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익 갤러리에서 했던 설원기전이다. 어떤 전시는 바로 글로 베풀지 않고 나중을 위해 남겨두어야한다. 내 안에서 생각이 발효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은 많은 질문을 낳아 관람 당시에는 다 답할 수 없고 이후에 시간을 두고 생각해봐야하기도 하다. 내 안에서 충분히 음미되고 발효될 때까지. 아이러니하게도 서사는 별로 없고 정동만 있는 추상계열들이 그런 작품이다. 아무 것도 안 말하는데 무수히 많은 것을 말하는 색면. 아무 것도 질문하지 않는데 수많은 질문을 건네는 단색화.

설원기, 2023-25, 75x60cm, oil on plexiglass, 2023


무거운 붓질로 휘발하는 기운생동의 감각을 휘갈긴 듯한 설원기 작가의 작품이다. 붉게 달궈진 금속 표면처럼 불균질하게 번지는 크림슨과 스칼렛에 단청풍미가 섞인 반질반질한 표면 위에, 금속성 광택을 머금은 푸른 스트로크들이 조적하듯 수직으로 얹혀 있다. 스트로크로 마티에르감을 쌓은 느낌이다. 브러시는 물결이라기보다 굴절된 유리판처럼 단단한데, 그 사이사이로 언뜻언뜻 재기발랄한 카나리아 옐로, 새침데기의 페일민트, 탄식하듯 흐르느 저채도의 그레이시 블루가 어긋나듯 겹쳐진다. 육중한 소리를 삼킨 색채의 기둥이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중력에 의해 견고하게 세워진 듯하다. 앙리 미쇼의 떠남과 방랑, 그 무브망의 심리적 추상성과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물성실험이 생각난다

설원기, 2023-22, 86x70cm, oi on lead, 2023


프레임도 고목을 사용해 빈티지감이 돋보인다. 동양적 침묵이 연상되는 고구려 벽화풍 작품도 있다. 벽화처럼 거칠게 긁힌 채색 위에 선연한 핏빛의 마르살라 레드와 둥둥 기체 같은 스모키블루가 중앙에 벽처럼 세워져있는 난백색 타원에 침투한다. 데미안의 알, 이 타원은 수정체이자 터널 혹은 배의 선체처럼 화면을 가로지르는데 양극의 혼란을 뚫고 나타난 서정적 침묵에 구현된 실체로 읽힌다. 번짐과 끌림, 반복과 삽입의 제스처. 그 안에서 어쩐지 감정의 파형이라기보다 전통시대의 잔향이 시트지 바닥에 깔린듯 깊이감있는 회화적 지층을 만난다. 붓질이 적막한 폭발을 조율하며 김환기의 정적성과 피터 도이그의 상상적 영역을 버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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