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1~6권 세트 - 전6권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외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죽음 너머의 세상은 불확실의 영역이다. 하나의 유기체로 숨을 쉬고 오감을 사용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지금 이 시점에도 나는 불안하다. 그 불안은 두려움이라는 피할 수 없는 외피처럼 막연하기만 하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 존재의 상실에 대한 불안, 알 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 불안의 요소들은 어디에든 산재한다. 인간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초월적인 신을 영접하고 기대었는지 모른다. 신과의 만남. 그것은 불안의 제거를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불안의 정체가 신과의 소통으로 모든 것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신의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 그것은 우주의 존재에 대한 원초적 질문으로 되돌아  온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인간이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규명작업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미지의 영역에 대한 불안의 제거는 인간을 이해하는 첫 번째 시도인지 모른다. 죽음에 맞서는 타나타노트의 순항처럼 말이다. 인간에게 죽음과 신은 밀접한 관계다. 죽음을 관장하는 섬뜩한 세계는 불안을 두려움으로 바꾸고 두려움은 다시 털어낼 수 없는 공포로 만든다. 그러나 종교는 말한다. 신을 받아들이고 사후세계에 대한 존재를 믿는다면 그 또한 인간을 움직이고 이끄는 동인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한다. 때로는 토템의 형식으로 때로는 정신으로 인간을 지배하고 의식을 고양시키는 방편으로서 존재한다. 이것은 종교에 대한 짧은 나의 단견에 불과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의미도 없다. 단지 신의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에 앞서는 서투른 끼적임에 불과하다. 나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규명할 방법이 현재로서는 없다고 본다. 기실 그 합리성이라는 잣대도 인간이 만든 기준에 불과하다는 오류를 생각한다면 어디에도 존재에 대한 마땅한 근거를 찾을 수는 없다.




        그래서 신은 이 땅의 모든 이를 관장하고 의식을 이루는 모든 유기체를 지배한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뒤따른다. “신, 그 이전에는 무엇이었는가?” 바로 이 물음에 대답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생경한 해답이 대신한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개미>를 통찰하던 그의 놀라운 사유의 흔적과 비범한 능력을 보았을 무렵부터다. 그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보편적이고 절대적이며 상대적인 이야기를 한다. 그러므로 이 책 <신>에 담긴 이야기의 줄기와 근간은 그가 이전에 써내려간 모든 것의 총합이다. 지옥을 탐사하고 죽음에 대한 본질을 파헤치던 <타나타노트>, 천사의 세계를 장엄하게 연출해 낸 <천사들의 제국>, <개미>에서 덮쳐 오던 숨 막히듯 개미세계를 열어젖힌 그의 모든 지식의 총아가 이 책에 담겼다.




        베르나르의 이전 작품인 <파피용>은 인간의 본질, 즉 협력하고 대립하고 무시하는 것에 대해서 본질적인 연구를 하였다면 <신>은 그것의 존재적 완성이라 할 만 하다. 베르나르는 인간이 무리를 이루면 반드시 협력하는 이, 대립하는 이, 무시(중립)하는 이로 나뉜다는 분열의 D, 중성의 N, 협력의 A의 인간의 본성에 렌즈를 맞추었다. 그것은 DNA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이해하였으며 이와 같은 단순한 체계로 모든 복잡한 것에 대한 기초를 이룬다는 의미다. 기실 <신>의 곳곳에 포함하고 지탱하는 지지대는 이것으로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인간을 추동하는 핵심요소인 것처럼 더 나아가 모든 것은 DNA의 과정을 답습한다. 단순함이다. 단순함은 허무로 싸여 있지만 확고하다. 베르나르가 천재적 영감을 마음껏 이용하며 신선한 발상을 뱉어 내는 주요한 이유 또한 단순함에서다. 단순함은 분명, 모든 것을 명료하게 만든다.




        그래서 베르나르의 주파수는 항상 열려있다. 닫힌 편견의 시선을 기존의 사고를 딛고 올라선다. <신>에서 드러난 모든 신들의 역사는 이미 인간의 의식세계에 깊숙이 침투한 모든 것이다. 올림피아의 12신들을 비롯해서 유명 짜한 신들의 일화를 모두 녹여냈으니 얼마나 대단한가. 밝혀진 신들을 재료로 새로운 행성을 건설하고 다시 그 모든 것들을 담아내는 발상의 신기원을 이루었으니 창의적이라 할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무지의 이전의 세계에서 피어 올린 작은 호기심의 열망이 과학의 세계로 다시 가상의 세계를 달리는 동안 베르나르는 한데 뭉치고 버무렸다. 수직, 수평의 세계, 시공간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 곳에 동시에 분출하는 새로운 존재의 중심. 평행세계에 대한 체계적이고 진보한 생각의 창출이다.




        <신>은 천사들의 제국에서 상승한 미카엘 팽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모험 가득한 이야기다. 신후보생으로 아에덴(Aeden)에 오른 미카엘과 다른 143명의 후보들과 겨루는 인간 사회의 운명적 만남은 여태껏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상상력이 뿜어내는 아우라다. 현재 지구 위에서 펼쳐지는 모든 역사의 기록들이 순환되고 영향을 받아 나가는 모습을 그린 그의 내러티브는 치밀한 기록의 재해석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역사적 진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이 책을 이어가는 스토리텔링의 산실이며 그의 방대한 지식의 분출에 놀랍기만 하다. 마치 마인드맵의 얼개를 짜 나가듯 넓혀 가는 경우의 가지가 모두 망라된다. 그리스신화를 중심으로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토속종교에 이르기까지 신화적 존재는 거의 터치되고 드러난다. 베르나르가 더욱 천재적인 작가라는 표상은 이러한 종교적 패러다임을 통해 하나의 조합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조합의 중심은 인간은 순회하고 내세는 존재하며 선과 악으로 나뉘는 본성의 접근에 부합한다는 윤회설에 가 닿는다.




        결국 <신>은 신을 통해 인간을 보는 이야기다. 진화의 단계를 거치면서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진실의 순간은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모든 것은 순간처럼 돌고 도는 수레바퀴라는 의미다. 베르나르가 3부작으로 총6권에 걸친 방대한 서사구조를 이어가기 위해 스토리의 지지대를 점검하고 흐트러진 알고리즘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곳곳에 보인다. 결과는 완벽할 수 없다. 완벽하지 않기에 베르나르가 독자에게 던지는 화두 또한 그곳에 있는지 모른다. 다소 황당무계한 결말에 이르는 베르나르의 종착역이 그의 끝없이 다다랐을 고민을 감내하는 구실이 되었으니 말이다. 기지와 재치가 넘치는 그의 핵심적 가치는 편견의 무덤 속에서 피어난 투명한 결정체다.




        아울러 <신>에 등장하는 신들의 배경을 기록된 사실과 가미되고 조정된 의견을 함께 고민해 보는 것도 이 책을 보는 묘미다. 신들의 전쟁을 통해 제우스와 그의 형제들이 세상을 나누고 구획하는 배경,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강박적인 결핍증상, 하데스의 악마적 본질은 인간이 빚은 허상 등은 이전의 지식체계를 흔들어주는 고무적인 장치들이다. 또한 베르나르는 인간 심리에 관한 본질적 접근을 통해 인간을 추동하는 가치들이 무엇인지를 미카엘과 에드몽, 라울 등을 통해 현란하고 다채로운 접근을 시도한다. 베르나르는 이를 위해 신후보생으로 명명된 인물들을 역사에 존재했던 철학자, 과학자, 수학자, 정치인, 아나키스트, 배우 등으로 채워 보완해 나간다. 이렇게 집결된 그들의 생각은 하나의 빛이 되고 그 빛은 더 높은 차원의 세계를 드려다 보는 프리즘으로 작용하는 결과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신>에 갈마드는 생각의 총아들은 인간이 밝힌 결과물과도 부합한다. 다층적인 심리세계를 기반으로 평행세계를 넘나드는 기반을 제공한 “초끈이론“에 이르기까지 건강하고 다양한 생각들로 붐빈다. 베르나르는 미카엘을 통해 끊임없이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란 의문을 지속적으로 던지며 현자의 돌을 찾아 나서는 연금술사처럼 비존재를 존재로 바꾼다. 마치 과거에 일어난 시간적 배경을 밝히는 학문인 크로노스(연대학)를 대하는 기분이다. 시간의 학문을 이용해 자아를 찾는 또 다른 여정의 산물인 셈이다.




        코스모스로 유명한 유작 <에필로그>에서 칼 세이건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죽는 순간 다시 살아나 나의 일부를 기억하고 생각하고 느끼면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이라 믿고 싶다. 그러나 그러한 소망이 강렬한 만큼 나는 그것이 헛된 바람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 사후 세계가 있다면 내가 언제 죽음을 맞이하든(…)나의 호기심과 갈망은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이 세계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우며, 크고 깊은 사랑과 선으로 가득한 곳이기 때문에, 증거도 없이 예쁘게 포장된 사후 세계의 이야기로 자신을 속일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약자 편에서 죽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생이 제공하는 짧지만 강렬한 기회에 매일 감사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칼 세이건의 생의 도정道程과 베르나르의 그것과 사뭇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미지의 세계를 알아 가고 깨달음으로서 궁극에는 우리 자신을 알아간다는 필연의 작업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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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8-05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유신론자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곡우님 글을 읽으니 더 와닿습니다. 존재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베르나르의 책은 접해 보지 못했는데 칼 세이건의 얘기와 더불어 곡우님의 리뷰만으로 그저 호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 수많은 종교와 신에 대하여 다 고민해 보고 이야기에 녹여낸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더운데 이런 좋은 공들인 리뷰를 읽고 가니 절로 시원해집니다.

穀雨(곡우) 2010-08-05 17:03   좋아요 0 | URL
제가 보기엔 베르나르는 천재입니다. 공통된 코드를 골라 붙이는 상상력도 대단하지만 방대한 분량을 하나의 줄기로 이어가는 그 치밀함이 더욱 대단합니다. 블랑카님께 조금이나마 청량감을 들였다니 기분 좋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