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10
재닛 윈터슨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을 때 인간은 더 없는 만족감을 향유한다. 태고적 신비가 진화라는 기억 속에 풀린 그 순간부터 사랑은 인간을 진화케 만들었다. 아마도 인간은 파충류의 냉혈동물에서 포유류의 온혈동물로 진화가 촉발되면서 사랑이라는 미묘한 화학작용을 잉태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통념 상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경계가 어디쯤인지는 부지불식간에 스며드는 빗물처럼 무의식의 영역에 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정상적인 인간의 삶을 산다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객체가 동성이 아닌 이성에 가 있어야 한다는 필연적 귀결에 빠진다. 그런데 만약 내가 이성이 아닌 동성을 연모하고 사랑한다면?

 

이처럼 인과율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상황은 음으로 양으로 생겨난다. 인간이 만든 제도의 통념이 허락을 하든 말든 반드시 생겨난다. 그렇다면 동성을 사랑하는 감정이 돌연변이에나 해당하는 비정상적인 감정의 변이일까? 동서고금을 통틀어 성 정체성에 대한 논란은 종종 암묵적으로 거론되며, 드러내 놓고 공론화하기에는 뜨거운 감자로 제도의 틀, 즉 경계 외부의 일로 치부되곤 했다. 비록 누군가의 아픔일지라도 제도에 흡수되지 못한 그들만의 아픔으로 외부적 압력에 의해 축소되기까지 했다.

 

문화가 성숙하고 인간의 관습이나 제도 또한 변화된 최근에는 그 사정이 달라졌다. 커밍아웃을 선언하며 공공연히 자신의 성 선택권에 대한 행복결정권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연애인에서부터 소리없이 자신의 성 혼란에 따른 부작용을 극복하는 단체까지 생겨났으니 말이다. 이 책 <오렌지만이 과일이 아니다>는 출간된 지 4반세기 정도 되었다. 한 소녀의 성 정체성을 사실적으로 그려 호평을 받은 책이다. 저자 지넷 윈터슨의 자전적 소설로도 유명한 이 책은 제2의 버지니아 울프로 추앙받을 만큼 문단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사실에 기반한 허구와 실제를 오가는 감정의 리터칭은 읽는 이의 마음을 공감으로 이끌어 낸다. 

 

저자 지넷은 작중 주인공인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만든 제도와 관습에 대해 심오한 물음을 던진다. 인간은 불투명한 미래를 극복하고 현실의 불안정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신에 기대고 종교에 심취한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 주는 외경심으로 인해 판단의 가치가 전도되는 경우도 자주 발견된다. 배척보다는 포용을, 갈등보다는 이해를 종교의 실제적 행위가치라면 이단과 비정상에 향하는 시선은 사뭇 다르다. 결국 저자 지넷이 이 책을 통해 무미건조할 만큼 담담히 그려 간 이야기의 중심은 관습과 미덕이 주는 경계의 속박에 가 다다른다.

 

이러한 저자의 속내가 이야기 곳곳에서 쉽게 모습을 드러낸다. 구약성서에서 따 온 전개방식, 책 속의 또 다른 액자형 이야기인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 그리고 위닛 스톤자와 마법사의 동화 등은 좀 처럼 보기 힘든 구성방식이다. 소통되지 못하는 폐쇄된 사회에 대한 작가 나름의 특이한 접근방식쯤이라고나 할까. 중심 축과 배치되는 갈등상황은 인간의 광기와 난폭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넷이 친구 멜라니를 사랑하면서 주류에서 밀려나고 배척당하는 상황을 여과없이 투영한다. 이러한 관습에 대한 도전 내지는 파괴의 객체로 몰리는 현상은 당시의 종교적 폐쇄성에서도 이유를 찾게 된다.

 

지넷이 친모에게서 버림받고 독실한 기독교 가정으로 입양되며 지넷의 양모가 광적일 정도로 삶을 지배당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은 저자가 문제시한 그 사회가 처한 문제의 출발선에 대한 줄긋기이다.  저자의 줄긋기 작업은 집단적 의식과 관습의 충돌에도 그어진다. 소규모 집단일수록 평범함이 오히려 비정상으로 취급받기도 하고 일반적 통념이 배척당하기 쉽다. 그것이 하나의 목적을 추구하는 집단일수록 더욱 취약하다. 이런 사회일수록 비정상적인 행동은 너대니얼 호손의 <주홍글씨>에서 본 혹독한 판단과 증오로 불타오른다.

 

따라서 집단적 무의식 상태나 다양성이 공존하기 힘든 상황에서의 미덕은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수동적인 자세에 국한된다. 지넷은 위닛 스톤자의 딸이 관습을 부정하며 신세계를 찾던 모험심에 경의를 표하며 현실에 맞선다. 이 책이 젊은 고전에 반열에 오른 이유는 다름 아닌 인간 본성의 내밀함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는 대담함이다. 타자에 대한 반목, 알력이 적절하게 뒤엉켜 인간 사회의 한 단면을 세밀하게 해부하였다는 것도 이유다.

 

또한 이 책의 제목인 오렌지는 상징적인 소재라는 것은 충분히 인식된다. 오렌지의 속살이 벗겨지고 울툴불퉁한 외피가 오롯이 말랑말랑한 내피로 탈피할 때 인간이 바라 본 표리부동한 현실과 조우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적 바탕은 저자가 목도하고 경험한 현실과의 합일된 소재로 부합한다. 오렌지가 주는 일반적 관념에 더해 다양한 과일이 존재하는 현실상황이 비주류로 밀려난 그들에 대한 포용력을 내심 바라는 의도된 장치다.

 

법이나 종교, 윤리, 제도 등은 항상 옳을 수는 없다. 인간이 가진 존엄성에 비한다면 하찮은 인간의 발명에 불과한 도구일 뿐이다. 만인에 대한 행복을 위해 소수의 행복을 져 버릴 수 없듯 우리 사회는 다양한 개성으로 뭉친 인간들이 공존한다.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기 이전에 모두 같은 인간임을 상기한다면 관점에 따라 그 경계나 틀도 변화될 것이다. 이처럼 지넷 윈터슨이 쓴 이 책 <오렌지만이 과일이 아니다>는 제목이 주는 독특함 만큼 생각의 알맹이를 다량 함유하고 있는 잘 만들어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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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0-01-20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쓰는 님 눈여겨 보고 있어요. 오렌지만이 결코 과일이 아니죠.
김조광수 감독의 친구사이 보고 싶은데, 가까운 도시 아트홀에는 벌써 내린 것 같아요.

穀雨(곡우) 2010-01-21 08:52   좋아요 0 | URL
꾸준히 다녀 가는 분들이 계신다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지켜 보고 계신 줄 몰랐네요.
부족한 글, 좋게 봐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예산 노개런티 영화는 가뜩이나 설 곳이 없는 것 같아요. 교차상영의 덫에
막대한 배급사도 기우뚱하는 형편이니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