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창 삼세영에 다녀왔다
이현정 심다슬 큐레이터가 기획한 AI 전시가 진행중이다. 보통 사람이 명령 프롬프트로 AI에게 일을 시키는 구조를 역전해서 AI가 예술가에게 명령해서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어떨까? 라는 아이디어로 그린 회화작품들이다. 창의적이고 시의성있다. 오늘날 담론과 접속하려는 큐레이터의 시도가 엿보인다. 더불어 삼세영의 좋은 위치와 뒷편의 멋들어진 큰바위와 단순하고 선명하면서 지루하지 않은 이동동선은 참 좋아 두 번 오고 싶은 전시장이라는 생각이 들게한다.
흥미로운 전시다. AI가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이나 상황을 빌어 인간에게 표현을 예술작품으로 시각화하라는 상황을 설정했다
AI가 자동화 도구에 머물지 않고 인간 예술가에게 창작을 시키는 주체로 부상하는 역발상을 통해 창작의 자율성, 인간중심적 시각, 알고리즘의 감정표현에 대해 질문하는 전시다.
전시장을 거닐며 AI시대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인지, 감정의 진정성은 있는 것인지, 표현의 자유란 어떻게 확보되는지 등, 정답은 없고 개별 해답과 풀이과정만 있는 질문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끔 한다.
나아가 AI 테크의 윤리적 파장을 근미래적 시점으로 미리 탐구해본다는 의미도 있다. 한편 프롬프트 자동화가 강력한 툴로 작용하면서 예술가가 자신의 의지, 감정이나 관점을 반영할 여지가 적어져 창작의 자율성이 축소되지는 않을지, 그 예술가의 두려움을 일부 반영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캡션의 설명에 공통 전제 네 가지가 보인다
우선 AI는 감정이나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자율적인 창작자다. AI는 도구고 인간은 사용자다. 지시문은 AI스러워야한다.
비인간 AI가 강아지가 느끼는 야생에 대한 동경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 번 노드를 뛰어넘어 상상하게 한 프롬프트는 창의적이다. 구조 속의 구조(AI-사람-강아지) 개별적인 감정이 아니라 감정의 복잡한 스펙트럼에 대해 혼란을 겪는다는 혼술 프롬프트도도 흥미롭다.
그러나 AI는 이미 감정을 분류하고 표현하는 '척'하는데 능숙해지고 있고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까지 AI의 학습 및 관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AI에게 인간의 감정을 이해해보라고 역프롬프트를 무수히 반복하면 감정의 번역과정을 거치며 AI는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느낄지 습득하게 될 것이다. 정말 느끼는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인간이 만족할지 아는 그정도다.
아울러 AI시대 전에도 이미 인간은 예산제약, 후원자의 오더, 각종 갤러리 이해관계, 저작권문제, 국가권력의 억압, 사회적 문화적 터부 등 여러 복잡한 규칙에 따라 창작하고 있었다. 완벽히 자유로운 창작은 상상된 것이다. 예술가는 항상 온갖 규율과 테두리 속에서 창의적인 시도를 하고 있었다. AI의 지시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AI시대가 되어 특별히 더 제약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예술가들은 자동화의 힘을 입어 생산성이 더 높아지고 문화권력과 문화자본의 양극화가 심해지리라 예상한다
AI스러운, AI답게 작성한 지시문도 정말 AI였다면 인간이 쓴 것처럼 다듬고 재서술했을테니 캡션 자체는 인간에게 나 AI요! 하고 보여주기 위한 브루탈리스트 건축에 가까운 구성이다.
사실 나는 그보다 큐레이터의 감정이 더 복잡하지 않을까 싶다. AI가 감정 데이터를 분석해 예술가에게 맞춤형 주제를 부여하고 커스텀된 감정을 시각화하게 하는 이 모든 행위는 전시기획에 가깝다. AI가 큐레이터의 지위에 도전하고 있는 것 아닌가?
조금 더 생각을 펼쳐보자면 나는 AI가 심사위원일 때 더 흥미로워질 것 같다. 인간 예술가의 감정 표현을 데이터에 따라 채점하거나 평가를 하는 상황. 작품마다 AI의 평가점수가 함께 전시되어 인간의 표현과 고유의 생각을 검열받는 듯한 위화감을 주는 것
전시는 영화와 달리 평론가들이 "이번 전시는요 5점 만점에 3점" 이런 식으로 점수 매기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마케팅 분석을 위한 무작위 평점은 통계적으로 의미있다. 어떤 시간대 어떤 나이, 성별, 지역의 사람이 이런 어휘로 이런 평점을 주었다는 유의미한 종합 데이터가 된다. 그러나 개별 평론가의 평점은 무의미하다. 우선 자의적이다. 이전 평점과 이후 평점 사이에 일관적 기준이 없고 차후 조정이 안되며 왜 이 작품은 4점이고 저 작품은 3점인지 대중의 논란이 생긴다. 그러한 논쟁 가운데 건설적인 배움이 있어야하는데 별로 없다. 무엇보다 여러 사람이 수고해서 만든 종합예술로서 영화를 세 치 혀로 가타부타하는 것이 창작욕을 떨어뜨린다. 평론가가 새로운 관점과 분석을 제시하는 것은 의미있다. 배울 게 있다. 개인의 평점은 무의미하다.
만약 전시업계에도 평점이 들어와서 이번 국현미 전시는 4점입니다. 아 이번 전시는 3.5점 드릴게요 아쉽네요 이렇게 말한다면 얼마나 천박해질지. 그러나 평론가가 아니라 AI가 들어와 예술가와 전시기획에 점수매기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