 정동만 있는 추상계열들이 그런 작품이다. 아무 것도 안 말하는데 무수히 많은 것을 말하는 색면. 아무 것도 질문하지 않는데 수많은 질문을 건네는 단색화.

설원기, 2023-25, 75x60cm, oil on plexiglass, 2023


무거운 붓질로 휘발하는 기운생동의 감각을 휘갈긴 듯한 설원기 작가의 작품이다. 붉게 달궈진 금속 표면처럼 불균질하게 번지는 크림슨과 스칼렛에 단청풍미가 섞인 반질반질한 표면 위에, 금속성 광택을 머금은 푸른 스트로크들이 조적하듯 수직으로 얹혀 있다. 스트로크로 마티에르감을 쌓은 느낌이다. 브러시는 물결이라기보다 굴절된 유리판처럼 단단한데, 그 사이사이로 언뜻언뜻 재기발랄한 카나리아 옐로, 새침데기의 페일민트, 탄식하듯 흐르느 저채도의 그레이시 블루가 어긋나듯 겹쳐진다. 육중한 소리를 삼킨 색채의 기둥이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중력에 의해 견고하게 세워진 듯하다. 앙리 미쇼의 떠남과 방랑, 그 무브망의 심리적 추상성과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물성실험이 생각난다

설원기, 2023-22, 86x70cm, oi on lead, 2023


프레임도 고목을 사용해 빈티지감이 돋보인다. 동양적 침묵이 연상되는 고구려 벽화풍 작품도 있다. 벽화처럼 거칠게 긁힌 채색 위에 선연한 핏빛의 마르살라 레드와 둥둥 기체 같은 스모키블루가 중앙에 벽처럼 세워져있는 난백색 타원에 침투한다. 데미안의 알, 이 타원은 수정체이자 터널 혹은 배의 선체처럼 화면을 가로지르는데 양극의 혼란을 뚫고 나타난 서정적 침묵에 구현된 실체로 읽힌다. 번짐과 끌림, 반복과 삽입의 제스처. 그 안에서 어쩐지 감정의 파형이라기보다 전통시대의 잔향이 시트지 바닥에 깔린듯 깊이감있는 회화적 지층을 만난다. 붓질이 적막한 폭발을 조율하며 김환기의 정적성과 피터 도이그의 상상적 영역을 버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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