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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 월급사실주의 2025 ㅣ 월급사실주의
김동식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5월
평점 :
자극적인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아 크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쌀먹부터 새로운 용어가 흥미를 붙이게 해줬고, 스스로 반성해 볼 주제를 담고 있는 단편들도 많았다. 계속 읽어볼 생각이다.
<올바른 크리스마스>
호주에서 대형마트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가는 주미는 자신의 역량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자신과 달리, 남자친구 애런은 높은 직급에 올라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 주미는 자신이 마트 모델에 발탁되어 매니저가 될 기대에 차있지만 본사의 다양성 존중 이미지 제고에 이용당한 것을 알게되고, 매니저 승진의 영광은 원주민 고용 의무를 무기로 삼아 근무 태만을 일삼는 빌리에게 돌아간다.
<아무 사이>
어르신 시터인 희지는 시터닷컴의 베스트 시터로 손꼽힌다. 항상 신규 시터들에게 자신의 책임과 사명감을 고취시키는 강연을 하지만 자신의 처우가 정말 정당한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있다. 고양이 키우다 들켜 퇴거명령을 한 집주인과 연락을 시도하려다 돌보고 있는 할머니가 사라지자 밖으로 사방팔방 할머니를 찾아 헤매지만 할머니는 찾지 못하고, 가족들에게 둘러댈 거짓말만 궁리해 낸다. 결국 딸한테 온 전화에 할머니와 같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지만 딸은 할머니와 같이 있었다. 할머니가 두고 간 핸드폰에 자신의 이름이 ‘아줌마‘가 아닌 희지로 등록되어 있는 것을 본다.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시각장애인 안마사가 계약직을 전전하며 정규직 비장애인 노동자와 대립하고 갈등을 겪는 소설인데 제목이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니라는 게 좀 무엇을 함의하는지 잘 모르겠다.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청소부 노약자에게 차별을 당하고,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정규직 백화점 노동자에게 차별을 당하지만, 규정 위반의 근무를 강요하는 인사과장에게 노동부와 장애인고용공단 신고 카드를 꺼내자 통쾌하게도 태세가 전환된다. 그리고 그들 전부 다 일은 하기 싫다라는 자세만큼은 한결같다.
<일괄 비일괄>
과거 전환이 쉽지 않았던 때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선미는 노부장에게 최근 정책 때문에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일괄 전환된 후배들의 대표로 간주된다. 노부장은 계약직 차별과 이후 일괄 전환자들에 대한 차별을 일삼지만 사실 노부장은 계약직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일년 전 운이 좋게 상고 출신의 막차 정규직이었던 사람이다. 노부장은 후배들에게 대한 미안함 때문에 자발적으로 노예 근성을 보이며 회사에 충성하는 사축이었고, 선미는 자신 또한 정규직으로 전환된 ’행운’을 누렸다는 죄책감에 자신을 스스로 채찍질 하는 모습을 보며 노부장과 결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기획은 좋으나>
방송국놈들의 전형성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던 PD가 양심을 가진 후배 소연을 만나 자극적인 영상에 사람을 이용하던 관성에 제동이 걸린다. 실제로 선배들에게 일어날 수 없는 경우고, 소연이 계속 방송국에서 일을 한다는 것도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경우다. 사람은 변하지만 안좋게 바뀔 뿐이라는 현실 고증이 필요하다.
매니저 하기 싫어서. 승진하기 싫고, 책임지기 싫고, 더 오랜 시 간 일하기 싫어서. - P49
그러니까 나는 근성이랄 게 없이 삶을 지속해나갔다. 하지만 삶 은 어느 기점 이후로 버티기만 해서는 되는 것이 아니었다. 미래 를 도모하고 계획하고 운용하는 식이어야만 했다. 그러려면 아무 려나 좋다는 식이어서는 안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러니까 그나마 정을 붙이고 해나갈 수 있는 일이 필요했다. - P89
어떤 말들은 오히려 입 밖에 냄으로써 스스로 그것을 진심으로 믿게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전까지 의문으로 남아 있던 것들이 오 히려 발화를 통해 명백해져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나의 명백한 진심인 것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내가 뱉었던 그 말을 복기하며 언덕을 미친듯이 뛰어내려가고 있었다. - P90
하지만 내가 느끼는 이 이상한 기분, 모멸감 같은 것 들은 도대체 어떤 회로를 거쳐야 다스릴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모 든 일에 진심을 다했지만 그럼으로써 깎이는 마음을 도로 채우는 법은 도무지 몰랐던 것 같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취약 한 부분을 너무도 쉽게 들키고야 말았다. 누구도 내게 그런 식으 로 말할 수 없도록 나를 지키는 건 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는데. - P101
"나도 마찬가지야. 노력한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 같아서 행복했어. 그런데 지선아, 나는 가끔 전환이니 일괄이니 하는 그 런 말 몇 마디가 내 인생을 망가뜨린 것처럼 느껴져." - P125
노부장은 자신이 상고 출신 중 마지막 정규직 세대라고 했다. 노부장이 어렸을 때는 정규직이니 비정규직이니 하는 개념 자체 가 없어서 합격하면 그냥 회사원이 되는 거였다. 하지만 비정규직 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일 년 후에 들어온 후배들은 일괄로 비정 규직이었다. 고작 일 년 차이로 똑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누군가는 정규직이고 누군가는 비정규직이었다. 노부장은 자신도 일 년만 늦게 태어났으면 정규직이 못 됐을 거라고 자조했다. 고 작 일 년 후배랑 자기랑 무슨 능력의 차이가 있었겠냐고. 그런 생 각을 하면 열심히 안 할 수가 없다고. 열심히 하고 또 열심히 해야 지, 안 그러면 그 후배들한테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 "지선아, 그거 알아? 나는 요즘 내가 노부장처럼 느껴져." - P127
별 시답잖은 질문을 다 하네•····•라는 말을 선배는 눈으 로 뱉고 있었다. - P139
당시 나는 회사와 육 개월 인턴 계약을 했고 이후 근무 평가를 거쳐 일 년을 연장해주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갑자기 현실 파악이 되며 내 처지가 자각되었다. 열정이 식어버린 자리에 이성이 들어 찼다. 이곳에서의 현명한 근로 방식은 적게 일하고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만 힘을 쓰는 것이다. 죽자고 주물러봤자 월급 한푼 늘 어날 일 없다. 직업적 성취감 같은 건 고용인이 만들어낸 사탕발 림이다. 어차피 나는 계약직이다. 이 년 후면 바꿔치기당할 소모품. 그뿐이다. - P166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직접 하는 게 속 편하다 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나중에 치르는 값에는 이자가 붙었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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