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나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심리 수업
테리 앱터 지음, 최윤영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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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기쁨 중 하나로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해방되는 것을 꼽는다. 하지만 이 같은평정심과 자신감은 엄청난 노력을 통해서만 획득할수 있다. 이른바 ‘중년의 위기‘에 관해 연구할 당시 나는 이러한 성인기의 발달이 확고한 의지, 즉 다른 사람의 칭찬과 비난에 쉽게 흔들리지 않으려 노력함으로써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고 스스로의 판단을 보다 신뢰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통해 이뤄진다는것을 알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이 합당한 이유에서도출된 것이라고 믿지만, 실제로 이 같은 믿음에는 별다른 근거가 없다. 오히려 우리의 판단에는 편향적 직관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자신의 판단이논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믿음은, 사람이 코끼리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두 사람이 똑같은 증거를 바라보고있어도 이 증거가 자신의 직관적 판단에 부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평가를 내렸다. 이처럼 아무리강력한 증거도 감정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핵심은 이것이다. 아이들이 성공적으로 학교생활을하고 어떤 도전에는 용감하게 나아가기 원한다면, 아이들의 지식이나 재능, 능력보다는 성실한 노력과 인내, 끈기를 칭찬하라는 것이다. 성공적인 삶을 위해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타고난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결코 헛되지 않는 노력에 대한 자신감이다.

내가 아무런 가치를 못 느끼는 일에 대한 칭찬은 나를분노케 했다. 시어머니의 칭찬은, 나 스스로는 결코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를 조종하고자 하는 수단에불과했다.

겉보기에는 기쁨을 줄 것 같은 상대방의 칭찬이 때로는 나 스스로의 판단을 가로막고 부적절한 압력을 가할 수 있다.

자부심, 혹은 자존감이라는 단어로 자주 사용되는 존중감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감정을 의미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존중, 따뜻한 인정, 존경 등에 가치를 둔다. 그래서 업신여기는 듯한 냉대에는 쉽게 움츠러든다.

인간은 냉대가 주는 잠재적 고통과 존중이 주는 잠재적 기쁨을 계속해서 의식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다른 사람의 판단은 우리 마음에 견고한 발판이 되며,
우리의 행동을 재촉하고 조절하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초기 인류는 무리를 지어 생활하며 각종 소식을 접하고 먹을 것을 구하고 서로를 보호했다. 그러니 자기가속한 무리에서 배제되는 것은 죽음과도 같았을 것이다. 독방 수감을 경험한 이들이 독방을 가장 극한의,
파괴적인 형벌로 묘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른들도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할 수 있는 한 모는 방법을 동원해 비난으로부터 고통받는 일을 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모순이 있다. 본래의 실수보다 방어적인 태도가 사람과의 관계를 더욱 안 좋게 한다는 점이다. 범죄 자체보다 은폐하는것이 더 나쁜 것과 마찬가지다.

철저히 자기 위주의 방식으로 존중감을 형성해 온 것처럼, 인간은 비난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도 이와 비슷하게 개발해 왔다. 그래서 잘못이 들통날 상황에 맞닥뜨리면 재빨리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상대방을 비난하고 나선다. "당신이 뭔데 그런 말을 해?" "네가 하는말에 누가 신경이나 쓸 것 같아?"

이 같은 불일치, 즉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하는 것을 인지 부조화‘ 라고 한다. 일치하지 않는 믿음은 부정적인 판단으로부터 자아 존중감을 지켜 내려는 경향이 있다.

예전에는 기억이 하나의 기록 장치로 여겨졌다. 재생하면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는 비디오 기계처럼 말이다. 그래서 시작 버튼을 누르면 우리의 기억이 과거에경험한 그대로 재생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이 기억의 복잡한 과정을 연구해 보았더니 전혀 다른 사실이 발견되었다.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이의미를 부여한 기억을 단편적으로 저장하고, 그 기억을 되살려 낼 때(기억해 낼 때)는 과거의 경험을 자기입맛에 맞게 재구성하여 불러들였다.35 구멍 난 기억은 메우고 일관성 있게 정돈하며,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총동원해 시간 및 물리적 인과관계, 개연성 등을짜 맞춘다. 결국 기억은 재생이 아닌 구성인 셈이다.
자신에게 편안한 방식대로 기억의 조각을 다시 맞추어 재생하는 것이다.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착각은 회복성을 높여 주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방어적인 태도는 종종 심각한 위험을 초래하기도 한다. 방어적인 태도는 실수로부터 배을 기회를 놓치게 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에 귀를 막게 하며,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과도 대적하게 만들기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 열린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부정적인 판단("이건 모두 네 잘못이야")은 긍정적인 시선("이번 일을 기회로 삼아서 앞으로는 비난이나 죄책감을 피하고, 나와 다른 사람 모두에게 인정받는 존재로 거듭나야겠어")으로 바뀐다.

비난의 수용이 수치심의 위험을 줄여 준다.

"미안해" 라는 말은 우리의 실수를 인정하고 어떠한 비난도 달게 받겠다는 사과의 표현이다. 여기에는 죄책감을 알아 달라는 바람도 포함되어 있다. 잘못에 대한후회보다 중요한 것은 미안하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갈등의 공통적인 원인은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누가맞고 틀리고 누가 누구에게 존경을 표시하고 안 하고‘에 있었다.

똑같은 잘못을 했을 때, 비난의 대상을 특정 행동으로국한하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아이 자체를 비난하는부모도 있다. 비난을 통해 행동을 교정하도록 가르치면 자녀는 이를 긍정적인 교훈으로 받아들인다. 또 ‘넌 잘할 수 있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므로 마치 칭찬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때로는 감정이 생각을 지배하고, 화가 난 상태에서는자신의 감정을 정당화할 이유를 찾기에 급급하다. 늘상대방이 잘못해서 나를 실망시켰다고 여기면서, 신뢰와 배려를 느꼈던 경험은 모두 잊어버린다. 그런 좋은 기억은 지금 자기 기분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방을 강하게 비난할수록, 그 사람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는 생각도 더욱더 굳어진다.

"우리는 사랑을 중히 여기기 때문에 감정과 생각에 대한 도덕적 기준도 사랑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 그래서 가족들이 분노의 감정을 파괴적이며 치명적이라고 생각하거나 행동하면, 나 자신이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가족들의 이 같은말과 행동에는 내가 느끼는 분노의 감정이 사람들에게 상처와 실망을 주고 있다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기때문입니다."

칭찬의 욕구와 비난의 그림자가 끊임없이 교차하고있었는데, 비난의 그림자는 대개 어린 시절 가족과의 관계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숨기고 싶어 하는 생각을 감지하고서도발설하지 않는 것이 대인 관계의 암묵적 동의라고 강조한다. 상대방이 말하는 도중에 음식물을 튀기고 콧물을 닦거나 사타구니를 긁적이면, 으레 시선을 다른곳으로 돌리며 못 본 척을 하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친밀한 표현 없이도 친할 수 있다.

가십을 공유하며 소속감을 느끼고 자신이 전달한 소식에 친구들이 흥미를 보인다는 데서 재미를 맛보기도 한다. 41 한편 남자아이들도 친구들의 평판에 신경을 많이 쓴다. 자신에 대해 어떤 이야기가 들려오는지, 주위에서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끊임없이귀를 기울인다. 그러면서 친구들 사이에서 인정받는친구와 그렇지 못한 친구를 하나둘 분류해 나간다.

남자아이들도 여자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성별 구분에매우 엄격한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누구든지 사내코드‘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면 그에 따른 사회적 처벌을 가하는데, 이 같은 현상을 조롱 압박(타인을 놀리는 행위를 보았을 때 자신도 그런 놀림을 받지 않기위해 동참하는 현상- 옮긴이)42‘ 이라 한다.

예컨대 10대 이전의 남자아이들은 이런저런 속내를친구에게 털어놓지만 10대로 접어들면 이 같은 공유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며 혼자 속으로 삭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친구에 대한 애착이 강한 10대 후반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이 어떤 식으로 판단되는가에 대해 상당한 불안을 느낀다. 그래서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그 친구가 자신에게 애정과 욕구를 드러내는 즉시 그 관계를 끊어 버린다. 둘 사이에 아무런 성적 관계가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이 시기의 남자아이들은 어떤 위험도 기꺼이 감수하려는 성향탓에 흔히 사고뭉치로 불리며, 많은 부모들이 마음고생을 한다. 그런데 사실 이 같은 성향은남자다음의 기준, 즉 친구들이 서로를 판단하는 기준에 자기가 부합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에 기초한 것이다.

파벌 내 구성원의 지위는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지위보다 훨씬 불안정하다. 그래서 10대 아이들은 집단 내에서 자기 위치를 끊임없이 주시한다. 여전히 파벌에속한 존재인가의 여부는 나이와 성별에 따라 달리 규정된다. 여자아이들은 친구들 사이의 중요한 소식이나에게도 전해지는가 아니면 나만 모르고 있는가?,
‘친구들이 무언가를 계획할 때 나의 스케줄도 확인하는가 아니면 전혀 신경 쓰지 않는가?, 체육 수업이끝나고 나를 기다렸다가 학생식당으로 가는가 아니면나만 빼고 먼저 가는가?‘ 등의 기준으로 자신이 파벌의 구성원인지 판단한다. 남자아이들은 나의 농담에친구들이 웃어 주는가?, ‘친구들이 내게 이런저런 내용을 묻는가?, 어디로 갈지, 어떤 게임을 할지에 대해 내 의견을 따라 주는가?‘ 등을 기준으로 삼는다.

폭력서클 조직은 상당한 권위를 자랑하는 남학생, 여학생 클럽의 특징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다. 공식적인가입 절차와 정기 모임, 조직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 소속감 등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름 있는 클럽에서요구되는 조건, 이를테면 명문가 자제, 사회적 지위, 올바른 말씨, 구별되는 차림새와는 전혀 거리가 멀지만, 자존심을 지키고 냉대감을 피하려 한다는 목적만큼은 같다. 때로 낮은 자존감은 폭력서클 가입의 동기가 된다.

권위적인 칭찬은 비난만큼 나쁘다.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많은 연구 결과가 축적되었고, 가트맨 박사는 드디어 결혼 생활의 지속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는 변수 하나를 발견해 냈다. 그것은 부부가 종종 싸움을 하는지, 공통의 관심사가 있는지, 혹은 성적인 화학 반응이 지속되는지의 여부가 아니었다. 결혼 생활의 지속 가능성을 예측하는 핵심 변수는 바로 칭찬과 비난의 역할이었다.

어떤 부부는 극적인 상황도 꽤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때로는 즐기는 모습까지 보인다. 말하는 도중 소리를지르거나 울기도 하고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리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더 깊은 사랑과 존중을 나타내며 서로를 웃게 해 주려 노력한다. 서로에게 소리 지르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이 함께 웃는다. 언성을 높이다가도 까르르 웃으며 흐지부지 넘어가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열띤 논쟁이 활기찬 토론으로 바뀌기도한다. 서로의 생각을 따져 물으며 반대 의견을 내놓는경우도 다반사다. 12 하지만 아무리 자주, 그리고 크게싸운들 이들 부부가 이혼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연구 결과 부부싸움을 하느냐 안 하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비난의 양과 비교해 칭찬이얼마나 되느냐였다. 비난은 칭찬보다 그 여파가 훨씬크다. 더 많은 감정을 유발하며 기억에도 강하게 남는다.13 그래서 비난으로 인한 상처가 흡수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횟수의 칭찬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칭찬과 비난의 비율이 5:1일 때 결혼 생활이 가장 원만하게 유지되었다. 이를 ‘마법의 비을 이라고 하며,
결혼 생활의 지속 여부를 예측하는 지표로 사용된다.

‘당신은 세심해‘라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할 경우 이것은 길이 제니에게 자신이 기대하는 배우자 유형을 강요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세심하다‘ 라는 칭찬이 제니에게는 존경의 시선이 아니라 강요와 압박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하지만 여보, 당신은 진짜 좋은 엄마야. 우리 애를 당신만큼 잘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레이엄의 이 같은 찬사는 엄마로서 앨릭스의 자질을 아주높이 평가한 것이었다. 아이를 돌보기에 가장 적합한사람이라는 칭찬에 누가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여기에는 앨릭스의 입장이 완전히 배제되어있다. 그레이엄은 아이의 행복을 강조하며 아내의 감정에 호소해 우리 사회 전반에 깊숙이 자리한 모성애를 자극했다. 이 과정에서 앨릭스가 준비한 손익분석결과는 아무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요컨대 우리는 자신의 나쁜 행동은 일시적인 것으로여기지만 배우자의 문제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으로생각한다. 이러한 충들의 순간에는 자신에게 유리한기억으로 스스로를 보호한다. 설령 부부 관계가 손상을 입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이 같은 편향된 기억은좋지 않은 분위기를 더욱 악화시키며 갈등의 원인이배우자에게 있다는 생각을 더욱 굳힌다. 동시에 자신은 항상 배우자를 도와주고 배려하면서 관대하게 행등했다고 생각하고 배우자에 대해서는 고집 세고이기적인 모습으로 자기에게 무관심했던 기억만을 떠올린다. 남편 혹은 아내의 친절하고 자상했던 모습은묻어 버린 채, 지금처럼 자신을 화나게 했던 기억만을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성관계는 재생산의 목적을 훨씬 넘어선다. 그중 한 가지는 부부 간 결속을 강화하는 것으로 그 효과는 매우 탁월하다. 일단 성관계를 시작하면 두 사람은 신경학적으로, 또 신체적으로 완전히 변환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가스등 효과는 남편 혹은 아내가 배우자의 의식을 조종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비난을 당연하게 여기도록속이는 것을 의미한다.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전제가 한 가지있다. 그것은 때로 화를 내거나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도, 내 배우자는 기본적으로 존경할 만한 좋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나는 당신을, 당신은 나를 판단하게 될 거야. 하지만서로의 좋은 점을 무시하거나 나쁜 점을 과장해서는안 돼. 이 부분은 최대한 노력하자. 부정적인 판단이강하게 들면 대화를 통해 풀어 나가고, 끊임없이 비난하는 행동만큼은 피하자. 상대가 힘들어하는 상황에서는 서로를 위안하며 공감과 지지를 보내 주어야 해.
또 상대방의 성격을 판단할 때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말이나 행동을 판단할 때는 최대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 사소한 잘못 하나를 성격 문제로 몰아서 비난해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가 없어. 때로는 여러 편견에 빠져 스스로의 자존감은 지켜 내지만 부부 관계는위험에 빠뜨릴 수 있어. 우리도 사람이기 때문에 이부분은 계속 부딪혀 가며 해결해야 해."

"학계의 정치는 모든 정치 형태 가운데 가장 격렬하고잔혹하다. 걸려 있는 몫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극히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다른 사람의 시선에 집착하죠. 스스로를 얼마나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느냐가 주위의 판단에 좌우된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사실입니다. 사회에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압박은 결국 다른 사람의 판단에 가치를 둔다는 의미입니다. 성공과 실패의 대부분은 주위의 시선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죠."

"경쟁자들 사이에 오가는 무언의 메시지를 읽어 내지못한 채 동료들과도 상호작용을 할 수 없다면, 업무능력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요컨대 근거없는 가십으로 시작된 판단이 사실로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들리는 이런저런 말들로 집중력과 자신감을 잃게 되고, 업무 수행 능력도 떨어지면서자신을 둘러싼 부정적 판단이 결국 사실임을 스스로증명하고 만다.

‘나르시시스트‘는 보통 자기애가 강한 사람을 일컫는다. 하지만 심리학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자존감이 낮고 스스로를 과장되게 떠벌리는 사람, 타인의 관심에 집착하며 이를 통해 자존감을 높이려는사람을 칭한다. 그런데 직장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그폐해가 매우 심각하다. 나르시시스트는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고위험 투자 같은 그럴듯한 계획을 추진하지만, 결국 조직에 엄청난 손해를 끼치고 만다.
이들은 또한 비판에 공격적으로 대응하며, 자신에게동조하지 않는 사람은 적대시한다. 물론 그중에는 넘치는 투지와 자신감으로 성공하는 사람들도 다수 있다. 일부 심리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최고경영자들 가운데 약 4퍼센트가 공감 능력이 부족하고 다른 사람을 조작하는 나르시시즘적 성향을 지닌 것으로 나타났다. 최대 21퍼센트의 최고경영자가 이 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고 밝힌 연구 결과도 있었다(일부에서는사이코패스 기질로 언급했다). 놀랍게도 이 수치는 교도소 수감자 중의 나르시시스트 비율과 같았다.

무엇보다 이들은 칭찬과 비난의 프레임을 만들어 사내 분위기를 경직시킨다. 매 순간을 자신이 돋보일 수있는 기회로 삼고 다른 사람은 하찮은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과연 내가 빛날 수 있는가?‘ 이들의 관심사는오직 그것뿐이다.

직장 문화 자체가 전체적으로 과시하는 사람들을 인정하면서 적절한 보상까지 해 주는 분위기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자기 판단을 반성하거나 수정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의 판단에는 적대감만 드러내는 나르시시스트의 존재가 조직의 안정에상당한 위협으로 작용한다고 경고한다.24 상대방의판단에 집착하는 이들 나르시시스트들은 조직 자체를와해시킬 수 있을 만큼의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가까운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직장에서의 칭찬도 매우 복잡하다. 상대방의 칭찬이 자신의 목표와 가치,
자존감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그 칭찬은 비난만큼이나 모욕적으로 다가을 수 있다.

철저한 준비성을 지닌 필리시티의 경쟁력에 놀란 팀장이나 샤론의 업무 기여도를 간과한 팀장이나 상대를 편향된 시각으로 대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여자 직원들 업무는 남자들 일보다 가치가 낮아." 이런 식의 말도 절대 내뱉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재된 편견은 우리의 판단에 자동적으로 스며든다.

이 같은 판단은 여성의 능력에 대한 의식적 편견이나여성을 배제하려는 고의적 태도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우리의 판단을 돕는 여러 정보들이 처리되는 과정에서 전혀 의도치 않게, 의식하지 못한 틈으로 불공정한 편견이 파고든 것이다.

권력의 무게에서 오는 책임감보다 권력의 부재에서오는 박탈감이 건강에 더 좋지 않았던 것이다.

안 좋은 댓글에 관심이 집중되는 현상을 부정 편향Negativity Bias‘이라 일컫는다.

진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안 좋은 환경에 적절히 순응해 온 생물이 끝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좋은 기회를 놓쳤을 때 생겨나는 후회나 아쉬움보다 위험을 무시했을 때 생겨나는 파장이훨씬 더 심각하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인류 초기의조상들이 똑똑하고 매력적인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릴기회를 포기했다고 생각해 보자. 조금 아쉽기는 해도별다른 문제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특정인물이 적대적이라는 신호를 무시했다면 그 혈통은더 이상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치명적이다. 따라서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부정 편향은 충분히적응 가능한 특성이다. 그러나 문제는 소셜 미디어에서는 그 힘이 잘못된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에서의 부정 편향은 피해자에게는 극도의수치심을 안겨 주고, 가해자에게는 오히려 더 큰 힘을실어 준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의 행동 및 관용, 이성의 수준은 점차 개선되었다. 그리고이것은 선량한 본성‘, 즉 공감, 자기통제, 도덕심, 이성이 확대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선량한 본성은 우리의 판단 장치가 주도하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더욱 개발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판단을 끌어내어 자기 스스로의 판단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또 본능적으로 모험을 즐기기 때문에 다양한사람과 어울리며 그들에게 판단받고자 한다.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도 있어 상대방의 판단을 조정하고 개선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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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는 곳으로 오늘의 젊은 작가 16
최진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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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작가이기에 이런 진부한 소재도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소설이 조금 만 더 길었으면, 전개가 더디 가더라도 좀 더 책의 감정을 가슴에 지고 있었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내게 도둑질을 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훔친 것은 티켓이나 돈이라기보다 목숨이다. 나는 이미 많은 이의 증오를 뒤집어썼다.- P19

사람들은 나를 보고 아빠를 닮았다고들 했다. 워낙 어렸을때부터 그런 말을 들어서 나는 내가 정말 아빠를 닮은 줄 알았다. 지금 생각은 다르다. 나는 아빠를 닮은 게 아니라 아빠를 닮았다는 말을 듣고 자랐을 뿐이다. 그 말이 나를 아빠처럼 만들었고.- P31

어느 밤 고백 성사라도 하듯 건지가 말했다. 학교에 가지않아도 되고, 아빠도 없고, 모두가 공평하게 불행한 지금이차라리 홀가분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고, 적어도 지금은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만약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학교에 다닌다면 이젠 누구에게도 맞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그런 만약 같은 건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다고.- P37

건지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전에 본 적 없는 결연함, 꿈을꾼다는 것. 그 꿈을 나눈다는 것. 건지에게 꿈이란 전에 닿아본 적 없는 새것, 실패해 본 적 없어 재지 않고 있는 그대로 품을 수 있는 첫사랑 같은 것이었다.- P38

나는 그 모든 말이 무서웠다. 학교다닐 때 놈들은 나를 보고 ‘재수 없는 새끼‘라고 했다. 선생에게 혼나고 여자한테 차이고 용돈을 못 받고 반찬을 흘리고 선배가 갈구고 심지어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파리가 날아다니고 아무 이유 없이 짜증이 나도 나 때문이라고 했다. 모든 걸내 탓으로 돌리며 나를 때렸다. 내가 맞아야 하는 이유는 사방에 널려 있었다. 세상은 내가 재수 없는 새끼란 걸 증명하려고 존재했다. 아버지도 그랬다. 모든 게 내 탓이고 엄마 탓이라고 했다. 엄마와 내가 자기 인생을 망쳐 놓는다고, 현실은 반대였다. 아버지가 우리 가족을 망쳐 버렸다. 엄마가 죽고 모든불행을 홀로 감당하게 되자 아버지는 자살해 버렸다.- P70

단은 국경을 넘어 유럽으로 가길 원했다. 그곳에는 생존자를 위한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을 거라고, 그곳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내겐 그런 믿음이 천국을 주장하는 종교인의 설교와 다르지 않게 들렸다.- P85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처럼 시간 개념도 널뛰었다. 엊그제가 여름이었는데 벌써 연말이라거나, 추석 지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설날인가, 그렇게 놀라다 보면 어느새 1년이 지나있었다. 월급 들어오는 날짜를 기준으로 한 달을 가늠했다. 정해진 날짜가 되면 통장에서 돈이 우수수 빠져나갔다. 열심히 버는데도 늘 쪼들렸다. 중요한 일을 다음으로 미루거나 대충 처리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가족 여행, 가족사진, 생일 파티, 칭찬과 위로, 오늘은 어땠어? 키가 이만큼이나 컸네, 안아주고 사랑한다 말하는 것, 오늘을 기억하고 내일을 기대하는것,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잘 자라고 말해 주는 것.- P89

분명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데, 최선이 답은 아니란 생각이 세금 고지서처럼 주기적으로 날아들었다. 삶이 마디마디 단절되어 흘렀다. 직장에서의 나와 아이들앞에서 나와 단을 대할 때의 나와 혼자 있을 때의 내가 징그러울 만큼 달랐다. 나라는 사람이 흐트러진 퍼즐 같았다. 애초의 내가 어땠는지 밑그림은 기억나지 않았고 퍼즐은 흩어진 채 여기저기 떠돌았다. 무언가 미세하게 어긋나고 있어서먼 훗날 완벽하게 분리될 것만 같았다. 나와 내가. 나와 단이. 나와 아이들이.- P90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언제부터 시작된 질문인지 모르겠다.
잘 살 수 있을까. 그 질문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대학 졸업하던 무렵이었다. 불분명한 내일이 두려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잘 될 거라는 긍정이 남아 있었다.- P93

한국에서 그런 일을 하면 무시당하기 십상이고 자기를 하찮게 대하는 사람들에게 화도 많이 나는데 외국에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무시당하면 그냥 무시하게 된다고, 고생스러워도 우울하지 않고 마음속 당당함을 지킬 수 있다고, 외국에서는 자신의 젊음을 고스란히 느끼고 즐길 수 있는데 한국에만 들어오면 젊음이 짐스러워진다고 했다.-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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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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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작가의 에세이를 보면 나름 성공루트를 밟아온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작가의 글은 왜이렇게 심연으로 가라앉기만 할까. 시적인 절망이 나를 끌어내린다. 위로를 받으려 김애란의 글을 읽진 않는다. 그냥 가라앉는 배에서 바다를 등지고 기댄 것처럼, 내 뒤의 불행을 연민하고 내 앞의 불행을 가늠해 보며 바로 닥친 나의 불행도 실감해 보는 것.

소설은 내가 좋아하는 이기호작가의 말처럼 잔인하다. 잔인한 걸 알면서도 자꾸 중독되는게 이런 먹먹한 감정이 계속되면 마치 마라톤 선수의 러너스하이라도 가져다 줄 것이라 착각을 하는건지, 이런 비참함에 같이 서서 불행해지는 감정의 끝이 무엇일지 알기위해 계속해서 달려야겠다.

몇 해전, 추석 때였던가. 술에 취해 오토바이를 몰고 선산에 가다, 중심을 잃고 논두렁에 고꾸라져버렸을 때 —— 작열하는 가을별 아래, 자신을 일제히 내려다보던 친척들의 얼굴을 용대는기억한다. 형의 곤혹, 형수의 경멸, 조카의 무시, 사촌들의냉소, 햇살을 등진 구경꾼들의 눈부신 멸시.- P135

그러니 혈혈단신 상경한 그가, 사람들의 포기와 실망에 익숙해진 그가, 도시의 속도에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철딱서니 없는 노총각이, 눈 깊은 조선족 여자의 친절에 홀딱 빠져버린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P137

택시 경력 5년이 넘는 용대는 서울의 괜찮은 식당을 속속들이 알았다. 처음에는 유명해지고 다음에는 천박해져버리는음식점이 아니라, 허름하고 보잘것없지만 맛 하나만은 단정한 그런 집들을 말이다.- P139

도시 곳곳에는 한쪽 손을 번쩍 들어 택시를 잡은 뒤, 술에 취해 아름답고 어그러진 말들을 차비처럼 내려놓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때론 두서없고 엉뚱한, 어느 때는 철렁하고 알 수 없는 말들을 반짝이는 동전처럼 흘리고 가는 이들이.
......
물론 용대는 알고 있었다. 택시 안에서는 기사도, 손님도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교육받으러 온 사람의 30퍼센트가 한 달 안에 그만두고, 2, 3개월이 되면 절반 이상이 그만두고, 6개월 후에는 한두 사람밖에 안 남는 회사에서, 같은 기사들끼리도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
자기 위치가 초라할수록 풍선처럼 커다랗게 허풍을 떤다는 걸 말이다.- P144

처음에는 안도가 그다음엔 욕심이 찾아왔다. 정착의 느낌을 재생반복하기 위해 자꾸 이것저것을 사들이고 집을 꾸미기 시작했다. 월급날에 대한 확신과 기대는 조금 더 예쁜 것, 조금 더 세련된 것, 조금 더 안전한 것에 대한 관심을 부추겼다. 그러니까 딱 한 뼘만…… 9센티미터 만큼이라도 삶의 질이 향상되길 바랐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많은 물건 중 내게 딱 맞는 한 뼘‘은 없었다는 거다. 모든 건 늘 반 뼘 모자라거나 한 뼘 초과됐다. 본디 이 세계의 가격은 욕망의 크기와 딱 맞게 매겨지지 않았다는 듯. 아직 젊고, 벌날이 많다는 근거 없는 낙관으로 나는 늘 한 뼘 더 초과되는쪽을 택했다. 그리고 그럴 자격이 있다 생각했다.- P214

은지가 조그맣게 끄덕인 건 이제 그들도 더 이상 어리다고 할수만은 없는 나이가 되어서였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어둑한술집에 죽치고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지적이고 허세 어린 농담을 주고받다 봄 세상이 조금 만만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어느 날 자리에서 눈을 떠보니 시시한 인간이 돼 있던 거다.
아무것도 되지 않은 채.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이 이상이될 수 없을 거란 불안을 안고, 아울러 은지와 서윤은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가진 것 중 가장 빛나는 것을 이제막 잃어버리게 될 참이라는 것을.- P251

하지만 은지는 언제나 그래 온 것처럼 인생을 굴러가게 만드는 건 근심이 아니라 배짱임을 믿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두려움을 깔보는 거라고, 실은 본인도 믿지 않는 주문을 외워가며 말이다. 서윤의 경우,
두려움을 이기는 제일 좋은 방식은 두려움을 경험하는 거라여기는 편이었다. 아니, 그보단 아예 두려움 근처에 가까이가지 않는 편이 상책이라고, 진짜 공포는 그렇게 쉽게 감당할수 있는 게 아니라며 말이다. 사실 서윤이 품고 있는 근원적인 두려움 중 하나는 가난이었다. 서윤은 오랫동안 그것이 제삶 가까이 오지 못하게 흡사 파리 떼를 쫓는 사람처럼 두 팔을 휘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혹 그게 누군가에게는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할지라도,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되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P254

"힘든 건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 기다리는 게 지겨운거였어."- P277

다만 언제였더라. 현대문학 스터디 때 서윤이 "교수님들세대는 가난이 미담처럼 다뤄지는데 우리한테는 비밀과 수치가 돼버린 것 같아" 라고 웅얼대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은지는 그동안 서윤과의 감정도 풀 겸 먼저 이런저런 얘기를 꺼냈다.- P281

그런데 언니, 요즘 저는 하얗게 된 얼굴로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가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요..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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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은희경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5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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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은 이미 이루어 졌거나, 혹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냉소적인 어린아이를 통해 평범한 인간 군상에 신랄한 비판을 퍼붓는 소설인가 싶었는데 마지막 해설의 한 글귀를 보고 마음을 풀었다.

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나로 하여금 내 몸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한다.
내 몸밖을 나간 다른 나는 남들 앞에 노출되어 마치 나인 듯 행동하고 있지만 진짜 나는 몸속에 남아서 몸밖으로 나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나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자 하는 나로 행동하게하고 나머지 하나의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와 나 자신이 바라보는 나‘로 분리된다.
물론 그중에서 진짜 나는 보여지는 나가 아니라 바라보는 나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강요를 당하고 수모를 받는 것은 보여지는나‘ 이므로 바라보는 진짜 나는 상처를 덜 받는다. 이렇게 나를 두개로 분리시킴으로써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P23

누구를 좋아하게 되면 약점이 생기고 어리석어진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애는 결국 내 마음을 끝까지 붙들지못했다. 그런데도 그애에 대한 장군이의 질투심은 같잖게도 꽤 집요한 것이었다. 나와의 관계를 견제하는 부질없는 질투심이기도했지만 반장이 갖추고 있는 조건을 질투하는 열등감이기도 했다.- P52

그날도 우물가에서 설거지를 하며 장군이 엄마는 광진테라 아줌마를 상대로 한참 수다를 늘어놓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모의 월남치마를 두고 폭이 좁다, 무늬가 요란하다, 하면서 한바탕 참견을해대더니 이왕 나온 월남 이야기를 얼마 전 월남에서 돌아온 자전거포 작은아들로 자연스럽게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이 안됐어. 다리가 그 지경이 되었으니 시집올 처녀나 있겠어?"
이렇게 동정하는 척하면서 불운을 강조하는 것이 남의 험담에이력이 붙은 장군이 엄마의 요령이다. 거기 비해 성품이 순박한 광진테라 아줌마의 대꾸는 언제나 솔직하다.- P63

"쪼꼬만 게 무슨 비밀이라도 있나? 책가방 좀 봤다고 저 야단이야" 라며 방문을 닫고 들어가버리는 이모의 행동이, 스스로도 떳떳지 않다고 생각한 행동을 현장에서 들켰을 때 어른의 권위를 되찾는 마지막 방법으로 택한 뻔뻔스러움이란 걸 알긴 하면서도 지금까지 성실하게 수행해온 배달부나 자문관의 권위를 잃은 나는 자존심에 작은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불과 오 분도 지나지 않아 그 상처 위에는 억지로 딱지가내려앉았다. 쪼꼬만 게 어쩌구 하면서 꽝 닫고 들어간 바로 그 방문을 황급히 도로 열고 이모가 쏟아질 듯 방에서 뛰쳐나오며 아직까지 상한 자존심에 대한 정리가 끝나지 않아 마루 앞에 그대로 서있는 내 목을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듯이 꼭 끌어안았던 것이다.
이모는 정말이지 제멋대로 행동했다. 이모의 머릿속에서 세상사람은 언제나 자기를 몹시 좋아하는 사람과 자기를 알아볼 줄 모르는 사람, 두 부류로만 나뉘었다. 또 세상일은 언제나 사랑과 미움 두 가지뿐이었다. 따라서 그런 몇 가지 생각의 틀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이모의 행동에 사려라고는 있을 수 없었다.- P85

그 이야기를 들은 뒤 나는 다시는 엄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이상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에서 나는 슬픔을느꼈으며 그런 슬픔이 나에게 약점을 만드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엄마에게나 나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기를 원치 않았다. 건드려질 때마다 아픔을 느끼는 상처를 갖는다는 것은 내 삶에 대한 스스로의 조절능력을 상실하는 거였다. 나는 내 상처를 건드리는 사람의 의도대로 반응하면서 살고 싶진 않았다.
교과서가 효심을 고취시킨다는 목적으로 한 단원쯤은 반드시어머니의 사랑을 환기시키고 모든 동시와 동화가 어머니를 아름답고 그리운 존재로 찬미할 때마다 나는 찢어진 치마 사이로 땟국에 전 다리가 내비치던 장터의 미친년을 떠올렸다. 그때 비로소 죄의식이나 공포 같은 강력한 것보다 그리움이나 사랑 따위의 보드라운 것을 이겨내기가 훨씬 힘들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P158

고달픈 삶을 벗어난들 더 나은 삶이 있다는 확신은 누구에게도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떠난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기보다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무 확신도 없지만 더이상 지금 삶에머물러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 때문에 떠나는 이의 발걸음은 가볍다. 그런 떠남을 생각하며 아줌마는 사라진 버스 쪽을 그렇게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는 것이리라.- P164

아이들이란 쉽게 패를 짓고 그것을 공통된 정서로 묶어서 세勢를형성하기를 좋아했으므로 누구를 괴롭힌다는 데 신이 나서 그렇게짓궂은 반복음률을 만들어내 남을 놀리곤 한다. 나는 그런 데에 한번도 끼어본 적이 없다. 아이들 특유의 그런 하찮은 위악성에는 관심이 없었다.- P167

(나는 ‘내 자랑이 아니라‘로 시작되는 노골적인 자랑과 ‘남의 험담 같아서 안됐지만‘으로 시작되는 본격적인 험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P200

할머니는 이모에게 무언가를 허락할 때 활짝 웃으며 "이 시간 이후는 그렇게 해라, 어때 맘에 드니? 좋지?" 라고명명백백하게 말하지 않고 꼭 절대 마음이 바뀔 리 없는 사람의 완강한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니 마음대로 해라" 라거나 "반대는않겠다"는 식의 미필적 고의 혹은 비판적 지지의 형식으로 표현하곤 한다.- P262

사랑이 아무리 집요해도 그것이 스러진 뒤에는 그 자리에 오는다른 사랑에 의해 완전히 배척당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장소가가지는 배타적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랑, 새로운 사랑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해온 사랑이 흔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에 대한 냉소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빠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든지 다시 사랑에 빠지며,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유지의 감각과 신랄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착 없이 그 사랑에 열중할 수가있다. 사랑은 냉소에 의해 불붙여지며 그 냉소의 원인이 된 배신에의해 완성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며 불성실하다. 나는그것을 광진테라 아저씨 박광진씨를 통해서 알았다.- P275

대부분의 어른들은 모험심이 부족하다. 진정한 자기의 삶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찾아보려 하기보다는 그냥 지금의 삶을 벗어날수 없는 자기의 삶이라고 믿고 견디는 쪽을 택한다. 특히 여자의경우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배후에는 ‘팔자소관‘이라는 체념관이 강하게 작용한다.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그 체념은 여자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우연히 닥쳐온 불행을 이겨내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만듦으로써 더 많은 불행을 번식시키기 때문이다.- P301

한참 동안 혜자 이모는 진흙땅 위에 무릎을 꺾고 엎어져 소리죽여 운다. "현석아" 하면서 현석 오빠의 어깨를 끌어다 함께 우는데 솥단지며 곤로며 화장품이 어지럽게 널려진 진흙땅에 엎어져 우는 그들의 모습은 비참하기는 하지만 한편 상처입은 영혼들처럼 순결해 보이는 점도 있다.- P325

세상에 기적이란 없다. 그러나 우연은 많다. 아니 세상의 중요한 일은 공교롭게도 모두 우연이 해결한다.- P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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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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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 윗 세대의 감수성은 이렇게 감정이 주체할 수 없도록 벅차오르게 만드는걸까.


이 감정을 또 받아들이기 망설여져 두번 읽긴 힘들것 같은 생각이 들정도로 먹먹한 소설.

이승우 작가 소설은 나같이 평소 기독교에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도 독서에는 전혀 무관할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연희에게 일어난 일은 그가 라면을 먹지 않았어도 일어났을 일이다. 그가 라면을 먹은 사건과 연희의 사건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 그러니까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라면을 먹지 않았는데도 그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는 자기가 행한 다른 어떤 일을 끄집어내어 그 사건의 원인으로 상정하고 자책했을 것이다. 무엇이든 끌어냈을 것이다. 자신에게 죄의식을 덧씌우기 위해 무엇이든 찾아냈을 것이다. 만들어 내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죄의식이었으니까. 죄의식을 느끼지 않으면 죄의식이 느껴져서 괴로웠을 테니까.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자신을 견딜 수 없었을 테니까. 차라리 죄의식을 만들어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자기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며 괴로워하는것보다 나았을 테니까. 그는 죄의식을 피하기 위해 죄의식을 필요로 했다.- P41

우연하지 않고 막연하지도 않은 동기를 숨기기 위해 우연과 막연을 전면에 내세운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우리는보기 싫은 물건은 우연히‘ 손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곳에 숨기고, 만나기 싫은 사람과의 약속은 우연히 잊어버린다. 박 중위를 그 자리에 앉게 한 것은 왼쪽 창가에 앉은 사람이 그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킨, 그 자신이 아직 의식하지 못하거나 의식하지 못한 척하는 어떤정서, 추억이거나 기대 혹은 욕망일 수 있다. 왼쪽에 앉은 사람에게서 감지한 어떤 요소가 그의 과거나 미래와 연결된 어떤 줄을 흔들었고 그는 그 줄에 걸려 넘어졌다는 식이다.- P46

예컨대 자기가 정말로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라 무료한 한 때를 견디기 위해 가벼운 파트너를 필요로 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그 자신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모를 필요가 있거나모르는 게 유리하기 때문에 모르기로 작정했다고 가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토끼를 잡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하는 호랑이의 프로 근성 같은 것과는 상관없다는 말인가. 아니, 자기 자신조차 감쪽같이 속여서 진심으로 간절하게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그 복잡한 암시와 조작이야 말로 토끼를 잡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하는 호랑이의 진면목인지 모를 일이었다.- P65

후는 형제가 어떤 판단을했는지 그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형제가 어떤 해석을 했는지 알 수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자기가 어떤 의사를 가지고 있는지, 아니, 어떤 의사를 가지고 있기는 한 건지 분명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형제의 해석을 판가름할 능력이 없었다. 후는 그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선택을 해야 하는 부담으로부터 달아났다. 선택은 그의 권리였지만 책무이기도 했다. 그는 책무를 다하지 않은 죄책감을 권리를 포기한 희생과 맞바꿈으로써 자신의 무고함을 확보하려고 했다. 자연스러운 양도가 이루어졌다. 어쩔 수 없이 선택의 권리와 책무가 형제에게 떠넘겨졌고, 형제는 그 권리와 책무를 양도하지 않았다.- P102

암논은 자기 사랑을 어떤 것이든 요구할 수 있는 권리증처럼 내민다. 사랑한다. 그러니까 나와 자자. 사랑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모든것을 할 수 있고 무엇이나 용납되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간주된다. 그렇기 때문에 억지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하면서도 그 요구가 억지스럽고 어처구니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간주된 그의 사랑이 상대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는 사실을인지하지 못한다. 아름답고 순결한 다말은 이 폭력의 희생자이다.
그녀는 자기를 욕되게 하지 말라며 이복 오빠를 뿌리친다. 그리고상식과 이치를 앞세워서 설득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나에게는 치욕이고 당신에게는 어리석음이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지금 이러지 말고 아버지인 왕에게 말해서 나를 원한다고 하라. 아마 왕은당신의 청을 들어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당신의 차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말은 논리적이다.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에 맞는 생각은 사랑 이전이나 이후의 것이다. 논리에 맞게 생각하고 논리에 따라 말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하지 않거나 이제 더 이상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P106

말하자면 압살롬은, 암논이 사랑한 것처럼 다말을 사랑했던 것이 아닐까. 암논이 사랑한 것처럼 사랑했지만, 암논이 행한 것처럼 행할 수는 없었던 것이 아닐까. 암논이 사랑한 것처럼 사랑했음에도 암논이 행한 것처럼 행할수 없었기 때문에 암논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P110

신분을 증명하는 일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믿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증명할 수 있지만 믿지 않으려고하는 사람에게는 누구도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신분이었다. 장은 그것을 잘 알았다. 장은 칼자루를 쥔 자였다. 그는 언제든 칼끝을 겨누거나 거둘 수 있었다. 믿어 주거나 믿어 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에도 연연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의 칼끝은 무안하고 무색했다.- P140

아내는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능력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있는 것처럼 판단하고 평가하고 비판하는 건 옳지 않다고 답했다. 한정효는 전능자의 권력 사용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아내는 전능자의 권력 사용에 대한 사람의 판단 능력에 이의를 제기했다. 한정효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고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듣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렇게 독실하고헌신적인 사람을 이런 병에 걸리게 할 수 있는가, 거기에서 무슨 뜻을 찾으란 말인가, 하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만 질러 댔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내의 무반응과 침묵은 도에 지나치게 항변하는그를 무안하게 했다. 그때는 명쾌하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 신을 원망의 표적으로 삼음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징벌을 피하고 있었다.- P180

의로운 사람이 당하는 고통은 불의한 사람이 누리는 행복만큼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인간은 질문한다. 이성이 대답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질문은 이성 너머, 신에게로 향한다. 신의 대답은 그러나 언제나 흡족하지 않다. 그 대답을 듣는 인간이 이성 너머를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 대답이 이성 너머를 사유할 수 없는 인간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이다. 한정효의 아내는 신의 대답에 흡족하게 수긍하는매우 드문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녀가 이성 너머를 사유할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녀는 다만 인간이 이성 네머를 사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녀는 말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겪는 고난 역시 우리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은 우리 이성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우리의 옳음을 주장하기 위해 하나님이 옳지 않다고 말하면 안 된다고, 알기 쉽고 다루기 쉽고 우리의 좁은 머리에 갇히는 하나님은하나님일 수 없다고,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그래서 믿는 거라고, 우리는 어떤 상황이든 왜냐고 묻지말고 네라고 대답해야 한다고.- P182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려면 위에 있는 것을 밟을 수밖에 없다고, 밟지 않고 오를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그는스스로를 합리화했다.- P193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어. 궁금한 것을 궁금해하지 않았던(않으려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은 심정이었거든. 불러내지는 죄책감, 감정의 혼란, 양심의 가책, 행동의 제약…… 그런 성가신 것들과 대면하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동기 말이야. 자신의 비겁함을 똑바로 대면하지 않을 때만 군인은 용감해질 수 있는 거지. 그러니까 용감한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비겁해야 하고, 비겁함을 의식하지 않아야 하는 거지. 나는 또 다시 비겁해지고 싶지 않았으므로 지금이야말로 비겁해져야 한다고 설득했어. 신념을 지키기 위해 신념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제넘은 충고를 다 했어.- P217

요약하면 이렇다. 처음에는 그녀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했지만 점차 찾아다니는 일 자체가 의미 있어졌다. 처음에는 그녀를 찾아내는 것이 그에게 내려진 계명과 같았지만 점차 그녀를 찾아다니는 것(찾아다닌다는 명분)이 그의 삶이 되었다. 계명일 때는 그 일을 이루는 데 자기 삶을 써야 했지만, 삶이 되자 그 일이 그의 삶을 누비는 재료가되었다. 그 미묘한, 그러나 현저한 차이를 후는 오랫동안 인식하지못했다.- P238

후는 원장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틀리지 않은 말을하는 원장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다른 문제였다. 말의 내용은 옳지만 말하는 행동은 옳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 어떤 옳은 말은 말해지는 순간, 말해졌기 때문에 옳지 않은 것이된다. 어떤 옳은 말은 옳음을 유지하기 위해 말해지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만 말해지지 않으면 그 말이 옳다는 걸 이해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 말이 옳다는 걸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말을 하는, 옳지 않은 방법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옳지 않은 행동을 통해서만 옳음이 증명된다는 것,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옳지 않음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 옳지 않은 실천을 통해서만 그 옳음을 이해시킬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누군가의 옳지 않은 실천이 옳은 말 때문에 용납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옳은 말이 옳지 않은 실천 때문에 의심스러워지기도 한다. 후는 원장을 의심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그런 말을 하는 동기를 추측할 수 없었다. 후는 당신 말이 옳다고도 하지 않고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도 하지 않았다.- P255

사람은 자기를 지배하는 사람이 누구보다 강하고 탁월하기를 원한다. 그다지 강하지 않은 상대에게부림을 받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누구나 두려워하는사람에게 부림을 받는 것은 우쭐하고 자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운동 경기에서 자기를 이긴 상대가 모든 사람을 이기고 최강자가 되기를 바라는 심리와 무관하지 않다. 나를 이긴 상대가 누군가에게 지면 기분이 언짢아지는데 그것은 내가 충분히 강하지 않은 상대에게 졌다는 사실이 무참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이기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러지 못할 바에는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강한 자에게 지기를 바란다. 나를 지배하는 자가 나를 지배할 만큼 강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배받지 않는 것이 제일 좋지만 (이것은 확실하지 않다. 지배할 조건을 갖추지 못했거나 그럴 만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 사람이 누군가의 지배조차 받지 못할 때,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아무도 그 사람을 지배하려고 선택하지 않을 때, 소외감을 느끼거나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는 의견이 있다. 그렇다면 지배받지 않는 것이 제일 좋다고 단정해서 말하긴 어렵다. 그렇긴 해도, 어쨌든) 불가피하게 지배받아야 한다면, 나를 지배하는 자가 당당하고 강할수록, 심지어잔인할수록 나를 만족시킨다고 할 수 있다. 이 당당하고 강하고 잔인한 지배자가 아주 가끔 아주 작은 친밀감을 표시하거나 아주 사소한 친절을 베풀 때 우리는 황송하고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지배 방법이 엄할수록 이 효과는 크게 나타난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이 황송함과 고마움은, 그의 친밀감과 친절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의 당당함과 강함, 심지어 잔인함을 향한 것이다.- P263

연희가 꿈 이야기를 하며 괴로움을 털어놓았을 때 후가 충격을 받은 것은 연희의 고통에 대한 새삼스러운 깨달음이나 공감 때문이 아니라(그것이 아주 없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자기의 은밀한 쾌락이 발각되고 통박되었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가 모르길 바랐고, 모를 줄 알았다. 심지어 그는 그 자신도모르길 바랐고, 모를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는 그의 쾌락을 똑바로 보게 했다. 그는 치욕과 충격의 구렁텅이로 떨어졌고 죄의식에 사로잡혔다. 쾌락은 그에게 죄였다. 그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러니까어떤 의미에서 그는 연희에게 쫓겨난 것이 아니라 연희로부터 달아난 것이었다.- P301

그는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어쩔 수 없다는 듯, 거듭되는 제안을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포즈를 취하며, 의지가 아니라 숙명이라는 식으로, 당연하고 불가피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선택을했다.- P317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다."라는 여행기 저자의 문장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진술이라는 생각이들었다. 그 생각은 다른 많은 생각들을 거느리고 떠올랐다. 정확한 내막을 알아낼 수 없는 일이 있고, 정확한 내막을 알아내는 것이 적절하지 않거나 무의미한 경우가 있고, 정확한 내막을 알아낼 수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 있고,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다고 말해야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다고썼고, 그것은 어느 쪽인가의 진실을 대변할 것이다. 그러자 다시금강영호가 초소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그가 언급한 1970년대 초는 초소가 세워진 시기라는 데 생각이 미쳤고, 그러자 뜻밖에 그가 초소에 대해 아주 잘 알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초소에 대해 아주 잘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그것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역설적인 증거일 수 있다는 생각이 뒤따랐다.-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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