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프린스턴대 출판부에서 나온 캐롤라인 부트 캠브릿지대 고전학과 교수의 책이다. 기원전부터 시작하는 그리스로마→15-16c르네상스→18-19c신고전주의→박물관과 오늘날에 시사점으로 이어지는 챕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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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읽었는데

챕터9의 이 부분은 인상깊어 함께 공유하고자

채선생에게 번역해달라해서 복붙한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왜곡(warping)”이 감탄, 수집, 발굴, 연구와 함께 수반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특정 유물에 집착하고 다른 것들―혹은 사회, 사회의 일부―을 축소하거나 아예 배제하는 과정 속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알렉산드리아와 아탈리드 왕조의 페르가몬에서 르네상스 이탈리아, 계몽주의 시대의 유럽,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문화”로 전환되었고, 그리스와 로마의 이미지를 다듬고, 계승하고, 전해주었다. 이것은 분열적이기도 하고, 분명히 과장되었지만동시에 우연히도 유익했다. 이것이 없었다면 우리가 의식적으로, 혹은 양심적으로 다룰 수 있는 “유산”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원한다면 그리스와 로마를 분리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 “예술,” “유물,” 혹은 우리가 무엇이라 부르든 간에 그것들을 단지 현재의 그리스 땅에서 발견된 물건으로 정의하는 것은 부분적인 이야기만 전할 뿐이며 여전히 거짓된 동질성을 만들어낸다. 공화정 로마의 시각에서 보면, 지중해 전역에서 생산된 방대한 물질문화―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처럼 가까운 곳에서조차―는 “그리스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올림피아나 델포이 현장에서는 아테네인 봉헌물은 아테네적으로, 낙시아인 봉헌물은 낙시아적으로 보였다. 후자는 심지어 낙시아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그리스적”이라는 말은 로마에서, 비잔틴이나 근세 유럽에서, 그리고 다시 그리스 독립 이후에 각각 다른 의미를 가졌다. 


로마 미술에 관한 책에서 “그리스적” 내용을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고전주의”나 “제2소피스트기의 고전주의”로 한정하는 것 역시 단순화이다. 하드리아누스 별장에서 발견된 모작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복제품은 단순히 “특유의 고대풍”이나 “그리스 문화의 부흥”의 상징이 아니라, 로마의 웅변과 문학 속에 뿌리내린 것이었다. 그것들은 원재료이자 완성품이었으며, 로마적이면서 동시에 그리스적이었고, “제국적” 이미지와 “해방 노예 예술”의 형성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 과정은 후기 고대 예술을 형성했고, 끊임없는 전시와 점점 더 노골적인 투자 속에서 서구의 조각과 회화, 심지어 중국의 그것과도 연결되었다. 만약 그리스 조각과 회화를 “예술”이라 한다면, 로마에서 그 예술은 인기와 위신을 더해갔고, 로마의 제단, 기둥, 초상화, 보석, 주화 같은 생산물을 그 궤도 안으로 끌어들였다. 


“로마인들이 문학 속에서 예술을 논할 때, 그들은 매우 자주 그랬는데, ‘예술’은 곧 그리스 예술을 의미했다.” 오늘날 오직 그리스 예술만을 수집하려는 이들은 거의 없지만, 그들은 키츠적인 위상에 이끌린다.


수집가들은 적이 아니다. 예술이 적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개인 수집가들과 후원, 그리고 본문 전체에서 드러나는 수집 활동은, 그리스 성소에서 로마 공화정 사원으로, 로마에서 파리로, 아테네·바세·보드룸에서 런던으로 조각이 옮겨졌던 더 넓은 차원의 전유, 거부, 반응의 일부일 뿐이다. 그것은 예술가들이 이 조각을 복원하고 스케치하면서 자신의 창작의 기초로 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떤 이들은 모형에 충실했고, 또 어떤 이들은 너무도 정교해 구매자를 속이고 진품으로 통과되기도 했다.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고 속성을 덧붙여 고대 대리석을 헤라클레스나 가니메데로 변모시키는 것과, 약탈된 유물을 두드려 부수거나 잘라서 세관의 눈을 피하고 대서양을 건너 보내는 것 사이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큰 차이가 없다. 그것들을 스티로폼, 혹은 유리 구체나 마오 수트로 재현하는 것―다브셔, 제프 쿤스, 쉬지앙궈 같은 이들이 해온 것―은 비교하자면 오히려 경건한 행위이다.


그리스와 로마 유물을 향한 감탄과 수집은 언제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었고, 노골적인 논쟁의 대상이었으며, 그러한 논쟁들은 형성적 역할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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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S/F시즌이 되면 미술계는 새 전시, 키아프, 프리즈로 북적이고 F&B는 헤이즐넛, 밤, 햅쌀, 말차 등의 다크 브라운톤의 차분하고 단정하고 묵직한 분위기를 돋우며, 영화계는 베니스와 부국제로 들썩인다. (ㅂ으로 두음이 같지만 너무 먼 거리고 v는 한글에서 기능정지된 유성 순치 마찰음이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용언에 디귿과 비읍을 활용했다)

오늘자 더코리아타임즈에서도 펼친 두 면이 문화 소식으로 빼곡할 정도


그렇지만 나는 학창시절부터 늘 이 즈음 새학기 때 공간을 감싸는 요란한 소동에 발맞추기가 힘들었다. 이맘 때 약간 커뮤니케이션 기능이 도태되어 트렌드에 동기화가 잘 안된다. 유금을 잘 쓰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다. 남들이 바깥으로 다닐 때 내면에 침잠해 공부하는 날이 더 많았다. 옛날에는 선선한 천고마비의 계절이어서, 기후위기의 폭격을 맞은 지금은 연장된 폭염에 피신하느라. 두꺼운 양서가 잘 읽힌다. 일본 2007년 드라마 화려한 일족 10화 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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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미술관 프로젝트갤러리 대만전시에 다녀왔다. 7.27에 끝났다. 흥미로웠다.


입구쪽 주황색 조명과 함께 있는 에스더 린이쥔의 작품은 타이완 북부 양밍산과 따툰 화산지대의 광물냄새에서 착안해 유황을 의인화한 여성의 곤욕스러운 일상을 다루었다. 말하자면 비인간 무기물의 시각을 탐색한 것인데 광물사 자연사의 비중이 적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테마다.


니우쥔취앙은 사후세계, DMZ, 비교문화(김치국물 묻은 티셔츠)의 모티브를 담당하고 있다. 지능은 2세지만 몸은 26세인 인도남성 이빨 및 눈흰자 클로즈업 영상, <장생>을 통해 절대시간의 자장 속에 있는 치아의 영속성에 대해 탐구한다.


전시공간 가장 안쪽에 있는 왕융안의 작품은 피부를 통한 촉각적 경험이 구성하는 몸과 정체성에 대한 아이디어로, 촉각인지 매커니즘 연작을 통해 인공지능과 생명정치라는 첨예한 두 테마를 융합했다.


AI는 어떤 피부를 가졌을까요? 라는 질문을 던지며 두뇌중심이 아닌 촉감중심 신경과학적 사고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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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뉴요커 정말 흥미로운 도서 리뷰


케이트 라일리의 데뷔소설 Ruth에 대한 맛깔나는 뉴요커풍 리뷰다.


1960년대 미시간 재세례파 공동체의 일상적이고 소소한 삶을 그려내는 이 소설은 갈등이나 드라마틱한 전개보다는 맛있는 디저트를 위트있고 화려한 문체로 묘사한다는 데 특징이 있다.


달콤한 음식과 정돈된 규율이라는 신앙 공동체의 양면적 세계를 정교하게 포착하면서 그 이면의 억압, 긴장이나 정치적 무게는 빵 속 크림처럼 감추어 두었기에 웨스 앤더스 같은 스타일의 미학을 추구했다고도 볼 수 있다. 


스타일과 질서와 매혹을 탐구하는 작품을 읽으며 다루지 않은 더 깊은 진실을 갈망하게 되는 셈. 


한국 사이비를 다룬 넷플 다큐 <나는 생존자다>나 미국 보수 기독교를 다룬 <더 패밀리>, 영화 <데어윌비블러드>와 페어링하기에 좋아보인다.


뉴요커는 문단 별로 줄을 치면서 읽고 싶을 정도로 스타일리쉬한 영어 표현이 많은데 예를 들어


insular religious community

섬 같은 (폐쇄적) 종교 공동체


irresistible pleasure of making up rules

규칙을 만드는 저항 불가능한 즐거움(규칙 제정의 기묘한 매력)


irreverent longings

불경한 동경(외부 세계에 대한 금기된 욕망)


at the behest of

~의 명령에 따라(교회 지시에 의해)


at the drop of a hat

모자를 떨어뜨리자마자(즉시, 갑자기)


inflexible vision of domesticity

융통성 없는 (경직된 가부장적) 가정상


humble escapades

소박한 소동들


effete description

기운 빠진 묘사


apotheosis of twee

귀여움의 신격화(극치)


petit-four politics

쁘티푸흐 정치(디저트 같은 소규모 정치)


shamefaced pleadings

부끄러운 호소


fleeting ancillary characters

잠깐 나타나는 보조 인물들


like ducklings marching in lockstep

오리 새끼들이 발맞춰 행진하는 것처럼 질서 정연한 움직임


풍자하는 표현 두 가지

1) hot cross bun marathon

핫 크로스 번 마라톤(공동체 이벤트인 과장된 음식행사를 풍자)


2) pies of breathtaking uniformity

숨 막힐 정도로 균일한 파이(지나친 규격화 풍자)



그리고 두운alliteration활용하는 좋은 표현 두 가지

1) familiarity without favoritism

친밀하되 편애는 없는 상태(공동체적 균형 추구)


2) This finicky, formal style coats every page of the novel with an impressively even surface

이 까다롭고 격식을 갖춘 문체가 소설의 모든 페이지를 놀라울 만큼 균질한 표면으로 덮는다


https://www.newyorker.com/books/under-review/pictures-of-life-on-a-christian-comm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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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카토르 독법이 원래 대륙 사이즈를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며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세계지도 바르게 하기 운동이 확산중이다


실제로 아프리카 대륙이 큰 것은 맞고

기존 세계지도에선 북반구 캐나다, 러시아, 특히 그린란드가 과하게 강조된 것은 사실이다.

아래 사진만 봐도 스칸디나비아가 얼마나 쪼그라들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서양중심에서 아프리카중심으로 체스판의 중심을 이동하고 싶은 것이라며 다른 나라들은 굳이 관심을 두지 않을테니

이것은 다양성을 표방하는 모든 운동의 문제점이다


주류집단이 대표적이고 보편적이지 않으며 그 집단도 전체의 한 부분집합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혁명을 일으켜 그 중심성을 옮겨오고 싶다면 과연 비주류집단 중 누가 그 주류를 차지할 것인가?


즉, 기존의 그 왕좌는 수많은 가신 중 누가 차지할 것인가?


기존에 백인 남성 서유럽미국 중심으로 짜여져있는 주류 구도를 글로벌 사우스로 옮긴다고 차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구조의 문제다


https://correctthemap.org/


https://equal-earth.com/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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