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틴에서 추천받은 그릴드쪽파 샌드위치 먹어봤다


푸르싱싱한 쪽파는 영어로는 scalion인가보다. 그릴드 치즈 스칼리언 샌드위치라고 쓰여져있다. 파김치의 식감 그대로다. 마늘 풍미에 어석어석 씹히는 쪽파와 사워도우는 인내심을 가지고 70번 이상 지속적인 저작활동을 요한다.


가볍게 흩날리듯 고소한 사워도우의 신맛과 더불어 무겁게 녹진한 치즈의 고소함이 정확한 미각 수용체를 겨냥하고 있다. 고소와 구수의 원투펀치가 사그라들즈음 홀그레인 머스타드가 후반에 파삭하고 새콤하게 들어온다.


좋은 재료를 써서 섬세하게 발효한 도우의 존재감이 확실하다. 모든 재료가 사워도우의 뒤를 충분하게 뒷받쳐주고 씹는 자의 저작경험을 풍성하고 지속적으로 유지시켜준다.


바디감도 과하지 않고 감칠맛도 과하지 않아 밸런스가 아주 잘 잡혔다. 쪽파의 섬유질 덕분에 거의 강제적으로 사워도우를 여러 번 씹어야해서 도우 자체의 향을 돋우고 단맛의 부피를 손실없이 유지한다.


씹으면 씹을수록 침의 효소작용으로 인해 밀 속의 복합당이 단당류로 분해되어 단맛이 활성화된다. 하여, 맛이 전해져오는 속도감이 균일한다. 맛은 저 멀리서 천천히 그러나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이 윌리엄 터너의 회화같다. 채썬(라페) 프랑스식 당근 샐러드가 아삭함에 일조한다


사워도우는 바게트처럼 바삭한 겉면의 강도가 높지 않고 쫄깃한 내면의 점성이 강하다. 따라서 질긴 반죽을 이빨로 밀어내고 당기다가 죽이 되어가는 과정을 경험하니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빵이다.


내면이 유들유들 두부처럼 부서지는 멘탈 약한 푸딩과는 다른 셈. 밀도를 경험하는 2차전이 있다. 앙버터나 필링계열의 빵처럼 쉬이 녹지 않고 텍스쳐감과 저항감이라는 부분을 거친다.


타르틴은 빵이라는 베이커리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했다. 사워도우 하나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 구질구질하지 아니하고 코어에 집중해 전체 기세를 살려냈다. 열쇠와 관건. 다른 빵도 다 맛 볼 생각이다. 다가오는 매일의 행복 예상되는 내일의 기쁨이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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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힐 스토리에코 2
하서찬 지음, 박선엽 그림 / 웅진주니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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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삼세영에 다녀왔다


이현정 심다슬 큐레이터가 기획한 AI 전시가 진행중이다. 보통 사람이 명령 프롬프트로 AI에게 일을 시키는 구조를 역전해서 AI가 예술가에게 명령해서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어떨까? 라는 아이디어로 그린 회화작품들이다. 창의적이고 시의성있다. 오늘날 담론과 접속하려는 큐레이터의 시도가 엿보인다. 더불어 삼세영의 좋은 위치와 뒷편의 멋들어진 큰바위와 단순하고 선명하면서 지루하지 않은 이동동선은 참 좋아 두 번 오고 싶은 전시장이라는 생각이 들게한다.


흥미로운 전시다. AI가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이나 상황을 빌어 인간에게 표현을 예술작품으로 시각화하라는 상황을 설정했다


AI가 자동화 도구에 머물지 않고 인간 예술가에게 창작을 시키는 주체로 부상하는 역발상을 통해 창작의 자율성, 인간중심적 시각, 알고리즘의 감정표현에 대해 질문하는 전시다.


전시장을 거닐며 AI시대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인지, 감정의 진정성은 있는 것인지, 표현의 자유란 어떻게 확보되는지 등, 정답은 없고 개별 해답과 풀이과정만 있는 질문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끔 한다.


나아가 AI 테크의 윤리적 파장을 근미래적 시점으로 미리 탐구해본다는 의미도 있다. 한편 프롬프트 자동화가 강력한 툴로 작용하면서 예술가가 자신의 의지, 감정이나 관점을 반영할 여지가 적어져 창작의 자율성이 축소되지는 않을지, 그 예술가의 두려움을 일부 반영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캡션의 설명에 공통 전제 네 가지가 보인다


우선 AI는 감정이나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자율적인 창작자다. AI는 도구고 인간은 사용자다. 지시문은 AI스러워야한다.


비인간 AI가 강아지가 느끼는 야생에 대한 동경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 번 노드를 뛰어넘어 상상하게 한 프롬프트는 창의적이다. 구조 속의 구조(AI-사람-강아지) 개별적인 감정이 아니라 감정의 복잡한 스펙트럼에 대해 혼란을 겪는다는 혼술 프롬프트도도 흥미롭다.


그러나 AI는 이미 감정을 분류하고 표현하는 '척'하는데 능숙해지고 있고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까지 AI의 학습 및 관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AI에게 인간의 감정을 이해해보라고 역프롬프트를 무수히 반복하면 감정의 번역과정을 거치며 AI는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느낄지 습득하게 될 것이다. 정말 느끼는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인간이 만족할지 아는 그정도다.


아울러 AI시대 전에도 이미 인간은 예산제약, 후원자의 오더, 각종 갤러리 이해관계, 저작권문제, 국가권력의 억압, 사회적 문화적 터부 등 여러 복잡한 규칙에 따라 창작하고 있었다. 완벽히 자유로운 창작은 상상된 것이다. 예술가는 항상 온갖 규율과 테두리 속에서 창의적인 시도를 하고 있었다. AI의 지시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AI시대가 되어 특별히 더 제약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예술가들은 자동화의 힘을 입어 생산성이 더 높아지고 문화권력과 문화자본의 양극화가 심해지리라 예상한다


AI스러운, AI답게 작성한 지시문도 정말 AI였다면 인간이 쓴 것처럼 다듬고 재서술했을테니 캡션 자체는 인간에게 나 AI요! 하고 보여주기 위한 브루탈리스트 건축에 가까운 구성이다.


사실 나는 그보다 큐레이터의 감정이 더 복잡하지 않을까 싶다. AI가 감정 데이터를 분석해 예술가에게 맞춤형 주제를 부여하고 커스텀된 감정을 시각화하게 하는 이 모든 행위는 전시기획에 가깝다. AI가 큐레이터의 지위에 도전하고 있는 것 아닌가?


조금 더 생각을 펼쳐보자면 나는 AI가 심사위원일 때 더 흥미로워질 것 같다. 인간 예술가의 감정 표현을 데이터에 따라 채점하거나 평가를 하는 상황. 작품마다 AI의 평가점수가 함께 전시되어 인간의 표현과 고유의 생각을 검열받는 듯한 위화감을 주는 것


전시는 영화와 달리 평론가들이 "이번 전시는요 5점 만점에 3점" 이런 식으로 점수 매기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마케팅 분석을 위한 무작위 평점은 통계적으로 의미있다. 어떤 시간대 어떤 나이, 성별, 지역의 사람이 이런 어휘로 이런 평점을 주었다는 유의미한 종합 데이터가 된다. 그러나 개별 평론가의 평점은 무의미하다. 우선 자의적이다. 이전 평점과 이후 평점 사이에 일관적 기준이 없고 차후 조정이 안되며 왜 이 작품은 4점이고 저 작품은 3점인지 대중의 논란이 생긴다. 그러한 논쟁 가운데 건설적인 배움이 있어야하는데 별로 없다. 무엇보다 여러 사람이 수고해서 만든 종합예술로서 영화를 세 치 혀로 가타부타하는 것이 창작욕을 떨어뜨린다. 평론가가 새로운 관점과 분석을 제시하는 것은 의미있다. 배울 게 있다. 개인의 평점은 무의미하다.


만약 전시업계에도 평점이 들어와서 이번 국현미 전시는 4점입니다. 아 이번 전시는 3.5점 드릴게요 아쉽네요 이렇게 말한다면 얼마나 천박해질지. 그러나 평론가가 아니라 AI가 들어와 예술가와 전시기획에 점수매기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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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시네마 광교 경기인디시네마관에 다녀왔다. SNS에서 누가 계속 홍보를 하길래 근처 수원박물관, 경기대박물관과 광교아트스페이스와 함께 동선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경기도에서 지원받아서 티켓이 5천원이라고! 하지만 신분당선 지하철비가 3500원이니 근처 사는 사람만 이득이고 일부러 찾아가기엔 곤란하겠다


예술영화하는 곳은 이대 아트하우스 모모 건대 시네마테크 명동 시네라이브러리 연희 라이카시네마 이수 아트나인 강릉 신영극장 정도 가본 것 같다. 경기인디시네마는 롯데시네마 극장 1관을 쓰고 있다


달팽이의 회고록을 봤다. 팀 버튼 작화에 아동시점 자전성장기를 겹쳤다. 전반부에 어렸을 때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처럼 어린아이 관찰자 시선을 취하다가 후반부에는 빌둥스로만형으로 바뀐다. 초년을 다루는 전반부는 아이성우 캐스팅에 문법과 어휘도 초등저학년 레벨이다. Never seem to be so happy같이. 후반부 성년일 때는 recluse 은둔 effervescent 혈기왕성한 등 어휘레벨이 칼리지레벨로 천천히 그러나 선명하게 상승한다. 대학진학은 안 했으나 독서를 많이 했기 때문. 읽는 책도 곡예사 아빠는 자신의 처지를 반영하는 of mice and men를 읽고 길버트는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파리대왕,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며 비현실적 낭만을 추구하는 그레이시는 게이샤의 회고록을 읽다가 결말에 이르러 길버트는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읽고 그레이시는 길버트의 책을 읽는다


잘 생각해보면 윤리적으로 극단적인 설정인데 휘리릭 아이의 보이스로 내레이션이 지나가서 그 파괴성을 실감못한다. 예컨대 스와핑(영어대사에서는 swinging) 성관계를 즐기는 양부모, 핑키가 할머니일 때 누드스트립쇼에서 공연한 것이나 손가락이 선풍기에 잘리는 장면, 사이비종교에 경도된 가족에게 입양되어 노예처럼 착취당하는 길버트 등등


달팽이에 대한 은유는 달팽이 껍질과 달팽이 이동 두 가지로 나온다. 초반에는 힘든 고난과 소외감과 친구들의 폭언 등에 달팽이 껍질로 자기를 감싼다. 달팽이 껍질은 자기방어기제의 상징이다. 이후 살쪘다가 빼면서(아마 이것도 달팽이의 무언가를 상징할 수도) 깨달음과 보호를 거쳐 껍질을 버리고 성장한다. 핑키의 편지에서 달팽이는 뒤로 안간다 직선으로 간다 흔적을 남긴다라고 하며 달팽이의 이동에 대한 메시지를 새로이 도출한다


복선의 처리도 좋다. 비스켓 깡통 둔 곳을 잊을 정도로 깜빡깜빡하는 성격이라고 설명한 다음 클라이맥스를 지나 감자(밭)!에서 회수한다. 초반의 성냥불장난에서 화재 이후 영화학교 재회신에서 복선를 현명하게 거두면서 끝날 법한 결말을 다시 소생시키고 탱탱한 스토리탄력성을 만든다. 꼬마일 때 도와준 노숙자를 나중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시 만나는 것도 그렇다.


호주식 발음에 고환얼굴, 골덴주름 같은 발칙한 개그가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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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휘는 상업마케팅 목적으로 너무 남용되어서 그 소구력을 잃었다. 단어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인해 그 본질이 오염되어 안쓰느니만 못하게 되었고 깨끗하게 씻어 쓰는 청탁의 노력, 리뉴얼하는 수리보수의 노력을 하기보단 다른 어휘를 다시 끌어와 그 오염된 것을 대체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소설분야는

압도적 황홀한 짜릿한 명작, 올해 최고의 작품, 영혼을 울리는,전율이 느껴지는, 세대를 초월한,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놀라운 반전


건설현장은

단군이래 최대 토목공사


음식점은

정통 원조


공연 전시분야는

숨 쉴 틈 없는 몰임감, 감동의 도가니, 소름 돋는 열연, 극찬 세례, 전석 매진 신화

미학의 극치, 예술사의 획을 긋다, 현대미술의 거장, 레전드, 혁명, 신세계, 미학의 정수, 시간을 초월한 아름다움, 기립박수 받은, 평단의 찬사를 받은


광고판은

지금 놓치면 못 산다, 마감세일, VIP, 한정판, 기간한정, 전국유일, 당매장 한정


무색무취무맛의 호객용 문구에 설득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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