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 작가의 상 받은 작품들을 모은 '다시 시작하는 아침'에 실린 이상문학상 수상작(1992) '숨은 꽃'을 읽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숨은꽃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35087&cid=41708&categoryId=41737


아래 옮긴 부분에 등장하는 '지브란' - 칼릴 지브란 - 이란 별명을 가진 동년배의 지인은 추리하여 검색한 결과 고 이을호가 모델 같다. (1955년 생 동갑 양귀자와 이을호는 둘 다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 사회의 억압 구조에 분노하는 청춘”…이을호 전 민청련 부위원장 별세, 향년 67세]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201270918001 (2022년 1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68893


철학을 전공한 고 이을호는 철학사(중원문화) 세트 번역발간에 참여했다. 




Magic, 2015 - Bernadette Resha - WikiArt.org


[양귀자,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 https://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7040600237





그가 다시 지브란의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지난 겨울이었다. 나는 그때 무슨 일로 한 화가를 만나고 있었다.

화가와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도중에 그가 들어왔다. 나는 그때 끝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도 갈래머리 여고생 시절의 나를 기억할 리 만무했다. 격식도 없이 불쑥 들어온 이 방문객은 화가가 권하지도 않는데 의자 한쪽에 주저앉아 조용히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손님? 아, 그 친구. 괜찮습니다. 사나흘에 한 번씩 와서 저러다 가니까요. 밥이나 한번 사주려 해도 꼭 자기 있고 싶은 만큼만 있다 가는 친구라서 이젠 나도 신경 안 씁니다. 느닷없는 청와대 소리만 빼면 다른 정신은 멀쩡해서 실은 아까운 폐인입니다. 가만 있자, 혹시 모르십니까? 저쪽에선 상당히 유명한 인사인데."

그 다음에 나온 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는다는 말은 나도 들었었다.

그는 불사신이 아니었다. 화가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난 이후 나는 그를 알 만한 사람들한테 그의 소식을 물었다. 사실이었다.

지브란은 무슨 말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왜 그 말에 무언가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나는 지브란에게서 예언자의 잠언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그의 잠언이 난해하다는 것은 시대가 난해하다는 뜻이다. - 숨은 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어 라이프'(앨리스 먼로)의 마지막 수록작이자 표제작인 '디어 라이프'와 연보로부터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리고 장례식에도 나는 집에 가지 않았다. 내게는 어린 자식이 둘 있었는데 밴쿠버에는 아이를 맡길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거기까지 갈 경비가 없었고 내 남편은 의례적인 행동을 경멸했다. 하지만 그것이 왜 그의 탓이겠는가. 내 생각도 같았다. - 디어 라이프

1931년 7월 10일 캐나다 온타리오 주 윙엄에서, 로버트 에릭 레이들로와 앤 클라크 레이들로의 장녀로 태어남. 아버지는 스코틀랜드계 장로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결혼과 함께 윙엄에 정착하여 여우와 밍크를 길러 모피를 팔아 가족을 부양함. 어머니는 아일랜드계 성공회 집안에서 자랐으며 결혼 전까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침.

1943년 여름, 어머니가 파킨슨병 증세를 보임. 가세가 기울기 시작함.

1949년 2년간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웨스턴온타리오 대학교에 입학. 영문학과 저널리즘을 전공.

1951년 같은 학교 학생이었던 제임스 먼로와 결혼. 학업을 중단하고 웨스트밴쿠버의 던더레이브로 이사.

1953년 딸 실라 먼로 태어남.

1955년 딸 캐서린 먼로 태어남. 태어난 지 15시간 만에 사망.

1956년 여름, 딸 실라와 온타리오 주에 가지만 어머니를 만나지는 않음.

1957년 딸 제니 먼로 태어남.

1959년 2월 10일 어머니 사망.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음. - 연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래 옮긴 글은 '소중한 경험'(김형경) 이 출처. 

Isolde Charim (2015) Von Manfred Werner - Tsui - Eigenes Werk, CC BY-SA 3.0, 위키미디어커먼즈


이번 6월에 번역출간된 '나르시시즘의 고통 - 우리는 왜 경쟁적인 사회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가(원제 Die Qualen des Narzissmus)'를 담아둔다. 저자 이졸데 카림은 오스트리아 출신 여성 철학자.







나르시시스트와 얽혀서 삶에 불편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먼저 본인도 나르시시스트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인정해야 한다. 내면에 동일한 무의식이 있기 때문에 고통당하면서도 특별한 사람 곁에서 서성이는 것이다.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우월하다는 자기 이미지와 특별한 대접에 대한 갈망을 포기해야 한다. 그토록 우월하고 선하고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으며, 그런 점을 고집하지 않을수록 삶이 오히려 편안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 더욱 좋을 것이다. - P1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캐나다의 여성 작가 앨리스 먼로가 5월에 별세했다. 그녀의 작품집 '디어 라이프'에 실린 '코리'를 다시 읽었다. 인생의 행과 불행이 도사린 단편. 아, 삶과 사랑, 그리고 죽음이여.


디어 라이프 (아제르바이잔) By Adam Jones from Kelowna, BC, Canada - Alice Munro Book in Bookstall - Baku - Azerbaijan, CC BY-SA 2.0, 위키미디어커먼즈






그녀는 당돌하면서도 어린아이 같았다. 처음에는 그녀에게 흥미를 보이던 남자도 곧 그녀의 오만하고 자기만족적인 성격—정말로 그렇다면—에 넌더리를 낼 것이다. 물론 그녀에겐 돈이 있었고, 어떤 남자들에게 그것은 결코 지긋지긋한 것이 될 수 없었다.

우리는 다시 새롭게 시작할 거야. 우리가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걸 다시 느끼게 될 거야. 우리가 잘못한 게 없다는 걸.

그가 말했다. "당신과 나 사이가 끝나는 건 견딜 수 없어." "그렇게 말해주니 기뻐." 코리가 말했다.

이따금 코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그에게 얼굴을 묻었다."우리는 정말 운이 좋아." 그녀가 말했다.

코리를 불행하게 만든 것은 그 토할 것 같은 느낌, 결코 안전하지 못한 느낌, 오래된 사랑에 지워진 무거운 짐이었다.

새들이 모두 날아가버린 것을 깨닫는 그런 아침은 항상 존재한다.

그녀는 뭔가를 깨달았다. 자는 동안 깨달았다.

어디에나 구멍이 있다. 특히 그녀의 가슴에.


달리 무언가를 해보기에는 너무 늦었다. 더 좋지 않은 일이 있을 수도 있었다. 이보다 훨씬 더 좋지 않은 일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대한 개츠비'(백지민 옮김)로부터








약속한 날에는 비가 퍼부었다. 11시가 되자 비옷을 입은 남자가 잔디 깎는 기계를 끌고 우리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개츠비가 보낸 사람이었다.

빗줄기는 세 시 반쯤부터 가늘어지더니 축축한 안개로 바뀌었고, 이따금 이슬비도 내렸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라일락나무 아래로 대형 오픈카 한 대가 올라오더니 멈춰 섰다. 연보랏빛 삼각 모자를 쓴 데이지가 밝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오빠, 정말 여기서 사는 거예요?"

빗속에서 울려 퍼지는 그녀의 명랑한 목소리는 상쾌한 청량제 같았다. 나는 잠시 동안 리듬감 있게 오르내리는 그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녀의 한쪽 뺨에는 젖은 머리카락 한 가닥이 마치 푸른색 페인트로 죽 그어 내린 것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의 손은 빗물에 젖어 번들거렸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

나는 뒷문으로 나와서 걸었다. 개츠비가 30분 전에 초조해서 집 주변을 한 바퀴 돌았을 때처럼 말이다. 나는 울창한 잎이 지붕 역할을 하며 비를 막아주는 옹이가 있는 검은 나무를 향해 뛰어갔다. 또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개츠비의 정원사가 잘 깎아놓았지만 여전히 엉성한 우리 집 잔디밭에는 조그만 진흙 웅덩이와 선사시대의 습지 같은 것이 여기저기 생겨났다. 나무 아래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개츠비의 거대한 저택밖에 없었다. 나는 칸트가 교회 첨탑을 바라보듯 그 집을 30분 동안 쳐다보았다.

30분쯤 지나자 다시 햇빛이 비쳤다.

"비가 그쳤어."

"그런가?" 개츠비는 내 말을 듣고서야 햇살이 방 안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나타난 햇살을 열광적으로 반기는 기상 캐스터처럼 그 소식을 데이지에게 전했다.

"어떻게 생각해요? 비가 그쳤다는데요."

"잘됐네요, 제이." 데이지는 가슴이 아플 정도로 슬픔에 젖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예기치 않은 기쁨을 나타낼 뿐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