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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번역의 말들 - 읽는 사람을 위한 번역 이야깃거리 ㅣ 문장 시리즈
김택규 지음 / 유유 / 2022년 12월
평점 :
에세이는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를 주제로 한 책을 읽어야 재밌나 보다.
평소 번역서를 읽으면서 터졌던 분노들이 이제는 좀 사그라 들 것 같다.
번역이 원작과의 유사성을 그것의 마지막 본질에 따라 추구할 경우 어떠한 번역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이 입증될 수 있다. 왜냐하면 사후의 삶이라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의 변천과 새로워짐이 아니라면 그렇게 불릴 수도 없을 터인데, 그러한 사후의 삶 속에서 원작은 변화하기 때문이다. - P24
문화대혁명의 깊은 상처를 돌아보는 ‘상혼문학(문화대혁명의 상처를 되새기고 위로하는 문학 조류)‘ 계열에 속해 많은 이의 공감을 사기는 했다. 하지만 후대에 쓰인 문학사에서는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소설이 라기보다는 거의 수기에 가깝고 감정 노출이 너무 직접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첸 선생은 한 편의 논문을 발표해 자기 생각을 정리했다. 중국과 한국의 민중이 역사의 격랑을 넘고 나서 얻은 감정적 후유증이 「사람아 아, 사람아」에서 접점을 갖고 이어졌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그랬다. 「사람 아 아, 사람아」의 현생은 중국의 상흔문학이었지만 후생은 민주화 후 한국의 중국식 후일담문학 이었다. - P25
한국에 출판되는 당신의 소중한 책을(이제 제 책이기도 하지요) - P29
애초에 외국 저자가 자국 독자를 배려해 쓴 글을 가져와 국내 독자를 타깃으로 번역해 새로 내놓으려니 적절 한 외교술을 부리지 않을 수 없다. - P29
출판사들은 새로운 중국 소설을 원하지 않았다. 굴곡진 현대사를 헤쳐 온 민초의 이야기‘만을 바랐다. 왜? 독 자들이 중국 소설에서 기대하는 이야기가 그거였고 또 그런 독자들이 중국 소설을 읽는 고정층이었기 때문이 다. - P33
지금 이 시간에도 독자는 저자의 글을 마음속으로 번역하고 반장은 선생님의 전달 사항을 친구들에게 통역하 며 시민들은 정치인의 발언을 서로 다르게 번역해 옥신각신한다. 번역은 본질적으로 해석 행위이고 해석은 누 구에게나 열려 있기 때문이다. - P37
하지만 어디에나 괴짜는 있게 마련이어서 언젠가 외국어의 어순을 그대로 살려 번역해야 한다는 역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이미 몇 권의 번역서를 낸 사람이었지만 아마 그전에 출판사와 부단히 충돌했을 것이다. - P47
한국어의 순수성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고대에 수입한 한자에서 생성된 한자어가 사전 표제 어의 약 52퍼센트에 달하고 사회과학, 화학, 물리, 법학 등 각 학문 분야의 기본 술어가 대부분 근대 일본의 번역어이며 또 해방 이후에는 영어를 위시한 서구어에서 비롯된 외래어가 매일같이 탄생하고 있는데 무슨 ‘순 수성‘을 논하겠는가. 오히려 한국어는 다양한 외국어의 영향을 마치 용광로처럼 한데 녹여 무한히 변신해 왔 다고, 그만큼 유연하고 자유로운 언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한국어 고유의 특성을 저해하는 서툴고 비효율적인 언어습관은 경계한다. 한국어는 품사 중에 동사 와 부사가 명사와 형용사보다 비중이 커서 동적이고 구체적인 느낌이 강하다. 이를 유념하지 않으면 글을 쓰 든 번역을 하든 힘없고 추상적인 문장이 나온다. 소설에서 "빠르게 달려갔다"를 굳이 "빠른 속도를 유지했다" 라고 쓸 필요는 없지 않은가. 또 한국어는 시제 구분이 까다롭지 않은데도 대과거를 나타낸답시고 ‘했었었 다‘처럼 과거시제 선어말어미를 중복해 쓰고, 그의 마음의 상처‘처럼 관형격조사 ‘의‘를 연달아 쓰곤 하는데, 모두 어색하기 그지없다. - P67
그런데도 대부분의 독자는 ‘잘된 번역서‘를 몰입해 읽을 때 번역가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다. 원저자의 목소리 가 투명하게 자기 귀에 직접 와닿는다고 느낀다. 이것은 재현에 대한 얼마나 낭만적인 환상인가. - P73
어렵지만 의미심장한 책을 가방에 한두 달씩 넣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조금씩 곱씹어 읽는 독자는 거의 소멸 했다. 대신 일상을 마무리하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머리를 식힐 용도로 책을 꺼내 드는 독자가 상대적으 로 많아졌다. 이런 까닭에 이 시대의 출판업자들은 어쩔 수 없이 가볍고 매끄러운 책을, 디자인은 앙증맞고 불 편한 주제는 피해 가는 범용성 책을 더 많이 내게 된다. 사실 누구나 읽을 만한 책은 누구나 꼭 읽을 필요는 없 는데 말이다. - P75
작가는 진공 속에서 글을 쓰지 않는다. 그는 특정 문화의 산물이다. 특정 시대에 속하여 글에 종족, 성별, 연 령, 계급, 출생지 등의 요소가 반영되고 개인적 문체와 습관의 특징도 나타난다. - P126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경지의 텍스트를 찾아 번역하고 싶어요 - P137
10년 만에 시 쓰기를 그만둘 때 나는 의외로 기분이 담담했다. 그 10년은 사실 재능 없음에 대한 끈질긴 부정 과 확인의 세월이었다. 할 만큼 했고 이제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오랜 의지를 대체할 새로운 의지가 필요했고 그때 마침 나는 생계형 번역가로 첫걸음을 뗀 상태였다. ‘아무에게도 충격을 못 줄 작품을 쓰느니 누군가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작품을 번역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내 문학 기획과 번역은 이때 시작되었다. - P149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 출간되는 문학작품의 성패는 거의 전적으로 현지 번역가의 역량에 달렸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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