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통장 콘서트 - 가정경제의 미래를 그리는 사람들 이야기
이광구 지음 / 정보와사람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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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재테크열풍이 한창이다. IMF구제금융의 험난한 파고를 넘어서면서 자생적으로 익힌 살기 위한 본능에 가깝다. 잘 나갈 때야 우물물이 샘솟아 나듯 넘쳐나는 것이 인심이지만 한 번 기울어 버린 가산은 쉽게 회복하기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해서 요즈음 재테크나 경제를 모르면 뒤처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섣불리 접근하다가는 낭패를 보기가 일쑤다. 예전이야 종자돈을 불리기 위해서 저축이라는 단순접근으로 충분히 가능하였다지만 지금은 저축관련 상품만 그 종류와 개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넘쳐난다.




그래서 설익은 재테크로 인해 자산이 묶이거나 화를 부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게다가 정작 필요할 때 유용하지도 않은 상품에 가입하거나 중복된 상품에 가입하는 일도 허다하다. 이러한 모든 실수는 재무관리기반이 허약해서 비롯된다. 재무관리는 자신의 자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유기적인 관계를 통한 최상의 수익을 창출하는 관리시스템을 말한다. 하지만 국내에서 이러한 전문가를 쉬이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책 <희망통장 콘서트>는 그런 이유로 집필되었다. 저자 이광구씨는 “포도재무설계”라는 회사에 이사로 재직 중이다. 그가 재무관리에 관한 책을 내게 된 이유도 척박한 국내의 금융환경과 인식의 변화를 제고하기 위해 펜을 들게 되었다. 제 아무리 자기 PR시대라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의 업무와 관련해서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다. 자칫 비판적인 시각으로 비쳐 보일 수도 있거니와 잘못된 고정관념을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구성이 실화를 바탕으로 어디까지나 있는 사실 그대로를 조명하였기에 그러한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겠다. 시중에 유통되는 자산관리에 관한 서적이 직접적인 수익을 창출하는 부의 기능적 면에 충실했다면 책은 효율적인 실질적 면에 부응했다. 재무 관리사는 낯선 그들의 상담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투영하고 무엇을 위해 사는 지를 깨우치게 해 준다면 이 얼마나 유용한 지표가 되겠는가.




경제라는 말도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준말로 나라 일을 경륜하고 세상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경제의 작은 단위인 가정경제가 바로 서지 못한다면 기반이 취약해 얼마 못가서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탐욕과 시기가 지나쳐 올바르지 못한 상품을 설계하고 판매하는 경쟁제일주의구조에서 자신의 체질에 맞고 시의적절한 금융상품을 선택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에 소개된 “포도재무설계”의 철학이 바로 우리가 찾던 그것에 가깝다. 건전한 재무구조개선을 통한 목표의식을 분명하게 하고 삶의 질을 현저하게 나아지게 하겠다는 취지다.




책은 10명의 현직 포도재무상담사의 실화를 우화형식으로 녹여냈다. 열악한 상담환경을 극복한 성공담에서는 절로 그 노고와 어려움을 통감하게 하며 읽는 내 나 자신의 문제도 반추하게 만든다. 실제 돈을 다루고 제어한다는 것은 경제의 흐름을 한눈에 꿰뚫는 것과도 같다. 자영업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맹목적이고 공격적인 투자습관에 대한 습관은 쉽게 고쳐지기 힘든 것이며 우리가 흔히 범하는 오류 중에 하나다.




인간은 심리학적으로 쉽사리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않으며 지키려는 본성이 강하다. 잘못된 원인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애써 무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신에게 맞지도 않는 상황을 외부요인으로 돌리는 경우겠다. 기실 이렇게 만들어진 시행착오가 잘못된 재무환경을 고착화하는 계기가 됨은 물론이며 지인의 권유에 의한 보험가입이 그 주예다. 어느 금융상품이든 그 목적이나 내용을 감안하면 나쁜 상품은 없다. 그렇지만 과도한 경쟁 심리와 실적에 목매다는 금융환경에서는 언제든 발생 가능한 일이며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이처럼 고삐 풀린 말처럼 통제하지 못하는 재무습관과 체질변화가 이 책의 주요 관심사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는 지도 아울러 고민해 보고 삶의 질이 풍요로워지기를 희망하는 진정성이 가득한 이야기다. 포도의 대표이사 라의형씨의 구구절절한 경력을 보아 알 수 있듯 척박한 재무관리환경을 그들의 노력으로 변화시키려는 열의와 에너지가 넘쳐난다. 진정 사회적 기업의 출발은 이러한 도전과 진심에서부터다. 이러한 진심이 하나 둘 모여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고 자본주의 논리에 일그러진 우리의 참된 모습을 찾는 단초가 되리라. 진심은 통하게 마련이며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 어느 CF의 카피처럼 진심으로 대하면 사정은 달라지는 법이다. 한번쯤 돌이켜 볼 가치가 충분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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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픽 - 운전습관과 교통체계에 숨겨진 인간의 비이성적 본성 탐구
톰 밴더빌트 지음, 김민주.송희령 옮김 / 김영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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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로망이라면 단연코 자동차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엣지 있는 스타일의 자동차는 언제고 본능을 깨우는 욕망처럼 분출되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전에 자신이 있든 없든 남자라면 자동차에 관심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런 경향을 보이는 남성은 대개 자신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운전을 곧잘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운전을 잘한다는 것의 정의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으나, 도로 주행 시 교통여건ㆍ정체상황ㆍ운전습관 등 제반여건을 모두 고려할 때 목적지까지 최단시간에 가는 것으로 인식하는 편향이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남성의 시각으로 바라 본 시각이지만 이 책에서라면 눈 여겨 볼 판단의 대상이다.




그런데 이처럼 운전을 잘한다는 인식으로 가득한 남성들이 대부분 운전 중 사고를 유발하는 잠재 사고유발자라면 수긍이 되는가? 반대로 여성이 운전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서툴다는 편견은 어디서부터 출발한 생각일까? 우리는 운전에 담긴 익숙한 행위에 다양한 편견과 비뚤어진 관점을 유지하는 경향이 강하다. 실제 여성과 남성은 인지체계의 특성상 공간지각, 상황판단을 관장하는 영역의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여성이 운전을 못한다는 협소한 시각은 편견에 불과하다. 이것은 인간의 사고능력이 처리할 수 있는 개별적인 특성의 차이가 빚어 낸 오래된 고정관념이다.




또한 운전이 생활화 되고 기술의 발달로 운전 중 다양한 일을 동시에 하는 멀티태스킹이 가능해 진 것도 사고의 주범이다. 멀티태스킹의 위해는 이미 학계에서도 보고된 바 있으며 실제 처리속도가 개선될 것 같은 착각 외에는 이도저도 아닌 업무의 집중도만 저하시키며 스트레스만 가중시킨다. 따라서 이 책 <트래픽>은 빈번하게 발생하는 교통체증의 현상에 착안하여 왜 이러한 비생산적인 현상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지에 대해 묻고 그것이 인간을 둘러싼 다양한 착오, 관습, 그릇된 행위, 관념에 연결되어 있음을 심리학의 시선으로 세밀하게 고찰했다.




그러한 만큼 책은 실제 궁금했으나 별로 중요치 않다고 치부했던 사소한 궁금증에서부터 고난도의 복잡한 심리적 문제까지 골고루 섭렵하였기에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심리학의 일반이론을 기저에 깔고 있는 것도 이 책의 완성도를 높이는 재료로 충분히 활용되었으며 무엇보다 저자의 깔끔하고 명료하게 정리된 예제와 정리가 돋보이는 책이다. 미국의 교통상황과 국내의 교통상황이 엇비슷한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현실에 실제로 적용하기에도 무리가 없다. 나아가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현상과 실험적인 사례를 통해 인간의 인지체계의 부조화가 얼마나 치명적이고 심오하게 전개되는지 조목조목 따져 묻는다.




책은 운전에 얽힌 인간의 비이성적인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인간이 하나의 행위로부터 연결된 다른 행위로 연결 짓는 결정을 하기까지의 판단과 처리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문제는 눈으로 보고 인지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류다. 오류는 인지부조화를 촉발하고 실제와는 다른 각도로 사물을 판단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부정확하게 인지된 사고체계는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사고를 유발하는 잠재요인으로 예컨대, 정차해 있는 제설자동차나 응급차를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추돌하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이유겠다. 이는 인간의 심리는 일정한 영역을 설정하고 마치 배가 닻을 내리듯 정박하는 관성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관습이나 환경에 묶이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책의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은 일반심리학으로 본 인간의 행동들, 즉 편향(Bias)적 특성에 대한 담론이다. 고속도로 위의 막히는 구간을 통과할 때 갓길을 따라 운행하는 얌체운전족이나 막판 끼어들기를 시도하는 운전자에게 분개하는 심리를 기가 막히게 잘 설명해 주며, 정체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시간대나 갑작스런 정체상황이 왜 발생하는지에 대해 인간의 본성과 연결시켜 규정하고 있기에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신선한 사고의 접근이다. 그러하기에 인간의 심리기제라는 유동적인 관점을 통해 드려다 보는 세상은 가히 운전이 주는 형식적 행위 속에 담긴 실질적 의미를 엿보는 창에 다름 아니겠다.




다시 말해 인간의 행위는 일정한 틀에 의해 어떠한 과정으로 진행하는 단계에서 작용하는 대상으로 작용한다는 의미다. 이 책에 의하면 메뚜기, 개미 등 곤충의 놀라운 군락형태를 통해 효율적인 통제와 흐름을 제시하여 보여준다. 개미가 지닌 행동특성에 담긴 체계적이고 매우 영리한 보행시스템은 인간의 교통사정과 극명하게 대비케 한다. 자유의지로 걷고 이동하고 보행할 권리는 인간의 행복과 직결되는 우선권이다. 서로의 이익의 만족추구로 인해 충돌하고 상충하는 갈등관계의 원만한 해결은 건실한 사회를 유지하는 필요충분조건이다.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개미들의 행동양식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이렇듯 인간의 내면에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심리영역의 파장효과는 상당함을 알 수 있다. 위험한 길일수록 더 조심하게 되고 반대로 익숙한 길일수록 더 느슨하게 되는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보는 것이 우리 사회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지지대가 되지 않을까 한다. 트래픽의 부하에 걸려 잠시의 만족을 위해 대를 희생하는 소탐대실의 현실을 이제는 벗어나야 되지 않겠는가. 이 책을 통해 -고속도로가 정체에 걸리고 그 가운데 멈춰 서 있는 경험을 한 이라면 누구나 알 듯- 운전은 순리대로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 최선의 지름길임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음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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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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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선생의 글에서는 향이 피어오른다. 글로 다듬어 뽑아 올린 힘찬 문장들은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꿈틀거린다. 선생의 글을 읽고 대할 수 있다는 것은 동시대를 사는 한 인간으로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그의 칼칼한 성격이 오롯이 틀어 박혀 각인된 문장들의 태동과 역동감에 절로 흥분된다. 실제와 당위의 경계에서 고뇌하는 인간을 어루만지는 따사로움으로 반듯한 원형질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의 글은 천리향처럼 마음 속 울림의 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인간의 거친 삶을 날것 그대로의 상태로 조탁하고 드러내 보여주기에 감출 것도 덮을 것도 없음을 이내 알아차린다.




인간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다. 인간은 비루하고 던적스럽다는 선생의 말처럼 삶은 치열하다 못해 버겁기까지 하다. 숭고한 이상도 이념도 삶 앞에선 아무도 어찌할 수 없을 테다. 인간의 삶이 우연성의 우듬지로부터 기인한다면 유약한 본능의 기억은 적나라하게 인간을 괴롭힌다. 선생이 조명한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은 목적을 상실한 허무한 날개 짓처럼 위태롭다. 하지만 삶이란 것은 적절한 균형으로 돌아서는 것처럼 말콤 글래드웰이 말한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의 상태로 회귀하며 유지하기를 반복한다. 이른바 공존의 삶을 추구하는 항상성일 게다. 그렇기에 인생은 음과 양이 빚어낸 조화의 산물이 아니겠는가. 마치 밀물과 썰물처럼 말이다. 해서 제 아무리 암울하고 비열하고 구차한 삶에 쫓길지라도 우린 하나의 희망처럼 꿈을 안고 나아가는지 모른다.




이 책에서 설정되고 배치된 인물들의 면면은 우리 현대사의 질곡의 틈바구니를 살아가는 대표적인 캐릭터들의 집합체다. 신념을 목숨처럼 경외하고 대의명분을 위해 결의를 다지던 그들도 생활의 덫에 걸려 끝없는 추락으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그런 거창한 명분이 아닐지라도 삶이라는 야수의 추격에 몰려 이러지도 못하는 나약한 인간군상의 발버둥쯤 아니겠는가. 굳이 특정인물을 끄집어내어 낱낱이 해부하고 까발리지 않아도 우리에게 놓인 삶의 모습이 순탄치만은 않은 현실에 자조해지까지 한다. 그러나 삶이 어디 이토록 암울하기만 하던가. 아무 짝에 쓸모없는 자존심은 개나 줘 버리라는 공지영작가의 말처럼 분노와 울분이 샘솟아 오르지만 그것도 익숙해지면 그 속에서 익힌 현실의 관성이 새로운 희망의 싹을 절로 움트게 마련이리라.




현대사를 흔히 질곡의 삶으로 빗대곤 한다. 조선왕조 5백년의 넘지 못했던 신분사회의 갈등구조를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 청산하고 우리 사회는 빠르게 변화의 물결을 넘었다. 이로 인해 우리를 지배하던 이데올로기의 근간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양분되었으며, 자연스럽게 계급과 계층을 나누고 보수와 진보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경계의 벽으로 구별 지었다. 해서 김훈 선생이 이 책을 통해 한국 현대사회를 재조명하고 인간의 불안정한 내면을 투영하고자 한 것은 인간을 추동하는 본질에 더욱 접근하고자 했음이리라. 더 나아가 인간의 부정적인 면을 보고자 함도 아니고 바로 살아 내기 위한 몸부림의 현장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님아 강을 건너지 말랬어도

기어이 건너려다 빠져 죽으니

어찌하랴 님을 어찌하랴

- 公無渡河歌, 여옥의 노래 -




차안과 피안으로 나뉘는 안식의 염원은 강은 건너는 행위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김훈선생은 공무도하가에서 보았듯 강을 건너는 행위의 불안정한 상태의 현실을 이상이 아닌 현세에서 추구하고자 하였으며 화합과 통합의 바람으로 이끌었다. 그 옛날 중생대 쥐라기시절 공룡이 바다로 향한 까닭과 신라의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해골 속에 담긴 썩은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던 진실의 이면도 현재에서 찾았다.




그러하기에 이 책에서 공무도하의 상징성은 다양한 모습으로 와 닿는다. 백수광부의 아내 여옥이 남편을 잃은 상실의 아픈 현실과 책 속에 설정된 인물들의 아픔은 오롯이 일치한다. 오금자가 자신의 아들이 키우던 개에 죽임을 당하였으나 드러내지 못하는 아픔, 장철수가 노학연대를 배신하고 권력의 끄나풀이 되어 삶의 바닥으로 추락하던 아픔, 박옥출이 현실의 고단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캐피털백화점화재사건에서 귀금속을 훔치던 아픔, 후에가 베트남의 지긋지긋한 가난이 생산하는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도피하듯 국제결혼을 해야만 했던 아픔. 이 모든 아픔의 실체 또한 포위된 현실의 반영이다.




지지리도 고단한 현실을 단절하기 위한 몸부림을 통해 그들은 또 다른 삶을 산다. 시종일관 욕지기를 일삼던 편집부 차장의 독백처럼 힘겹고 분투하는 삶이다.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상처받은 아픔을 끌어안고 이들은 해망으로 찾아든다. 누구나 아픔은 있듯 복잡다단한 일상의 반복된 역겨움에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부 기자 문정수 또한 아픔을 안고 산다. 그를 위무하고 보듬어 주는 존재인 노목희 역시 화가로서의 치명적인 아픔이 그러하다. 기실 아픔과 상처는 보듬어 주고 품어 치환을 기대한다. 그들의 엇갈린 삶의 명암도 서로에게 주고받는 교감을 통해 부족한 것을 채워주기에 삶은 순환되어 가는지 모른다. 갯벌의 생태가 자연 치유되고 진화의 지층이 겹겹이 기록된 삶의 반복을 통해 흘러가는 연유이리라.




실제 책 속에 던져진 각자의 아픔은 동일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아픔을 탈피하기 위한 행위가 만든 피할 수 없는 삶의 간극을 메워나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나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적자생존의 치열한 현장에서 그들의 행위는 가냘프기 짝이 없다. 미 공군 폭격훈련장으로 사용되었던 밤섬의 조차기간동안 해망의 원주민들은 고통에 시달렸다. 생태가 변하고 환경이 척박해져 유린된 땅을 목숨처럼 지키던 그들도 미군이 떠난 후 득달같이 밀려들던 개발논리의 강자에 엉겨 붙게 된다. 명분과 신념은 이미 물을 건넜으며 더 이상 알량한 자존심 따위로 수치스러워할 단계는 지난 지 오래다.




결국 삶은 절망 속에서도 누군가가 남긴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비루하고 던적스럽다. 현상이 달라지면 요구도 달라지고 이유도 달라지는 법이다.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탐욕으로 얼룩진 뺏고 빼앗기는 약탈의 혐오만이 똬리를 길게 튼다. 김훈 선생이 잘라 보여준 인간의 단면은 더 이상 새로울 것도 놀랄 것도 없는 우리네 삶이다. 자본화되고 이해타산의 논리에 변모하고 일그러진 우리 사회의 모습이며 상실의 시대다. 하지만 삶은 어디에서든 계속된다. 비록 가슴 저린 신산한 삶의 무게가 짓누를지라도 숙명처럼 질긴 연을 이어가는 이유는 살아 있음의 허기로움 때문이다.




이처럼 사유하고 숙고한 흔적이 행간을 따라 겹겹이 쌓인 김훈의 글은 생각의 무게를 더 하게 만든다. 부정적인 상황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속물처럼 더러움에 물들어 타락했든 밥벌이를 위해 살아가든 우리의 삶은 채만식 선생의 레디메이드 인생처럼 허무함만 쌓인다. 이처럼 이 책에 투시된 하류인생의 고통과 연민은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숙제다. 계층 간 갈등, 맹목적 탐욕자본주의의 열망은 이 시대가 반드시 풀어야할 과제다. 강을 건너, 바다를 건너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난 희망의 싹일지라도 이름 모를 땅에도 꽃은 피고 지리라. 우리에겐 암울한 현실보다 희망의 부재가 주는 절망이 더욱 크다. 그러하기에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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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경제학 - 진화하는 경제의 흐름을 읽는 눈
마이클 셔머 지음, 박종성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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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적이고 합리적 계산, 정확한 예측모델에 의한 최대의 효용성 산출은 경제학이 추구하는 목표다. 경제는 수요와 공급의 함수관계에 의해 일정한 형태와 패턴을 찾고 미래의 일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이것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전통 경제학의 구조와 얼개다. 이러한 틀에 의해 현실의 실물경제가 가동되고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이토록 중요한 경제의 지배적 위치는 현대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커다란 한 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런데 과연 전통 경제학이 우리 사회의 모든 현상들을 적확하게 잡아내고 분석할 능력이 있다고 보아야 할까? 이미 그 답은 시장으로부터 나왔다. 인간이 수렵채집사회에서 동력화된 산업혁명시대를 거쳐 현재의 정보통신사회로 이전하는 동안 겪은 시행착오를 보더라도 이제 기존의 이념과 잣대로 현재의 틀에 끼워 맞추기에는 버겁기 짝이 없다. 예컨대, 경제학의 이념을 추동하고 조종하는 구심점이 바로 인간이라는 데 있다.




행동경제학, 행태경제학, 심리경제학 등 다양한 형태로 분파된 새로운 개념의 경제학적 접근은 이 책에서 소개된 내용의 포커스와 일치한다. 인간이라는 더 자세히 말해 감정이라는 말랑하고 요상한 제3의 관점에 의해 경제학이 예측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저자 마이클 셔머가 통찰하는 이 책은 대단히 신선하고 충격적인 시각적 공유의 장을 마련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진화경제학의 학제적 연구는 이제 4반세기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그 동안 주류 전통경제학이 바라보는 이론의 토대위에 새로운 요인을 찾고 첨가한 것이 바로 인간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태동한 학문이 바로 진화경제학이다. 우리에게 조금은 낯설고 먼 분야인 것은 사실이나 그 영향력과 현실경제를 이해하는 도구로서의 수행력은 상당한 성과를 도출해 낸 것이 사실이다. 학제 간 접목에 의한 심리학, 사회생물학, 우생학으로부터의 접근이라는 요소도 그렇고 진화경제학을 주류적 가치로 끌어 올리는 계기가 된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할만하다.




책은 인간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의 행위가 이어지기 위해 인간이 어떻게 의식하고 어디서 제어와 통제를 하는지를 설명하고 사회 내에서 관계로부터 무엇을 이끌어 내는지를 상세하게 살폈다. 이러한 모든 중심에 진화라는 관점이 녹아있음은 물론이다. 다윈의 진화론에 의해 밝혀진 바와 같이 영장류인 인류가 진화를 거듭한 과정에서 선택한 자연 진화론에 의해 감정 또한 지배를 받는다는 생각과 궤를 같이 한다. 인간이 진화의 위대함을 이루어 내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돌연변이로부터라는 발상처럼 인간의 감정 또한 이성적인 통제 속에 고스란히 흡수할 수는 없다.




인간은 비현실적이고 충동적이고 선과 악이 공존하는 감정의 유기체다. 인간이 얼마나 이성적이지 못한지는 수없이 많은 심리학의 연구와 결과에 의해 소개되었다. 심리학자 필립 짐바도의 유명한 감옥역할실험인 <루시퍼 이펙트>의 충격적인 분석이나 최후통첩에 의한 분배의 원칙은 전통적인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이상을 무차별적으로 무너뜨리기에 충분하다. 저자는 이러한 감정의 불가해적인 요인에 의해 인간이 일정한 경향이나 패턴으로 움직이기 쉽다는 것에 착안하였으리라. 그 속에서 인간의 이중성에 의해 경도되는 감정의 유전자가 어떻게 기록되고 각인되었는지를 통렬하게 밝히고자 하였다.




사악함은 환경과 시스템, 사람이 만들어 내는 행위다. -필립 짐바도-




인간의 감정이 모여 문화로까지 발전한다는 밈(Meme)이론의 주창자 리처드 도킨스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이기적인 유전자가 결합된 유기체인 것은 사실이나 이것도 상대적이다. “내 등을 긁어주면 네 등도 긁어주겠다.”는 상호적 이타주의의 기저를 보더라도 인간은 환경과 시스템에 영향을 받는다. 전통경제학이 간과하고 지나쳐 버린 중요한 키워드도 여기에 숨어있다. 저자는 인간(감정), 환경, 시스템에 의해 경제가 움직인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찾아내고, 가공하고, 저장하고, 재사용하는지에 관한 효과적인 시스템을 발견해 나가는 일이 진화라고 말하는 신경 경제학자 리드 몬태규의 주장처럼 인간을 추동하는 근원적 본성은 도덕적 목적에 있다. 도덕적 가치는 우리를 더욱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하고 인간을 공리적으로 바꾸는 밑거름이 된다는 이야기다. 제러미 밴덤이 주장한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의 기본 가치도 바로 신뢰관계가 핵심이지 않았겠는가.




이렇듯 진화경제학에서는 인간의 선택과 결정을 환경의 척박함과 메커니즘의 견고함에서 찾는다. 계획경제와 사회주의경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자유주의도 적극적인 보호경제를 펼쳐야 한다는 신고전학파이자 온정주의자인 존 케인스도 전혀 고려하지 못한 요소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글로벌경제는 이전의 사상으로 덮지 못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거대담론 또한 어느 학파의 사상적 우위나 지지를 하기 위한 부가적 접근은 아니다. 월스트리트를 푸른 암흑으로 몰고 간 금융공학자들이 저지른 신자유주의의 착오를 거듭하기 위해서는 더욱 아니다.




인간을 지배하는 감정의 유전자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현실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윤리라는 거름망을 통해 걸러내자는 의미겠다. 다시 말해 자유주의적 온정주의에 의한 사고관이다. 기존의 경제학의 이론을 재통합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사회를 추동하는 구심점을 인간의 자유의지로 집결시킨다는 성과다. 자유의지를 근간으로 한 행복의 추구는 인간이 범접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다. 내재된 본성을 선한 행동으로 유도하고 갈등과 긴장을 해소 시켜 준다면 환경은 자생력을 갖추며 인간은 협업의 위대함을 유지, 진화시킨다는 사고다. 아울러 시스템을 행위를 받쳐 주는 지지대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를 통한 국가의 최소 보호를 모토로 삼는다. 하지만 사회 안전망에 의해 보호되는 약자의 보호는 필요불가결한 사항이기에 끌어안는 것을 잊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진보적인 시각이나 보수적인 시각을 모두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진화경제학이 바라본 시각은 틀짜기가 아닌 인간의 마음을 보듬는 마음의 치유이기에 어느 이론보다 유용한 가치가 흘러 넘쳐난다.




시장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익숙한 것과 낯선 것,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경계에 서 있다. 인간의 본성이 악한지 선한지는 인간의 유전자에 각인된 진화를 불러 모으는 과정에서 형성된 행복을 찾는 자유의지에서 비롯된다. 이성적으로 평범한 인간이 상황에 따라 악을 택하고 선을 택하는 현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한다면 사회경제는 예측 가능한 범주로 바라 볼 수 있으리라.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은 지적 포만감을 차치하더라도 인식하고 소통하는 사회적 출구로서의 역할을 다 한다. 따라서 마음의 오류가 범하기 쉬운 착각과 인간의 마음에 구축된 닻 내림을 효과적으로 이용한다면 협력과 번영이 제 발로 찾아드는 새로운 휴먼경제가 출현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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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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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의 좌표는 어디쯤에 와 있을까? 어디든 신ㆍ구간, 좌ㆍ우간의 자생적으로 피어나는 계층 간의 알력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어릴 적 기억으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좌로 치우친 사상이나 표현은 이적으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그 시절 목 놓아 자유를 갈구하던 민주열사도 518 학살에 희생된 영혼도 모두 붉었다. 그러했기에 난 붉은 색은 뭐든지 다 삐딱하게 보았고 우리 편이 아닌 반대의 세력으로 인식했는지 모른다.




실제 전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로 우린 많은 것을 잃고 얻었다. 보수와 진보의 기치 아래 다양한 세력의 물밀듯 터지는 출현을 맛보았다. 바야흐로 이념의 춘추전국시대라 할 만하다. 해서 현재의 시류를 논하기에는 상당히 예민하고 민감한 상황임은 분명하다. 해서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을 담았고 무엇을 보았는지 고민하기 전에 그 저자가 바로 장정일 작가란 데 있다.




평소 그의 철학이나 신념을 흠모했던 이유도 있겠거니와 차별화된 시각적 통찰이 눈길을 끌었다. 그의 작품의 전반을 관통하는 담론과 통찰은 신선한 충격에 다르지 않았다. 그런 그가 10년 만에 쇳물에서 막 달군 쇠막대기처럼 뜨거운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러한 관계로 이 책은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 사회가 떠안은 숙명적인 과제와 맥락을 같이한다. 감히 꺼내기 힘들었던 현실의 문제를 그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마치 황야를 개척하던 프론티어처럼 말이다.




책은 10대 후반의 거침없는 젊은 영혼, 금과 은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성장소설이다. 금은 민주화의 온기가 숭고하게 흐르는 호남에서 성장하였으며 은은 전통보수 세력이 득세한 영남에서 자랐다. 그들은 둘도 없는 친구로 서로의 자리를 메워 주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동성 간의 연인으로 발전할 만큼 각별했다.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자웅동체와 같았다. 여기서 그들을 묶은 커밍아웃은 작가의 의도된 삽입처럼 변형된 우리 사회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금과 은의 기질과 성향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진보를 상징하는 금은 이상과 열정을 신봉하고 반면 은은 보수에 입각한 현실과 냉정을 열망했다. 그러하기에 그들을 둘러싼 주변인들은 마치 현재의 우리 사회가 다다른 좌표로 순항하는 도구 내지는 길잡이 역할을 충실히 했다. 연상의 추상화가 반고경과 금과의 은밀한 사랑은 끝끝내 이루어 질 수없는 현실도 명분과 실리에 따라 움직이고 모이고 흩어지는 우리의 정치현실을 대상만 바꾸었지 동일한 모습 그대로의 형국이다.




우린 지난 10년을 민주화의 시대라고 말하기도 잃어버린 세월이라고도 한다. 양 극단의 이념체의 렌즈를 통해서 본다면 그 미립자는 분명 태양態樣을 바꾸는 변형체임은 분명하다. 어느 쪽이든 이념을 신봉하는 것은 자유의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재 토양은 공정하지 못하다. 좌우를 나누는 경계선도 그렇고 이념을 인식하는 출발부터 불공정한 현실이다. 작중 금과 은이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만나 대립을 청산하고 각자의 이념을 찾아 가는 모습에서 나는 불공정한 현실과 암울한 미래를 보았다.




제 아무리 은이 보수를 아우르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자유주의를 주창할지라도, 또한 금이 잃어버린 진보의 균형을 바로 세우고 모두를 위한 이념으로 무장할지라도 현실은 터무니없이 텁텁하기 짝이 없다. 인간은 던적스럽고 비루하다고 말하는 김훈작가의 말처럼 현실과 이념 속에 우리가 가진 사상과 이데올로기는 말 그대로 거추장스러운 일인지 모를 일이다.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인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어느 쪽으로 치우침은 더 더욱 위험하다. 그렇지만 작가는 새로운 우파의 출현에 기댔다.




장정일 작가는 구월의 이틀이란 타이틀을 얻기 위해서도 부단히 고민했다. 류시화님의 동명 시에서 그대로 따 온 제목이란다. 굳이 구월의 이틀을 시간의 개념 속에 가두어 둘 필요는 없겠으나 결핍된 현재를 향한 갈망의 흔적이다. 돌이켜 보면 젊음도 이념도 부질없는 인간의 행위와 몸부림에 다르지 않다. 헌데 구월의 이틀 속에 매몰된 우리의 현실은 바람처럼 구름처럼 찰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는 현재의 대안으로 역설스럽게도 영라이트(Young Right)의 출현을 반겼다.




세상의 이치가 양과 음을 나누듯 조화를 이루는 것은 당연지사다. 읽어 내는 자에 따라 그 의미와 해석을 달리 하겠으나 조금은 아쉽다. 독재와 압권에 깨지고 넘어질지언정 누구나 공정한 대우를 받고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 세상이었음 했다. 난 붉은 것은 모두 빨갱이로 보던 무지몽매했던 그 수치심보다 현재의 방관자의 태도가 더 부끄럽다. 앞서 작가의 희망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받아들이기 나름이겠지만 현실을 바로보고 이상에만 빠지지 말라는 의미로 들린다. 무릇 조화란 균형과 견제를 통한 서로를 인정하고 소임을 다하는 자세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뼈아픈 진통은 시간의 층위 속에 기억된 유전자적 기록처럼 끝없이 되풀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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