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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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독특한 취향의 유머리스트라니!!

성호와 강지민이 우리의 단골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은은한 촛불의 울타리 안에서 그녀는 성호를 바라보며 나른하게 웃었다. 몸을 돌려 덜컹거리는 철제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강지민이 나를 설핏 본 것도 같았다. 나는 <태>에 다른사람을 데려온 적이 없었다. 밀약 같은 건 없었지만, 둘만의 아지트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성호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강지민이 내가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서 성호를 채워줬다면훨씬 견디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와 성호의 교집합부분만을 잠식해 들어왔다. 친구가 아닌 연인으로서. - P92

네가 왜애? 어젯밤 이 대답을가장 고심해서 갔다.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내가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눈치챌 수 있는 대답, 수치심을 걷어내고 제안을 수락하면서도 자괴감은 남겨두게 만드는 대답. - P94

솔직히 내가 다른 누군가로 변한다는 환상은 매혹적이잖아요. 선생님도 가끔 꿈꿔보지 않나요? - P121

혹자는 말한다. 과거 특정 시점의 현상을 현재의 세계관으로 판단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 P164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상자가 열린 이후 인간들은 순수한 선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이것은 베이징 나비의 날갯짓처럼 전혀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했으니, 신들의 사회에 구조 조정의 칼바람이 몰아친 것이다. 인간들은 점차 강력한 리더십으로 자신들을 이끌어줄 완벽하게 선한 신을 원했다. 신이라면 모름지기유한한 삶을 넘어설 수 있는 영원의 비전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신성한 빛으로 둘러싸인 절대자, 지상의악을 소탕하는 정의의 사도, 신축 중인 천국 아파트 분양권을독점한 존재. 그런 신이 있을 턱이 있나. 그러나 인간들은 가끔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뚝심을 보여준다. 마치 오만 신들을 원심분리기에 집어넣고 엑기스를 뽑아낸 듯한, 순도 99.9%의 순결한 신들이 탄생했다. 태생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이들은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세력을 넓혀갔다. 바야흐로 글로벌 경영을 추구하는 무한 경쟁의 시대가 왔건만, 철밥통을 꿰차고 있던올림포스 신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했다. 1차 정리해고 대상자였던 디오니소스에게 당시 상황에 대해들어보자.

디오니소스 (술의 신, 제우스와 세멜레의 아들)
그게 무슨 신이야, 사이보그지. 감정도 없는 사이보그, 어디서 근본도 없는 것들이 튀어나와 나대는데 말이야, 정말 같잖아서……… 그래도 나는 오픈 마인드를 가진 신이야. 하루는 아후 - P174

정말 미쳤나 봐, 그 사이코를 …… 그 사이코는 영문과조교라고 했다. 교수들에게 아부로 붙어살면서 학생들에게는성깔 더럽고 인정머리 없기로 악명이 자자하다는 설명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추한 것을 미워하지. 그러니 어떤 생명체보다도 추한 내가 얼마나 혐오스러울까! 그대, 나의 창조자여,
하물며 당신까지도 자신의 피조물인 나를 혐오하고 멸시하고있소. 그래도 그대와 나는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풀릴 끈으로묶여 있소. (……] 삶은 비록 고뇌 덩어리라고 해도 내겐 소중한 것이오. 그러니 난 삶을 지킬 것이오. 명심하시오. 당신은나를 당신 자신보다 더 강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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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빛
백수린 지음 / 창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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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천년을 사는 방법이 있다고. 독서라는.... 삶의 다양한 이면들을 여러각도로 보는 기회라고...
읽을 때는 잘 몰랐는데 노트를 정리하니까 좀 더 진하고 묵직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당장 따라가지 못하는 수업을, 끝내지 못한 과제를, 마칠 수 없을 것 같은 논문을 걱정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들은 언제나 내게 그렇게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 앞에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안달하는은 언제나 창피하고 조금쯤 비참했다. - P22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쉽게 우연에서 어떤 계시의 흔적을 찾고 싶어하는 법이다. - P70

오빠는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아야 해, 하고 내게 말했다. 네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우리 때와 달라. 그렇게도 말했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경쟁에서살아남을 수 있어. 오빠는 아무것도 몰랐다. 오빠는 정말 그렇게 믿는 것 같았다. 열심히 하면 된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오빠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오빠는 열심히 해도 아무것도 되지 않는 세상을 아직 살아보지 못했던 거니까. - P79

교수들도 포기한 원서 독해를 추구하는 선배의 열정은 무모해 보였다. 처음에는 스무명쯤에 달했던 스터디의 인원이 줄고 줄고 줄어서 한 학기 만에 열명도 채 남지 않았다. 그중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별히 러시아어에 열정이 있었던것은 아니었다. 씨를 뿌렸으면 거둬야 한다는 부모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온 19년 동안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결과였다고나 할까. - P109

이해는 했지만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무례가 난무하는 시절이라지만 기분이 상했다. - P127

나는 죽음이 슬픈 이유는 잊히기 때문이 아니라 대체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배웠다. - P128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번번이 괴로워졌으므로 나는 그때마다 이렇게 되어버린 것은 그저 세상의 이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어쩐지 변명 같았고, 그래서 결국은 씁쓸한 기분이 되고 말았지만. - P148

적어도 그때까지는,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나의 무심함으로 인해 지켜내지 못한 모든 것들을 생각했다. 눈부시도록 찬란한 햇살이 우리가 타고 있는 차를 부드러운 파도처럼 집어삼켰다. - P273

삶에 생로병사가 있듯 사람 간의 관계에도 생로병사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은 한때 내게 위로가 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을 처음 한 사람은, 모든 관계가 생로병사를 겪으며 자연사하는 것이 아님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나는 지척에서 우리에게 닿을 것처럼, 닿을 것처럼, 밀려왔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사고사로 끝나는 수많은 관계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기습적으로, 불시에, 사멸하는 관계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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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랄프 로렌
손보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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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허구이지만, 누구에게나 익숙한 사실과 그럴싸한 거짓말이 범벅이 된 난장판이라면 그건 그냥 독자를 기만하려는 허위일 뿐이다. 대체 그럴싸한 허구를 지어내기 위해 그 많은 허구의 인물들과 인터뷰, 저작물을 창조해 내다니, 이 작가는 기자가 되지 못한 한을 소설로 풀어보려는 심산인가.
영화감독 장 자크 밀레노를 열심히 찾아본 멍청한 독자가 나만은 아니길.....(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필모그래피까지 다 찾아본 나는 정말 두서없이 앞서가는 멍청이였다.)
그래, 화자가 거짓말쟁이였으니 이 소설의 주제는 그냥 미천한 구라다.

믿을 수 없는 진실을 주제로 담기위해 직설적으로 믿을 만하지 못한 인물들을 나열하고 화자가 지속적으로 거짓말을 써내는 단순성이 문학적인 가치가 있나? 정말 최악이다.

젊은 여성작가가 남성에 빙의해 화자가 되어보려한 시도도 정말 역부족이지 않았나 싶다. 남성작가가 여성화자로 소설을 쓸 때 여성독자들도 이런 이질감을 느끼나. ‘종수’라는 남자 이름의 여성화자라 생각하고 초반부를 읽어갔다. 그러다 화자가 명백하게 남자라는 걸 알게됐고, 이 감정선은 도저히 남자라고는, 심지어 여성성 충만한 감성적인 남성이라고 해도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찌질함’때문에 소설이 너무 거북해졌다.

재미는 너무 당연하게 없다. 중심을 잃고 마치 실존인물인냥 등장하는 어중이 떠중이들이 뒤섞여 있다가 그냥 이건 구라니까 결말도 구라처럼 끝내버리자는 나름 철저한 계산과 의도가 담겨있는 듯 하다.

어째서 그런 식의 논리가 성립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대부분의 선생님들은 그러한 엄격함의 기본은 복장 단속에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겉모습에 신경쓰는 것을 막으면 모든 관심이 자연스럽게 공부 쪽으로 흐를 것이라는 명제‘가 있었다. 또한거기에 덧붙여 교복을 단정하게 입으면 입을수록 정신 상태가 좋은것이라는 ‘이론‘도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또다른 온갖 ‘이론‘이 있었다(저 모범생 좀 봐라, 얼마나 단정하게 교복을 입었니? 혹은, 저따위로 꾸미고 다니는데 무슨 공부람! 또는, 쯧쯧쯧……). - P52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내가 세상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단 한 가지가 있었다면, 그건 나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을 사방팔방 알려야 하는 그 순간이었으니까. - P89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글자로 기록하면서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아주 조그마한 실마리라도 발견하게 되기를 아주 순수한 마음으로 바랐다. 그 당시 내가 세웠던 원칙 가운데 하나는그들이 해준 이야기 중 랄프 로렌(티모시)과 조셉 프랭클에 관련된내용만 기록해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 각각의 기억들은 지극히제한적이어서 때때로 정면으로 배치되고 모순되고, 순수하게 말이안 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는 그러한 어긋남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나중에 들음으로써 그들이 혼란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이야기를 시작한 이후에야, 자신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풍부하고 생생한 기억의 토막들이, 언어화되는 동안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순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마치 안개 속을 더듬거리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워진다. 그렇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방금 전까지의 머뭇거림이 무색할 정도로 이야기에 탄력이 붙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용케도 그 시절의 자기 자신을 끄집어낸다. - P151

"세상에, 당신, 동양인이었어요?"
그녀는 내 이름 같은 건 주의깊게 듣지도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야나는 그게 그녀의 성격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매사 그런 식이었는데, 남의 말을 귀기울여 듣지 않을 때가 많았고, 말을 함부로 했으며, 단정짓는 걸 좋아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이런 식으로이야기했다. "직설적인 면이 있지만, 활달하고 대범하며 맺힌 곳이없죠." 그녀는 마치 국가공인이라도 받은 사실인 양 이야기했는데 나는 아무런 반박도 못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중에 나는 그 말에 완전히 동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기적이고 독단적인면이 있어요. 정말 싫은 면이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랄한 평가에 오히려 내 쪽에서 그녀에 대한 변명을 할라치면 그녀는 내 말을 끊고 이렇게 말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어요." - P154

이미 조셉 프랭클이 예순 살을 넘은 시점부터 권투장의 젊은이들은 조셉 프랭클과 함께 링에 서는 걸 꺼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링 위에서가 아니라면 권투장의 젊은이들도 조셉 프랭클을 좋아했다. 아니, 좋아할 이유는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조셉 프랭클을 싫어하거나피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젊은이들의 삶에 섣부른 참견이나 충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그가 그만큼 지혜로워서였다기보다는 그가 타인의 삶을 문자 그대로 타인의 삶으로 받아들였기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링 위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 P215

나는 그녀의 편견에 기겁했지만, 그런 이야기를 아무 거리낌도 없이 하다니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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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한숨 - 내가 경험한 중국, 문학, 그리고 글쓰기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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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라는 나라의 특수성, 그 수긍하기 힘든 수준의 특이한 행동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중국소설을 읽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다. 중국 소설을 보통의 사람들보다 조금 더 접해본 나는 그들이 사고하는 방식의 기저에 깔려있는 공산주의, 문화대혁명, 정치적 체제와는 무관하게 기형적으로 성장한 경제를 체험하며 굳어진 사고방식 등을 알아가면서, 그러한 양립할 수 없을것 같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만들어내는 중국식의 행위를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
옌롄커라는 작가가 교보에서 강연했던 ‘침묵과 한숨‘의 같은 타이틀을 가지고 책이 출판되었을 때, 2019년의 그 강연에 참석했던 나로써 이 책은 당연히 열독해보고 싶은 책이었다. 강연에서 작가가 수차례 강조했던 자신의 ‘유약함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으로 이해하고공감할 수 있을 것이고, 좀 더 다양한 작가의 관점과 의견을 들어볼 수 있을테니까.
옌롄커에 대해 중국인 중에 의식이 깨어있는 지식인이라는 수식어는 중국에 대한 실례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옌롄커가 묘사하는 중국인과, 내가 체감하는 한국인의 모습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우리가 표면적으로 좀 더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다라는점과, 사회적으로 용인되거나, 혹은 그러지 못한 세속적으로 합의된 품위가 있을 뿐, 인간의심리라는 것이, 본성이라는 것이 지역과 나라마다 크게 다를 것이 없으니까.
작가가 경험한 중국이라지만, 몇 개의 사상적인 부분, 숨기고 싶은 굵직한 사건 사고, 힘의 논리를 한국에 맞춰 각색을 한다면 어느 한국인이 경험한 한국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이건 중국에 대한 중국 지식인의 이야기이다. 한국의 모습도 빤하게 보였지만, 중국에대해서 좀 더 쉽게 이해하여 공감할 수 있는 책이다.

이리하여 나는 너무나 일찍 어둠을 이해하게 되었다. 캄캄한 어둠은 일종의 색깔이 아니라 삶 자체였다. 중국인들의 피할 수 없는운명이자 운명을 받아들이는 방법이었다. - P17

글쓰기가 존재하는 의미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존재를 피하게 하는 것이다. 나와 나의 글쓰기는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켜던 그 맹인처럼 어둠 속을 걸으면서 그 유한한 불빛으로 어둠을비춰 사람들로 하여금 최대한 어둠을 보고서 확실한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빛나거나 피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 P22

그리고 기억상실에는 ‘현실과 역사에 대한 선택적 포기와 잔존’이 포함된다. 심지어 ‘기억에 대한 오늘날의새로운 창조’도 포함된다. 그렇다. 바로 이런 기억상실의 상황이 오늘의 중국에서 한 세대의 아이들을 기억의 식물인간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역사와 현실, 과거와 오늘이 전부 기억상실의 상태에 처해 있다. 한 세대 사람들에 의해 깨끗하고 가지런하게, 애써 흔적을남기지 않는 방식으로 망각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기억과 망각, 진실과 기억상실이 매일 관심의 대상이 되는 언어와 문자, 두뇌 속에서 충돌과 투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는 줄곧 역사와 인류의 기억이 결국에는 일시적인 망각을 제압하고 양심과 진실로 돌아오게 된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정반대였다. 오늘의 중국에서는 망각이 기억을 이기고, 허위가 진실을 이기면서 억지로 역사와 논리가 연결되는 사슬과 접합부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하여 방금 어떤 일이 발생하는 것을 목격했는데도 그 일은 놀라운 속도로 선택적인포기와 망각을 거치면서 진위를 구별할 수 없는 파편만 남아, 사회와 생활 그리고 사람들의 머릿속을 떠돌게 된다. - P33

"내가 말을 할 수 없다면 항상 침묵하고 있을 수도 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는 모르지만 무슨 말을 하면 안 되는지는 안다." - P38

우리는 이따금 "침묵은 일종의 소리 없는 반항이다"라면서 침묵에 대해 고상한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침묵은 어디까지나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고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으면 정말로 벙어리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침묵이 오래 지속되면묵인이나 인정이 혈루에 스며들어 습관이 되기 쉽고, 이것이 기억상실이라는 국가의 악랄한 조치의 조력자가 될 수 있으며, 강제로 기억을 상실하게 만드는 사람들의 동조자나 지지자가 될 수 있다. 묵인하다보면 인민 전체가 기억상실의 늪에 빠지게 된다. 이는 어느한 국가의 독특한 특징도 아니고 고유한 현상도 아니다. 세계의 모든 독재 및 권력 집중 국가 혹은 권력이 집중된 역사의 단계에서는이처럼 밧줄과 쇠사슬로 언어에 대한 통제와 억압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기억이 양호한 지식인들은 우선 침묵과 기억상실의 상태에 몰리며, 점차 집중된 권력에 의해 통치되고 구금되는 시간 속에서 기억상실을 민간과 사회 기층, 백성의 생활로 확대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의 현실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 다음에야 이런 강제적 기억상실의 대업이 막을 내리게 된다.
역사가 아주 완벽하고 아름답게 다시 쓰이게 되는 것이다. - P39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이 발생했던 나라에서는 사람과 아이들 모두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경제와 강대해져가는 국력에 대한 들뜬 환호 속에서 이런 일을 낯설게 여기면서 점차 망각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기억이 수많은 목격자에게는 다른 세상의 몽경을 본 것이나 다름없었다. 용솟음치는 뜨거운 피를 주체하지 못해 현장에 참여했던 당시의 젊은이들도 지금은 인생에 성공하거나실패한 중년이 되어 그때의 일을 어리석음‘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하고 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자조와 기억상실에 대한 만족이이미 개인의 운명과 집단의 기억,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처절하고 치열했던 고통의 상처를 단절시키거나 덮어버린 것이다. - P37

유럽 문학 가운데 의식의 흐름 소설과 프랑스의 누보로망은 중국 작가와 독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때문에 오히려 비판은 더 어렵고 예찬은 더 쉬웠다. 우리 앞에 유명브랜드의 값비싼 명품 의류가 놓여 있지만 이를 입으면 몸에 어울리지 않고 쾌적하지도 않거나 아예 맞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명품이라는 이유만으로 몸에 걸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외래사조에 대해 중국 작가와 독자들은 감히 아니다라는 가치 판단과의사 표현을 하지 못했고 할 능력도 없었다. - P84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와 지역에서 사람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만드는 가장 통속적인 질문이 하나 있다. 어머니와 아내가 동시에 격류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고, 그중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다면 누구를 먼저 구하겠는가 하는 양자택일의 곤경이다. 이런 질의를 던지는 사람은 사전에 미리 도덕적 함정을 파놓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내를 먼저 구하든 어머니를 먼저 구하는 답변하는 사람은 도덕의 타액 속에 엄몰되고 만다. - P127

작가가 현실에 기초하여 가장 진실하게 인간의가장 깊이 있는 영혼을 묘사하는 것은 원래 하늘과 땅의 가장 본질적인 원리에 관한 일이자 신이 작가에게 부여한 책임이자 의무다.
이 점을 포기한다며 작가는 존재의 필요성을 잃게 된다. - P172

이런 일들을 통해 내게 처음으로 권력을 느끼게 한 것은 권력 자체뿐만 아니라 타인의 운명을 장악할 수 있는 마법의 지팡이와 힘이었다. 바로 그때부터 나는 권력에 대한 일종의 미혹을 느꼈고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 P201

이것이 바로 권력이다. 이것이 바로 권력의 필연적인 존재로부터나오는 두려움이다!
권력에는 사람과 사람의 운명에 대해 마음대로, 편의대로 바꾸고변화시킬 수 있는 거대한 마력魔力이 담겨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마력에 무한히 미혹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를 무한히 두려워한다. - P206

물론 우리는 깨어 있어 마오쩌둥 연설의 필사를 거부한 사람들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좀더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쉽게 필사에 나섰던 사람들도 이해해야 한다. 그들이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세속을 인정하고 존엄이 없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격이 아닌 권력에서 존엄을 얻고자 하는 작가들이다. 중국 작가들이 존엄을 지닌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속적인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세속적인 삶을 인정하려면 또 반드시 체제와 권력에 가까이 다가가고 의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많든 적든 권력과 명예를 지녀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 작가들이 필연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노선이다. - P272

물론 사람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붙잡을지는 대부분 어떤 한 가지 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기보다는 종종 수많은 일의 축적에 의해 이루어진다. 어떤 사건이 갑자기 발생한 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수많은 포기와 집착이 축적되어 일정한 시기에 이르러 하나의 도화선이 된 것일 뿐이다. 내가 젊었을 때 덮어놓고 돈과 명리, 권력을 추구하거나포기했던 것도 내 생활 속에서 일어난 무수한 일이 축적된 결과였다.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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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고 차가운 오늘의 젊은 작가 2
오현종 지음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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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지 않은 입시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고 싶지 않았는지 소설 초반에는 집중을 하지 못했다. 그냥 저냥 다른 계층의 두 어린 소년 소녀가 만나 서로의 불행을 비교하며 위로하다 계층의 화합이 이루어지는 연애소설이구나 싶었는데...

이런 반전 통속적이지 않아 좋다.
기대감을 쪼그라들게 했다 후반부에 몰아치는 박진감이라니.

세개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악과 한개의 숨어있는 악에관한 해설도 좋았다. (사실 초반에 너무 집중을 못한 탓에 그 상징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악을 없앨 방법은 악밖에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이 선과 악이라면 선은 우리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고 모든 것은 결국 악으로 귀결되니까....

잠시도 자신을 편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 인생이 과연 행복한지, 누나가 생각하는 행복이 엄마가 말하는 성공과 같은 주머니에 들어 있는지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 P109

그때의 나는 어른이 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아이였다. 어른이 된다는 게 이렇게 끔찍한일인 줄 몰랐다. 단지 달콤한 것, 부드러운 것을 알고 싶었다. 부드러운 것을 쓰다듬고, 부드러운 것을 이로 물고, 부드러운것의 속삭임을 듣고 싶었다. 부드러운 것을 아는 게 죄가 될수 있다는 진실을 몰랐다. - P160

나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모진 운명이 사람을 모질게 변화시킨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내 운명을 더 이상 손해 보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이 되어야 했다. 쉽게 보여도 안 되고, 쉽게 당해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 P165

"이봐, 열쇠를 내가 쥐고 있잖아. 그런데도 이렇게 싸가지없이 말하면 돼, 안 돼, 엉? 아쉬운 거 없이 살아서 나오는 대로 입을 놀리나? 아쉬운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란 말이지. 그리고 뭐가 더러워? 커피 봉지가 더러워, 아니면 머리에 피도안 마른 주제에 이런 데 드나드는 놈이 더러워?"
......
이런 데나 드나드는 놈이 더러워, 라는 말에 화가 치밀었어야 옳은데, 도리어 속이 시원했다. 그말이 맞았다. 나는 더러운 놈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런 데 돈을 갖다 바치면서 쫓는 배신자는 나보다 더 더러운 년이었다.
하지만 내가 한 짓을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을 해야 하나. 나는 어째서 이렇게 분하고 억울한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 P166

저번에도 내가 말했지. 분노로 얻을 건 개똥도 없다고. - P167

"잘 지냈어?"
신혜가 반쯤 숙이고 있던 머리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에게 한다는 말이, 뉴욕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침사추이로 찾아온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이건가. 안 된다.
너는 벌을 받기보다 먼저 너의 죄를 고백하고 변명하고 사과해야 한다. 이마를 땅에 짓찧으며 잘못을 빌어야 한다. 그 전에는 벌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물론, 용서는 뒤따르지 않을 것이다. 용서는 필수가 아닌 선택의 문제이므로. - P171

그런데 죄인이 되는 것보다 이런 결말이내겐 더 절망스럽단 거 알아? 나는 죄인 아니라 악마도 될 수있어. - P173

"입 닥쳐! 너는 착각하고 있는 거야. 아버지를 사랑했다고?
너는 너 자신까지 완전히 속여 온 거야. 그렇게 믿지 않으면살 수 없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믿은 것뿐이야! 견딜 수 없으니까!"
......
"내가 아니어도 그랬을 거잖아. 넌 누구라도 죽이고 싶었잖아. 그랬잖아." - P175

"그게 아니면 네가 봐야 할 지옥이 남아 있기 때문일 테고." - P177

그래, 누구나 자신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 때문에 운다. 나를 위해 울어 주지 않는다고 비난할 수는 없겠지. 울음소리가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나만은 아니라는 위안, 그것에 기대어. - P179

"믿음이 지나치면 그것도 지옥이 되더라고."
나는 조금 더 빈정거려 주지 못해 아쉬웠다. - P180

신혜가 나를 부러워하던 그때 나는 더없이 불행했다는 걸, 그런 아침마다 나 역시 죽음을 상상했다는 걸알았더라면, 그녀는 덜 불행했을까.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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