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진보 후집 한유의 글 <원도>다. 고즈넉한 산사에서 씹을 수록 맛이 우러나오는 옛 글을 읽는 것이 참 적절한 것 같다.
글은 불교와 도교에 대한 유학의 우위를 설파한 당나라 학자로 훗날 신유학(성리학)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 선진 유학자들의 가르침이 쇠퇴하고 대중들이 불교와 도교에서 제공하는 거대한 상징의 세계관, 내세관 등에 경도되는 것에 불안을 느낀 그의 생각이 <원도>에 잘 나타나있다. 국가 사회에 대한 기여는 하지 않고 일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불,노에 대한 비판을 내가 절에서 읽고 있는게 적절한가 싶긴하지만 말이다. 미국사를 읽는 게 더 이상할 수도.
물론 주자주에는 대학의 격물치지까지 언급하지 않았다고 그의 글이 엄밀하지 않다고 꼬집기도 하니 지금으로 말하면 선행연구 비판이다. 선행연구자는 너무 많이 읽어 애증하는 관계인 것이니.. 좋아하지 않으면 언급하지도 않는다.
경영컨설팅의 대가 맥킨지식 3단계 생각법과 논지가 같다. 문제, 분석, 해결책 순서
구름이 많다. 비가 올 것 같다. 우산을 준비해라.
의 순서다.
불교와 도교가 성행하고 유학의 도가 땅에 떨어졌다.
군군신신부부자자의 법이 해체되면 사회에 해악이 많다. 명령하지 않는 군주, 명을 받들지 않는 신하, 농사를 안 짓고 재화를 유통하지 않으며 윗사람을 섬기지 않는 백성. 그럼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이외에 유불도의 도와 덕, 인과 의의 구분이 다르다는 이야기도 하나 생략)
그렇다면 해결책은?
인기인 화기서 려기거 명선왕지도이도지다.
스님과 도사를 일반인으로 만들고, 그 책을 불태우며, 거처하는 사원을 평민의 집으로 만들고 선왕의 도를 밝혀 그것으로 다스린다는 것이다.
최근 어느 유명 정치평론가가 라캉의 사상을 거칠고 납작하게 인용해서 잘못 적용했다고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나도 그의 이해는 너무 얕고 무엇보다 자신이 유학한 독일의 책은 커녕 영어 원서도 번역본으로‘만‘ 보는 것 같아 학술적 깊이가 얕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영향력은 별개의 이야기다
그런데 인문학은 정밀한 리딩을 좋아하지 어설픈 응용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언급은 순서가 틀렸다. 라캉의 원서를 정밀하게 읽다가 마지막에 우리 사회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흘러가듯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너무 대중 강의에 익숙해진 나머지 배경지식없는 청중들을 단시간에 이해시키기 위해 적용하는 과도한 이분법으로 글을 썼으니 문제가 된다. 인문학 찍먹 같다.
위의 한유의 글을 가지고 말하자면
어학적으로 자구를 엄밀히 분석하고,
(예컨대 행이의지+지위-의, 에서 전자의 지는 대명사 후자의 지는 의of를 밝히고
유시이지언+지위-도에 대한 주석의 설명을 곁들이고 글자 수준에서 혈, 후, 서 같은 빈번하지 않은 어려운 한자를 설명)
기소위덕은 도덕경 51장을 언급과 대학 구절의 전거를 설명하고
경학사와 함께 주석도 상세히 해석한 다음 한유의 신유학에서의 사상사적 계보도 설명하는 등
우선 제대로 텍스트를 읽고 세부적인 이야기를 다 베푼 다음
흘러가는 듯이
엄밀한 인문학을 해설하는 정교한 언어와는 다른 용어와 어법과 말투로 살짝 톤을 바꿔 그 인사이트를 잠깐 설명해주는 것이다.
국가 사회의 거시적인 제도 운용을 고민하는 유학자들은 모두가 일신의 안위에 매달리게 되면 시스템을 떠받칠 인력의 손실을 걱정하는 것이니
이를 오늘날에 비유하면
유학자는 산업화 시대 민족주의 교육을 받은 베이비붐세대, 불교와 도교 신봉하는 백성은 게임 애니 영화 노래 등 문화향유에 빠져서 정치를 잊고 사는 오늘날의 세대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한 세대의 정신이 지나고 다음 세대의 자이트가이스트가 생겨나고 이에 안티테제가 길항하다가 새로운 삶의 방식이 나오는 것이니 두 접근방식 다 의미가 있되 각자 어떠한 삶이 옳다고 생각하며 각자의 문제를 어떻게 진단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만 강의 마무리로 생각해 볼 거리를 던져주는 것이 깔끔하다.
절대 사회진단이 메인이 되거나 옛 학자의 용어가 원서의 리딩 범위 밖에서 맥락 없이 응용되어서는 안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