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어떤 갈등이 촉발될까라는 설정이 상당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고통이 사라진 사회에서 고통을 신성시하는 사이비 종교의 등장으로 발생하는 사이비 범죄에 대한 내용이었다. 기발한 상상력이 사이비 종교에 대한 혐오로 점철되는 소설이 되어버려 아쉽다.
이 작가의 소설은 상상력이 특출나지만 장르소설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심오한 문제의식이 조금 부족했던 것 같다. 기대에 살짝 미치진 못했지만, 그래도 종종 챙겨보고 싶은 작가이다.

그들은 도스토옙스키를 읽고는 고통을 겪지 않는 인간은 신의 구원을 갈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고통이 없는 상태가 죄악에 빠진 상태보다도 더욱 무서운 타락이라는 주장을 수긍했다. 그들은 통증의 신체적 감각뿐 아니라 고통에 수반되는 두려움, 절망감, 모멸감, 자괴감, 분노 등의 정서적 반응에도 주목하며 이것이 영혼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므로 고봉은 곧 영혼이자 인간의 정수이고, 고통의 근절은 영혼의 멸절이자 신에 대한 거부이며 구원에 대한 모독이었다. - P18

중독되지 않고 내성이 생기지 않는 강력하고 안전한 진통제의 등장은 고통의 개념, 통각의 문화를 서서히 그 러나 확신하게 바꾸었다. 통증은 그 부위나 정도와 관계없이 참는 것이 아니라 간단하게 조절하거나 퇴치하는 것으로 변했다. - P18

그리고 동서고금을 통틀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삶의 의미. 그 삶이 고통이라도, 거 기에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다면 사람은 어떻게든 견뎌낸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이 오래 지속되면 고통을 견 며내는 것 자체가 삶의 의미가 된다. 삶의 의미를 고통에서 벗어나거나 더 건강하고 자학적이지 않은 방식으 로 찾을 능력과 자원은 이미 고통을 견디는 데 소모되어 사라진다. - P19

거기에는 초월도 깨달음도 없었다. 그저 인간의 신체에 대한 이해가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신체를 갖는다는 것은 욕구의 발생과 그것의 한시적인 충족이 반복되는 생존의 투쟁이며 그 모든 과정 자체가 또한 고통이라는 쓸쓸한 결론이었다. - P105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얄라알라 2023-12-31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입부만 읽다 쉬고 있는데 충분히 강렬한 소설이었어요. 틈새를 타서 종교와 범죄가 사람들을 교란하는 내용이군요. 다시 책 펴야 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