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싱의 후기 단편들을 먼저 접하고 나서 느낀 점은 레싱의 작품은 조금 난해한 기분을 가져다주는 소설이라는 거였다. 때문에 그녀의 장편을 읽는다는 것은 좀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그렇게 막연한 마음으로 시작한 소설이었는데 1장에서부터 소설의 결말을 보여주며 궁금증을 자아내어 사건에 빠져들게 하더니, 그 몰입감을 타고 작품에 열광하면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 이 장편이 그녀의 데뷔작이라니, 글을 쓰는 능력은 타고났나 보다.

메리와 모세의 성적인 상황을 상상하게 하는 글의 분위기가 아주 절묘하게 갈등관계에 가려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뒷면 해설에서 관련된 함축된 의미의 설명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없어서 끝내 혼자만의 의문으로 남고 말았다. 토니의 의심도 둘 간의 정사를 암시하고, 모세에게 살인의 충동까지 일게 할 동기가 메리와의 치정말고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는 듯 하다.

메리가 농장에서 표독스럽게 남발하는 권력을 통해 희열을 느끼는 것을 보며 군림하는 자세에 대한 (나 자신의) 성찰해보는 계기도 있었다. 사소하지만 각자 자신들에게 쥐어져 있는 요망한 권력을 행사하며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있다는 만족감의 실체를 메리를 통해 제3자의 입장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어 불편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큰 주제와 관련된 일이겠지만 인종의 문제, 성별의 문제, 계급의 문제에서 연장되어 작금의 계약관계에서 재현되고 있는 인간의 더러운 본성을 항상 억눌러야 한다는 의무감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 소설은 부끄러워해야 할 과거사들을 총망라한다. 식민지, 인종차별, 성차별, 조금 더 큰 맥락에서는 멀어져 보이지만 천박한 자본주의와 자연파괴, 더불어 이제는 새롭지도 않은 가부장들의 지리멸렬한 군상까지 고발하는 주제들. 기억하고 반성해야 할 역사들이 기록되어 있고 재미까지 갖추고 있는 문학작품을 읽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옆모습을 계속 바라보면서, 아무리 평범하고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여인일지라도 조명을 받으면 환상적이고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 리처드는 그녀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누군가를 사랑해야 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를 깨닫지 못했지만 이제는 상황이달라졌던 것이다. 그날 밤에 그녀 곁을 떠나며 곧 다시 만나러오겠다고 작별 인사를 할 때도 리처드는 섭섭한 마음을 금할길이 없었다. - P81

그녀는 원주민 우두머리를 통하지 않고 냉랭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직접말하면서, 그들의 생각이 무엇이 잘못되었고 자신의 처사가 왜합당한지에 대해 아주 논리적으로 설명해 나갔다.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백인들이 으레 그렇듯이 노동의 신성함에 대해서 짤막하게 훈계하면서 말을 끝맺으려 했다. 그녀는 일 그 자체를사랑하여 일을 하고 난 다음에 받는 돈 따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고 감독하는 사람이 없어도 일 그 자체를 위해서 일하게 될 때까지는 원주민의 생활이 나아질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그녀는 카피르어와 영어를 섞어 가며 말했는데, 토속 부락에서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원주민들은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백인을오늘날과 같은 백인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일에 대한 그러한 태도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백인이 일을 하는 것은 노동 그 자체가 신성하고 좋은 것이기 때문이며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할때 인간의 가치가 나타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러한 짤막한 훈계는 그녀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왔다. 일부러 생각해서 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흑인 하인들에게 훈계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는데 그때의 기억으로 별 어려움 없이 이야기를 풀어 나갈 수 있었다. - P199

한번은 전쟁에 관해서였다.
"부인은 곧 끝날 거라고 생각하나요?"
메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주간지조차 읽지 않으면서모든 것과 단절된 채 지내는 그녀에게 전쟁은 다른 세상에서일어난 루머에 불과했다. 그러나 메리는 주방 탁자 위에 깔려있는 낡은 신문을 모세가 열심히 읽는 걸 여러 차례 보았다.
그녀는 딱딱하게 모르겠다고 대꾸했다. 그 후 며칠 뒤, 그는 줄곧 생각해 왔다는 듯 다시 질문을 해 왔다.
"예수는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걸 옳다고 생각했나요?"
이번에는 그 질문에 함축된 비난 때문에 화가 났다. 그래서예수는 착한 사람 편이라고 냉랭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날하루 종일 예전처럼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으며, 마침내는 저녁 때 리처드에게 물어보았다.
"모세는 어디 출신이에요?"
"선교사 밑에 있었대. 그래도 제일 고상한 녀석이오."
남아프리카 백인들 대부분이 그렇듯 리처드도 교회 출신 원주민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너무 많이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경우야 어떻든 깜둥이들한테 읽고 쓰는 걸 가르쳐 주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그저 노동의 신성함과 백인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라고만 가르쳐 주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 P266

필요에 의해서건 선택에 의해서건 이웃 때문에 번거로움을겪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왈가왈부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면 마음이 편치못하고 기분이 몹시 언짢은 법이다. 마치 잠을 자던 사람이 깨어나 보니 침대 주위에서 낯선 사람들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지역의 주민이나 일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달나라에서 사는 셈이었던 리처드와 메리 부부가 자신들이 오래전부터 근방 농부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신세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부부의 이름 정도만 알거나,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도슬래터 부부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마치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들처럼 그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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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altine 2022-03-25 0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3번째 단락이 너무 좋네요. 저도 얼마 전 이 책을 재밌게 읽었는데요, 마음속으로는 막연히 느끼겠는데 언어로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던 것들이 님의 글을 읽으니 확 와닿네요.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