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leído tu texto con atención y agradezco la profundidad con la que abordas la relación entre arte, mirada y estructura social.

Has logrado situar la cuestión estética en un territorio donde el poder de la representación se entrelaza con las jerarquías históricas de la visión.Coincido en que la interpretación de Araya no puede reducirse a una mera inversión del eurocentrismo; su obra, como bien señalas, tensiona las fronteras entre sujeto y objeto, entre lo visible y lo que resiste a ser visto.

La noción de tableau cinemático, que dices,introduce una dimensión temporal en el espacio pictórico que desestabiliza cualquier lectura estática.
Sin embargo, quizá valdría pensar—más que en la definición conceptual de la experiencia—en su potencial de desplazamiento:¿y si la imagen no fuera un punto de llegada del pensamiento, sino su punto de fuga? cómo decirlo,tal vez el arte no contiene la mirada, sino que la disuelve,la redistribuye,la devuelve al mundo con nuevas condiciones de visibilid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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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 vez el arte no mira, sino que devuelve la mir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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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en punto, lo que dices abre una línea de pensamiento fascinante. Por ejemplo, podríamos preguntarnos si el arte realmente devuelve la mirada o, más bien, la disuelve por completo. En Anselm Kiefer, las superficies calcinadas no observan: engullen al espectador, lo vuelven materia del paisaje. En Gerhard Richter, la pintura se desvanece en una niebla que borra toda certeza visual, cuestionando la fe en la imagen. Lee Kangso y Edward Hopper, desde extremos geográficos, crean espacios donde la mirada se interrumpe, suspendida entre presencia y vacío, por así decirlo.
Tal vez el arte no sea un espejo que nos devuelve, sino una fractura en el acto mismo de ver, un territorio donde mirar se vuelve un gesto de extravío y revelació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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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저자께서 6월에 올린 글인데 피드에 왠일인지 오늘 떠서 읽다가 어학적으로, 철학(신학)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서 풀어서 설명해본다. 이런 것이 라틴어를 읽는 재미다.

내용은 대략 암브로시우스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플라톤에게서 유래했다는 플라톤주의자들의 비판에 대해 반박하며 되려 플라톤이 예레미야를 통해 유대 전통의 영향을 받았다고 논박하는 대목이다.

출전: Augustinus, De doctrina christina, II 28. 43.
번역: alek.try.on

De utilitate autem historiae,
역사의 유익함에 관해서,
ut omittam Graecos,
그리스인들[의 예들]은 제쳐두더라도,
quantam noster Ambrosius quaestionem solvit,
우리 암브로시우스가 아주 중대한 문제를 해결했다.
calumniantibus Platonis lectoribus et dilectoribus,
플라톤의 독자들과 애호가들이 비방했을 때 말이다.
qui dicere ausi sunt omnes Domini nostri Iesu Christi sententias,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견해들을quas mirari et praedicare coguntur,
자신들도 감탄하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그것들을
de Platonis libris eum didicisse,
그가 플라톤의 책들에서 배운 것이라 감히 말하였다.
quoniam longe ante humanum adventum Domini Platonem fuisse negari non potest.
왜냐하면 주님의 인간으로서의 강생보다 훨씬 이전에 플라톤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Nonne memoratus episcopus, considerata historia Gentium,
근데 아까 그 주교[암브로시우스]는 이방인들의 역사를 고려하여,
cum reperisset Platonem Hieremiae temporibus profectum fuisse in Aegyptum, ubi Propheta ille tunc erat,
플라톤이 예레미야 시대에 이집트로, 그 예언자가 있었던 곳으로 갔음을 알아냈을 때,
probabilius esse ostendit quod Plato potius nostris Litteris per Hieremiam fuerit imbutus, ut illa posset docere vel scribere quae iure laudantur?
플라톤이 오히려 우리의 성서에서 예레미야를 통해 영향을 받아 그가 마땅히 칭찬받을 수 있는 내용들을 가르치고 쓸 수 있었단 게 더 그럴듯함을 보여준 것 아니겠는가?

....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고전 라틴어 acc+inf였던 간접문의 활용 그리고 예수 이전에 살았던 플라톤에 대한 신학적 해명에 대한 것이다.

우선 어학부터. 중세 라틴어 이후부터는 간접문에서 현대 유럽어처럼 that구절이 보편적이다. 독일어의 다스 dass 프랑스어와 스페인어의 끄,께que처럼 다음 구절을 연결한다. 예컨대 그가 말한다. 댓 이하라고.. 하는 식으로 쿠오드 quod를 사용한다.

그런데 로나제국주교 암브로시우스(339)는 고전과 중세 중간의 고대후기 인물이어서 그런지 쿠오드가 아니라 고전 라틴어의 대격+부정사를 사용한다

문장에는 ablative absolute 절대탈격(이라고 잘못 번역된 느슨한 종속절),ut+subj., plup.subj.같은 중요한 문법
글고 proficisci같은 수동태모습에 능동태의미인 이태동사deponent도 나오지만 모두 생략하고 간접문만 초점을 맞춰보자

noster Ambrosius가
quantam quaestionem을 solvit했지

Platonis의 lectoribus et dilectoribus들이 calumniantibus했는데

qui(그 플라톤의 독자와 애호가들이) dicere + ausi sunt감히 말했었다 다음을.

Domini nostri Iesu Christi의
omnes sententias(여기 간접문의 목적어 먼저 f.pl.acc.)들을
<quas mirari et praedicare +coguntur했던 그 모든 견해인데>
(de Platonis libris) eum didicisse
플라톤의 책들로부터(de+pl.abl) 그가 배웠었다고

eum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고 대격으로 표시된 간접문의 주어에 말하다의 부정사 과거형이 간접문의 동사다.

그 이후도 고전 라틴어식 간접문은 세 번 더 나오는데
Platonem fuisse + negari non potest.
(성육신 이전에) 플라톤이 ~있었다고(존재했었다고)+ 부정할 수 없었다. (전체문장은 quoniam때문에 앞뒤로 왜냐하면 ~ 때문이다가 붙는다)

cum reperisset(알아냈을 때) + Platonem이 (Hieremiae temporibus 예레미야의 때에) profectum fuisse갔었음을

이 앞에 considerata historia gentium은abl.absolute이니 historia a가 장음이고 gent-ium3변화 pl.gen.다. 이방 민족들의 역사를 검토한 채로.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인용된 부분 딱 마지막만 간접문이 아니라 quod 댓구절을 쓰는데 왜냐하면 안은 문장이 여러 개 겹쳐있기 때문이다.

probabilius esse 더 그럴듯하다고 (comp adv)
ostendit 보여주었다. 다음 이하를
(그가 + 보여주었다 + 더 가능성있다고 + 다음 이하를)
+ quod Plato가 potius오히려 nostris Litteris per Hieremiam우리 (성경) 문헌들에 의해 예레미야를 통해 fuerit imbutus, 스며들어있었을 듯하다고

즉, 그 주교는 오히려 플라톤이 예레미야를 통해 우리 성서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게 더 타당하다고 보였주었다(증명했다)

여기서 앞과는 달리 acc platonem이 아닌 이유는 esse가 간접문으로 껴있기 때문이다. 이 주어는 굳이 밝힐 필요가 없는데 정말 굳이 굳이 드러내자면 eum, illud다.
그는(그 주교는) 보여주었다. ostendit
+그것이(그 사실이) 더 타당하다고 eum+ esse (간접문1 acc+inf)
+quod Plato + fuerit (간접문2 quod+S+V perf.subj.)

-여기서 간접문2도 대격을 써버리면 문법 전체가 이해불가능하게 꼬이기 때문

그(플라톤)가 그(우리 경전의) 내용들에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에 + ut 목적, 결과절
+ ut illa posset docere vel scribere
+quae iure laudantur?
그(플라톤)는 가르치거나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마땅히 칭찬되는 그 내용들을

이런 식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라틴어의 스도쿠 같은 재미짐이다

신학적으로도 흥미로운데 예수 이전 인물의 구원에 대해서 시사하기 때문. 조선땅에 천주교 도래 이전 인물들의 구원에 대해서도 많은 초기 선비들이 고민했었던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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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진보 후집 한유의 글 <원도>다. 고즈넉한 산사에서 씹을 수록 맛이 우러나오는 옛 글을 읽는 것이 참 적절한 것 같다.

글은 불교와 도교에 대한 유학의 우위를 설파한 당나라 학자로 훗날 신유학(성리학)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 선진 유학자들의 가르침이 쇠퇴하고 대중들이 불교와 도교에서 제공하는 거대한 상징의 세계관, 내세관 등에 경도되는 것에 불안을 느낀 그의 생각이 <원도>에 잘 나타나있다. 국가 사회에 대한 기여는 하지 않고 일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불,노에 대한 비판을 내가 절에서 읽고 있는게 적절한가 싶긴하지만 말이다. 미국사를 읽는 게 더 이상할 수도.

물론 주자주에는 대학의 격물치지까지 언급하지 않았다고 그의 글이 엄밀하지 않다고 꼬집기도 하니 지금으로 말하면 선행연구 비판이다. 선행연구자는 너무 많이 읽어 애증하는 관계인 것이니.. 좋아하지 않으면 언급하지도 않는다.

경영컨설팅의 대가 맥킨지식 3단계 생각법과 논지가 같다. 문제, 분석, 해결책 순서

구름이 많다. 비가 올 것 같다. 우산을 준비해라.
의 순서다.

불교와 도교가 성행하고 유학의 도가 땅에 떨어졌다.
군군신신부부자자의 법이 해체되면 사회에 해악이 많다. 명령하지 않는 군주, 명을 받들지 않는 신하, 농사를 안 짓고 재화를 유통하지 않으며 윗사람을 섬기지 않는 백성. 그럼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이외에 유불도의 도와 덕, 인과 의의 구분이 다르다는 이야기도 하나 생략)

그렇다면 해결책은?
인기인 화기서 려기거 명선왕지도이도지다.
스님과 도사를 일반인으로 만들고, 그 책을 불태우며, 거처하는 사원을 평민의 집으로 만들고 선왕의 도를 밝혀 그것으로 다스린다는 것이다.

최근 어느 유명 정치평론가가 라캉의 사상을 거칠고 납작하게 인용해서 잘못 적용했다고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나도 그의 이해는 너무 얕고 무엇보다 자신이 유학한 독일의 책은 커녕 영어 원서도 번역본으로‘만‘ 보는 것 같아 학술적 깊이가 얕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영향력은 별개의 이야기다

그런데 인문학은 정밀한 리딩을 좋아하지 어설픈 응용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언급은 순서가 틀렸다. 라캉의 원서를 정밀하게 읽다가 마지막에 우리 사회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흘러가듯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너무 대중 강의에 익숙해진 나머지 배경지식없는 청중들을 단시간에 이해시키기 위해 적용하는 과도한 이분법으로 글을 썼으니 문제가 된다. 인문학 찍먹 같다.

위의 한유의 글을 가지고 말하자면

어학적으로 자구를 엄밀히 분석하고,
(예컨대 행이의지+지위-의, 에서 전자의 지는 대명사 후자의 지는 의of를 밝히고
유시이지언+지위-도에 대한 주석의 설명을 곁들이고 글자 수준에서 혈, 후, 서 같은 빈번하지 않은 어려운 한자를 설명)

기소위덕은 도덕경 51장을 언급과 대학 구절의 전거를 설명하고
경학사와 함께 주석도 상세히 해석한 다음 한유의 신유학에서의 사상사적 계보도 설명하는 등
우선 제대로 텍스트를 읽고 세부적인 이야기를 다 베푼 다음
흘러가는 듯이

엄밀한 인문학을 해설하는 정교한 언어와는 다른 용어와 어법과 말투로 살짝 톤을 바꿔 그 인사이트를 잠깐 설명해주는 것이다.

국가 사회의 거시적인 제도 운용을 고민하는 유학자들은 모두가 일신의 안위에 매달리게 되면 시스템을 떠받칠 인력의 손실을 걱정하는 것이니
이를 오늘날에 비유하면

유학자는 산업화 시대 민족주의 교육을 받은 베이비붐세대, 불교와 도교 신봉하는 백성은 게임 애니 영화 노래 등 문화향유에 빠져서 정치를 잊고 사는 오늘날의 세대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한 세대의 정신이 지나고 다음 세대의 자이트가이스트가 생겨나고 이에 안티테제가 길항하다가 새로운 삶의 방식이 나오는 것이니 두 접근방식 다 의미가 있되 각자 어떠한 삶이 옳다고 생각하며 각자의 문제를 어떻게 진단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만 강의 마무리로 생각해 볼 거리를 던져주는 것이 깔끔하다.

절대 사회진단이 메인이 되거나 옛 학자의 용어가 원서의 리딩 범위 밖에서 맥락 없이 응용되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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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따뜻한 구름의 능선을 바라보며 히나와 호다카가 비행했을 것 같은 구름 속 용과 물고기를 상상하며 가져 온 날씨의 아이 노벨라이즈는 다 읽었다.

2년 동안 세계의 모습을 바꾼 것에 대해 혼자서 온갖 상상을 하고 죄책감을 가진 INTP 주인공은 서비스 정지된 웹사이트에 전달된 2년 전 메시지(상당히 일본스러운 설정이다. 늦게 도착한 편지의 디지털 버전)를 확인하고 수몰 때문에 넓은 일본가옥에서 좁은 아파트로 이사한 할머니에게 이제 하레온나(맑음여자)는 없다고 겸연쩍게 말한다. 에도시대는 여기가 물이었다고 말하며 어차피 자연과 사람이 만들어가는 거라고 위로한다. 조금 더 노골적인 대사는 스가에게서 나온다.

그를 향해 총까지 쏘았던 호다카가 사과하자 뭘 2년 동안 구질구질하게 생각하고 있냐며 딸 사진 보여주고 빨리 히나를 만나러 가라고 호통을 친다. 생각의 공회전이 심한 INTP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다.

두 명의 대사로 기후 변경에 대한 죄책감을 다독여주며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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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유성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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