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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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변의 한국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인간의 처참한 실패를 보여주는 쓸쓸한 이야기. 다만 해피엔딩이 더욱 더 사람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소시민의 행복은 정신의 승리로써만 이룩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져서 인가.

이정도면 남성작가가 쓴 페미니즘 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나 지난 몇 십년간 한국을 근간 없이 성장시킨 남자들의 찌질함은 작가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소설 전반에 두드러졌고, 결국 인간의 삶을 진정한 인생으로 만들어내는 구원자 역할은 여성들의 몫이었다. 만수같이 판타지적인 요소가 깃든 캐릭터를 제외하고는....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가 현실감 있고 설득력 있고 사실적이었다.

만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말이 늦었고 매사에 이해가 더뎠다.
잘 모르면 질문을 하라고 했다. 질문과 대답을 통해 어려운 문제도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질문하는 사람도 배우지만 대답하는 사람도 배운다. - P25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아버지는 제어장치가 전혀 없는 폭발물 같았다. 그런데 나 또한 그런 아버지의 폭군 기질을 물려받은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물론 나는 아버지처럼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맨정신으로도 아버지처럼 발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게 아버지와 다른 점이었다. 술을 마시기 전에는 그래도 묵묵히 일을 하고술을 마시고 미쳐 날뛰고 난 뒤 다시 조용해지는 아버지와 달리 나는 발작 전후에 침착하고 냉정했고 발작의 원인이 된 것을 기억해두었다가 다음 발작 때 보탰다. - P199

조건이 환경을, 환경이 인간을 바꾼다. 돈이 세살 때부터 시작돼 이십년을 끌어온버릇도 고친다. 호칭 역시 조건이다. - P215

그 때문이었다. 그랬다. 내가 혼자 며칠째 지독한 몸살을 앓고 있을 때 병문안을 하러 왔다면서 설렁탕을 냄비에 담아 왔다가 죽은듯 잠들어 있던 나를 덮친 그를 용서한 것은, 외로웠다. 힘들었다. 무서웠다. 무릎 꿇고 비는 인간이 의지가 될 정도로. - P267

상처에서 나는 진물처럼 눈물이 흐르고 흘렀다. - P274

당사자가 아니면 참 재미있는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식사를 하고 난 손님들이 구경을 하느라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 P293

문제는 연탄이었다. 방의 호수별로 구역을 표시하고 들여놓은연탄을 쌓아놨는데 슬그머니 한두장씩 없어지는 일이 잦으니까 매일 숫자를 세어보게 되고 서로를 감시하면서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그러니 가난하고 가진 게 없는 사람들끼리 싸울 일이 더 많은거였다. 그 연탄을 우리에게 팔아먹고 돈 많이 벌고 세금 많이 걷고 영원히 부와 권력을 물려주고 물려받을 인간들하고 싸울 생각은 하지도 않고, 쳐다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비슷한 처지의 가난한 인간들끼리 머리 뜯고 대가리 깨지고 피 흘리며 싸우고 또 싸우는 것이었다. - P304

비꼬고 비웃는 건 속이 배배 꼬인 어른보다 더 잘했다. 타고났다. 천재가 맞았다. 사람 속을 긁어 피가 철철 나게 하는 데는 소름이 끼쳤다. - P323

생각하면 카지노도 고마운 곳이다. 쓰레기장이 없으면 쓰레기를어디다 버리겠는가. 쓰레기인 줄 판별하기까지의 시간을 단축시켜주기도 하는 것이다. - P333

투석을 하러 가서 보면 병원에 누워 있는 여자 환자들 중에 옆에남편이 붙어 있는 경우는 열에 하나도 안됐다. 반대로 남자가 누워있으면 열에 아홉은 아내가 간호를 했다. 여자들은 자기가 스스로 간호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게 한국의 여자 팔자였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기 간호를 하면서라도 병원에 편하게 누워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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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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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장강명 작가를 좋아하진 않는데 이번 책은 너무 사실적.... 아니 책의 문장처럼 사실은 아니지만 진실이라 웃프고 매력적이다.

음모론을 신봉하고 현상 이면에 숨은 진실을 파악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영화스태프들 처우가 열악한 것도 사실이고요. 삼궁은 이렇게 표현하더라고요. 사실은 아니지만, 진실이라고. - P36

일단 전파속도는 엄청 빨랐어요. 글을 올리자마자 그야말로 마른들판에 불이 번지듯 온갖 게시판으로 퍼져갔어요. 사람들도 알고 있었던거죠. ㅇㅇ전자에서 노동 탄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영화판의 노동 조건에 비하면 천국 같은 직장일 거라는 사실을. 노동자 권익이니 남녀평등이니 하는 말들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 중에 자기 단체 직원들 권익 챙겨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즈음에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건드리는 영화가 너무 많이 나왔잖아요, <도가니>이후로, 그 감독들이나 제작사들이 그런 이슈를 실은 돈벌이로 활용하고 있다는 걸 사람들도 눈치채고 불편해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그 임금체불 건이 딱 터진 거죠. - P37

인터넷이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권위를 타파해서 민주화를 이끌 거라고도 믿었어. 거대 언론이 외면하는 문제를 작은 인터넷신문들이 취재하고, 인터넷신문조차 미처 못 보고 넘어간 어두운 틈새를 전문 지식과 양식을 갖춘 블로거들이 파고들어갈 줄 알았어.
독재 국가에서는 지금도 인터넷이 그런 고발자, 감시자 역할을 해. 그런데 한국에서도 그런가? 인터넷신문이나 블로거들이 과연 그런 역할을하냐고, 아니지. 그냥 거대 언론이 하던 나쁜 짓을 아마추어들도 소자본으로 하게 됐을 뿐이야. 거대 언론이 점잖게 기업에 겁을 주며 광고를 따냈다면 인터넷신문들은 대놓고 삥을 뜯지. 블로거들은 동네 식당을 상대로 협찬을 요구하고, 이것도 민주화라면 민주화지. 협박, 공갈, 갈취의 민주화. 누구나 더럽고 야비한 짓을 할 수 있게 되는 민주화. 그런 대신에인터넷신문들과 블로거가 기존 언론이 쓰지 않던 무슨 좋은 기사를 내놓느냐 하면, 이런 거야. 누구누구 아찔한 뒤태, 남녀 생각 차이 열네 가지, 노래 따라 부르는 일본 강아지 화제 - P55

진보주의자 열 사람이 모여서 시국을 논의하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그중세 사람은 극좌파로 변하게 돼.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고, 그 사람들은 자기가 극단적이라는 사실도 몰라. 왜냐하면 자기 옆에 있는 아홉 사람의 평균 의견이 자신과 크게 차이 나지 않으니까.
그렇게 인터넷을 오래할수록 점점 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돼. 확증 편향이라는 거야. TV보다 훨씬 나쁘지. TV는 적어도 기계적인 균형이라도 갖추려 하지. 시청자도 보고 싶은 뉴스만 골라 볼순 없고, 하지만 인터넷 커뮤니티들은 달라. 사람들은 이 새로운 매체에 어떤 신문이나 방송보다도 더 깊이 빠지게 돼. 그런데 이 미디어는 어떤신문 방송보다 더 왜곡된 세상을 보여주면서 아무런 심의를 받지도 않고 소송을 당하지도 않아. 커뮤니티 사이트들은 최악의 신문이나 방송사보다 더 민주주의를 해치지. - P57

"1980년대 중반부터 한 10년간 가족계획이라고, 정부가 둘째나 셋째낳는 걸 상당히 규제했어.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이런 표어도 있었지.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아선호사상이 심하잖아. 또그때쯤 태아 성별을 감별하는 기술이 개발됐어. 그래서 임신을 했는데딸이라고 판정이 나면 낙태를 했던 거야. 어마어마하게.
그러니까 자네 세대 남자들이 연애를 못해서 고생하는 건, 자네 부모세대들의 잘못 때문이야. 물론 자네 부모 세대들은 그 문제에 대해 일절 책임을 지려 들지 않지. 책임은 고사하고, 자기들이 그런 문제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몇 없을 거야. 자네들만 피해자가 된 거지." - P60

아무래도 남자들이 친밀감이나 공감보다는 유머나 지식이 주는 짧은 쾌감을 주로 추구하잖아요. 그러다보니 가상의 커뮤니티에 대한 애착심이 덜해요.
하지만 밑바닥은 다 똑같은 겁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인정 투쟁. 모두가슴에 단도 한 자루씩 숨기고 있다가 기회만 생기면 팍! 그런데 저희들은 언제 사람들이 미쳐서 그 칼을 휘두르는지 그 타이밍을 알아낸 거죠.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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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 김훈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4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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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이 기억에 가물가물한 사람들은 뒤에 충무공연보를 먼저보고 읽기 시작하면 좋을 듯.

아무리 아름다운 문장으로 작품을 구현해 내도 조선 3대 똥이라는 선조의 지독한 찌질함이 가장 기억에 남는건 어쩔 수 없다.
사실 군사정권이 만들어낸 영웅의 서사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읽어 봤다’는 득의를 뽐내기 위해선 필히 권장할 만한 책이니까.

나는 정치적 상징성과 나의 군사를 바꿀 수는 없었다. 내가 가진 한 움큼이 조선의 전부였다. 나는 임금의 장난감을 바칠 수 없는 나 자신의 무력을 한탄했다. 나는 임금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함대를 움직이지는 않았다. 나는 즉각 기소되었다. 권율이 나를 기소했고 비변사 문인 관료들은 나를 집요하게 탄핵했다. 서울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는 동안 나는 나를 기소한 자와 탄핵한 자들이 누구였던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정치에 아둔했으나 나의 아둔함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 P23

여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당에 쓰러져 울었다. 몸 안으로밀어넣으려는 울음소리가 몸 밖으로 밀려나오고 있었다. 그 여자는 전신으로 울고 있었다. 작은 몸뚱어리 어디에 그토록 깊은 울음이 감추어져 있었는지, 여진의 울음은 길었다. 강 건너편에서 달이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의 울음이 스스로 추슬러질 때까지, 흔들리는 어깨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 P28

나는 다시 붓을 들어 맨 마지막에 한 줄을 더 써넣었다. 나는 그 한 문장이 임금을 향한, 그리고 이 세상 전체를 겨누는 칼이기를 바랐다. 그 한 문장에 세상이 베어지기를 바랐다.
…신의 몸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못할 것입니다. - P46

잘 죽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길은너무 멀어서 끝은 보이지 않았다. - P79

상처가 아물어도 통증은사라지지 않았다. 살아 있는 아픔이 살아 있는 몸속에 박혀 있었으나 병의 실체는 보이지 않았다. 병은 아득한 적과도 같았다. 흐린날들의 어깨 쑤심증은 내 몸속에 들어와 살고 있는 적의 생명으로느껴졌다. - P155

술 취한 명의 하급 지휘관들이 히데요시의 유언시를 노래로 부르며 춤을 추었다. 술 취한 이국 군대들이 부르는 노래가 칼처럼내 마음을 그었다. 그날 나는 취했다. 내 마음속에서 내 칼이 징징징 울면서 춤을 추었다. 저러한 노래, 저러한 시구를 이 세상에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고, 진실로 이 남쪽 바다를 적의 피로 붉게 물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내 술 취한 칼은 마구 울었다. - P278

서울로 올라간 감찰관은 내가 임금에게 보낸 장계의 원본을 제시해줄 것을 조선 조정에 요청했다. 조정은 겁에 질렸다. 조정은진린에게 가해질 천자의 노여움에 조바심쳤다. 선전관이 고금도수영에까지 내려왔다. 선전관은 사실을 요구하지 않았고 해결책을 요구했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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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나날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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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장류진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보다 크게 흥하지 못했던 건 작명의 실수이거나 출판사 마케터의 문제거나 실패한 북디자인 때문이거나....아니면 유쾌함이 좀 부족했나

직장생활과 사회초년생들의 너무나 일상적인 감정의 사실적인 묘사로 속이 다 시원해지는 통쾌함.... 그 뒤에 밀려오는 씁쓸함. 그런식의 흔하지만 표현하기 어려운 진귀한 공감.

북디자인은 너무 아쉽다. 민음사 천재디자이너라면서 유튜브를 본 기억이 나는데...... 의도는 알겠으나 너무 과하게 양옆으로 밀린 감이 있다... 나중에 개정판 양장본 나오면 다시 구매하기로.......

"형, 데리러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가 알아서 찾아가도 되는데."
연승은 순식간에 그의 대외적인 모습 명랑하고 싹싹하며, 약간은 비굴한 하인의 모습으로돌아와 있었다. - P20

그는 아내에게 깍듯하게 존칭을 썼다. 한 마디한 마디 반듯하고 정성스럽게 했다. 진아는 자신이날마다 마주하는 회사 사람들, 늘상 서로 힘을 재어 보며 재치 있는 말 한마디에도 숨은 의도가 담겨 있어 곱씹어 보게 만드는 사람들 자신도 그중하나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 을 떠올렸다. 그래서인지 소중한의 태도가 뜻밖에 신선하게 여겨졌지만, 사무실 안에서라면 그런 부류의 인물은 잘해봐야 외계인, 지루한 샌님쯤으로 여겨지며 고립될게 분명했다. - P21

그녀의 가족을 움직이는 건 그들이 속한 집단에서 공유되는 일종의 믿음, 금기, 평판에 대한 강한 의식 같은 것들이다. 이것들은 한데 얽혀 구분이 되지 않았고, 일상적인 두려움을 만들어 냈다. 삶에 대한 두려움. 그녀는 그녀의 엄마를 구속하고 있던 그 막연한 두려움, 공포로부터 도망치려고 애를 써 왔고, 어쩌면 자신의 인생 전체가 내내 거기서부터 벗어나려는 도주의 과정이리라는 걸 그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 P64

바깥현기증이 일어나는 순간이 있다. 현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채 인식하지도 못했던 광경이 갑자기 빛을 비춘 듯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낼 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고 싶지만, 그조차 허락되지 않을 때.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상률과 하려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들은 살림을 꾸리고 있었다. 이건 결혼과 다를 바가 없었다. 집을 구하고, 그 집을 채울 가전제품을 사러 다니고 있었다. 그게 결혼의 뜻이었다. 이번 이사는 이전 생활의 연장이 아니었다. 그저 방 하나 더 많은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준비되지 않은 무대 위로 등을 떠밀리는 기분이었다. - P80

엄마는 한 달 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뿐인 딸에 대한 기대를 점점 내려놓았다. 하지만엄마뿐만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한기대를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자신이 누릴 수 있을줄 알았던 것. 때가 되면 손에 들어올 줄 알았던모든 것들. 어릴 때부터 보고 배웠던, 교과서와 텔레비전이 말하던 이미지와 삶의 방식들을, 그리고그녀는 훌륭한 딸이 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였다.
훌륭한 딸이 되려 할수록, 그녀는 불행해졌다. 어쩌면 훌륭한 딸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야 할 거라고. - P87

게다가 내가 지금껏 뭔가를 사고 찾을 때마다 검색해 참고했던 블로그 후기들도 죄다 업체를 통해작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반인이 운영하는 블로그 글이 검색 결과 상위에 노출되기란거의 불가능했다. 맛집이나 병원처럼 사람들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일수록 그랬다. 많은 사람들이자주 검색하고 참조하기 때문에 시장이 되는 것인데, 시장이 되면 사람들이 원하는 진짜 정보는 닿지 않는 곳으로 밀려난다.
이것이 경제구나.
나는 세상의 이치를 목도한 사람처럼 약간의 경이로움과 체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 P107

그보다 더 열심히 일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완전히 자발적으로, 20대 중반까지는 돈을 지불하고 뭔가를 학습하고 받아들이기만 했다. 그런데 이젠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받았고, 내 머리와 손끝을 써서 뭔가를 생산해 냈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쓸모 있는 존재라는 느낌, 조금만 더 시간을 할애해 정성을 기울이면 결과물이 더 좋아지는 게 눈에 보였다. - P108

그러나 실제로벌점 제도가 어떻게 운영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N포털의 로직은 공개된 바가 없었기에, 업계에는진위를 알 수 없는 추측과 속설만 무성했다. - P109

그러고는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내가 회사 차릴 때 연락하면 바로 온다고 약속해."
나는 애매하게 웃어넘겼지만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따져 보면 나를 높이 평가해 주는 말인데도, 그때 내겐 그 말이 뻔뻔하게여겨졌다. 곱씹을수록 불쾌했고, 화가 났다. 바로온다고 약속해. 마치 그동안 자기가 내게 굉장히잘해 주었던 것처럼, 내가 굉장히 대우받으며 일했던 것처럼, 심지어 질문형도 아니었다. 물을 필요도없다는 듯이, 나도 당연히 자신과 일하고 싶을 거라는 듯이 말이다. 나는 그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 P128

엘리베이터가 왔고, 선화는 다른 얘기를 이어갔다. 방금 전 자신이 느낀 감정이 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그냥 제일 성실할 것 같아 뽑았다고 했을 때 느낀 기분이었다. 가슴께에서 막 고개를 내민 연한 싹에 끓는 물이 한 바가지 끼얹어진 듯한. - P142

"오늘은 일찍 들어가 보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선화가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점심에도 늦었는데,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그녀는 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그리고 선화 또한 자신이 의식하는 것들을 의식하도록 만들었다. 그 많던 금기들.…… - P143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있을 때입니까?"
그가 길을 건너 다가오면서 말했다. 두 사람의 얼굴을 살피더니, 아무것도 모르는군, 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분들이 기사도 안 봤나 보네. 김정일 죽었대요. 지금 난리 났어요."
상미와 효정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을 보고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담배를 꺼냈다. 그는30대 중반인데, 뱅글거리는 입매에 늘 모든 걸 안다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 P230

"이겼지만 패배한 기분이었다." (236쪽)라는 상미의 말은 적대와 경쟁을 부추기는 세계에서 적을 물리치는 데는 성공했으나 세계의 부조리와 부정의는 외면해 버린 그녀가 자신을책망하며 던지는 자조다. - P308

특히 팀원의 의식주에까지 관심을 갖고 호의를 베풀던 은정이 다른 팀들과의 신경전에서는 공격적이었다는 선화의 기억을 참조할 때, 은정은 팀을 마치 ‘가족‘처럼 꾸려 온 것 같다. 경쟁과 대결이 일상화된 세계에서 가족만큼은 유일한 안식처로 기능해야 한다는 한국 사회의 관습적 인식을 은정 역시 갖고있었을 것이고, 선화의 복장과 식사와 주거에 대해애정 어린 참견을 해 온 것이다. 선화의 이직이 은정에게 준 과장된 상실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된다. "난 네가 날 버렸다고 생각했어." (153쪽) - P314

한편 동기들은 일을 잘 못했다. 팀장은 홍성식의 의견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팀장과 점점 사이가 벌어졌다. 자신을 인정해 주어야 할상사가 그러지 않자, 그는 상사의 자질을 의심했다. 팀장이 옛날 사람 같다고 했다. 퀄리티 높은 콘텐츠를 요구하는 것도 불만이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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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반양장) 문학과지성사 이청준 전집 13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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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고전이 될 작품들, 개인적인 독서 시기에 약간 앞서있어 쉽게 접하기 힘든 작품들을 천천히 읽어보려는 계획이다. 한승원, 김승옥, 이청준.... 등등.
눈길은 이제 수능에도 나오는 문학인가 보다. 하긴 내 수능 시절에도 조세희작가의 작품이 나와서 다시 한번 베스트셀러가 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이청준과 동시대 문학작품이니, 조세희작가는 좀 더 일찍 수능의 덕(?)을 본 거라고 해야 하나. 다만 이런 문학‘작품’들이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아지는 것이야 반가울 일이지만 수능으로 인해 그 순수함이 더럽혀지는 안타까운 일도 불가항력적이다.

한국 고전에 올라선 작품들보다는 읽기 편하지만, 현시대의 문학들보다는 조금 가독성이 떨어지는 부분도 있었다. 아직 시대를 아우르는 감성을 파악하고 사유를 체화하는데 능력이 닿지를 못하는 부분이라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 시대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조금은 변했기 때문에 (굳이) 문제제기를 할 부분을 찾아낸다면 없지 않겠지만, 최근 고전을 읽다 보면 생기는 가치판단의 변화들 때문에 혼란스러운 일은 매한가지다.
당시의 감성은 확연히 현재의 감성과는 좀 더 차분한 속도감인 것 같다. 분명 극단과 혼란의 시대라고 하는 격변의 시기인데 큰 사건도 왠지 잔잔하게만 느껴지는 기분이랄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불 머금은 항아리>와 <잔인한 도시>였다. <소리의 빛>은 너무 가학적인 정신세계의 예술관이라 몰입도는 높지만, 감동이 오는 작품은 아니었던 것 같고 <불 머금은 항아리>가 예술가의 성장을 보여주는 한편 영웅의 실패를 즐거워하며 ‘소장’까지 하려는 빈약한 인간의 심리에 대한 조롱까지 가미되어 몰입도는 좀 떨어져도 긴장과 감정이 은은하게 지속되는 작품이었다.
<예언자>나 <얼굴 없는 방문객>은 흥미롭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미신적 서사에 정당성을 주는 것 같아 별로고, <겨울 광장>은 먹먹한 여운이 있지만, 현시대 가치판단의 잣대를 잠시 옮겨두고 봐야 하는 점도 있었다.

죽은 사기를 깨 없애는 데에 그 사기를 구워내는 법칙이 생기는 게요. 죽은 사기들을부수면 부술수록 살아남은 우연들이 남아서 분명한 법칙의 묶음을이루는 이치지요. 그래서 이 사기장이 일에도 그 나름의 보람이나법도가 정해져온 것이오. 그런데 노형 같은 사람이 많아서 그 사람의 실수들을 찾아 엮어보시오. 아무 곳에도 신용할 법칙이 남아나지 못할 게요. 실수가 없을 사람도 없고, 실수가 없는 일이 없을수도 없지만, 또한 그 실수를 사람답게 감싸고 아껴주는 것도 사람 나름의 생각일 터이지만, 그런 사람이 들끓다 보면 세상은 그저 아무 곳에도 법도가 없는 무법천지가 되고 말 게요…..." - P193

"가마 일이란 그저 나무를 지펴 불길을 내는 것만으론 흙이 제대로 구워지질 않는 법이오. 가마 속의 불길이 붙을 때는 사람의가슴으로 옮겨붙어와서 불을 때는 사람도 그 가마 속의 흙덩이들과 함께 불길을 참으며 심혼이 뜨겁게 타올라야 하오. 그 불길로사람은 자기가 지녀온 잡념을 깡그리 태워 없애서 가마 속의 흙덩이들과 오롯한 정성으로 함께 타올라야 하는 게란 말이오. 그래야사기다운 사기를 얻을 수 있는 게요. 말하자면 가마의 불을 때는일은 불 때는 이 자신의 불길을 피워 올리는 것이오. 그래서 그 불때는 일이 가마 일을 배우는 근본인 것이오."
"그런데 그 젊은이에게 이제 비로소 불길이 옮겨붙은 줄 어른께선 어떻게 아셨다는 겁니까?"
"그 아인 여태까지 죽은 사기와 산 사기 구분도 제대로 못해온위인이었소. 구분을 못하니 사기 깨기가 무엇보다 두려웠소. 하지만 불 때는 일을 익히기 시작하면 죽은 것과 산 사기의 구분은 저절로 익혀지오. 제 불길로 익은 흙이 제 눈에 어떻게 분별이 안 되겠소. 제 불길로 제가 타지 못하면 사기도 제대로 구워지질 못하오. 잡념이 남으면 불길이 사람으로 옮겨붙을 리가 없지요. 가마속의 흙과 함께 탈 수가 없지요. 잡념이 모두 타 없어지지 못하면사기에도 역시 잡념이 옮겨 남소. 그 아인 여태 잡념이 들끓고 있었소. 그래 흙을 제대로 구워내지도 못했고, 죽은 사기와 산 사기의 구분도 못해왔소. 그 일이 그저 두렵기만 했소. 하지만 요즘엔많이 나아졌지요." - P195

하지만 그런 경섭의 자랑을 듣고 난 사람들 가운덴 그 사기장의생애와 항아리의 내력에 대한 감동 이외에 뒷맛이 이상스럽게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바로 그 사기장의 오랜 소망에도 불구하고 그 한 번의 실수의 흔적이 아직도 사기장의소망대로 거두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 말하자면 그 사기장의 이야기가 보여준 아프고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항아리는 바로 그절망스런 내력과 말 없는 소망까지 오히려 소중스럽고 값진 의상이 되어버린 기이한 운명의 역리(逆理) 때문이었다. 사기장에게로되돌아가야 하는 항아리의 그 말 없는 소망의 내력 때문에 오히려경섭의 늠름한 자랑거리가 되고 있는 씁쓸한 역리의 뒷맛 때문이었다. - P203

검표원 녀석도 그때그 비슷한 말을 한 바가 있었지만, 완행댁은 그 처녀 시절의 의붓터의 되풀이된 좌절감이 차곡차곡 마음속에 쌓여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원망과 좌절의 기억들이 그녀에게 자신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였고, 그 사라진 자신을 대신하여 자꾸만 다시 가엾은 딸을 떠나보내고 있는 형국이었다. 완행댁이 찾고 있는 딸아이는 바로 완행댁 자신을 대신하여 그 딸의 이름으로 그녀를 떠나가고 있는 완행댁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완행댁에겐 무엇보다 아름답고 소중스런 꿈이었다. 광장 사람들은 그 완행댁에게서 그녀의아비에 대한 두렵고도 원망스런 기억 이외에 그남편과 아들로부꿈을 빼앗아버릴 수가 없었다. 완행댁에게서 딸의 환상을 빼앗는것은 완행댁을 위해서나 광장 사람들 자신을 위해서나 더 이상 잔인스러울 수 없는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 배운 것 없이 늙어온 군밤장수 강 영감마저도 젊은이로부터 사연을 듣고 나선 오히려 이렇게 말했댔다.
"그렇담 젊은이도 알겠구만, 젊은이의 모친에게 그 딸을 찾아나서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모친을 얼마나 상심시키게 될 일인 줄을말이여. 젊은이의 모친은 지금 그 딸아이에 의지해서야 비로소 자기 신세에 얼마간 너그러워질 수가 있는 것이고, 그 딸아일 의지하고서야 세상이 훨씬 견딜 만하게 되어가고 있으니께 말일세. 뭣보담도 모친은 지금 그 딸아일 쫓아서 자기 자신을 찾아 돌아댕기고 있는 거 아니겠느냔 말이여. 그러니 나 같으면 여기서 자꾸 모친을 집으로 끌어들이려 하질 않겠구만, 여기서 그냥 가여운 딸아이 소식이나 기다리게 모친을 놔둬드리는 게 나을 게란 말이여."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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