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세종의 나라 1~2 세트 - 전2권 (양장)
김진명 지음 / 이타북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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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영웅의 기적일까, 시대를 설득하는 필연성일까

세상에는 오래도록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권력이고, 누군가에게는 신념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자신이 살아온 세월 그 자체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성을 쌓고, 문을 걸어 잠그며, 때로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적으로 돌린다.


김진명의 장편소설 《세종의 나라》는 한글 창제를 둘러싼 갈등 속으로 독자를 이끈다. 한석리와 권숙현의 비범한 활약, 권력을 지키려는 이들의 저항, 그리고 고독 속에서도 뜻을 펼치려는 세종의 모습이 어우러지며 역사의 빈틈을 상상력으로 채운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영웅의 기적일까, 시대를 설득하는 필연성일까. 인물들의 선택을 따라가다 보면 한 사람의 신념이 시대의 벽에 균열을 낼 수 있다는 사실과, 그 벽이 얼마나 견고한 욕망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함께 보게 된다. 아무리 옳은 뜻이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세상이 없다면 변화는 더딜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누군가 그 벽을 향해 걸음을 멈추지 않을 때, 작은 틈으로 새로운 시대의 빛이 스며든다. 역사를 바꾸는 힘은 한 사람의 비범함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그 뜻이 시대의 변화로 이어지려면 마침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도 가닿아야 한다.


굳게 닫힌 문은 누구를 지키기 위한 것인가


소설 속에서 한글 창제를 가로막는 것은 새로운 문자의 등장이 아니다. 자신들이 독점해 온 지식과 권력이 흔들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글을 안다는 것은 세상을 해석하는 힘을 갖는 일이었고, 그 힘을 더 많은 사람에게 나누는 일은 기존 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영번과 윤교찬은 권력욕이 인간을 어디까지 비틀어 놓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삶도, 진실도, 나라의 안위마저도 희생시키려는 교활함이 그들에게는 거리낌이 없다. 이들은 모함과 거짓으로 타인을 궁지에 몰아넣고, 진실을 왜곡해 자신의 잘못을 감추며, 남의 불행마저 제 앞날을 지키는 수단으로 삼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자신에게 유리한가이다. 권력을 지키려는 마음이 양심을 밀어내고 이기심이 충정을 가장할 때, 나라를 위협하는 것은 외부의 적만이 아니다.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 뒤에 숨어 사사로운 욕망을 좇는 사람들 역시 그만큼 위험하다.


여덟 사대부가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의 임금을 폐위해 달라는 연서를 올리는 대목에 이르면, 갈등은 한 나라의 운명마저 흔들 만큼 거대해진다. 그들에게 명나라는 단순한 외교 상대가 아니었다. 법과 제도, 학문과 문자의 질서를 규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에 가까웠다. 그런 세계에서 조선이 독자적인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글자 몇 개를 새롭게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 온 질서에 질문을 던지고, 조선 스스로 자신의 언어와 생각을 세울 수 있는가를 묻는 일이었다.


그들은 세종의 뜻을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로 여겼고, 마침내 외세의 권위를 빌려 왕의 자리까지 흔들려 한다.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나라의 임금을 외국 황제의 판단에 맡기는 역설. 그 장면에서 사대부들의 신념은 단순한 충절로만 읽히지 않는다. 기존 질서에 대한 맹신과 자신들이 누려 온 권위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지켜야 할 질서가 어느 순간 질문조차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때, 충성은 변화에 맞서는 명분이 되고 나라를 위한다는 말은 오히려 나라의 가능성을 가로막을 수 있다.


그토록 강경하게 맞섰던 이들이 세종의 설명을 거쳐 한글의 원리를 이해하고 포용의 길로 돌아서는 과정은 극적인 위기를 풀어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다만 폐위 연서까지 올릴 만큼 완강했던 마음이 바뀌기까지, 그들 안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명나라의 질서를 절대적으로 믿었던 이들이 조선의 독자적인 문자가 지닌 뜻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조금 더 깊이 그려졌다면, 화해의 순간은 한층 묵직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장면은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것과 이해시키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반대자가 사라지는 것과 반대하던 사람이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세종이 바랐던 것이 단지 반대의 종식이 아니라 한글의 뜻을 함께 헤아리는 일이었다면, 진정한 승리는 상대를 침묵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다른 가능성을 바라보게 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일은 닫힌 문을 부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문 너머를 함께 바라볼 수 있도록 마음의 빗장을 여는 일까지 필요하다.


절개는 한 사람의 운명을 넘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가


권숙현의 이야기는 권력을 좇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인간의 의지를 보여 준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 앞에서도 자신의 뜻을 꺾지 않는 숙현의 모습은 단순한 강인함을 넘어선다. 자신의 안위보다 지켜야 할 가치를 앞세우는 사람은 때로 한 개인의 운명을 넘어 시대의 흐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숙현의 절개가 특별한 까닭은 그저 고난을 견뎌 냈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끝내 무엇을 지키려 했는가에 있다.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포기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건다. 그 선택이 반드시 세상을 바꾸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신념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의 존재는 세상이 아무리 흔들려도 끝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묻게 한다. 숙현의 의지는 마침내 한 사람의 생존을 넘어 나라를 구하는 데까지 닿으며, 절개가 누군가의 운명을 바꾸는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하영번과 윤교찬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의 운명을 짓밟는다면, 숙현은 고난 속에서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놓지 않는다. 한쪽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마음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지켜야 할 것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마음이 있다. 이들의 대비는 권력의 크기보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만이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록의 중심에 서지 못했더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끝까지 지켜 낸 뜻이 누군가의 길을 열기도 한다. 숙현의 여정은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 아래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한 사람의 의지가 흐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지도 위에 없는 길을 꿈꾸는 사람들


한석리의 행보는 숙현의 신념과는 또 다른 빛을 낸다. 그는 주어진 시대의 질서에 순응하는 데 머물지 않고, 자신이 발 딛고 선 세계의 경계 너머를 바라본다. 장영실과의 관계를 비롯해 비범한 사건들이 빠르게 이어지는 서사는 역사적 상상력의 힘을 보여 준다. 한편으로는 인물의 활약이 압축적으로 펼쳐져, 그가 마주한 세계의 한계와 이를 넘어서는 과정이 조금 더 깊이 그려졌다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러나 한석리의 여정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해내는가만이 아니다. 그가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가이다. 조선이 처한 지정학적 한계와 시대의 질서 속에서도 더 넓은 세계를 꿈꾸고, 숙현과 함께 서쪽의 이상향을 찾아 나서는 모습은 인간의 상상력이 현실의 경계 너머를 향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상향은 지도 위에 표시된 어느 한 장소만을 뜻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는 마음, 다른 삶과 다른 질서가 가능하리라 상상하는 마음 또한 이상향을 향한 여정이다. 한석리와 숙현이 향하는 곳은 단순히 서쪽의 어느 땅이 아니라, 주어진 운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인간의 오래된 꿈처럼 읽힌다.


세종이 백성에게 새로운 문자의 세계를 열어 주려 했다면, 한석리와 숙현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선다. 서로 다른 길을 걷는 듯하지만 그들의 여정에는 지금의 한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의지가 흐른다. 한 사람은 백성의 생각이 뻗어 갈 길을 열고, 다른 이들은 인간이 꿈꿀 수 있는 세계의 끝을 넓혀 간다. 역사의 틈새에서 피어나는 꿈이란 결국 주어진 세계에 갇히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일 것이다.


소리를 그려 마음을 전한다는 것


한글은 소리를 그려 마음을 나타내는 글이다. 입술과 혀끝에서 흩어지는 소리를 붙잡아 눈으로 볼 수 있는 문자로 세우고, 마음속에 머물던 생각을 다른 이에게 건네는 길을 열었다. 무수한 소리를 담아내고 그 안에 뜻을 세우는 문자. 그곳에서 한글의 위대함은 시작된다.


그러나 한글이 위대한 까닭은 단지 우리가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자신의 마음을 세상에 건넬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 그 안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글을 몰라 뜻을 펼치지 못했던 이들에게 문자를 내어 준다는 것은 그들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일 가치가 있다고 선언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세종이 열고자 했던 것은 새로운 문자의 세계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생각으로 세상과 만나는 세계였는지도 모른다.


한글 창제를 둘러싼 갈등을 따라가다 보면 문자를 둘러싼 권력의 의미도 새롭게 다가온다. 지식이 소수의 손에 머물 때 다수의 목소리는 쉽게 묻힌다. 반대로 더 많은 사람이 읽고 쓰며 자신의 뜻을 표현할 수 있을 때,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넓어진다. 한글은 소리를 기록하는 수단인 동시에, 그동안 드러나지 못했던 마음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하는 통로였다.


한글은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한글로 쓰인 노래와 이야기, 드라마와 영화가 국경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에 닿는다. 우리의 정서는 번역과 다양한 문화적 매개를 거쳐 세계 곳곳에 전해지고, 한류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공감의 물결을 만들어 낸다. 소리를 그려 마음을 전하던 문자는 이제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고 있다.


한글의 위대함은 얼마나 많은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가에만 있지 않다. 그 소리로 얼마나 많은 마음을 세상에 드러내고, 서로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깊이 연결할 수 있는가에 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 마련한 길은 오늘날 우리가 세계와 소통하는 데에도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단지 글자를 세우는 일이 아니라, 그 글자를 통해 살아갈 사람들의 가능성을 여는 일이었음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물려받은 것은 무엇인가


《세종의 나라》를 읽고 남은 것은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감탄만이 아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견딘 숙현, 시대가 허락한 경계 너머를 꿈꾼 한석리, 그리고 고독 속에서도 백성에게 필요한 길을 찾으려 했던 세종의 모습이다.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속한 세계의 한계를 넘어선다. 반면 권력과 지위를 지키려는 욕망은 진실을 왜곡하고 타인의 삶을 짓밟으며, 마침내 나라의 근간까지 흔들 수 있음을 작품은 보여 준다.


역사는 지나간 시간에 머물지만, 그 안에서 발견한 신념과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한글을 당연하게 읽고 쓸 수 있다는 사실 뒤에는 그것이 당연해지기 전의 고독과 저항이 있었다. 그렇기에 한글을 물려받았다는 것은 편리한 문자를 물려받았다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누구의 목소리도 함부로 지워지지 않는 세상을 향한 뜻까지 함께 이어받았다는 의미일 수 있다.


어쩌면 좋은 역사소설은 과거를 다시 보여 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묻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세종이 열어 놓은 문 앞에서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그 문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어느새 또 다른 문을 닫고 있는가.

그들은 혹 자신과 장영실이 만물을 관찰했듯 글자의 또 다른 세계에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쏴아 소리를 내며 불어온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종루에 달린 풍경을 요란하게 흔들어대자 조금 전까지 잠들어 있던 세상이 아주 조금, 미세하게 깨어나는 듯했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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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리커버, 양장)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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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관계를 형성하는 기저에는 결국 ‘나’로부터 비롯된 무엇이 있다. 느슨하든 밀접하든 관계는 우리를 아우른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칭하는 것도 결국 그 때문이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가진다. 나다움으로, 혹은 나라는 인간으로. 그런 관점에서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는 다양성을 가장한 나다움에 눈길을 머물게 한다.


7개의 짧은 호흡으로 써 내려간 단편들은 기존의 생각의 틀을 허문다.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예측하기 어려운 열린 결말은 익숙한 판단을 유예하게 한다. 선인과 악인의 구분 또한 모호하다. 평범을 가장한 우리의 익숙한 서사를 차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길티 클럽 : 호랑이 만지기」에서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소실되어 가는 환상에 열광하는 팬클럽의 모습을, 「혼모노」에서는 약발이 다한 무당의 마지막 발악에 경악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마주한다. 기이함과 불편함이 뒤섞인 그 풍경은 오래도록 시선을 붙잡았다.


중반으로 치달을수록 이야기는 민감한 소재를 아무렇지 않게 주무른다. 「구의 집」을 읽는 내내 뱉어낼 수 없는 불쾌함이 맴돌았던 것도 남영동 고문실을 떠올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잉태기」에서 일제 치하 부역으로 쌓아 올린 자산을 무기로 손녀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시부와 며느리의 손녀 쟁탈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 모든 메타포를 가르는 불편함은 작가가 일으킨 힘이다. 의도되었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군상들이 감추고 있던 이면을 내밀하게 드러낸다.


혼모노. 진짜인 듯 가짜이고, 가짜인 듯 진짜인 사람들.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어느 한쪽으로 쉽게 가를 수 없는 회색지대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작가가 바라본 현대인의 모습이며, 우리가 흔히 ‘나다움’이라 부르는 것의 실체인지도 모르겠다.


이민 3세대로 분해되어 기술된 「스무드」 속 듀이와 광화문 태극기부대의 어색하지만 불편한 환영은 신선한 충격으로 읽힌다. 분명한 것은 조밀한 관찰의 파장이 불러낸 상상이 전혀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라면 그 어색함 속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끼지 않을까.


「우호적 감정」에서는 기존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자율적 규칙을 만들고, 서로 다른 것들을 한데 섞어보려 하지만 결국 보이지 않는 차별은 존재한다. 의도하지 않은 시선과 말 한마디, 익숙한 관습의 틈 사이로 차별은 부지불식간에 스며든다. 기실 이런 불편함은 우리 안에도 이미 스며들어 있는지 모른다. 「메탈」은 헤비메탈을 사랑하고 관습을 부정하며 노마드적 삶을 꿈꾸지만, 현실의 냉혹함 앞에서 그 꿈은 처절하게 사라지는 신기루가 된다. 자유롭고 싶다는 욕망조차 결국 관계와 사회라는 보이지 않는 그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이렇듯 성해나 작가의 글은 방향이 좋다. 읽는 내내 불편함이 한몫하겠거니와, 그 불편함 뒤에 남겨진 몫 또한 온전히 독자의 것이다. 그 속에서 관계 속의 나를 찾고, 나다움이 무엇인지, 진짜와 가짜를 분별할 힘이 솟아나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보이지 않는 차별 속에서 우리는 분투하고 좌절하며, 때로는 타협하면서 오늘을 살아낸다. 이 또한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나는 관계를 만들지만, 그 관계가 다시 나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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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인류 - 인류학의 퓰리처상 ‘마거릿 미드상’ 수상작
마이클 크롤리 지음, 정아영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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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는 삶을 긍정에너지로 바꾸는 지름길입니다. 타고 난 신체적 특성, 환경 그리고 열정은 달라도 달리기가 그 만한 가치가 있는 일 임을 알려 준 책입니다.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에디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 모인 선수들의 달리기에 대한 내밀한 이야기를 엿볼 수 있어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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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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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화되고 보편적 정의가 지배적인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비이성적이거나 몰상식적인 일들에 경악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원초적인 아픔의 형태가 아닐지라도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배려하는 것은 사람 사는 세상에서 자라나는 연대된 믿음이다. 어떻게 보면 봉건제 사회에서든 민주제 사회에서든 보편적 선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때로 잔인하고 더할 나위 없이 추악스럽다. 아픔의 형태가 원초적일수록 더 크게 잔혹함의 형태는 무뎌지고 아픔에 대한 고통척도의 비례가 비정상적으로 재단된다. 더욱이 제도화된 기관의 이면 속에 감춰진 폭력은 때로는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이 책은 아일랜드의 참혹한 역사의 어두운 사실에 기반한다. ‘막달레나 세탁소’는 아일랜드 가톨릭교회가 세운 미혼모를 위한 보호소이며 입양시설이었다. 구휼시설의 타락은 더 철저하게 무너졌고 파장효과는 매우 강력했다. 보호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인권유린의 실상은 가닿지 못한 현실처럼 아련하기만 하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화자를 통해 바라 본 세상은 불편했고 차가운 고통은 사뭇 낯설기만 한다. 하루하루 오늘을 버티게 한 노동의 대가에 실로 감사하며 가족의 행복이 최우선으로 여기는 중년의 필부를 통해 바라 본 타인의 고통은 많은 물음을 제시한다. 작가의 의도가 천착한 바가 여과없이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책은 가벼웠고 흘러가는 강물처럼 시나브로 스며들지만 암초에 걸려 소용돌이치는 물결처럼 파문은 오래도록 자리 잡는다. 불의와 타협한 시간을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선을 통해 현실속의 자아를 선의로 이끄는 과정은 매우 감동스럽다. 이미 이야기는 영상화되어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지만 그 전에 활자를 통해 바라 본 감동을 느끼길 권한다.

 

이야기가 추동하는 힘은 간결하지만 빠르게 퍼져 오래도록 여운을 새기는 힘을 가진 책임에 틀림없다. 어느 시대에 살았건 어느 곳에 터를 내렸건 역사의 층위에 기억된 아픔과 야만의 폭력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타락하고 오염되며 취약한 구조의 결과물인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역사의 시간 곳곳에 나타난다. 그럼에도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 즉 공공의 선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희망처럼 다가온다.

 

이렇듯 작가의 책은 처음이지만 단숨에 읽혔다. 이야기의 얼개가 단단한 것은 사실에 기반을 해서 그러하겠으나 종교적 위선의 충격이 관념의 거짓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신은 죽었다는 니체를 통해 공허한 허무성에 실존적 물음까지 다양한 생각의 지평이 펼쳐진다. 연민의 한계와 양심의 명령 사이의 절묘한 대립은 이 책이 보여줄 원초적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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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빠르게 사라진다는 것은 나이 들어감의 또 다른 의미다. 크고 작은 무수한 파편의 날들이 흘러가는 동안 잊혀지고 쓰러진 나의 서재는 빛이 바랬고 함께 낡았다. 새삼 돌아 왔노라고 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이게 뭐라고 사라져 버린 것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그 생명력에 오롯이 감탄할 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랬듯 근면은 소실되지 않는다. 어디서든. 아이러니하지만 적당한 불안함과 막연한 걱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치 않더라. 이 또한 사라지지 않는 명제랄까. 나만 그런것은 아니겠지만 누구나 다 그럴거라는 끈끈한 연대의식의 갸날픈 위로로 퉁치면 될 듯 싶다. 많은 것이 변했고 나 또한 무던히 변했다. 찬란했던 젊음도 이곳저곳 삐걱대기 시작했으며 기억 또한 찰나처럼 빠르게 지워진다. 


그나마 위안히 되는 것은 꾸준히 읽어 내고 듣고 생각했으며 덤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태생이 앉은자리 습성의 종족이 아니건만 오랫도록 앉아 지내는 동안 굳어 버린 근육의 얼레를 달리기를 통해 쓰다듬고 온기로 채웠다. 달리기는 다른 세상으로 이끄는 온기가 되었으며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곳으로 안내했다. 언제까지 달리게 될지 모르겠지만 러너스 하이가 지속되는 동안 읽고 쓰고 달리고파 낡은 서재로 천천히 뛰었다.


호흡을 열고 가슴을 넓히는 동안 나약한 인대는 들숨에 삐걱댔고 날숨에 통증은 빠르게 퍼졌다. 우리는 더 이상 살기 위해 뛰지 않으며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달리지 않는다. 퇴화된 달리기의 기억처럼 낡은 나의 서재를 천천히 다듬고 고쳐 세워야겠다. 지금의 몹쓸 통증이 시나브로 달리다 보면 강인하고 튼튼한 강철인대로 강화되기를 소망해 본다. 나를 둘러 싼 모든 것에.


어제의 자신이 지닌 약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해 가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장거리 달리기에 있어서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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