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엄마 오늘의 젊은 작가 25
강진아 지음 / 민음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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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일지라도 이렇게 진부한 신파라면 그런 능력의 부재는 부끄럽지 않다. “......시끄럽다”는 한줄에 눈물이 핑 돌기는 했지만...
그래도 누군가 겪었을 고통을 나같이 무시하려는 의지는 어쩌면 자기방어적인 수단일지도 모른다고 변명을 해보련다.

엄마의 죽음을 남자친구의 죽음과 대비되게 풀어나갔으면 좀더 재밌지 않았을까싶다. 자세한 설명도 없는 남자친구의 죽음은 앞에 왜 끼워넣었는지, 좀 아쉽다.

언니는 정아가 불편한 친가라도 되는 양 적의를 표했으므로 덧붙이려던 질문은 삼켰다. 그리고 그날 밤, 혼자 이리저리생각해 보니 엄마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자신도 그의 가족을 장례식 이후에 만나지 않는다. 그의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존재만으로 상실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역시, 불편하기만 한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은 그 불편의 구덩이를 급하게 메우려고 시집가야지, 시집가야지, 합창을 해대는 건지도 모르겠다.- P93

이모에게는 모두가 타자일 뿐 아이와 어른의 차이가 없다. 손윗사람이든 손아랫사람이든 모두가 불편하고 어렵다.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정아 자신도 같은 문제를 겪고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모두가 어렵다.-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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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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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과 가족들이 마치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의 할머니도 어느 누구의 할머니만큼 특별하고 소중하다. 그분의 이야기가 시선의 이야기처럼 남아있다면 그 후손인 나의 가족들의 이야기는 어느 지점에 수렴해 있을까 상상하니 문득 할머니가 더 보고 싶고 애틋해졌다.
시선이 깔아주는 멍석에 가족들의 삶의 이야기가 놓이는 소설인데 가족이라 그런지 인물들이 좀 비슷비슷하고 평면적이라 아쉬움이 있었지만, 워낙 독보적인 시선을 강조하려 한 의도라고 생각한다.

찻잔을 앞에 두고 허벅지가 불편할 때까지 앉아 있었더니, 액자에 햇빛이 들어 반사가 심해졌다. 화수는 액자 유리에 비친 자신을 보았고 관자놀이와 턱, 목 아래로 이어지는 흉터를 살폈다.
분노로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테이블을 손바닥으로밀며, 한 발을 딛고 또 한 발을 디뎠다. 무릎과 어깨가 어색하게움직였지만 무시하고 벽을 짚었다. 숨을 고르고 욕실로 걸었다.
분노를 연료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비웃어주고싶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나와 내 할머니만 알고다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P18

"아이구, 무서워라. 하지만 무서우면 잘 만든 거겠지. 근데 원래 예술보다 예술 조금 옆이 더 재밌다. 나도 그랬었다."- P67

명준은 난정이 직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어쩐지 자기 탓인 것도 같았다. 아이가 아팠고, 돈이 급했다는 흔해 빠진 이유로 저 특별한 여자를 주저앉힌 것이 세상인지자신인지 헷갈렸다.- P90

현장에서 순순히 자수하여 삼 개월간 구금 생활을 한 기민철은초범이며, 반성하고 있고, 희석한 염산을 사용했다는 점이 참작되어 징역 이 년에 집행유예 삼 년을 받았다. 그리고 피해자들이 민사를 막 시작하려고 할 때 자살했다. 염산을 쓰지는 않았고, 욕실수건걸이에 목을 매달았다.
죗값을 치르지 않고 도망쳤다. 그건 도망이었다. 화수는 잊을수 없었고 늘 화가 나 있었고 이제 그 화는 화수만을 해쳤고……- P110

입지가 애매하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예술 애호가였다.- P113

요제프를 데리고 다니면일종의 인증을 받을 수 있으면서 과시도 가능했던 게 아닌가 짐작한다. 그는 터키인으로도 인도인으로도 중국인으로도 보였고, 특히 마티아스의 제자였던 젊은 축들은 자신들이 히틀러 유겐트처럼 보일까봐 늘 신경썼으므로 그를 끼우는 편이 나았다. 세계시민처럼 보이려는, 그림의 문제였다. 요제프도 나처럼 장식품이었다.
나보다야 지위가 나았지만,- P114

"할머니는 할머니의 싸움을 했어. 효율적이지 못했고 이기지못했을지 몰라도, 어찌되었든 사람은 시대가 보여주는 데까지만볼 수 있으니까."- P182

특별히 어느 지역 사람들이 더 잔인한 건 아닌 것 같아.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에겐 기본적으로 잔인함이 내재되어 있어. 함부로 굴어도 되겠다 싶으면 바로 튀어나오는 거야. 그걸 인정할 줄아는지 모르는지에 따라 한 집단의 역겨움 농도가 정해지는 거고.- P235

"응, 당신은 괜찮은 벽이야. 내가 생각을 던지면 재밌게 튀어돌아와."
"나는 우리가 라켓 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쪽은 벽이었어?"- P237

빛나는 재능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사실 그들은 계속 같은 일을 했다. 그리고 조각하고 빚고 찍고……… 아득할 정도의 반복이었다. 예외는 있지만 주제도 한둘이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질문 하나에 온 평생으로 대답하는 것은 질리기 쉬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대가들일수록 질려하지 않았다. 즐거워했다는 게 아니다. 즐거워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질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어떤 일에 뛰어난 것 같은데 얼마 동안해보니 질린다면, 그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당장 뛰어난 것같지는 않지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볼 만하다.- P289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손맛이 생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무것도 당연히 솟아나진 않는구나 싶고 나는 나대로 젊은이들에게 할 몫을 한 것이면 좋겠다. 낙과 같은 나의 실패와 방황을 양분 삼아다음 세대가 덜 헤맨다면 그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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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의 식탁 오늘의 젊은 작가 19
구병모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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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을 강요하는 환상적인 공간에 현실이 들어앉아 그 환상을 허물고 마는 이야기.

‘네’가 ‘너’가 아닌 ‘넷(4)’이었다는 점도 스포라면 스포니 흘려봄.

속사정을 알 길이 없었으나, 정가가 12만 원이든7만 원이든 일단 3만 원을 무턱대고 부르고 보는 강교원의 사고 리듬은 분명 은오의 이해 바깥에 놓여 있었다. 아이를 위한다는 구실로 일상에서 가벼운 것부터 하나씩 둘씩 무리수를 두다 결국 수치라는 걸 모르게 되고 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걸까…….- P148

남자들 여럿이 들어 옮기면 식탁 옆으로 한두 대쯤 더 주차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으나 여자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중기를 동원하지 않고는 어려워 보였을뿐더러 왠지는몰라도 이 공간은 이렇게 활용해야 마땅한 곳 같았다. 어떤효용이나 합리보다는 철저한 당위가 지배하는 장소.- P191

물건 사진을 찍어서 홍단희에게 보내 버린 다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상의할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그렇게 솔직히 고백했을 때 홍단희가 자기 남편이 아닌 요진의 편에 서 줄 리는 없었고, 같은 여자 입장으로 봤을 때 좀 이상하다 싶어 추궁하더라도 신재강은 그 상황에 맞추어 떨 수 있는 너스레와그 자신에게 유리한 임기응변을 적어도 스무 가지는 갖추고있을 것만 같았다. 무엇을 선택하는 요진은 공동주택의 남자들에게는 예민하고 까탈 부리는 사람이 될 터였고, 여자들에게는 밑도 끝도 없이 이상한 사람이거나 남의 집 남편에게 꼬리 친 여자로 둔갑하여 이미지가 박제될 것이었다.-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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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같은 곳에서
박선우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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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흐름보다 감정의 선을 따라가는 소설들. 소재가 조금씩 가미된 퀴어소설. 남자가 쓰는 아주 가느다랗고 여리여리한 문장들.

무릇 관계란 오래될수록 견고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르고 허술해지기 마련이다. 영지는 어쩌면 우리도 이런 식으로 느슨해지다가 한순간에 툭 끊어져버리고 말겠지, 별것 아닌 일을 계기로 영영 볼 수 없게 되겠지,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오늘 같은 일을 계기로 말이다.
그건 무서워, 이쪽으로 와줘, 라고 부탁하는 상대에게 음, 시간이 애매한데, 멀기도 하고, 그게 그렇게 무섭나, 라고 퉁명스레 대꾸하는 순간에 벌어지는 일 같은 것. 이 세계에서 단두 사람만이 감지하게 될 무한한 거리의 확장을 의미할 터였다. 그러므로 조금 전에 걸려온 영지의 전화를 외면한다는건, 아니 외면한다기보다 그것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는다는 건 사전에 주어진 경고를 무시하는 처사가 될 것이었다.- P61

그건 그 상황에서 충분히 할 수 있을 법한 말이었으나, 결코 그 상황만을 평가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자격지심인지 뭔지 나는 엄마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오랜 시간 품어온 환멸 같은 것을 감지했다. 기분 전환은 핑계였을 뿐이고 엄마가그 한마디 너는 뭐 제대로 하는 게 없냐 - 를 받기 위해 나를 백화점에 데려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111

난생처음으로 자살이라는 단어가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느꼈다. 언제든 자살해버리면 그만, 이라는 각오가 아니면 대학원 동기들의 말버릇이기도 했다. 그토록 누추하고 암담한 학생 신분을 견뎌낼 수도, 자신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고 얼마만큼 더 수행해야 할지 도통 측정이란 걸 할 수 없는 학문의 심연을 버텨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나중에서야 이경은 깨달았다. 그토록 죽음과 곤궁함을 가까이에서 느끼던 시절만이 가장 사는 것처럼 살던 시절로 기억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P203

인턴으로서 이경이 맡은 업무는 간단했다. 이제는 아무도거들떠보지 않을 만큼 오래된 책자의 내용을 그대로 타이핑하거나, 계간지를 일일이 스캔하여 파일로 저장해두거나, 폐이스북과 블로그에 게시할 신간 홍보 문안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누가 해도 상관없지만 누구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고, 열과 성을 다할수록 본인만 초라해지는 잡무들이었다. 한나절을 쏟아부은 결과물에서 일말의 성취감도 돌려받을 수 없다는 걸 확인했을 즈음, 이경은 회사 직원들이 나이 어린 여자 인턴에게 바라는 특유의 명랑함이랄까 애교스러운 태도를 자신이 전혀 수행하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런 감정적인 서비스야말로 인턴의 주요한 업무였다는 걸 뒤늦게야알아차린 것이다. 그렇게 억지로라도 사교성을 꾸며낼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다소 어눌하고 까칠한 이미지로만 평가받던 이경에게 선뜻 먼저 다가와준 사람이 지수였다.- P201

일순 이경의 마음속에서 뒤틀린 희열이 차올랐다. 그녀는 임신 소식보다 자신의 그런 감정이 낯설고 놀라워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어쩌면 부지불식간에 지수를 질투했는지도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동갑의 그녀가 자기보다 행복해지는데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자기만큼 불행해져야 한다고는몇 번이나 생각해본 적 있기 때문이다. 파탄, 지수의 고백을듣고 이경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문구는 바로 ‘사랑의파탄‘ 이었다. 수업 중에 그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었다. 사랑이 지닌 특성 중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자기파괴성이다.-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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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이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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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너무 오랜만에 읽은 책이다. 그동안 다시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를 바랐는데 이제서야 그 여유가 생겼다. 그냥 기쁘다. 그것도 최진영의 소설이니까.

사람들은 왜 나이를 먹는다고 표현할까? 먹어봤자 소화도 안되고 똥으로도 안 나오고, 그저 버겁기만 한 그것을. 나는 나이 소화불량에 걸렸다. 소화되지 않은 채 내 안에 들어차기만 하는 그것때문에 자꾸 더부룩하다. 나는 어린 것도 싫고 나이 많은 것도 싫다. 어리면 어리다고 무시하고 늙으면 늙은이라고 무시하니까. 세상엔 어린이나 늙은이만 있지 젊은이는 없는 것 같다.- P124

똥을 더럽다고 생각하는건 인간뿐이다. 동물은 똥을 더러워하지 않는다. 엘리를 보면 알 수있다. 엘리는 똥을 몸에 막 묻히고 다니니까. 어릴 때 키웠던 강아지는 자기 똥을 먹기도 했다. 인간은 언제부터 똥을 더럽다고 생각했을까? 인간이 동물보다 불행한 이유 중엔 분명, 더럽다고 생각하는 게 너무 많은 까닭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엘리의 똥은 더럽다. 더럽게 많다.- P127

애인을 사귀기 전에는, 진짜 이 여자애가 날 사랑해주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할 것 같았다. 근데 사실, 그것을 이루면 행복하겠지 하고 상상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꿈을 이루는 것보다 꿈을 품는 게 더 행복했다는 말이다. 어쨌든 내 꿈은 행복해지는 거다.- P133

나도 안다. 보고 듣고 배운 게 있으니까. 하지만 세상은 만만치않고, 사랑은 밥 안 먹여주고, 젊을 때 바짝 돈 안 벌고 뜬구름만 잡다보면 늙어서 고생하고, 가진 게 없는 사람은 침묵해야만 하고, 일등이 아니라면 시도조차 금지되는 게 세상의 룰이라면 나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왜냐. 나는 꿈꿀 때가 더 행복한 인간이라니까! 불행을 피하겠다는 게 아니다. 진짜로 불행해지는 그때 그 순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되지 않나. 하지만 언제 올지도 모를 불행때문에 현재를 망치고 싶진 않다. 형이 정말 어른이라면, 나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가족이라면, 내게 미리 불행을 주입하는 대신 내가진짜 불행해지는 바로 그날 나를 위로하고 쓰다듬어줘야 한다. 위로와 걱정은 일이 일어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P134

신은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다. 이거, 중요하다. 소원을 이뤄주는 게 아니라 들어주는 거다. 듣는 건 나도 할 수 있다. 그럼 나도 신이다. 아니다. 소원을 듣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대부분의 소원은 불행한 이야기 다음에 따라오니까. 우리 엄마 소원은 내가 얼른 정신 차리고 취직해서 안정적인 돈벌이를 하는 거다. 그런 소원이 생긴 이유는 내가 지금 개차반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이건 엄마 표현이다. 형 표현에 따르면 실패자고). 엄마의 소원을 들으려면 엄마가생각하는 불행과 불만도 같이 들어야 한다. 지독한 일이다. 역시 신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연민도 자존심도 없어야 신을 할 수 있다.- P139

그래서 나는 화가 난다. 사람들이 내가 다니는 직장을 얕잡아서가 아니라, 자기들이 얕잡아보는 그 일마저 뺏으려 해서.- P75

소문은 의심을 만들고 의심은 진실을 만든다. 의심이 먼저든 소문이 먼저든 진실의 자리는 언제나 맨 끝이다. 사람들은 의심과 소문을 함부로 버무려 진실을 만들고 있다. 나는 그를 믿는다. 내가 믿는 것은 그의 무엇일까. 그가 내 남편이 아니었다면 나역시 그를 의심했을 것이다. 나는 그라는 인간이 아니라 내 남편인그를 믿는다. 이것은 정당한 믿음일까.- P54

무슨 일이든 꾸준히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성수가 불성실하거나 나약해서라기보다, 일회용품처럼 사람을 잠깐 쓰고 버리기 좋아하는 사람들 탓이 컸다. 날이 갈수록 건강은 안 좋아지고 체력은 달리고, 임금은 줄어들고 인력은 많아지고, 노동은 점점 우습고 하찮은 것이 되어갔다. 에누리 없이 정직하게 쌓여가는 건 나이뿐이었다. 제대 후부터 살 섞고 살아온 아내는 집을 나가 다른남자의 아내가 되어버렸고, 하나 있는 자식은 아비를 투명인간 취급하다 성인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입대해버렸다. 사정이 안좋아질수록 성수는 형제들과 연락하는 일에 점점 인색해졌다. 잘사는 큰형과 건실한 작은형을 볼 때마다 열패감에 휩싸여 의도치않게 말과 행동이 삐딱해졌다.- P20

그 침묵과 무례가 자신에게 들이미는 칼날처럼 느껴졌다.- P34

요즘은 종교가 유행인가. 듣도 보도 못한 신의 이름이 섞여 들리는데, 그들이 하는 말은모두 똑같다. 곧 종말이 온단다. 아니, 지금이 바로 종말이란다. 신을 믿고 사죄하면 신세계에 갈 수 있다. 모두 그런 말이다. 신의 취향대로 이 세계가 만들어진 거라면, 정말 그런 거라면, 악마도 신이다. 사람들은 악마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중이다. 정말 좋은, 사랑으로 가득한 완전무결한 신이라면 왜 종말이란 단어로 인간을 겁주겠나. 괴물처럼, 비겁하고 치사하게.- P161

가슴이 아프다. 선인장을 삼킨 것처럼 따끔거린다.- P207

아버지와 엄마의 사랑이 너무나도 철저하고 완벽해서 나는 외로웠다. 솔직히 나라고 하느님이나 돈과 연적이 되고 싶겠나, 자존심구겨지게, 외로움에서 탈출하기 위해 나는 별짓을 다 했다. 반항도해보고 착한 척도 해보고 아픈 척도 해보고 성숙한 척도 해봤다. 하지만 그 모든 ‘척‘은 나를 ‘성격은 지랄 같고 변덕은 죽 끓듯 하는 애’로 만들어버렸다. 절망과 오기로 똘똘 뭉친 한 시절을 보낸후에야 나는, 사랑받으려면 일단 무엇이든 사랑하고 봐야 한다는간명한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부모님과 달리 살아 있는 것을사랑하기로 했다.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할수록 더 외로워졌다. 그저 외로울 뿐이라면 어떻게든 꾹 참아보겠는데, 사랑과 함께 오는 외로움은 꼭 경멸이나 굴욕감의 손을잡고 왔다. 상대가 바람을 피우거나 거짓말을 할 때도, 약속을 안지키거나 이기적으로 굴 때도, 혹은 그럴듯한 데이트를 마친 뒤 평온한 상태로 잠들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감정의 끝물에서는 외로움의 맛이 났다. 무생물을 사랑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부모님도 외로웠던 거고, 외로운 것이 싫어 무생물을 사랑했던 거다. 무생물은 나를 배신하지 않고, 항상 내곁에 있으며, 그저 믿고 사랑하기만 하면 되니까.
옛 애인 중엔 사랑한다는 말보다 헤어지자는 말을 먼저 한 사람도 있다. 지긋지긋하니까 이제 그만 헤어지자는 사람 앞에서 나는, 헤어지려면 우선 사랑한다는 말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절대 헤어질 수 없다고 길길이 날뛰자 그 사람은 적선하듯, 그래, 그거 했다. 됐냐? 라는 말을 던지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 나는 그를 쫓아가 그의 입에서 끝내 ‘사랑‘이란 단어를 뽑아내고야 말았다. 그런 식으로 복수했다. 그는 아마 ‘사랑‘이란 단어에 알레르기가 생겼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하라며 표독하게쫓아다니던 내가 떠오르겠지. 젠장, 나라고 사랑을 그렇게 푸대접하고 싶겠나. 애태우고 주저하고 가슴을 부여잡으며 ‘사랑‘이란 말은 아끼고 아꼈다가 일기장에나 간신히 쓰던 때가 내게도 분명 있었다.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니다. 겨우 십년, 십년 전 일이다.-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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