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서비스 제공자의 형태나 금융상품 종류는 천차만별이지만, 금융이 수행하는 역할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자금의 이전과 중개 기능이다. 금융은 여유자금을 모아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제공해주며, 중개 시스템을 통해 자금이 결제된다. 두 번째는 자금의 관리 기능이다. 금융은 우리의 자산을 안 전하게 보관해주는 기능을 넘어 적극적인 운용과 투자를 통해 재산 형성에 기여한다. 세 번째는 위험관리 기 능이다.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사고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보험 같은 금융의 위험관리 기능을 활용하면 앞으로 닥칠 손실이나 재난에도 충분히 대비할 수 있다. - P6
기독교에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된 것은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이로 써 예수 사후 지속되어온 기독교 박해는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이후 392년에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 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같은 변화는 과거부터 이어져온 금융 관행에 제동을 거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노동 없이 얻는 소득은 불로소득으로 죄악시했기 때문이다. 다음 성경 구절에서도 드러나듯,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는 교회법에 정면으로 저촉되는 일이었다. - P29
이를 근거로 유대인은 일반적인 상업 형태를 벗어나 금융업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외국인에게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더라도, 형제들로부터는 이자를 받지 마라. - P32
중세 기독교 교리와 금융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된 것은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의 노력에 의해서였다. 대표적인 인물은 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며 종교개혁운동을 촉발했던 마르틴 루터였다. - P34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 간 충돌을 불러온 사건이지만, 유럽과 중동, 아시아 지역 사이의 교역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이들 지역의 길목에 위치한 지중해 인근 도시들은 그로 인한 최대 의 수혜 지역이었다. 이탈리아의 제노바, 베네치아, 피렌체, 피사 같은 도시들이다. 이 도시들은 천혜의 지리 적 장점을 바탕으로 12세기 말 이후 무역과 금융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했다. 템플기사단의 해체로 야기될 법한 금융의 공백 상태는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훗날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금융 중심지가 이동하기까 지 약 4~5세기 동안, 금융이라는 무대의 주역은 단연 이탈리아인 차지였다. - P45
14세기 초반 피렌체에서는 메디치 가문 이전에 유럽 최대의 금융가로 군림했던 두 집단의 영향력이 두드러졌 다. 바로 피렌체의 연대기 작가 조반니 빌라니가 ‘기독교 세계를 떠받치는 두 기둥"으로 묘사했던 바르디 가문 과 페루치 가문이다 - P49
화폐를 직접 지니는 데 따른 위험을 덜 수 있게 된 것은 이 시기 나타난 새로운 금융상품 덕분이었다. 바로 12 세기 말, 이탈리아 상인들이 널리 활용하기 시작한 환어음bill of exchange이다. - P54
이 시기 교황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은 실상 대단한 재력가들이었다. 그렇지만 자신들의 막대한 부를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청빈, 희생 같은 기독교 덕목에 반했기 때문이다. 불로소득을 죄악시하던 교회법상 예금 을 맡기고 이자를 받는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하기 어려웠다. 교회법을 따라야 하는 왕실과 귀족도 마찬가지였 다. 이 때문에 성직자나 고위 권력층에게는 자신의 돈을 은밀하지만 안전하게 불려줄 수 있는 사람이 그 누구 보다 절실했다. - P64
이와 같이 금세공업자가 발급한 증서는 단순한 보관증 이상의 기능을 발휘했다. 상인들 간에 자유롭게 주고받 을 수 있는 상거래의 교환 수단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거래 관행이 자리 잡자, 결국에는 보관증 소지자의 요구에 따라 지급의무를 부담한다는 증표로서의 성질을 갖게 되었다. - P68
금세공업자의 경험에 따르면, 고객이 금고 안의 돈을 직접 찾으러 오는 경우는 10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 나 머지 90퍼센트는 금고 안에서 잠자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고객이 맡긴 돈이 총 1,000파운드라면 100 파운드만 금고에 남겨두더라도 고객의 인출 요구를 감당하기 충분했다. 이를 기초로 금세공업자는 금고 안의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남몰래 빌려주었고, 이는 금세공업자를 더 큰 부자로 만들어주었다. 이런 모습은 현대의 은행들이 부분지급준비금 제도를 통해 새로운 돈을 만들어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P69
메디치 가문만큼이나 금융 역사의 많은 페이지를 장식한 가문을 꼽자면 단연 로스차일드 가문일 것이다. 메디 치 가문을 통해 근대 은행의 면모가 갖추어졌다면, 로스차일드 가문은 머천트 뱅킹merchant banking이라 는 새 영역을 개척하며 국제금융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 P92
1602년, 네덜란드는 동인도 지역과 무역거래를 하던 소규모 회사들을 통합해 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라는 하나의 회사를 설립했다. - P107
주식을 발행하는 회사 입장에서 보자면 주식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다. 주식이 발행되면 주주 들은 투자금을 납부해야 하는데, 이는 회사 운영을 위한 기초적이고 영구적인 자본을 형성한다. 대출거래에서 부담하는 채무와 달리 회사는 주주에게 약속된 시점에 돈을 갚아야 한다거나 이자를 지급할 의무가 없다. 회 사의 운영 성과에 따라 발생한 이익을 주주에게 배당금으로 지급하면 그만이다. 물론 사업이 부진하면 배당금 을 지급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이처럼 채무 상환의 부담 없이 거액의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식은 대단히 효과적이고 안정적인 자금조달 수단으로 기능한다. - P116
채권이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주식보다 훨씬 이전인 12세기 무렵이었다. 지중해 북부 아드리아해의 지배권을 두고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베네치아와 비잔틴제국이 벌이던 전쟁이 그 발단이었다. 당시 비잔틴제국에 맞서 함대를 구축해야 했던 베네치아로서는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런 경우 흔히 쓰이던 방식은 자국 민을 상대로 세금을 걷거나 금융가 집단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방식도 한계에 다다랐을 즈음인 1172년, 베네치아 정부는 새로운 해결책을 떠올렸다. 채권을 발행하는 것이었다. - P118
당시 신흥 국가로 부상하고 있던 미국 역시 남북전쟁이나 철도 건설 같은 사업을 위해서는 유럽 자본에 의존 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내에는 그만한 돈을 빌려줄 은행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유럽의 투자자들을 상대로 채권을 판매해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채권과 유럽의 자본을 연결해준 대표적인 인물은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Junius Spencer Morgan이었다. 모건 금융 왕국의 선구자와도 같은 인물이다. - P122
펀드란 투자자로부터 모은 돈을 공동으로 운용하고, 그에 따른 이익을 나눠주기 위한 투자의 한 수단이다. 펀 드는 이전의 방식과는 구분되는 전혀 새로운 유형의 투자 수단이었다. 펀드가 나타나기 전까지, 투자란 개인 차원에서 행해지는 직접투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투자 대상을 결정하고 이를 실행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투자자 자신이었다. 각자의 판단에 따라 은행에 예금을 맡기거나, 증권시장에서 주식이나 채권을 매입하는 것 이 일반적인 투자 형태였다. 하지만 펀드를 통한 투자에서는 투자자가 이런 일들을 직접 하지 않는다. 투자자는 투자금만 납입하고 실제 투자는 여러 단계를 거쳐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 P138
그에게는 시장의 움직임과 관계없이 언제든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는 투자 방안이 필요했다. 이것이 바로 헤지드펀드Hedged Fund의 출발점이었다. 이를 위해 윈슬로는 자신이 운용하는 펀드에 매입전략과 매도전략을 동시에 구사했다. 저평가된 주식을 매 입하되 고평가된 주식은 공매도를 통해 미리 매도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레버리지전략 도 함께 구사했다. 펀드 재산을 담보로 자금을 빌려 투자 규모를 확대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투자전략을 구사 해 20년간 펀드를 운용한 결과는 놀라웠다. 누적 수익률이 4,800퍼센트에 달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이름과 투자 스타일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1966년, 그가 이룬 투자성과가 <포춘〉 지를 통해 알려지자 비슷한 패턴을 따르는 펀드들이 잇따라 생겨났다. 그가 마련한 투자전략이 헤지펀드 운용 의 기본 원리로 활용되었음은 물론이다. - P156
금융시장에 참여하는 투자자들의 일반적인 전략은 롱전략long strategy(매수전략)이다. 가치 상승이 예상되 는 주식 같은 투자 대상을 사두고 가격이 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전략이다. 예상했던 대로 가격이 오른다면 수 익을 낼 수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손실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헤지펀드는 통전략과 함께 숏전략short strategy(매도전략)을 동시에 구사한다. 가치 상승이 예상되는 종목은 매수를 통해, 가치 하락이 예상되는 종 목은 매도를 통해 손실을 피하고 추가 이득을 얻고자 한다. 주식시장에서는 흔히 저평가된 주식을 매입하고 고평가된 주식을 매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숏(매도)전략을 실행할 때 주로 쓰이는 것이 공매도short selling다. 주식 같은 금융자산을 보유하고 있지 않더라도 투자은행 같은 제3자로부터 주식을 빌려 시장에 파는 방식이다. 헤지펀드는 빌려서 판 주식의 가격이 하락하면 이를 싼 가격에 매입해 빌린 기관에 되갚으면 된다. 이때 헤지펀드는 공매도한 주식을 내다 판 가격과 이후 매입한 가격의 차액만큼 추가 수익을 올릴 수 있다 - P157
보험대차 방식에 따르면 항해에 나서는 상인들은 선불 수수료를 지급하고, 그 대가로 항해 실패에 따른 위험 을 금융업자에게 부담시켰다. 이를 위해 활용된 것은 선박이나 화물에 대한 ‘가상‘의 매매 계약서였다. 다만 계약의 효력은 아래 그림과 같이 항해의 성공 여부에 따라 달리 취급되었다. - P192
이 같은 방식은 위험한 항해가 성공해야만 금융업자가 이익을 얻는다는 점에서 흔히 모험대차‘로 불린다. 이 는 세부적으로 보자면 무역상에게 대출을 제공하는 기능과, 고율의 이자를 부과해 위험을 인수하는 기능이 결 합된 형태였다. 하지만 대출과 이자 징수라는 형태를 띠고 있는 한, 고리대금을 금지하던 교회법의 제한을 비 켜가기 어려웠다. 13세기 초,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모험대차에 대해서도 정식으 로 문제를 제기했다. - P192
보험대차 방식에서는 교회법상 금지되던 대출이나 이자 지급에 관한 내용은 배제되었다. 상인이 지급하는 선 불 수수료는 오늘날 보험료와 유사했는데, 이를 통해 항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이후 보험대차를 활용해 위험만을 인수하는 방식이 보편화되자, 종전의 모험대차 방식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어갔다. - P193
런던 대화재는 많은 사람들에게 절망감을 안겨주었지만, 다른 한편 여러 방면에서 새로운 변화를 불러오기도 했다. 우선 대화재 이후 당시 런던에서 유행하던 페스트가 자취를 감추었다. 비위생적이었던 주변 환경과 전 염병의 감염원이 모두 불타버린 덕분이었다. 소방대를 창설하고 체계적인 소화전 시설을 마련한 것도 런던 대 화재로부터 얻은 교훈이었다. 이와 더불어 새 건물을 지을 때는 반드시 석조나 벽돌을 사용하도록 했다. 오늘 날 여행객들이 동경하는 런던의 풍경이 조성된 것도 이즈음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한편 금융에서도 의미 있는 변화가 나타났다. 바로 화재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의 새로운 금융상품이 생 겨난 것이다. 해상보험 이후 새롭게 나타난 보험상품은 니컬러스 바본Nicholas Barbon이라는 사업가의 노 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의사이자 건축사업가로서 더 큰 성공을 꿈꾸고 있던 그에게, 런던 대화재는 획기적 인 사업 아이디어를 떠오르게 한 계기이기도 했다. - P198
현재‘ 시점에서 거래가격이나 수량 같은 거래 조건을 미리 정해두고, 결제는 ‘미래의 특정 시점‘에 하도록 하 는 거래를 선도거래forward contract라 한다 - P236
변동환율제는 새로운 금융상품에 대한 수요를 촉발시켰다. 환율 변동에 따라 나라별로 환차손이 발생할 수 있 고, 그에 따른 경제적 위험을 관리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때 활용한 것이 파생상품의 일종인 통화선물이다. - P242
그러나 1971년 8월, 미국 닉슨 대통령에 의해 이와 같은 고정환율제는 사실상 붕괴되고 말았다. 미화 35달러 를 금 1온스와 교환해주는 종래의 기준을 더 이상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금 태환 정지 선언이다. 미국의 만성적인 무역적자와 함께 베트남 전쟁의 장기화로 달러화 발행이 크게 늘어난 것이 주원인 이었다. 기존처럼 미화 35달러와 금 1온스를 교환했다가는 중앙은행에 보관한 금이 순식간에 동날 것이 뻔했 다. 결국 1976년, IMF 역시 고정환율제를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각국의 선택에 따라 변동환율제를 도입할 수 있도록 했다. - P242
하지만 어려움이 무엇이건 간에 그 해결책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문제 해결을 위한 시간이 필요할 뿐 이다. 거래세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영국의 기업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고민을 해소할 방안을 마련해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기업을 찾아내 각자가 부담하는 의무를 상호교환하는 방식이었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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