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의 서사 - 수많은 창작물 속 악, 악행, 빌런에 관한 아홉 가지 쟁점
듀나 외 지음 / 돌고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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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시간에 인터넷 서점을 많이 본다. 어쩔 수 없음. 그것도 업무의 일환임! 그러던 중 발견했고, 궁금해서 냅다 도서관 희망 도서로 신청했다. 그러니까 내가 읽은 건 내 책이 아니라 도서관 책인데, 다 읽고 필사 엄청 했어도 새 것 같기는 하지만, 이렇게 필사할 게 많을 줄 알았더라면 진작 타이핑했을 거다. 며칠동안 나눠서 했다. 하...... 진짜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에 타이핑했지!!


리뷰 본문에 들어가기 앞서 글 맨 하단에 쭉 실릴 문장 발췌에 대해 알아뒀으면 하는 게 있다. 그 문장을 누가 썼는지, 글의 제목은 무엇인지 밝혔다. 그리고 리뷰를 읽는 사람이 글의 중심을 잘 파악했으면 하는 마음에 제목과 부제 중 주제가 잘 드러나는 하나를 취사선택했다.







언젠가부터 인터넷에서는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요구가 확산됐다. 나도 이 말을 안다. 나올 때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언론이 강력 범죄의 가해자가 전도유망한 청년이고, 착실하고, 학벌도 좋고, 어쩌구, 이렇게 가해자 입장에서 뭔가 잔뜩 잘 써 주는 반면 피해자는 그 반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한국 사법부의 솜방망이 처벌에 분노한 사람들이 그리 주장했다.


그런데 어느 새인가 이 문장이 창작물에까지 확대됐다. 빌런 캐릭터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합리화할만한 여지를 주지 말라는 뜻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런데 서브컬쳐계 오타쿠 중에서는 자신의 도덕적 결백함에 강박을 느끼고 비윤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창작물을―창작자가 그 내용을 진심으로 옹호하는지 아니면 비판하는지 구분하지도 않은 채―비난하는 사람이 있다. 그건 올바른 텍스트 독해가 아니라 생각하는 바, 이 책이 더 읽고 싶어졌다.







이 책은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라는 문장에서 시작해 아홉 명의 필자가 각기의 경험과 경력과 보고 있는 콘텐츠를 토대로 자기 의견을 쓴 글을 모았다. 그래서 같은 주제도 이렇게 접근할 수 있구나, 싶다. 나와 생각이 맞는 필자의 글을 읽으며 내 생각을 더 강화하고 보완도 하는 한편 나와는 다른 시각을 가진 필자의 글로 시야가 더 넓어지고 새로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아홉 편의 글 중에서는 '이건 좀 생뚱맞은데.' 싶은 것도 있었지만, 언젠가 받아들일 날이 오겠거니.







그래서 트위터에서 듀나를 본 나에게 듀나의 글이 잘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듀나는 창작물의 악역 캐릭터를 예로 든다. 창작자의 손을 떠나서 작품과 악역 캐릭터는 본래의 창작 의도와는 달리 해석될 수 있다고 한다. 한편으로 그런 캐릭터들의 팬덤, 유독한 팬덤을 언급한다. 우리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 능력이 심하게 떨어지고 모든 주인공과 악당은 단순하게 나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상당히 복잡하고 혼란스럽다고 한다.(41p) 그러니까 사람들이 제멋대로 입맛에 맞춰 잘못되어도 상당히 잘못된 해석을 한다. 어차피 누군가는 그 악당을 옹호할 핑계를 찾아내 제멋대로 서사를 덧붙일 테다.(46p) 그러니 "매 창작물마다 새로운 전투를 준비"해야 할 거라고, '영화는 영화일 뿐', '소설은 소설일 뿐'같은 말은 거짓말이며 "어느 작가가 세상을 향해 한 마디라도 던졌다면 우린 그 말의 여파로 세상이 꿈틀거릴 것을 각오해야 한다."(47p)


(...) 과연 이들(수많은 연쇄 살인자들)이 그럴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이야기꾼에게 소재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택한 소재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어느 것도 그냥 이야기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영화는 영화로만', '코미디는 코미디로만' 같은 말들은 비겁한 거짓말이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던진 모든 것은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 서사 예술이라고 다를 이유가 없다. 아니, 서사 예술은 특히 더 그렇다.

_24p







전승민의 글도 소개하고 싶다. 전승민은 소설 두 편과 논픽션 한 편을 다루며 나르시시스트가 악인이라고 한다. 나르시시즘에 갇힌 주체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전승민은 최근의 한국 소설을 두고 이렇게 썼다.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최근의 한국 소설은 텍스트 바깥의 악이 내부의 악과 긴밀히 연동되며 악이 지나치게 죄악시되는 형국을 보인다. 악은 제 얼굴을 내보일 조금의 자리도 허락받지 못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선은 투쟁할 기회를 박탈당하는 와중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어둠 없는 빛을 좇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둠 없는 빛은 과연 무엇을 밝히는 빛일까?(어둠이 없는데 무언가를 밝히는 일은 가능할까?)

_80p

한국 소설의 애독자는 아니지만 가끔, 아주 가끔 읽는 사람으로서 근래의 소설은 지나치게 무해하다고 여긴다. 과하게 말하면 자신의 도덕적, 윤리적 결백함에 강박을 갖고 있는 느낌이다. 어떤 작품에서는 악이랄 것이 등장하지 않기도 하는 것 같다. 어떤 트위터리안도 이런 내용을 지적했다. 무해하려고 한다고.


앞으로 이어진 글에서 전승민이 짚어내듯 주인공을 무해하게 꾸린다고 해서 그가 서사에서 무해한 존재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저자가 고도의 기술을 발휘해 그렇게 읽히도록 설계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저자는 정말 무해하고자 썼는데 거기서 허점이 드러났을지도 모른다.


전승민은 전하영의 「그녀는 조명등 아래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에서 '나'는 나이 많은 남성의 애정을 두고 또래의 여성에게 경쟁심과 질투를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그 여성을 사랑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해결책을 레즈비언 커플의 세계에 투사한다. "소설은 '나'가 환멸을 느끼는 이성애적 질서에 대한 대안으로 두 여성 간의 사랑을 제시"한다.(91p) 전승민은 "여성 동성애는 이성애자 여성이 의식적으로 그리고 의지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대안"인지 질문한다.(92p) 소설에서는 여성 퀴어의 삶을 빛의 영역으로만 본다. 악도 없고, 나쁜 사람도 없다. 하지만 "자신의 피해의식을 투사해 형성한 왜곡된 세계상일 뿐이다."(96p)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하는데, 소설의 '나'가 여성 동성애 관계를 이렇게 바라보면 여성 동성애 관계 내부의 어둠이 조명받을 수 없다.


이 다음에 다루는 작품으로는 한정현의 『마고』와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있다. 이 또한 생각할 점이 많은 글이니 내 리뷰에서 말하길 생각한다. 꼭 읽어보셨으면.


나르시시즘에 갇힌 주체는 선한 빛을 비폭력의 수동성으로 치환해 받아들이고, 약자와 소수자의 당사자성을 피해자의 그것으로 물화해 주체의 서사에 동원되는 희생양으로 전락시킨다. 그러한 서사에서 퀴어와 여성들은 현실의 엄혹한 힘과 폭력 앞에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한없이 무력하게 사라진다. 연민하는 주체의 추억과 회고의 부속물로 물화된다. 진실한 선은 악과 정면으로 대결하며 성장한다. 서사에서 악이 납작해지면 선 또한 평평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역학의 결과다. 게다가 악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인간성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 아니던가. 악의 의도적 소거와 표백은 '선한 인간'의 자기기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악을 고의적으로 외면하는 선의 얼굴은 또 다른 악일 수 있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믿는 나르시시즘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해 대결해야 할 새로운 빌런이다.

_119p




이외에도 인상 깊은 내용이 많았지만, 직접 읽어보셨으면 하는 마음에 더 언급하지 않겠다. 소설,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을 잘 접하는 나에게 필요했다. 이를 발판삼아 내가 독자로서 더 발전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명민하지는 않다.


악역 캐릭터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일은 나도 고민하는 문제다. 사실 그렇다. 나도 정말 나쁜 놈이 사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며 이해 받을 여지가 생기는 것이 싫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악인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전두환도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였지만, 손자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이야기를 암기했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걸 보면 현실의 악은 복잡하기만 하다.


그래서 듀나의 말처럼 우리가 선과 악을 구분하는 능력이 한참 떨어질지라도, 우리의 능력을 시험하는 악인의 서사를 자주 접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면 그렇다고 인정하자. 악인에게 좋은 면모가 있다면 좋다고도 인정하자. 하지만 그와 악행은 별개이며, 사회가 단죄할 수 있도록 하자. 그리고 피해자의 삶을 조명하고 존중하고 그가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자. 창작물에서 구현하는 복잡한 악인의 서사는 우리가 현실의 악인과 악행과 그의 삶을 마주할 때를 대비한 연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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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인용

최근 몇 년 새 우리 사회 한편에서 새로운 상식처럼 주창되고 있는,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라는 표현이 이와 유사한 정서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 간명한 슬로건은 당초 현실의 잔혹 범죄와 이를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를 규탄하기 위해 대두됐지만, 머잖아 창작 서사 전체를 아우르는 원칙으로까지 받아들여졌다. 매혹과 연민의 시선으로 악인과 악행을 묘사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향해 이들 작품이 악을 비호하고 합리화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악인의 서사 자체를 비윤리와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이 널리 확산된 것이다. 심지어 일반 관객과 독자뿐 아니라 일부 유명 배우들까지 여기에 공감의 뜻을 공개적으로 밝히며 악인의 서사를 배제해야 한다는 의견은 더욱 대중화된 통설로 자리매김했다.
_편집자의 말 - P9

(...)과연 이들(수많은 연쇄 살인자들)이 그럴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이야기꾼에게 소재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택한 소재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어느 것도 그냥 이야기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영화는 영화로만‘, ‘코미디는 코미디로만‘ 같은 말들은 비겁한 거짓말이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던진 모든 것은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 서사 예술이라고 다를 이유가 없다. 아니, 서사 예술은 특히 더 그렇다.
_듀나, 악인보다 선인의 이야기에 집중할 것 - P24

(...)우리가 직접 경험으로 도달하지 못하는 인간의 어두움을 이해하는 작업에도 분명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런 인간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행위에 감상자가 생각하는 것만큼 깊은 의미가 있을까. 선을 공부하는 건 과연 그렇게 피상적이고 재미없는 일일까. 악당은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재미있을까?
_듀나, 악인보다 선인의 이야기에 집중할 것 - P24

(...)그루버를 보다 이해할 수 있거나 공감할 수 있는 인물로 만드는 것은 불필요하기도 하지만 일단 부도덕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더 사실적이다. 대부분의 경우 악은 얄팍하다.
_듀나, 악인보다 선인의 이야기에 집중할 것 - P26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습관적으로 이 인물에게 내면을 불어넣는다. 기독교 국가에서 유대인으로 당했던 차별, 죽은 아내에 대한 추억이 삽입된다. 그리고 어느 단계부터 샤일록이 희곡의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 된다.
_듀나, 악인보다 선인의 이야기에 집중할 것 - P29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선과 악을 구분하는 능력이 심하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모든 주인공과 악당이 존 매클레인과 한스 그루버 같다면 세상은 단순할 것이다. 하지만 우린 그런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처럼 단순하지 않은 세상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당연히 혼란스럽다.
_듀나, 악인보다 선인의 이야기에 집중할 것 - P41

(...)창작자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창작물이 해석되지 않는다면 예술 작품의 감상은 권태롭기 그지없을 것이다. 반면 훌륭한 작품은 창작자가 예상치 못한 해석을 품고도 기꺼이 살아남을 것이다.
_듀나, 악인보다 선인의 이야기에 집중할 것 - P43

이런 세계에서 우리는 창작물의 악역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악역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그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하지만 서사를 주지 않고 악역을 최대한 단순히 만들어도 누군가는 결국 그 악당을 옹호할 핑계를 찾아내 제멋대로 서사를 덧붙일 것이다. (...)
_듀나, 악인보다 선인의 이야기에 집중할 것 - P46

선의 손을 들어주고자 하는 이는 구체적인 악의 얼굴을 고의적으로 표백하는 일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피해자성으로 함몰시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이는 작가와 독자를 포함해 텍스트를 둘러싼 모든 존재자들이 주의해야 하는 지점이다. 이때 주체가 함몰되는 피해자성은 세계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과장과 비약의 왜곡을 통해서 인지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나르시시즘과 유사하다. 물론 둘은 다르다. 피해자성은 피해자의 위치에 놓인 사람이 당사자로서 가질 수 있는 맥락의 총체인 데 반해 나르시시즘은 세계를 인식할 때 타자의 실감을 고려하지 못하고 오직 ‘나‘ 자신의 감정과 감각, 이해관계에만 몰입해 그것을 지켜내야 할 절대적 당위로 삼는 병적인 자기애다. (나르시시즘은 건강한 자기애가 아니다. 그의 낮은 자존감은 외부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끊임없이 조달받아야 한다.)
_전승민, 나르시시스트의 선한 얼굴은 어떻게 악이 되는가 - P82

나르시시스트에게는 자신을 비춰줄 타자의 거울이 언제나 필요하다 나르시시즘의 양태는 그가 피해자의 위치에 있는지 가해자의 위치에 있는지와 무관하게 발현된다. 그러므로 피해자성으로의 함몰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은 피해자의 당사자성을 존중하는 것이 ‘과도하게‘ 중요시되고 있다는 꼬인 비판이 아니라 현실의 구체적인 맥락을 왜곡·비약·과장하는 나르시시즘이 일으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당부다.
_전승민, 나르시시스트의 선한 얼굴은 어떻게 악이 되는가 - P83

나르시시즘은 자신이 빛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자의식이다.. 가장 악한 폭력은 가장 선한 표정의 얼굴, 사랑이라는 이름의 가면을 쓰고―악을 행사하면서도 ‘나는 악이 아니야.‘라는 자의식 속에서―드러난다. ‘선‘을 표방하는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을 대상화하고 왜곡하기를 서슴지 않으며 겉으로 선한 ‘빛‘의 얼굴은 세계의 실체를 덮어버린다. 스스로가 어둠인 줄 모르는 빛, 제 행동이 악인 줄 조금도 인지할 수 없는 선의 무지각력은 악을 온전히 완성해낸다. 겉으로는 연민과 사랑이라는 기표를 드러내지만 결국 대상을 동정하는 주체의 우월한 시선을 강화하는 ‘빛‘은 악의 의도적 소거와 맞물려 있는 또 다른 ‘악‘이다.
_전승민, 나르시시스트의 선한 얼굴은 어떻게 악이 되는가 - P84

(...) 그러나 이때의 ‘여성성‘이 반反남성성으로 정의된다면, 여성(성)은 남성(성)을 대타항으로 가질 때에야 유표화될 수 있는, 독립적이지 않은 자질이 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
_전승민, 나르시시스트의 선한 얼굴은 어떻게 악이 되는가 - P94

(...) 게다가 퀴어의 삶을 이성애의 대안으로 투사하면 퀴어들이 겪는 현실의 난관은 이중으로 타자화해 한 단계 더 비가시화된다. 자신의 해방을 위해 타자를 대상화하는 것은 페미니즘이 그간 맞서온 가장 유구한 남성적 폭력과 그 시선 아니었던가? 게다가 어떤 세계가 빛으로만 가득하다고 선언해버리면 그 세계가 가진 어둠은 자동으로 소멸될 수 밖에 없다. 실재하는 어둠을 없다고 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_전승민, 나르시시스트의 선한 얼굴은 어떻게 악이 되는가 - P98

(...) 분류는 일종의 사다리 만들기다. 생물종들 사이에 선형적 위계와 우월 관계를 부여하는 이 행위의 목적은(음흉하게도) 사다리 제작자가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기 위해서다. (...)
_전승민, 나르시시스트의 선한 얼굴은 어떻게 악이 되는가 - P112

나르시시즘에 갇힌 주체는 선한 빛을 비폭력의 수동성으로 치환해 받아들이고, 약자와 소수자의 당사자성을 피해자의 그것으로 물화해 주체의 서사에 동원되는 희생양으로 전락시킨다. 그러한 서사에서 퀴어와 여성들은 현실의 엄혹한 힘과 폭력 앞에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한없이 무력하게 사라진다. 연민하는 주체의 추억과 회고의 부속물로 물화된다. 진실한 선은 악과 정면으로 대결하며 성장한다. 서사에서 악이 납작해지면 선 또한 평평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역학의 결과다. 게다가 악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인간성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 아니던가. 악의 의도적 소거와 표백은 ‘선한 인간‘의 자기기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악을 고의적으로 외면하는 선의 얼굴은 또 다른 악일 수 있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믿는 나르시시즘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해 대결해야 할 새로운 빌런이다.
_전승민, 나르시시스트의 선한 얼굴은 어떻게 악이 되는가 - P119

(...) 악인의 이야기는 악행을 납득할 수 있게 하기보다 ‘악‘이 놓인 판단 기준과 그것의 분류 체계를 성찰하게 한다. 더 과감히 말하자면 악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짓는 행위는 공동선과 윤리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 우리는 악을 통해, 혹은 악이 일어난 이유를 살펴보면서, 혹은 악의 의미를 고찰하면서 그 반대편에 있는 인간성을 확인할 수 있다.
_강덕구, 서부극, 공동선과 윤리를 탐구하는 악인 서사 - P184

(...) 진짜 이유는 바로 우리 인간이 허구를 통해 자신을 비춰보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들리는 혐오 표현, 악행에 정당화를 부여하는 서사가 허구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때로 불편하거나 역겨울 수 있는 거짓말은 우리가 사는 공동체의 기원에 담긴 폭력의 정체를 따져 묻게 만들기도 하고, 우리 세계의 잔혹성을 고발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허구는 내가 선택해야 할 선good을 나를 대신해 시뮬레이션해준다. 우리가 이야기와 허구를 포기한 순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탐구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도구를 잃은 셈이다.
_강덕구, 서부극, 공동선과 윤리를 탐구하는 악인 서사 - P185

(...) 그러나 우리는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행위‘가 올바른지 아닌지만을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누가, 어떻게, 왜 서사를 부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 그 위치를 구성하는 여러―역사적·문화적·사회적·경제적·성적·인종적―맥락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찾기 어려운 것 같다. 창작물 속의 이야기가 모두 작가의 관점을 투명하게 대변한다는 ‘작가 환원주의‘ 시대에 이런 논의가 빠져 있다는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 P191

문학은 첨예한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응징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응징은 적어도 문학의 역할은 결코 아니며 (그렇다면 문학은 무력한가? 그렇지는 않다.) 당위를 한껏 부여해 ‘내가 옳으며 선하다,‘고 주장하는 장르도 아니다. 오히려 응징할 수 없는 악이 있음을 인정하는, 손쉬운 비난을 넘어서는, 날카롭고도 섬세한 성찰이 깃든 작품을 우리는 은밀하게 사랑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선함을 지향해서라기보다 ‘또 다른 (불의한) 나‘를 발견해 이해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문학을 접하는 독자로서 우리는 ‘욕먹는‘ 일에 관한 강박과 검열로부터 잠시 탈출할 수 있다. 우리는 문학에서 ‘불의한 나‘를 만나고 그와 얼싸안는다. (이어서)
_최리외, ‘빌런‘이 득시글거리는 모녀 서사 - P233

문학이 우리를 울게 하는 것은 조화와 안정과 화해라는 극적이고 낭만화된(심지어는 실현 불가능한) 이미지를 접할 때뿐 아니라 내가 감히 소리 내 말할 수 없는 것, 비난받을 게 두려워 홀로 숨기는 것, 그럼에도 엄연히 내 안에 도사린 불순한 욕망들과 적개심, 증오 같은 불쾌한 감정이 툭 불거져 나올 때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어떤 공적인 페르소나 없이, 당위를 넘어선 지점에서 이해받았다고 느낀다.
_최리외, ‘빌런‘이 득시글거리는 모녀 서사 - P233

그러나 상징적 차원에서 ‘어머니 죽이기‘는 단순하지 않다. 모녀 관계는 대체로 보호나 의존이라는 문제에 지배와 피지배가 얽힌 복잡하고 유착적인 양상을 띤다. 여성인 딸의 내면에 어머니라는 존재는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깊이 각인돼 있기에 딸들은 어머니를 벗어나는 데에도, 뒤틀리고 얽힌 감정을 분리하는 데에도 애를 먹는다. 강한 반발심이 생기거나 경멸, 혐오의 감정까지 치밀더라도 거리 두기는 어려워진다. 어머니는 딸의 최초의 양육자이자 원초적 대상, 딸과 같은 젠더로 분류되는 존재, 때로는 유사한 운명을 공유하기까지 하는 존재다. 그러니 명쾌한 감사나 용서, 혹은 공동 의존 관계로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일이 힘겨울 수밖에. 많은 딸들이 인정하기 싫어할 테지만 이미 딸의 내면에 어머니라는 존재가 ‘전능할‘ 정도로 깊숙이 침투해 있기에 딸에게 어머니 죽이기란 결국 스스로를 죽이는 일과 다르지 않을 수 있다. (...)
_최리외, ‘빌런‘이 득시글거리는 모녀 서사 - P235

(...) 어머니는 전지적 영향력의 소유자, 그야말로 "최고 권력자"[11쪽]다. 에리카는 순간 광기에 휩싸여 어머니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미친 듯이 잡아 뽑기도 하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사용하던 면도칼로 자신의 성기에 상처를 내기도 한다. 뚝뚝 흐르는 피를 보며 에리카는 쾌감을 느낀다. 자신의 몸을 스스로 확인하는 행위는 자해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니 몸에 상처를 내 벌을 줌으로써 몸을 통제하고 있다는 지배 감각을 느끼는 파괴 욕구에 가까운 비틀린 ‘통제‘가 딸에게서 나타날 수밖에. 청결을 향한 과도한 강박도, 관음증도 마찬가지다.
_최리외, ‘빌런‘이 득시글거리는 모녀 서사 - P242

(...) 망상에 빠진 어머니가 불어넣은 공포와 열등감은 집구석에 대한 딸의 혐오감으로 이어진다. "우리 모두는 엄마가 미리 정해놓은 것이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한 모험이기 때문에, 집에서 도망치는 게 아닐까요?" (태평양을 막는 제방, 민음사, 34쪽)
_최리외, ‘빌런‘이 득시글거리는 모녀 서사 - P244

킨케이드의 어머니는 이렇듯 딸과 심리적 거리감 없이 엉켜 붙은 존재로, 일방적인 친밀감을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자신이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을 딸에게 투사하며 딸의 욕망이 자신과 다를 수 있음을 한 치도 고려하지 않는다.
_최리외, ‘빌런‘이 득시글거리는 모녀 서사 - P247

이쯤에서 눈 밝은 독자들은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빌런화되는 작품에서 가해-피해 구도는 경직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런 점에서 오히려 서사는 정치적으로 역동성을 띤다. 물론 비대칭적 관계에서 어머니가 일삼는 행위를 폭력이라고 규정하는 일은 피해자의 입장에 서는 위치성을 전제한다. 이때 피해자는 정의로운 행위자로서 무조건적 옹호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러나 애증적 모녀 서사에서 피해자는 절대적 정의가 아니며 가해자도 절대적 악이 아니다. 정의 구현, 악의 말끔한 제거, 응징은 가능하지 않다. 어머니와 딸은 극단적으로 대립하다가도 둘 사이의 가해-피해의 역학 관계가 역전되기도 하며 그 관계성이 변화하기도 한다. 애증의 필연적 속성이 바로 그것이다.
_최리외, ‘빌런‘이 득시글거리는 모녀 서사 - P250

어머니를 향해 도덕적 우월감을 표출하면서도 비틀린 애정을 수용하고 전략적으로 활용하기도 하는 딸들의 모습은 지난한 관계성을 다시 비춘다. 따라서 어머니가 악인이니 무조건 비난받아야 마땅하다는 일방적 당위는 성립하지 않는다. 역으로 딸의 무결한 피해자성이 한없이 강조되지도 않는다. 누군가를 악인으로 만드는 과정은 자연히 주체의 인간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인간성에는 물론 개성과 결핍이 포함될 것이다. 피해와 가해가 발생한 복잡한 층위와 맥락 전체를 살피지 않은 채 피해자성만을 선점하고 강조하는 행위는 때로 또 다른 권력을 낳기도 한다. 애증적 모녀 서사는 당사자성을 드러내면서도 손쉬운 선점과 확언을 비껴간다. 말끔하고 선악 구분이 확실한 길 대신,, 먼 길을 돌아가며 거의 불가능한 이해를 향해 간다. 따라서 어머니-빌런을 바라보는 독자의 섣부른 판단의 욕망을 유보한 채 이들 모녀의 구체적 사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_최리외, ‘빌런‘이 득시글거리는 모녀 서사 - P251

우리 모두는 안다. 가족 이야기, 부모 이야기, 어머니 이야기, 그중에서도 특히 그들로 인해 어떻게 얼마나 괴로웠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흔하고 뻔해 보인다는 것을. 그러나 가족 내 억압의 역사는 바로 그 손쉬운 판단 때문에 타자화된다. 부모와 거리를 두기 위해 부모를 악인으로 형상화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간신히 ‘(부모와)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재빨리 ‘익숙한 것‘으로 치부하고 ‘그렇고 그런 것‘으로 명명하는 그 순간, 부모가 맺어온 장구한 애증의 서사는 납작해진다. 자꾸 반복돼 피곤한 것, 그만 듣고 싶은 것, 그래서 대강 화해하거나 아예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은 것으로 얼버무리고 만다.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로 광기를 동반하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모녀 서사가 많은 이들에게 두루 사랑받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회피하고 싶은 것을 형상화하기에.
_최리외, ‘빌런‘이 득시글거리는 모녀 서사 - P252

(...) 어떤 서사가 환영받고, 어떤 서사는 영원히 주변에 머무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무엇을 회피하고 싶은지와도 맞닿아 있다. 우리가 모면하고 싶은 바로 그것에 우리가 누구인가에 관한 진실이 담겨 있다.
_최리외, ‘빌런‘이 득시글거리는 모녀 서사 - P253

감정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발견하는 진실이란 본질적으로 신경증적이며 부조리하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진실은 부조리한 것 안에서만 그 자신을 드러낸다. 티 없이 맑고 순수하며 깨끗하고 말끔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선한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 대신 연대라는 단어를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 안에서도 작가나 독자로서 무해함을 지향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무해해지고 싶다.‘는 또 다른 욕망을 투사한 인정 투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만사에 무해하고 싶다는 욕망은 오만의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을 표백하며 선함을 표방하는가?) 문학을 읽는 독자로서 우리는 정의 구현이나 악의 응징 같은 간편하고 단순한 해결책이 결코 실현 가능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내게는 악인인 그 지긋지긋한 빌런의 사정이야말로 때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다.
_최리외, ‘빌런‘이 득시글거리는 모녀 서사 - P254

웹소설의 악인에도 창작자 개개인(나아가 주류 사회)의 편견과 혐오가 여과 없이 투영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특히 남성 판타지 장르를 중심으로) 적지 않은 웹소설 작품이 기존 체제의 질서를 맹목적·무비판적으로 옹호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웹소설은 철저히 사회 주류의 시각만을 체화해 이에 거슬리는 존재들을 ‘빌런‘ 취급하는, 윤리적으로 실패한 장르일까? 나는 이 물음에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으로, 웹소설에 섣불리 낙인을 찍기에 앞서 이 장르에서 악인이 만들어지는 구조와 방식을 다층적으로 살펴볼 것을 제안하려 한다.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62

바로 이것이 악인 서사의 존재 유무 이상으로 우리가 중요하게 헤아려야 할 두 번째 쟁점이다. 웹소설에서는 고유의 매체적 특징과 독법이 있고, 이를 폭넓게 살피지 않은 채 웹소설 속 악인의 서사 유무만을 따지는 건 유명무실한 일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나는 ‘악인의 서사를 제거하라‘는 지엽적 쟁점에서 탈피해 웹소설의 악인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면서도 작금의 웹소설이 악인을 다룰 때 직면하는 한계를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는지 가늠해보고자 한다.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63

결국 2020년대 웹소설 시장에선 판타지, 무협, 로맨스 등 다양한 근대적 장르 구분이 만들어냈던 지위는 사라지고 그 안에 있는 기호들이 특정 독자군에게 어떤 자동적 연상 작용을 일으키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이때 장르 관습 안에서 창작자와 독자가 상호작용하기 위해 정형화된 약호를 코드code라고 부른다. 코드는 일종의 장르적 공공재로, 작품이 처음 등장한(혹은 주로 사용되던) 문화적 맥락과는 별개로 장르 독자 집단이 공유하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끌어낸 일종의 장르적 밈meme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코드가 장르에 따라 굉장히 다양한 형태로 창작-소비되고 있어 하나의 단일한 논의를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64

악녀물에서의 악인은 보통 세 단계의 레이어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롤플레잉, 즉 배역으로서의 악인이다. (...) 단지 이 악역이 서사 안에서 주인공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캐릭터가 수행하는 역할은 무엇인지 등이 중요할 뿐이다.
두 번째는 감정을 소비하기 위한 일회적 악인이다. (...) 서두에서도 언급했듯 이 정형화된 틀은 흔히 ‘고구마-사이다‘라고 불리는데, 현실 사회의 통념에 입각해 지극히 전형적인 악인과 그들의 악행에 고통받는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세 번째 유형의 악은 웹소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최종 안타고니스트로서, 대부분은 작품 속 세계를 무너뜨리려는 절대악으로 표상되는 경우이다. (...)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65

이렇듯 웹소설 독자들은 서사의 완결이 아니라 특정 쾌감이나 쾌락을 ‘사이다‘라는 이름으로 소비하기 위해 작품을 읽는다. 주인공은 서사를 통해 무조건 가까운 행동만을 보여줄 뿐이고, 독자는 편 단위로 분절된 텍스트에서 더 이상 구조적 완결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작품이 자신의 쾌감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 댓글란에 ‘하차합니다.‘라는 선언을 남기고 결제를 멈춘다. 독자의 하차 선언은 작가에게 강력하고도 위압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이는 작가의 생계와 생존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자의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주인공이 극중 사건을 경험하며 마침내 도달하게 될 변화와 성찰, 그리고 이를 통해 작가가 독자에게 궁극적으로 던지고자 하는 질문 따위는 더 이상 문학 작품에 필요치 않다는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처지에 대한 상상력과 숙고는 사라지고, 자신의 전능감을 체험하려는 욕망과 소비자로서의 권리의식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71

웹소설과 관련된 윤리적 담론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상술한 바를 종합하자면 웹소설은 소비하는 독자 대중의 욕망과 혐오가 그대로 반영된 텍스트 콘텐츠에 가깝다. 그렇다 보니 웹소설은 작품에 끊임없이 당위적 명령을 부과하고 도덕적 지향점을 교조적으로 선도하려는 관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흔히 남성향 판타지 웹소설에 쏟아지는 비판이 대표적인 예로, 일부 독자들은 남성향 판타지 웹소설이 자본주의의 착취 구조를 옹호하고, 이 같은 사상적 입장을 후속 세대에 주입한다고 꼬집는다. 작중 인물들이 인간으로서 갖는 복합적 속성을 배제한 채 이들의 능력을 수치화하는 방식으로 캐릭터를 납작하게 그려냄으로써 현대 사회의 계급 구조를 물신화·긍정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하고, 이들 웹소설이 자본주의의 자기계발적 환상만을 보여준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로맨스 소설이 가부장제하의 낭만화된 사랑을 공고화한다는 평가도 마찬가지다.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73

(...) 하지만 실상 이런 태도는 콘텐츠에 재현된 모든 사소한 코드를 강박적으로 해석하는 독서법의 연속에 불과하다. 웹소설에서 윤리를 어떻게 다룰지를 생산적으로 논의하기보다 작품에 대한 종합적 고려 없이 번번이 비슷한 요소에만 반응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이들은 작품에 혐오의 꼬리표를 붙이는 데 소모적으로 집착하는데, 이런 꼬리표가 붙은 작품을 불매 등의 수단을 통해 장르의 역사나 시장에서 축출하는 데 매달린다.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74

제대로 된 웹소설 비평이 부재한 사이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독자들의 댓글이다. 플랫폼에 따라 미세한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웹소설 플랫폼에는 댓글란에도 ‘좋아요‘와 ‘싫어요‘ 버튼이 달려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사용자의 댓글에 대한 의견도 드러낼 수 있다. 이로써 댓글은 단순히 소설에 대한 감상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웹소설에 기생하는 파라텍스트가 된다. (이어서)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75

댓글은 게시되는 즉시 타자에게 감상되고, 웹소설과 똑같이 평가된다. 댓글은 좋음과 싫음의 감정 자본을, ‘베스트 댓글‘이라는 자위를 갖는다. 즉 많은 독자의 동의를 받은 댓글은 그 자체로 작품과 독자 집단을 매개하는 중개자이자 가장 권위 있는 해석자로서 비평적 권위를 획득하게 되는 셈이다. 이렇듯 일상의 탈권위적 언어를 사용하는 소비자가 시장의 비호 아래 비평가에 준하는 위상을 확보한 상황에서 시장의 외부자에 불과한 비평가는 이 굳건한 지위와 구조를 침범하려는 침략자처럼 여겨진다. 웹소설이 돈이 되니까 비평가들이 숟가락을 얹으려 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 때문이다.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76

(...) 이들이 말하는 개연성은 사건의 인과관계에 그치지 않는다. 독자는 고구마로 재현한 현상이 현실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지, 고구마에 맞서 사이다가 실현됐을 때 그것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를 끊임없이 감시한다. 추리 소설이 성립되려면 탐정이 논리적·과학적으로 추론한 추리가 들어맞을 수 있도록 과학 외의 우연성이 모두 제거된 세계가 전제돼야 한다. 이와 유사하게 웹소설 독자들은 ‘고구마‘의 세계가 잘 재현되었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점검한다. 그래야만 ‘사이다‘ 장면을 통한 대리 만족을 더 확실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80

(...) 다시 말해 웹소설을 쓰는 작가는 현실을 재현한 세계에 비현실을 추구하는 캐릭터를 덧씌움으로써 독자에게 이 세계를 자각시키고, 독자는 웹소설이 비현실적 주인공을 통해 현실 속 불합리의 구조와 인과관계를 자각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웹소설을 쓰고 읽는 일에도 사회적 효용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독자들은 웹소설이라는 도구를 통해 사회 문제를 텍스트 속으로 끊임없이 호명하고, 텍스트를 통해 여러 부조리를 자각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웹소설을 느슨하고 넓은 의미의 사회운동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81

(...) "장르가 있어야 필자는 그에 맞서 글을 쓸 수 있고, 장르 관습이 있어야 필자는 관습의 파괴를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장르라는 맥락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필자의 행위는 존재할 수 없고, 관습을 파괴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다."
-아니스 바와시·메리 요 레이프, 『장르: 역사·이론·연구·교육』, 정희모 외 옮김, 경진출판, 2015, 45쪽. (비평가 조너선 컬러의 말)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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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3-09-04 2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라니님 저도 이 책을 도서관에 신청했어요! 같은 문제의식이 있었거든요. 리뷰 정말 잘 읽었습니다! 신청하기를 잘한 것 같아요!!!

책식동물 2023-09-04 20:12   좋아요 1 | URL
공쟝쟝님 안녕하세요!!! 리뷰 잘 읽으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읽으면서 별 생각 없이 술술 넘겼는데 리뷰 쓰다 보니까 이거 진짜 중요한 거 같아서 힘줬는데 알아주셔서 기쁘네요...^-^*

˝그런데 서브컬쳐계 오타쿠 중에서는 자신의 도덕적 결백함에 강박을 느끼고 비윤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창작물을―창작자가 그 내용을 진심으로 옹호하는지 아니면 비판하는지 구분하지도 않은 채―비난하는 사람이 있다. 그건 올바른 텍스트 독해가 아니라 생각하는 바,˝ <<개인적으로 이 부분. 쓰면서도 좀 예민해서 손 떨었습니다.ㅋㅋㅋ

공쟝쟝 2023-09-04 20:25   좋아요 1 | URL
서브 컬쳐계의 오타쿠이신가요? ㅋㅋㅋ 제가 잘 몰라서 ㅋㅋ 서브 컬쳐...나 웹소 아예 몰라서요 ㅠㅜㅠㅠ 책이오면 곰곰 읽어보고 가지고 있던 생각을 더 정리해보긴 해야할 것 같아요. 문학의 경우 정말 소비자의 입장이었는 데, 창작자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기도 하고.
살짝 궁금했는 데 이 리뷰 보고 완전 뽐뿌왔습니다.

헌데 사실 보다 중요한 것은... 강조되어야할 것은!!!
고라니님 글씨.... 대범함이 묻어나는 꽉찬 글씨........ 기개가 출중한 서체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래서 네이버 블로그 주소 좀 알려주세요! 비밀용 이면 안알려줘두 되여ㅋㅋ

2023-09-04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9-08 1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9-09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9-09 1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9-09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eBook] 아무튼, 클래식 - 그 속의 작은 길들을 천천히 걸으면서 내가 겪은 순간들을 꽤 소중히 여겨왔다 아무튼 시리즈 40
김호경 지음 / 코난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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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병원을 다녀왔다. 계속 내과만 가다가 이비인후과를 가게 된 이유는 약 이십 년 전 중이염에 걸린 느낌을 내내 느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알고 계셨습니까? 콧물로 인해 중이염이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저는 비염이 있고 중이염에 두 번이나 걸렸는데도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왼쪽 귀가 더 심하고 편도선이 붓고 몸살기가 있다고 했다. 주사 맞았다. 아픔. 낑낑.


지난 주부터 코로나보다도 더 심하고 아픈 감기의 영향력을 몸소 절절하게 느꼈지만, 다행히도 지적 능력에는 아무 탈이 없어서(ㅋㅋㅋ)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누워서도 읽고 앉아서도 읽었다.




에세이에는 내게 유의미한 정보값이 얼마 없다고 생각해서 기피하던 내가 아무튼 시리즈만큼은 관심 있는 주제의 책이 나올 때마다 챙겨봤다. 전자책 구독 서비스에도 잘 들어오니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떤 아무튼 시리즈는 어느 지역 도서관에서 한 책 읽기 도서에 선정되기도 했다. 읽기 쉽고 그 분야에 몸을 담가야 나오는 생생한 정보를 잘 담고 있고, 전반적으로 따스하고 희망을 품은 톤이어서 그럴 수 있었던 것 같다.


클래식 또한 좋아하지만 잘 모르는 분야여서 검색 키워드를 쉽게 얻기 위해 이 책을 읽었다. 해당 분야의 쉬운 책을 읽는 일은 언제나 유용하다. 아무튼 시리즈에게 품은 호감이 없었더라면 읽지 않았겠지만. 음악 자체는 쉽게 즐길 수 있지만, 생산된 결과물이나 그걸 관객 앞에 보여주는 아티스트들에게만 관심이 쏠릴 뿐, 무대에 나오기까지의 과정에는 관심이 없는 게 솔직한 내 마음이다.


클래식은 더더욱 그렇다. 좋은 음질의 연주 영상을 유튜브에서 쉽게 접할 수 있음에도 굳이 찾아보지 않는 건 대중음악보다 무심해서일 수도 있고, 어쩌면 같은 노래 한 곡을 오 분 넘게 듣지 못하는 마치 쇼츠 영상 중독자 같은 집중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대의 아티스트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 책의 장점이 다가온다. 김호경은 매체에 글을 기고하는 기자이다.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했지만 드라마 음악 작곡가인 남편과는 달리 클래식을 소재로 글을 쓴다. 그가 글쟁이라는 면모가 두드러지는 부분이 있었다.


글을 쓰려면 글 쓰는 몸을 만들어야 한다. 가사를 쓸 때는 가사 쓰는 몸이 필요하고, 산문을 쓸 때는 산문 쓰는 몸이 필요하다. 학술적인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무드가 비슷한 글을 근래에 좀 읽은 상태, 하고 싶은 말을 머릿속에 둥둥 띄워놓은 상태, 적당히 조용하고 적당히 편안한 그런 상태가 필요하다.

실상은 늘 다른 몸으로 다른 글을 쓴다. 열심히 사회학 이론을 읽다 가사를 얼른 완성해 보내야 할 때면 곤란하다. 하나의 논리를 쪼개고 파헤치고 관점들을 나열하고 인용하고 왜 아닌지, 왜 아닌지, 왜 아닌지, 왜 맞는지, 왜 맞는지, 왜 맞는지를 열심히 좇아가다 갑자기 멈추고 직관과 느낌과 감각을 깨운다. 왜 아닌지, 왜 맞는지 따지다가는 가사는 한 줄도 못 쓸 것이다.

_나의 일, 건강한 몸으로, 95/159p (종이책), 101/182p (전자책)


으하학. 내 얘기다. 에세이를 읽으면 문체가 보다 구어체에 가까워지고, 학술적 성격이 강한 비문학을 읽으면 단어 선택이 아무래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동질감을 느낄 수 있어서 김호경이 무대 바깥 사람인 게 장점이 되는 건 아니다. 김호경은 음악에 관한 책이라 하면 흔히 연상할 연주자가 아닌 시각에서 글을 쓴다. 며칠 전 읽었던 피아노 연주 관련 책이 그렇듯 연주자가 쓴 책도 매력적이지만, 연주자가 아닌 사람의 책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그가 좋아하는 음반을 설명하고, 그 음악이 어떤지 서술하고, 특히 어떤 연주가 좋았는지 추천한다. 클래식뿐만 아니라 영화음악, 현대음악도 언급한다.


여기서 두 번째 즐거움을 얻었는데, 글을 기고하고 그만큼 책을 읽는 작곡 전공자가 묘사하는 음악이 아름다웠다.


발레 음악으로 쓰인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에너지의 소요와 소모가 대단한 곡이다. 주술을 거는 바순의 신비로운 선율을 시작으로 생명의 태동을 묘사하는 현악기의 강렬한 일렁임, 원초적인 숨처럼 각기 다른 음색으로 터지고 포개지는 관악기, 타악기의 연속적인 고함이 이어진다. 그렇게 오로지 소리로 봄의 만개를 기원하며 대지의 신에게 의식을 올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도무지 미간을 펼 수 없고 등받이에 등을 대고 앉기 어려운 ‘뒤섞임’이 이 세계의 특징이다. 스트라빈스키는 리듬의 단위를 전투적으로 쪼개 긴장을 끌어올린다. 품위 있는 서사를 고집하던 과거의 음악들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본능적인 에너지를 원하는 대로 응축하고 집약해 하나의 흐름을 완성해내는 작곡가의 경이로운 기술을 좇다 보면 곡 안에서 최후의 춤을 추던 여인처럼 탈진할 것만 같다.

_좋아하는 마음, 14~16/159p (종이책), 6~18/182p (전자책)


정말로 그런가 싶어서 김호경이 묘사한 곡을 듣고 싶어졌다.


마침 코난북스에서는 이 책에서 언급된 노래들을 모아 유튜브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었다. 동영상이 긴데다 양도 많아서 다 듣지 못했지만, 요즘 듣고 싶을 때 찾아 듣는다.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uCyNfZIdxGGvgsPh1cCF4HZ91Eyane4l




책에서 김호경은 요한 요한슨(조한 조한슨)의 음악을 좋아한다고 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음악가는 요한 요한손이었다. 영상의 의미와 효과를 훌륭하게 뒷받침하면서도 뚜렷한 개성을 선보이는 음악가다. 영화 〈컨택트〉에서 처음 그를 알고 깜짝 놀랐다. 언어학자가 외계 생명체와 소통하는 이 영화는 무겁고 인위적인 금속 소리, 사람 목소리와 기계음이 뒤섞이는 오싹한 효과 등으로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들려준다. (...)

_영화를 위한 음악, 138/182p (전자책)


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는 2017년에 개봉했다. 세계 각지 상공에 등장한 외계 비행 물체와 인류가 접촉하며 지구에 온 이유를 밝히는 영화인데, 요한 요한슨이 음악을 작곡했다. 출판사에서 만든 플레이 리스트에도 있다. 제목은 Heptapod B인데, 괴기스럽고 으스스하다.


이전에 음악사인지 어떤 글인지, 하여간 음악을 다룬 글에서 읽었는데 클래식을 공부한 사람들이 영화음악을 많이 작곡했다고 했다. 그 영향이 거진 백 년 정도 지난 현재에도 남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음악 태반이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해 보면 컨택트의 음악을 작곡한 요한 요한슨이나 영화 오션스8의 다니엘 펨버턴이 신기할 따름이다.




본래 예술 분야의 책을 잘 읽진 않지만, 미술과 음악은 종종 찾는다. 미술은 문학과 연계해서라도 알게 되는 부분도 있고, 이런저런 전시가 많으니 읽기 수월하고 매번 새롭지는 않다. 하지만 음악은 그렇지 않았다. 내 체감으로는 미술은 대중적인 수준과 조금 깊게 들어간 수준의 간극이 그리 크지 않은 반면 음악은 크다. 성급한 일반화임. 순전히 개인의 경험에 근거한 결론임. 그래서 쉽게 발을 들일 수 있게 해 준 이 책의 존재에 감사하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더 길게 말할 수 있도록 정진, 또 정진해야지. (너무 자소서 같은 문장이다...)




예고! 다음에 읽을 책은 임승수의 피아노 에세이다. (전자책 내주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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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인용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세계에 가장 맨 위에 적어 넣을 작품을 꼽으라면 말러의 교향곡과 스트라빈스키의 초기 관현악곡이다. 나의 음악 취향은 잡식에 가깝고 그것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는데,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선으로 이어본다면 이 작품을 중심에 두고 그 주변을 넓게 둘러싸고 있을 것이다. 고전주의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새로운 소리 재료를 탐색해 전에 없던 음형을 창조한 대편성 관현악 작품들에 특히 관심이 많다. 밝고 아름다운 것보다 거대하고 어둑한, 파괴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는 건 ‘취향’이라는 말로 추릴 수 있을 것이다. - P14

말러가 완성한 열 개의 교향곡을 몇몇 단어로 뭉뚱그려 말하기는 어렵지만 말러 특유의 음울함, 비극성, 허무, 격정, 분열, 표현의 과잉 같은 것이 있다. 1번 〈거인〉의 3악장을 예로 삼는다면 구전동요 선율을 더블베이스의 어두운 음색으로 길게 늘어뜨려 장송행진곡을 만들고는 그 뒤에 그로테스크한 춤곡을 이어붙이는 식이다. 말러의 아버지가 운영한 술 공장의 풍경, 동생들이 질병으로 줄줄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목격해야 했던 그의 삶을 참고하면 그의 음악을 이해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런 환경에 놓인다고 해서 누구나 이런 음악을 쓰는 건 아니다. 말러는 기쁨, 슬픔, 아름다움 같은 감정을 묘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중적인 표현들을 창조적인 방식으로 빚는다. 100명이 우스운 대규모 오케스트라 편성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능력도 말러라는 세계의 매력이다. - P15

발레 음악으로 쓰인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에너지의 소요와 소모가 대단한 곡이다. 주술을 거는 바순의 신비로운 선율을 시작으로 생명의 태동을 묘사하는 현악기의 강렬한 일렁임, 원초적인 숨처럼 각기 다른 음색으로 터지고 포개지는 관악기, 타악기의 연속적인 고함이 이어진다. 그렇게 오로지 소리로 봄의 만개를 기원하며 대지의 신에게 의식을 올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도무지 미간을 펼 수 없고 등받이에 등을 대고 앉기 어려운 ‘뒤섞임’이 이 세계의 특징이다. 스트라빈스키는 리듬의 단위를 전투적으로 쪼개 긴장을 끌어올린다. 품위 있는 서사를 고집하던 과거의 음악들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본능적인 에너지를 원하는 대로 응축하고 집약해 하나의 흐름을 완성해내는 작곡가의 경이로운 기술을 좇다 보면 곡 안에서 최후의 춤을 추던 여인처럼 탈진할 것만 같다. - P16

음악의 재료는 어떤 법칙이나 공식이 아니라 추상적인 생각, 구체적인 경험일 수도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작곡이란 작곡 공식을 배워 적용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 혹은 감각이어야 한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 P21

미학자들도 선율(melody)의 영역은 명확히 분석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감상자의 논리적, 이성적 사고를 방해하는 감정 과잉을 지양해야 한다는 정도의 주장을 할 뿐이다. 실제로 음악학 영역에서 배우게 되는 많은 철학에서는 극도로 아름다운 음악을 경계하라고 가르친다. 음악은 차원 높은 추상 예술이고 이념과 진리를 포함하는 예술이니 선율이 통속적이고 세속적이면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내용이다. 나는 그런 책을 읽을 때마다 속으로 중얼거린다.
‘멋진 선율을 쓰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재능을 타고난 몇 안 되는 천재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이 바보들아!’ - P22

라흐마니노프가 써놓은 이 압도적인 드라마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는 무아지경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연주자가 지나치게 감상에 젖으면 균형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하고, 정작 청중은 음악에 몰입할 기회를 잃게 된다. (...) - P23

아닌 게 아니라 몇 해 전 평창의 야외 텐트에서 손열음이 붉은색 드레스 차림으로 들려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정말로 균형을 잃지 않은, 화려한 기교를 과시하지도 스스로에게 도취되지도 않은 뛰어난 연주였다. 같은 곡이어도 오자와 세이지 지휘의 보스턴 심포니와 협연한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녹음물은 절제미를 갖추고 있어 고독하고 쓸쓸하다. 그래서 더 슬픈 기묘한 감흥을 준다. 이와 달리 러시아의 데니스 마추예프는 엄청난 박력과 속도감으로 듣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한다. - P24

차이콥스키의 여러 작품 중 교향곡 6번 〈비창〉을 마스터피스라 여긴다. 1악장의 칸타빌레는 그저 마법 같다. 애틋하고 아득하다. 그 꿈같은 선율은 갑작스러운 소용돌이로 무참히 깨지는데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포효와 절규마저도 매혹적이다. 그러고는 그 아름다운 음색들을 동원해 한 번 더 꿈을 꾼다. 그 안에 푹 잠기고 싶어질 때도 있고 그저 멀리서 바라만 봐도 충만해질 때가 있다. 이 작품의 4악장은 음악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음악을 듣는 모든 청자 그리고 자신까지도 이 곡 안에서 느끼고 싶은 모든 걸 느끼게 만든다. 고요히 사라지듯 끝나는 마무리까지 완벽하다. - P25

쇼팽의 많은 피아노곡 중 단 하나만 꼽자면 소나타 2번을 이야기하고 싶다.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쓰려고 그리고리 소콜로프의 연주 음반을 막 재생했는데 1악장 도입부부터 말을 고르던 행위를 그저 멈추게 만든다. 왼손 저음부의 격렬한 움직임과 오른손의 날카로운 화음들, 정반대 정서를 품은 고요한 상념의 두 번째 주제, 두 테마가 대립하며 뒤섞인다. 자유로운 발상과 안정감 있는 구조, 대범한 시도와 정교한 전개, 이러한 이질적 특징을 동시에 품은 마법 같은 곡이다. - P44


2악장의 옥타브 연타와 느린 주제 역시 불필요한 장식 하나 없이 정제된 우아한 흐름을 보인다. 그리고 3악장의 꾹꾹 눌러 잇는 장송 행렬. 장엄한 비애감 끝에 흘러나오는 선율에서도 쇼팽은 섣불리 감상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다. 1분 30초쯤 무언가 중얼거리는 듯하다가 끝나버리는 4악장은 작곡가 스스로 천재적 영감을 믿고 내버려둔 순간의 기록일지 모른다.

(...) 쇼팽과 슈만 둘 다 엄청난 재능을 타고나고도 쇼팽이 재능을 마음껏 펼치고 누린 반면 슈만은 재능이 자신의 삶을 갉아먹도록 내버려둔 듯하다. 망상과 환각에 자주 시달리며 괴로워했다는 기록으로도 알 수 있듯 작품 속 그의 빛나는 아이디어들은 때로 쇼팽의 음악과 달리 통제력을 잃은 채 충동적으로, 무아지경으로 나아간다. 그래도 덕분에 완전히 창의적인 피아노 작품들이 음악사에 남았다. 그의 작품 속 모든 이야기는 철저히 슈만 개인의 것이다. - P45

리스트의 피아노곡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피아노 소나타 B단조다. 연주자로 하여금 여든여덟 개의 건반을 자유롭게 오가며 쇼팽이 경악할 만큼 악기를 세게 내려치게 만들기도, 미묘한 표현들로 풍부한 감흥을 빚어내게 하기도 한다. 리스트가 곡을 쓰기 시작한 후부터 피아니스트들은 아마 팔과 손가락뿐 아니라 몸 전체를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피아노 소나타 B단조는 기세등등하게 역동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구조적으로도 통일감을 잃지 않아 완성도가 뛰어나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이 곡을 연주한 녹음 기록을 듣자면 피아노라는 악기가 가진 모든 것을 만끽할 수 있다. - P47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 왜 좋은지는 몰랐다. 그냥 바흐가 멜로디를 잘 써서 좋은 줄로만 알았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배우면 배울수록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 안에서 수학적 논리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제가 되는 첫 곡을 시작으로 30개의 변주가 이어진 후 다시 첫 곡을 반복하며 끝마치는데 16번 변주곡을 기점으로 음악적 대칭을 이루고 있고, 카논 형식을 취하는 세 번째 변주마다 두 개 성부(양손) 사이의 음정이 1도씩 벌어진다.
이 곡은 오른손은 멜로디, 왼손은 반주로 나뉘는 일반적인 피아노곡과 달리 오른손도 왼손도 멜로디를 연주하게 하는 대위법을 취한다. 어느 하나의 성부만 연주하더라도 충분히 노래답다. 그러면서도 두 성부가 완전히 조화를 이루며 앞으로 나아간다. - P53

도 음을 부드럽게 치든 느리게 치든 그게 그거 아닌가 하는 질문은 그래서 바흐가 빚은 이 우주의 질서를 발견하고 나면 달라진다. 이 세계에서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중요해진다. 별 하나가 살짝만 위치를 바꾸어도 별자리가 달라지듯 표현의 섬세한 차이만으로도 전혀 다른 의미를 만든다. 그렇기에 음악가들은 책상 앞에 혹은 악기를 앞에 두고 앉아 음 하나하나에 어떤 뉘앙스를 입힐지, 선율 하나하나에 어떤 이야기를 부여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클래식 음악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연주하는 이유를 나는 바흐를 통해 알았다. - P54

자연스레 죽음을 묘사하는 다른 음악들도 떠올렸다. 모차르트가 쓴 〈레퀴엠〉,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도 손에 꼽게 좋아하는 작품이다. 집으로 돌아와 한동안 이 음악들을 재생하는데 어쩐지 계속 버거운 마음이다. 〈죽음과 소녀〉는 죽음을 향해 내달리는 곡이다. 〈레퀴엠〉은 죽음과 소멸의 한순간을 묘사한다. - P67

지금은 새뮤얼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 연주 영상을 틀어두고는 내내 넋을 놓고 있다. 구스타보 두다멜이 지휘한 빈 필하모닉의 여름 야외 음악회 영상이다. 풍부한 현악기 사운드가 매우 느린 속도로 큰 도약 없이 순차적으로 상행하거나 하행한다. 박자감을 느끼기도 어려울 만큼 아주 천천히 고이고, 번지고, 나아간다. (...) - P67

슈만의 피아노 모음곡 〈어린이 정경〉을 들을 때면 슈만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슈만이 〈어린이 정경〉을 쓴 건 1838년, 클라라와 정식으로 부부가 되기 전이다. 슈만은 서른 곡을 작곡한 후에 열세 곡을 추려 Op. 15 ‘어린이 정경’이라는 제목을 달아 완성했다.
길지 않은 열세 곡의 피아노 작품을 관통하는 정서가 그리움인 걸 보면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며 쓴 음악은 아닌 듯하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불러와 끌어안아주고 싶어서 쓴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슈만 덕에 이 곡들을 들을 때마다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리움이라는 정서를 매만지게 된다.
그중에서도 도이치 그라모폰의 노란 딱지를 단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1984년 연주를 좋아한다. (...) - P72

(...) 환상처럼 몽환적인 슈만의 〈어린이 정경〉과 달리 드뷔시의 〈어린이 세계〉는 산뜻하고 또렷하다. - P77


그러다 세 번째 곡이 시작되면 그저 감탄한다. 활기찬 리듬, 생동감 넘치는 당김음과 꾸밈음들이 넋을 놓게 만든다. 단조가 언뜻언뜻 내비치던 묘한 분위기를 ‘눈은 춤춘다’로 연결해 신비로운 존재의 명랑한 움직임을 아름답게 펼쳐 보인다.
‘작은 양치기’와 ‘골리워그의 케이크워크’의 모호한 화성, 독창적인 표현들을 듣다 보면 피아노를 곧잘 쳤다던 슈슈의 예쁨을 나도 꼭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이렇게나 품위 있는 방식으로 이렇게나 커다란 사랑을 표현할 수도 있구나. - P78

첼로와 더블베이스에 화음을 주지 않고 같은 음을 연주하게 하면 훨씬 풍부한 저음을 얻을 수 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대편성의 곡을 쓸 때 이를 적용해 입체감을 부여하고 깊이를 만들 수 있다. 오케스트라 단원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서도 소리는 완전히 달라진다. 독일식, 미국식, 절충식 같은 규칙을 따라 원하는 효과를 만들거나, 말러처럼 관악기를 하늘로 치켜들어 연주하게 해 특정 음색과 선율을 강조할 수도 있다. 음악학교, 작곡과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작곡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 P86


글을 쓰려면 글 쓰는 몸을 만들어야 한다. 가사를 쓸 때는 가사 쓰는 몸이 필요하고, 산문을 쓸 때는 산문 쓰는 몸이 필요하다. 학술적인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무드가 비슷한 글을 근래에 좀 읽은 상태, 하고 싶은 말을 머릿속에 둥둥 띄워놓은 상태, 적당히 조용하고 적당히 편안한 그런 상태가 필요하다.
실상은 늘 다른 몸으로 다른 글을 쓴다. 열심히 사회학 이론을 읽다 가사를 얼른 완성해 보내야 할 때면 곤란하다. 하나의 논리를 쪼개고 파헤치고 관점들을 나열하고 인용하고 왜 아닌지, 왜 아닌지, 왜 아닌지, 왜 맞는지, 왜 맞는지, 왜 맞는지를 열심히 좇아가다 갑자기 멈추고 직관과 느낌과 감각을 깨운다. 왜 아닌지, 왜 맞는지 따지다가는 가사는 한 줄도 못 쓸 것이다. - P95


센강의 왼쪽과 오른쪽, 낮과 밤, 잔잔한 풍경과 일렁이는 물결을 마주할 때도 역시 자연스레 드뷔시가 떠올랐다. 뼈대도 근육도 없이 오직 인상만 있는 음악이라는 드뷔시를 향한 당대의 비아냥이 얼마나 날카로운 비평이었는지도 파리를 보고서야 눈으로 이해했다.
파리를 여행하며 피아니스트 피에르 로랑 에마르의 연주로 드뷔시의 두 권의 프렐류드와 두 권의 〈영상〉을 반복해서 들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윤곽을 흐릿하게 뭉개 신비로운 장면을 그려냈다면 음악은 훨씬 더 섬세하게 세분화된 음표들로 번져나가는 소리의 울림을 좇아야 한다. 자연 속에서 흔들리고 움직이는 대상 하나하나를 자기만의 방식대로 표현하고, 소리 사이사이의 여운마다 색채감을 심어 넣은 드뷔시의 위대한 기록이 밤하늘 아래 굽이지듯 들려왔다. - P108

에마르의 연주는 반짝반짝 빛이 난다. 충분히 감성적이면서도 깊이가 있다. 무엇보다 드뷔시 작품의 특징인 어두워지거나 밝아지고,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흐름과 방향을 정확히 인지하고도 구심력을 발휘하듯 균형을 지키려 애를 쓴다. 들으면 들을수록 그 혜안이 놀랍다. 파리에서의 기억을 더듬으며 이 글을 쓰면서는 조성진의 2017년 드뷔시 음반을 듣고 있다. 에마르와 달리 조성진은 원심력을 가지고 마음껏 뻗어나가듯 연주한다. 깨질 듯 맑은 음색으로 황홀감을 선사하는 좋은 연주다. 가장 좋아하는 ‘물의 반영’을 연거푸 듣는다. - P109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음악가는 요한 요한손이었다. 영상의 의미와 효과를 훌륭하게 뒷받침하면서도 뚜렷한 개성을 선보이는 음악가다. 영화 〈컨택트〉에서 처음 그를 알고 깜짝 놀랐다. 언어학자가 외계 생명체와 소통하는 이 영화는 무겁고 인위적인 금속 소리, 사람 목소리와 기계음이 뒤섞이는 오싹한 효과 등으로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들려준다. (...) - P131


(...) 종종 꺼내 듣는 아끼는 음반이 영화 〈로맨틱 홀리데이〉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다. 블록버스터 영화 작업을 많이 한 한스 짐머가 남긴 로맨스 영화다.
이 음반은 뭐랄까, 만능이다. 아침에 들어도 늦은 밤에 들어도 좋다. 기분이 썩 괜찮을 때나 아니면 좀 센티할 때도 어울린다. 겨울에 들으면 완벽하지만 딱히 겨울이 아니라도 충분히 좋다. 여럿이 함께 듣기에도, 혼자 운전하며 듣기에도 만족스럽다. - P132


(...) 인터뷰 얼마 후 선생님이 귀국해 지휘자 정명훈, 서울시향과 함께 파스칼 뒤사팽이라는 프랑스 작곡가의 바이올린 협주곡 〈상승〉을 아시아 초연한 자리였다.
이 곡은 고음부에서 유영하는 솔로 바이올린과 저음부에서 머무는 오케스트라의 괴리를 드러내며 시작한다. 마치 현대를 사는 하나의 자아가 신을 향해 품은 복잡한 마음을 풀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악장마다 솔리스트를 극한으로 몰고 가는 건 고독한 투쟁을 치러내는 듯 보이기도 했다. 선생님의 바이올린은 매우 풍부한 소리로 엄청난 긴장감과 추진력을 만들어내며 뚜렷한 색채를 빚어갔다. - P140

〈머큐리〉 외에 아르보 패르트의 〈거울 속의 거울〉(1978), 요한 요한손의 <플라이트 프롬 더 시티(Flight from the City)>(2016), 올라퍼 아르날즈의 <ekki hugsa>(2018)를 자주 재생한다. 미니멀리즘 작품 중에서는 우울하게 추락하는 듯한 곡들도 많은데, 이 세 곡은 내가 어디에 있든 어떤 마음으로 있든 폭신폭신한 이불을 확 둘러 덮어준다. 언제라도 마음이 포근해지고 따뜻해지고 편안해진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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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9-01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라니님 생각보다 병약한 고라니 아니고 강한 고라니였어! 아플때 책읽는거 그거 진짜 힘든데!! 얼른 나으시고요... 낑낑 보니까 마음이 ㅠㅠ
클래식에 관심있는 고라니님 멋지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플리의 90%가 케이팝인 사람으로서.. 반하고 갑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책식동물 2023-09-01 22:23   좋아요 1 | URL
저 연약.귀염.초롱초롱.고라니입니다. 아니 주사가 뭔 코로나 백신 맞는 줄 알았어요 보통 이런 거 안 아픈데; ㅋㅋㅋ

저두 케팝 조아합니다... 요새 레드벨벳 빨간맛 클라이맥스 직전에 웬디가 그러니 말해~~~ 하는 게 좋아서 빨간맛 엄청 들었는데... 제로베이스원 앨범도 들었어요 키킼 이 책에서 서울필하모닉이 레드벨벳 빨간맛 오케스트라버전으로 연주한 걸 언급해요!!
 
세계 문학 전집을 읽고 있습니다 2 세계 문학 전집을 읽고 있습니다 2
김정선 지음 / 포도밭출판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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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두 권 대출해 읽었다. 두 권을 하루에 연달아 이어서 1권과 2권의 감상이 비슷하다. 이 책 1권에도 똑같이 리뷰 남길 예정.


책을 읽으며 김정선 작가님께 '아저씨레이디'라는 애칭을 붙여 드렸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니 꼭 아저씨라고는 단언할 수 없어서 급한대로 '50대레이디'로 변경했다.


저자가 이사 후 세계 문학 전집 도장깨기를 하신 책이다. 이 기획, 너무 흥미로워서 '젠장, 나도 하고 싶다고-!!'라고 생각했다. 글은 저자의 일상으로 시작하고, 읽은 책 줄거리 요약, 그 책에 대한 저자의 생각으로 끝난다. 간혹 일상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기도 한다. 편안하게 읽기 좋은 책이었다.


이 책은 고전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다. 어떤 책이나 다 그렇겠지만 특히 고전이라 불릴 만한 책들은 사골처럼 우려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텍스트를 가지고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 수 있다. 내가 생각지 못한 점을 다른 사람이 짚어주는데, 나온 지 오래 됐기 때문에 그 양이 풍부하다. 연구자, 서평가, 비평가, 그리고 나 같은 아마추어들.


하지만 이 책을 특히 더 추천하고 싶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저자가 고전이라고 해서 무지성으로 좋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저자는 50대니까 덮어놓고 무작정 좋다고 할 짬은 아니긴 하다. 또 이런 책을 낼 만한 고전문학 독자라면 무작정 좋다고 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서평이나 해설이 아니라 사적인 리뷰이기 때문에 불호 의견을 좀 더 서슴없이, 솔직하게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점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작년 겨울로 돌아간다. (저번에 썼던 이야기 반복이다.)


누군가 헤세의 『데미안』에 대한 글을 썼다. 그 글이 지적하는 점은 여자 캐릭터를 잘 다루지 못한다, 그런 거였는데 나는 백 번 천 번 동의했다. 『데미안』은 남자들의 그사세(그들이 사는 세상)였다.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이나 싱클레어가 그렇게 앓은 베아트리체가 그나마 좀 등장한 여자 캐릭터다. 베아트리체를 먼저 말해보자면, 이 여자의 육성은 없다. 그냥 싱클레어 앞에 한 번 나타났을 뿐인데 모르는 남자(싱클레어)의 상상 속에서 욕망만 당하다가 결국 다른 모르는 남자(데미안)로 덧씌워지며 끝난다. 에바 부인은... 제정신인가? 아들보다 어린 남자한테 쟁취될 거라고 말하는 아줌마가 세상에 어디 있나. 너무 수동적인 캐릭터였다는 인상이 남았다. 『데미안』 읽은 지 햇수로 사오 년이 넘은 듯하다. 그래서 틀린 부분도 있을 수 있다.


헤세의 다른 작품도 그렇다. 남자 주인공을 참 많이 쓰고 여자 캐릭터는 주변화된다. 아예 등장하지 않는 작품도 있다는데, 나는 헤세를 싫어해서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 『싯다르타』와 독서 에세이, 서평집만 읽었다. 싫어한 거 치고 많이 읽었지? 좋아하려고 노력해 봤지만 좋아할 수 없었다. 독서 에세이와 서평집에서도 그가 상정한 독자는 남자였다. 여자가 아니다. 가만 보면 헤세는 여자는 자기라는 남자와 동등한 고차원적 사고를 못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나만의 생각은 아니고 누가 지적했던 거다. 앞서 언급한 글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리고 이 지적이 중요한 이유는 여자 캐릭터를 못 다루는 창작자들의 문제는 대략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내가 열내며 주객전도까지 하는 이유다.


이제 진짜 왜 중요한지 말한다. 고전은 어차피 지난 시대의 것이고, 그 시대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소위 '빻은' 점을 지적할 필요가 없다, 그런 지적을 나는 받아들이지 않겠다, 이런 주장을 보았다. 이게 말이 됨? 시대상의 한계로 여자들이 결혼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결혼을 통해 이득을 취하려는 꽃뱀 같은 여자들만 득실거리는 식으로 묘사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감안할 만한 것이고, 후자는 지금도 대차게 까일 만하다.


물론 이 책을 찾아 읽을 정도면 이렇지는 않으리라고, 나는 나와 취향이 겹치는 독자들에게 희망을 품고 있다.


아래에 인용한 문장들을 보면 저자는 작품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이렇게 열을 낸 건 나 때문이기도 한데, 좋게 말하면 수용하는 폭이 넓으며 이해심 많은 사람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리뷰, 서평을 읽으며 내가 비판하지 않고 넘어간, 하지만 눈치챘더라면 욕했을 지점들을 알아야 한다.


앞서 이 책은 사적이라고 했는데, 저자가 글에 많이 드러나는 것이 장점으로 작용한다. 개인적으로 저자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아서 처음에는 불호 요소였다. 하지만 한 사람의 약 이 년 정도의 삶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보니 나도 모르게 애착이 생겼다. 잘 지내시길 바란다.


1권의 표지가 마음에 든다. 책 본문 같아서. 2권도 귀엽지만, 1권만 못한 것 같다. 

화자 스스로 말하듯 이 작품은 ‘인생의 소설‘이라고 이름 붙일 만하다.하지만 인생과 삶을 견제할 낭만주의의 힘은 여전히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치기 어린 경솔함에 삶은 눈살을 찌푸리겠지만, 삶 또한 우리에게 경솔한 판단을 내리고 경솔한 짓을 서슴없이 행하기도 하니까. 게다가 우리를 가르치려고 들 뿐만 아니라, 언제든 대체 가능한, 전체를 위한 부분으로만 취급할 때도 적지 않고. 그럴 땐 잘난 척하는 삶을 향해 낭만주의의 펀치를 힘껏 날리고 싶어진다. 비록 그 펀치가 부메랑처럼 고스란히 내게 와 꽂힌다고 해도. "그래서? 그냥 그렇다는 말"(123쪽).
_예브게니 오네긴 - P126

푸가초프의 난을 소재로 소설을 쓴다면 푸가초프나 푸가초프에 동조했다가 배신하는 인물이 주인공이고, 맞붙는 세력 간의 정치적 갈등이나 황제를 참칭하는 자의 개인적인 고뇌가 주된 내용을 이루리라고 예상하게 된다. 그런데 주인공은 진압군에 속한, 정치적 입장도 문명치 않은 장교인 데다, 딱 한 번 베푼 선행 덕분에 살육이 자행되는 양쪽 진형을 무시로 오갈 뿐만 아니라, 그렇게 오가는 이유 또한 팽팽한 긴장 속에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쓰는 소설의 정체를 작가 스스로 불분명하게 만들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_대위의 딸 - P131

그런데 독재 권력의 무자비한 횡포와 간악함을 고발하려는 욕심이 지나쳤을까. 오웰은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오브라이언의 입을 통해 역사 속 권력자들과 달리 자신들은 오직 권력 그 자체를 목적으로 권력을 잡았노라고 주장하게 만든 것. 물론 권력은 권력 그 자체를 먹고 산다. 하지만 자신이 권력 그 자체를 목적 삼아 권력을 잡았노라고 주장하는 권력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권력은 대의를 이루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권력자들의 공통된 논리다. 하지만 권력을 잡고 나서는 순서가 바뀌는 것도 매뉴얼처럼 정해져 있다. 대의는 도구에 불과하고 권력이 목적이 된다. 이것이 권력을 탐하는 자들의 위선을 드러내 줄 유일한 급소다.
_1984 - P225

그러니 오브라이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빅 브라더와 오브라이언을 비롯한 내부 당원들은 이를테면 ‘순수한‘ 권력주의자들일 뿐 위선자들은 아닌 셈이다. 오웰은 자신이 비판하고 고발하려는 상대에게서 급소를 빼앗고는 신(神) 같은 존재로 만들고 말았다. 도무지 어찌해볼 수 없는 권력의 신.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걸까.
_1984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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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8-29 2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전 까는 고라니
데미안 까는 고라니
에바 부인 까는 고라니
까도 된다 고라니
저도 얼마전에 데미안 재독했는데 절레절레… 에바 부인 진짜 ㅋㅋㅋㅋㅋ 미쳐 ㅋㅋㅋ

책식동물 2023-08-29 22:04   좋아요 1 | URL
아니 저도 상당한 사대주의자라서 20세기 이전에 태어난 독일사람이라면 무지성으로 빨 수 있는데 그... 도무지 그게... 안 되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헤세 여자 안만나봄? 이러고 봤는데 결혼을 세 번이나 했대요 넌 뭐한거냐진짜? 그리고 제 데미안 최애는.... 에바부인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08-30 06:26   좋아요 1 | URL
에바부인 진짜 어릴 때부터 공감이 안 되어서…. -.- 중학교 때 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읽고 헤세 싫어하게 됨요

책식동물 2023-08-31 20:52   좋아요 0 | URL
수하님/ 네 정말... 여자로서 에바 부인은 공감이 안 돼요

은오 2023-08-29 22: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분 내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쓰신분 아닌가요?! 이름이 왠지 여자느낌이라 여잔줄.... 글도 여자가 쓴 느낌이었는데... 아저씨 레이디에서 검색해보고 옴...
고라니님 리뷰 읽으니까 궁금해집니다. 솔직한 불호 의견 재밌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1권 표지가 더 낫다는 거에 저도 동의 ㅋㅋㅋ

책식동물 2023-08-29 22:05   좋아요 1 | URL
네 그 책 쓰신 분 맞아요!!! 남자분인데 pc함이 완전 여자여서 아저씨레이디...라고 했다가 저자 소개가 50대 남성이 아니고 50대 사람이어서 아 남성이 아닐수도 있겠구만~ 하고 급한대로 50대레이디라고 함.......................... 재밌었어요! 근데 2권 표지가 코팅이 안 되어 있어서 잘 꺾이더이다...

다락방 2023-08-29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분 또 책을 내셨군요! 저도 읽어볼래요. 아이참 살 책 많아 클났네. ㅋㅋ

저도 헤세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읽고나서 쓴 리뷰에 여자들은 다 어디있냐고 썼었어요. 골드문트 그렇게나 여자 만나는데 그와중에 아비없는 아이들도 여럿 탄생했을 것 같은데, 그런 건 전혀 안나오고 골드문트 인생 깨달아버림...

아무튼 김정선 작가님을 제가 좀 좋아하고 있습니다. 흠흠.

책식동물 2023-08-31 20:51   좋아요 0 | URL
재밌습니다!! ㅋㅋ 저 책 리뷰 좋아하는 것에 비해 그런 책을 잘 사지는 않는데(그보다는 해설에 가까운 글을 사게 되는듯...) 이 책... 읽다 보니 김정선 작가님한테 정이 들어서 다음에 또 읽고 싶다면 그땐... 사게 될 것 같습니다 ㅋㅋㅋ

저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읽지 않았는데... 진짜 화나네요 ㅎㅎ;;; 남성의 일반적인 인식을 생각하면 딱히 애가 안 생기도록 심혈을 기울이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손이 떨립니다 부들부들 참~~~~~~ 좋겠네요 임신 위험이 태생적으로 없는 사람들은!!

lucia_cheon 2023-12-16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는 동물의 농장인가요 프로필 사진들이 ㅋㅋㅋ 리뷰 읽다가 아저씨레이디 네이밍이 너무 찰져서 댓글을 달 수밖에 없었습니다…

책식동물 2024-01-01 20:2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늦은 답댓글 죄송합니다... 그런데 아저씨레이디라는 네이밍 진짜 어떤 느낌인지 딱 이해가... 되지 않으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김정선 작가님이 쓴 다른 개인적인 수필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 문학 전집을 읽고 있습니다 1 세계 문학 전집을 읽고 있습니다 1
김정선 지음 / 포도밭출판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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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두 권 대출해 읽었다. 두 권을 하루에 연달아 이어서 1권과 2권의 감상이 비슷하다. 이 책 2권에도 똑같이 리뷰 남길 예정.


책을 읽으며 김정선 작가님께 '아저씨레이디'라는 애칭을 붙여 드렸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니 꼭 아저씨라고는 단언할 수 없어서 급한대로 '50대레이디'로 변경했다.


저자가 이사 후 세계 문학 전집 도장깨기를 하신 책이다. 이 기획, 너무 흥미로워서 '젠장, 나도 하고 싶다고-!!'라고 생각했다. 글은 저자의 일상으로 시작하고, 읽은 책 줄거리 요약, 그 책에 대한 저자의 생각으로 끝난다. 간혹 일상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기도 한다. 편안하게 읽기 좋은 책이었다.


이 책은 고전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다. 어떤 책이나 다 그렇겠지만 특히 고전이라 불릴 만한 책들은 사골처럼 우려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텍스트를 가지고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 수 있다. 내가 생각지 못한 점을 다른 사람이 짚어주는데, 나온 지 오래 됐기 때문에 그 양이 풍부하다. 연구자, 서평가, 비평가, 그리고 나 같은 아마추어들.


하지만 이 책을 특히 더 추천하고 싶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저자가 고전이라고 해서 무지성으로 좋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저자는 50대니까 덮어놓고 무작정 좋다고 할 짬은 아니긴 하다. 또 이런 책을 낼 만한 고전문학 독자라면 무작정 좋다고 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서평이나 해설이 아니라 사적인 리뷰이기 때문에 불호 의견을 좀 더 서슴없이, 솔직하게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점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작년 겨울로 돌아간다. (저번에 썼던 이야기 반복이다.)


누군가 헤세의 『데미안』에 대한 글을 썼다. 그 글이 지적하는 점은 여자 캐릭터를 잘 다루지 못한다, 그런 거였는데 나는 백 번 천 번 동의했다. 『데미안』은 남자들의 그사세(그들이 사는 세상)였다.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이나 싱클레어가 그렇게 앓은 베아트리체가 그나마 좀 등장한 여자 캐릭터다. 베아트리체를 먼저 말해보자면, 이 여자의 육성은 없다. 그냥 싱클레어 앞에 한 번 나타났을 뿐인데 모르는 남자(싱클레어)의 상상 속에서 욕망만 당하다가 결국 다른 모르는 남자(데미안)로 덧씌워지며 끝난다. 에바 부인은... 제정신인가? 아들보다 어린 남자한테 쟁취될 거라고 말하는 아줌마가 세상에 어디 있나. 너무 수동적인 캐릭터였다는 인상이 남았다. 『데미안』 읽은 지 햇수로 사오 년이 넘은 듯하다. 그래서 틀린 부분도 있을 수 있다.


헤세의 다른 작품도 그렇다. 남자 주인공을 참 많이 쓰고 여자 캐릭터는 주변화된다. 아예 등장하지 않는 작품도 있다는데, 나는 헤세를 싫어해서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 『싯다르타』와 독서 에세이, 서평집만 읽었다. 싫어한 거 치고 많이 읽었지? 좋아하려고 노력해 봤지만 좋아할 수 없었다. 독서 에세이와 서평집에서도 그가 상정한 독자는 남자였다. 여자가 아니다. 가만 보면 헤세는 여자는 자기라는 남자와 동등한 고차원적 사고를 못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나만의 생각은 아니고 누가 지적했던 거다. 앞서 언급한 글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리고 이 지적이 중요한 이유는 여자 캐릭터를 못 다루는 창작자들의 문제는 대략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내가 열내며 주객전도까지 하는 이유다.


이제 진짜 왜 중요한지 말한다. 고전은 어차피 지난 시대의 것이고, 그 시대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소위 '빻은' 점을 지적할 필요가 없다, 그런 지적을 나는 받아들이지 않겠다, 이런 주장을 보았다. 이게 말이 됨? 시대상의 한계로 여자들이 결혼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결혼을 통해 이득을 취하려는 꽃뱀 같은 여자들만 득실거리는 식으로 묘사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감안할 만한 것이고, 후자는 지금도 대차게 까일 만하다.


물론 이 책을 찾아 읽을 정도면 이렇지는 않으리라고, 나는 나와 취향이 겹치는 독자들에게 희망을 품고 있다.


아래에 인용한 문장들을 보면 저자는 작품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이렇게 열을 낸 건 나 때문이기도 한데, 좋게 말하면 수용하는 폭이 넓으며 이해심 많은 사람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리뷰, 서평을 읽으며 내가 비판하지 않고 넘어간, 하지만 눈치챘더라면 욕했을 지점들을 알아야 한다.


앞서 이 책은 사적이라고 했는데, 저자가 글에 많이 드러나는 것이 장점으로 작용한다. 개인적으로 저자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아서 처음에는 불호 요소였다. 하지만 한 사람의 약 이 년 정도의 삶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보니 나도 모르게 애착이 생겼다. 잘 지내시길 바란다.


1권의 표지가 마음에 든다. 책 본문 같아서. 2권도 귀엽지만, 1권만 못한 것 같다. 

사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오직 샤일록만이 현실에 발 딛고 사는 어른이고 나머지는 하나같이 몽상가들이자 철부지들이다. 아마도 아버지에게 물려받았을 게 뻔한 재산을 단 한 번의 모험에 몰아넣은 안토니오는 물론 대책없는 백수 바사리오에, 자신의 신랑감을 운에 맡겨서 얻으려는 포셔, 아빠를 이해하지 못하고 기독교도 청년 로렌초와 야반도주하는 샤일록의 딸 제시카 등등.. 이들은 자신들이 불협화음의 원인으로 지목한 샤일록을 제거하고 제대로 된 화음을 이루는 청년들이 된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는 샤일록을 희생양으로 본 것일까? 모르겠다.
_베니스의 상인 - P118

결국 섹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도구인 건 로렌스에게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게다가 그 섹스는 지독히 남성 중심적인 섹스이기도 하다. 코니는 진정으로 오르가슴을 느꼈다지만 내내 누운 자세를 유지한 채 단 한 번도 섹스를 주도하지 못하니까. 무엇보다 두 사람의 섹스는 페니스가 중심인 섹스여서 아마도 작가는 삽입 섹스가 아닌 섹스는 건강하지 못하다고 비난했겠다 싶을 정도로 ‘페니스‘에 대한 강조가 차고 넘친다. 앞에 인용한 문장도 코니가 발기한 멜로즈의 페니스를 보면서 내지르는 탄성이다. 여섯 개의 문장 뒤에 발기한 페니스같은 느낌표가 빳빳하게 서 있다.
_채털리 부인의 연인 - P175

‘자유 시민‘으로 유럽을 여행하고 독일에서 교육 받은 코니가 멜로즈와 아이를 낳고 ‘진정한‘ 섹스를 나누며 사는 삶에 만족하도록 강제하는 듯해서 민망하다. 그건 하반신이 마비된 클리퍼드와 정신적인 삶을 함께하며 만족을 찾았다는 이야기만큼이나 현실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경제적으로 얼마든지 독립할 수 있는 코니라면 왜 굳이 멜로즈에게, 아니 멜로즈의 페니스에 매달려야 한다는 건지. 그것도 아이까지 낳아 키우면서 말이다.
_채털리 부인의 연인 - P176

그러니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을 통해 두 가문의 화해를 이끌어내고 베로나 시의 안전을 도모했어야 하지 않을까. 비록 그 사랑이 호르몬의 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더라도 말이다. (...) 게다가 그들은 일반 시민이 아니었다. 유력한 가문의 유일한 아들과 딸로서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누릴 수 없는 행운을 타고난, 이를테면 특별 시민이었다. 철천지원수로만 알았던 상대 가문의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면, 그리고 그 사랑이 단지 호르몬의 장난질만은 아니었다면,
_로미오와 줄리엣 - P179

그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새롭게 눈을 떴어야 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부여된 역할을 다 하면서 고통을 감수하고 치욕을 떠안으며 두 가문의 화해를 이끌어냈어야 했다. 그러고 나서 둘이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든 죽음을 택하든 그건 온전히 그들의 몫이리라. 하지만 세상에 작별을 고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떠나버림으로써, 그들이 속한 두 가문은 물론 공동체 또한 나이 어린 두 연인의 죽음을 통해 화해와 협력을 이뤘다는 죄책감을 부여받고 말았다. 이거야말로 비극이 아닐까. 그들에게도 공동체에게도.
_로미오와 줄리엣 - P180

좌파는 분열로 망한다지만 이 말은 어쩌면 좌파에겐 우파와 달리 대의라는 거울이 있다는 방증인지도 모른다. 대의 없이 구호와 동원만 난무하는 우파와 달리 좌파에겐 행위 하나 전략 하나를 비쳐볼 대의라는 거울이 있는 셈이다. 말 그대로 거울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이뤄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외려 텅 비어 있어서 우리 자신을 비쳐볼 수 있는 거울. 매번 다른 의견과 논쟁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좌파는 분열 책동으로 망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의견을 분열로 몰아 권력으로 제압하는 순간 망하는 것이리라. 설령 반대를 용인할 수 없는 여건이었다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_카탈로니아 찬가 - P259

서술자의 전략적인 서술도 한몫한다. 당시의 다른 소설들과는 다르게 풍경이나 인물 묘사는 되도록 자제하고 대화와 상황 설명만을 통해 인물의 대조되는 성격과 역할을 드러낸 것이 대표적이다. 독자는 베넷 씨의 집이 어떻게 생겼고 정원은 어떤 모습이며 제인과 엘리자베스, 빙리와 다아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 알 길이 없다. 서술자는 각각의 거처는 물론 등장인물들의 얼굴이 계란형인지 각진 턱을 가졌는지 머리카락과 눈은 어떤 색인지 일절 묘사하지 않는다. 서술자가 유일하게 관심을 기울이며 묘사하고 설명하는 풍경은 인물들의 내면 풍경일 뿐, 독자의 시선을 분산시킬 만한 묘사는 과감하게 생략한다. 심지어는 무도회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그 흔한 옷차림 묘사도 자제할 정도다. 『오만과 편견』을 낭만적인 연애소설이라고만 규정할 수 없는 이유랄까.
_오만과 편견 - P275

‘오만과 편견‘ 모두 개인적인 성벽에서만 비롯되는 건 아닐 터. 사회 제도와 문화, 습성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다아시는 귀족의 자제로 새로운 환경에서 뒤섞이게 된 시민 계급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미처 교육받지 못했고, 시민 계급의 자제인 엘리자베스 또한 귀족들의 특성을 참아줄 만큼 신분제가 공고한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다. 그러니 이 소설에서 ‘오만과 편견‘은 단지 연애와 결혼을 위해 고민하고 애쓰는 젊은 남녀들의 문제인 것만은 아니다. 한정 상속 제도라는 사례가 보여주듯 연애와 결혼에 수반하는 문제들을 제기하는 것이 곧 사회 문제를 지적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시대의 이야기니까. 하긴 그런 시대가 따로 있겠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그래왔고 지금도 그러한데.
_오만과 편견 - P276

그렇다고 『이성과 감성』이 졸작이라는 건 물론 아니다. 언급한 대로 인물간의 갈등이 그 최대치에 달할 때까지 이야기를 밀어붙여 보겠다는 의지가 느껴질 만큼, 관계도를 그려가며 읽어야 할 정도로 복잡한 갈등 관계를 무리 없이 그려낸 수작이다. 재능을 엉뚱한 데 낭비하지 않고 이른바 ‘선택과 집중‘의 힘을 보여준 건 『오만과 편견』에 버금가는 미덕이다. 인간 군상의 다양한 성격에 천착한 작가답게 상황 변화에 따라 인물의 성격이 가볍게 왔다 갔다 하지 않고 일관성을 갖도록 관리한 것도 제인 오스틴의 작품답다는 찬사를 받을 만하다.
_이성과 감성 - P281

찰스 디킨스와 그의 소설을 즐기는 대중과의 접점은 하층 계급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거나 그들의 분노에 공감하는 데서가 아니라, 천박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공유하는 데서 말미암지 않았을까. 디킨스는 어린 시절 불운 때문에 잠시 빠져들었던 하층민 생활에서 어렵게 빠져나온 기억이 있고, 당시 대중들 또한 자신은 물론 하층민 사람들도 더 이상 천박해지지 않고 하루빨리 그곳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랐을 테니 말이다. 아니면 세상이 점점 천박해지는 것에 대해 모멸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거나. 소설 속에서 매그위치가 반복적으로 ‘천하게 행동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나, 하층 계급의 이야기를 전하는 디킨스의 문장이 지나치게 고급스럽고 해학적인 것도 그 때문인 듯하다. 에밀 졸라의 직설적인 문장과 비교하면 디킨스의 해학적인 문장은 어색할 정도로 인물들과 괴리되어 있잖은가.
_위대한 유산 - P287

엠마는 외도 때문이 아니라 고리대금업자의 덫에 걸려드는 바람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이 부분이 비슷한 시기 결혼한 여성이 외도 때문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는 내용을 갖는 유럽의 다른 두 소설, 즉 독일 작가 테오도어 폰타네의 『에피 브리스트』(1895)나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1877)와 구별되는 점이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의 문학계에 같은 내용의 소설이 세 편이나 등장했다는 것도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엠마와 안나는 자살하고, 에피는 병으로 사망한다. 안나는 외도 끝에 절망한 나머지 기차에 몸을 던지지만, 에피의 경우는 외도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몇 년이 지난 뒤 남편이 연애편지를 발견하는 바람에 순전히 명예 때문에 결투를 하고 에피는 딸과 함께 집을 나와 병으로 사망한다. 엠마에게만 빚이 문제가 되었다. 외도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 환경이 엠마를 죽음으로 내몬 셈이랄까.
_마담 보바리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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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8-29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복붙 ㅋㅋㅋㅋㅋㅋ 날로먹는 고라니상

책식동물 2023-08-29 22:08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1권 검색하시든 2권 검색하시든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보셨으면 해서... 그러나 서재 친구분들에겐 같은 리뷰 도배ww

독서괭 2023-08-30 0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예전에 팟캐스트에서 소개되는 거 듣고 재밌겠다 싶었는데.. 고라니님도 한번 고전깨기 도전해보시죠!
그나저나 고라니님의 진지한 리뷰 낯설지만 좋습니다 ㅋㅋ

책식동물 2023-08-31 20:54   좋아요 0 | URL
네 재밌었어요!!! ㅋㅋㅋ 저도 고전... 좋아하지만 안 읽은 게 너무 많아서 읽을 때마다 이게뭐임?뭔소리임?알못ㅉㅉ 이러고 말 것 같아 우려스럽네요... 읽을 수 있는 텍스트만한 글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 진지한 고라니입니다.
 
[eBook] 피아노 시작하는 법 -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기쁨 땅콩문고 시리즈
임정연 지음 / 유유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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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대출하고 짱박아뒀다가
종이책 샥샥 읽고
아니-!! 이 책 정말 유용하잖아-!!
하고, 완독 후 바로 전자책도 사버렸다...

우선 나는 유유 출판사에서 자꾸
일본 저자 책을 번역해서 내는 걸
별로 안 좋아하고 있었다.
왜냐면... 일본어는 번역하기 쉬운 만큼
다른 언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책들이 쉽게 들어오니까.
이런 얘길 한다는 건?
최근에 읽은 유유 책(특: 일서)이 마음에 안 들었다는 것...
!!!물론 일본책이 다 그런 건 아님!!!
일반화 금지.

그런데 그 아쉬움을 싹 날려주는 책이었음.
정말...
알차다.
실용적인데
어떤 실용서들이 지니고 있는
경박한 문체나 세련되지 못한 글의 형식 등등을
이 책은 안 갖고 있었음.
진중하고 저자의 내공이 깊어 보이는데
읽기 쉽고 재밌는데다 심지어 무척 실용적임.
피아노 연주를 많이, 오래 하고
연습 방법에 숙고한 사람만이
이런 방법을 알려줄 수 있다고 느꼈음.

나는 어릴 때 피아노를 쳤다가
책에서 언급했듯ㅋㅋㅋ
초4때 체르니 30에서 튕겨져나옴.
중2때 다시 피아노 연주를 시작해서
너무 멋지지만 당시 내 실력에서는 무리였던 곡을
열심히 연습하고 완주할 수 있게 되면서
성인이 된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는 취미가 됨.

학생 때는...
취미 피아노지만 개잘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음.
하지만 대학 다니고 직장 다니면서
그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곡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연주하면서
이전엔 안 해 본 연주를 하고 싶어지는 거임.
그리고 악보의 이런저런 지시를
완전히 외우고 싶어지는 거임.
그래서 목표가 바뀌었음.
많은 곡을 잘 치기보다는
좋아하는 곡을 잘 치고 싶다...

그런 내 목표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해주는
좋은 책이고
앞으로도 책을 들춰보면서
피아노 취미를 이어나가겠습니다.








우선, 디지털 피아노에는 하나의 음색만 존재하지만 어쿠스틱 피아노로는 맑은 소리, 가벼운 소리, 굵직한 소리, 어두운 소리, 따뜻한 소리 등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 좋은 어쿠스틱 피아노일수록 손끝의 면적을 넓게 하느냐 좁게 하느냐, 건반을 빠르게 누르느냐 천천히 누르느냐, 손목을 손보다 아래에 두느냐 위에 두느냐에 따라 수십 가지 음색을 표현할 수 있다. - P49

앞부분을 가장 잘 치고 뒤로 갈수록 연습이 덜 된 경우를 많이 보는데 이는 매번 연습할 때마다 맨 앞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연습할 때 쓸 수 있는 에너지와 체력에는 한계가 있고, 가장 처음 연습하는 순간이 집중도 가장 잘되고 에너지 레벨도 높을 때이다. 그럼 이때 뭘 연습해야 할까? 가장 안되는 부분을 연습해야 한다. 기록하지 않아도 내일 다 기억할 것 같지만 내 경험으로는 기억나지 않을 때가 상당히 많다. - P57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나머지 단추를 채우다 보면 나중에 나처럼 불필요한 수고를 들여야 한다. 새로운 곡의 첫 음을 처음으로 누르는 그 순간부터 내 몸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한다. - P63

연주기호로, 루바토라고 쓰여 있는 부분에서는 연주자가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템포를 바꾸어도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 P64

다음으로는 악보를 보면서 음반을 들어 본다. 이때 최소 음반 세 개 이상을 비교하며 듣는다. 피아니스트 세 명의 연주를 듣다 보면 템포, 악상 표현, 루바토, 트릴 등에서 차이점이 느껴질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떤 연주가 내 취향인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연습할지 생각하게 된다. 악보를 보며 듣기 때문에 전체 구조도 자연스레 파악된다. 섹션이 어떻게 나뉘어 있는지, 초반에 나왔던 메인 테마가 곡 전반에 거쳐 나온다면 나올 때마다 완전히 똑같은지 약간 변형이 되는지, 이런 부분을 대강이라도 파악하면 곡을 배우는 속도뿐 아니라 나중에 암보할 때도 큰 도움이 된다. 나무 하나하나에 집중하기 전에 전체 숲을 보는 작업이다. - P64

이때 초견으로도 완벽히 칠 수 있는 쉬운 곡이 아니라면 원래 템포보다 훨씬 느리게, 그리고 양손 따로따로 연습해야 한다. - P65

천천히 연습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느린 템포로 연주할 때 비로소 음 하나하나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 P68

천천히 연습할 때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있다. 아무 표현을 넣지 않고 기계적으로 단지 템포만 느리게 치는 것이다. 원래 템포보다 두 배 느린 템포로 연습을 한다면 악상 표현도 두 배 더 많이 해 줘야 한다. 빠른 템포로 연주할 때는 생각만큼 악상 표현이 안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천천히, 과장하면서 내 근육이 그 팔의 무게를, 그 에너지를 흡수하게끔 해야 한다. 또 천천히 연습한다고 단 한 가지 템포로만 연주하기보다는 아주 천천히, 보통 천천히, 조금 천천히 등 다양한 템포로 쳐야 효율적이다. - P69

대부분의 곡은 오른손이 주요 멜로디를 연주하므로 양손 같이 치는 것만 반복하면 내 귀는 자연스레 오른손이 치는 멜로디를 따라가게 된다. 그 상태에서 왼손만 따로 쳐 보면 처음 보는 곡을 치듯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듯 왼손을 홀대하기 쉽기 때문에 악보를 처음 볼 때도 왼손 먼저 연습하는 것이 좋고, 곡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완성되어 가는 단계에서도 꾸준히 왼손을 따로 연습해 주면 양손 같이 칠 때 왼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인지할 수 있다. 가장 높은 성부를 연주하는 바이올린만 잘해서는 결코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연주가 될 수 없다. 귀에는 잘 안 들려도 아름다운 첼로, 콘트라베이스의 라인이 밑받침되어야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연주가 되는 법이다. - P69

부점이란 음표 옆에 작게 찍힌 점으로, 그 음표의 원래 길이 반만큼의 길이를 더하라는 뜻이다. 부점을 활용해 연습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가장 많이 하는 ‘두 음 앞부점 연습’은 두 음 단위로 앞음은 길게, 뒤음은 짧게 치는 리듬으로 변화를 주는 것이다. 반대로 뒷부점 연습(앞음 짧게, 뒤음 길게)도 가능하고, 더 나아가 네 음 단위(앞음 길게, 뒤따라오는 세 음은 짧게)나 마디 단위로 다양하게 연습할 수도 있다. 부점 연습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거나 초심자라면 두 음 단위부터 시작해 보자. - P71

운지법은 그만큼 중요하다. 운지법이 한번 굳어지면, 그러니까 이 부분에서 이 손가락 번호를 쓰는 걸 며칠만 반복해도 다른 운지법으로 고치기가 쉽지 않다. - P74

편하고 효율적이라고 해도 좋은 운지법이 아닌 경우도 있다. 효율성을 생각하면 약지를 쓰는 게 최선인데, 큰 소리로 나와야 하는 음이라면? 이때는 조금 덜 효율적이더라도 강한 소리를 낼 수 있는 엄지나 중지를 사용하는 게 최선이다. 중지는 깊이 있고 따뜻한 음색을 내는 데에도 가장 적합하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잘 어울리는 음에는 효율성과 상관없이 중지를 선택하는 게 좋다. 같은 맥락에서 작은 소리를 내고 싶다면 엄지는 되도록 피하고, 또렷하고 알맹이 있는 소리를 내는 데에는 의외로 새끼손가락이 제격이다. - P75

• 치기 전에 악보를 전체적으로 눈으로 훑으며 조성, 박자, 반복되는 구간 등을 빠르게 파악한다.
• 모든 음을 완벽하게 치는 게 목적이 아니므로 틀리더라도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실수했다고 해서 멈추거나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
• 틀리더라도 원래 템포로 친다.
• 각각의 음을 따로따로 보기보다 상향인지 하향인지, 음정은 어떻게 되는지 같은 음과 음의 관계에 집중한다.
• 언제나 시야는 한 박 또는 한 마디 앞을 봐야 한다.
• 맞는 음보다 맞는 리듬으로 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 - P83

바로크 시대
이 시대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선율과 반주로 구성된 음악이 아니라 대위법을 사용한 다성음악polyphony이라는 것이다. 대위법이란 두 개 이상의 성부가 각각 독립적으로 진행되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기법이다. 바로크 음악을 처음 접한다면 먼저 두 개의 성부로 이루어진 다양한 곡을 충분히 연습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세 개, 네 개의 성부로 이루어진 복잡한 곡으로 넘어간다. - P117

바흐를 비롯한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들은 악보에 음표와 쉼표 말고는 별다른 표기를 하지 않고 연주자의 자유로운 해석에 맡겼다. 악보에 크레셴도(점점 세게)나 디미누엔도(점점 여리게)가 적혀 있지 않아도 음이 높아지면 약간 커지고 낮아지면 약간 작아지게끔 다이내믹 표현을 해 줘야 자연스럽게 들린다. 또 예외는 있지만 연속된 두 음의 음정이 4도 이상으로 멀다면 스타카토로 짧게 치고, 순차적으로 진행한다면 부드럽게 이어서 연주하는 레가토로 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각각의 성부가 동등한 역할로 대화하듯 진행되므로 각 성부를 따로 연습해 주는 것도 필수다. - P117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선율과 반주로 이루어진 화성음악 homophony이 고전 시대 음악의 특징이다. - P120

고전 시대의 음악은 반주와 선율이 극명하게 나뉘어 있기 때문에 반주를 멜로디보다 작게 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대부분의 곡이 활기차고 명랑한 분위기이다 보니 가볍고 고른 터치가 중요하고, 페달을 너무 많이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 P120

‘낭만’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시대의 곡은 풍부한 감정 표현과 상상력이 중요하기에 곡의 성격을 잘 파악하며 쳐야 한다. 연주하는 본인이 느끼지 못하면 듣는 사람은 더더욱 곡의 느낌을 전달받을 수 없다. 바로크나 고전 시대 곡보다 페달을 많이 써야 하고, 계속 제 박으로 가기보다는 박자를 밀고 당기는 루바토를 해 줘야 한다. - P123

큰 코드가 간혹 나오는 곡이라면 손이 작아도 문제 될 것 없다. 내가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은 코드를 아르페지오처럼 굴리는 방법이다. 손을 벌려 모든 음을 동시에 치는 것이 아니라, 코드 가장 낮은 음부터 순서대로 빠르게 굴려 준다. 이때 중요한 건 페달이다. 가장 낮은 음을 칠 때 페달을 밟고 가장 높은 음에 도착할 때까지 페달을 바꾸지 않는다. 그래야만 손가락으로 모든 음을 다 누르고 있지 않아도 그 코드에 속한 모든 음이 페달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대개 코드에서 가장 중요한 음은 가장 높은 음이기 때문에 밑에서부터 위로 코드를 굴려 줄 때 크레셴도를 살짝 넣어 준다고 생각해도 좋다. - P141

또 한 가지는 중복되는 음을 생략하거나 손에 맞게 코드를 살짝 변형시키는 방법이다. 물론 작곡가가 써 놓은 음을 생략하거나 다르게 치는 일은 조심스러워야 하지만 코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에서는 어느 정도 허용될 수 있다고 본다. 실제로, 쇼팽 본인이 직접 제자의 악보에 ‘손이 작은 사람은 음을 생략해서 쳐도 괜찮다, 또는 이런 식으로 변형해서 쳐도 괜찮다’라고 쿨하게 적어 놓기도 했다. 손이 작은 나에게 위안이 되는 말이다. - P142

A음에서 B음으로 도약할 때는 총 4단계를 거치게 된다. ①A음을 친다. ②B음을 향해 간다. ③B음에 안착한다. ④B음을 친다. 도약의 정확성을 기르려면 반드시 3단계인 ‘B음에 안착’해서 건반을 느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취미생이 3단계를 생략하고 2단계에서 바로 4단계로 넘어가기 때문에 미스 터치가 나곤 한다. 4단계를 모두 다 거치는, 특히 3단계를 거쳐서 4단계로 가는 연습을 많이 하면 손 크기와 상관없이 도약의 정확성을 높일 수 있다. - P143

모차르트보다 열네 살 어린 베토벤은 모차르트를 작곡가로서는 존경했지만, 그의 논레가토 주법은 하프시코드 테크닉이지 피아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베토벤 시대의 피아노는 이전보다 크기가 커지고 건반 무게도 무거워지고 소리도 더 커졌으므로 이런 생각이 어쩌면 당연했을 것이다. 그는 손가락이 아닌 팔이 주동근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모차르트가 ‘단정한, 깨끗한, 우아한, 섬세한’ 연주를 했다면, 베토벤은 ‘꽉 찬, 풍성한, 자유로운’ 연주 스타일을 선호했다. 악기가 발전할수록 작곡가들은 더 큰 소리를 내고 더 많은 음역을 요구하는 곡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피아노 테크닉의 ‘트렌드’도 조금씩 달라졌다. 팔 힘을 완전히 뺀 채 아래로 떨어뜨려 중력의 힘으로 치는 ‘자연낙하 테크닉’, 손가락·손·손목이 한 축을 이루며 좌우로 회전하는 동작인 ‘로테이션’ 등 여러 가지 테크닉의 개념이 정리되었다. - P146

아주 틀린 설명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하는 크레셴도는 어딘가를 향해 전진하는 에너지, 디미누엔도는 긴장감이 누그러지며 높아졌던 에너지 레벨이 점점 낮아지는 것이다. 단순히 볼륨만 커지고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개입되어야 한다. - P152

댐퍼 페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다. 언제 어디서 페달을 바꿔야 한다는 정답이 있다기보다는 피아노에 따라, 장소에 따라, 곡에 따라 즉흥적으로 조절해야 한다. 그러려면 치면서 동시에 민감하게 들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앞뒤로 붙어 있는 음이라도 서로 다른 코드에 속한 음이라면 한 페달에 섞이면 지저분하게 들린다. 작은 소리로 나와 줘야 하는 부분에서 페달을 너무 오래 밟아 버리면 많은 음이 그 페달에 섞이게 되고, 그러면 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손가락으로 음을 잇는 데에 한계가 있어 페달을 쓸 때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다음 음을 손으로 치자마자 페달을 바꿔 줘야 끊김 없이 들린다. 페달을 언제, 어떻게, 어디서 사용하고 바꿀지는 귀가 판단해야 한다. - P156

악보에 ‘포르티시모’라고 적혀 있다고 모든 음을 다 똑같이 크게 쳐서는 안 된다. 전체적으로 들었을 때 포르티시모처럼 들리게끔 해야지 음 하나하나를 다 크게 치면 체력적으로도 금방 지치고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 음들에 우선순위를 매긴 후, 멜로디 라인을 가장 크게 내고 그 밖의 음은 더 작은 볼륨으로 내야 한다. 또 여러 부분에 같은 악상 기호가 적혀 있더라도 어디가 클라이맥스일지 생각해 보자. 그 부분에서 가장 큰 소리가 나오게끔 다른 부분의 소리는 조금 더 작게 내야 한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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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8-28 14: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피아노 치는 고라니

책식동물 2023-08-29 17:42   좋아요 2 | URL
자냥님의 고라니시리즈

반유행열반인 2023-08-28 15: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두 초6까지 치다 집어치웠다 중1말부터 중3초까지 다시 학원다니긴 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30년 전 9-10살 때 치던 노래 요즘 집어린이 가르치다보면 귀신 같이 생각이 나더라구요 ㅋㅋ정작 저는 연습 거의
안 함 ㅋㅋㅋ

책식동물 2023-08-29 17:44   좋아요 2 | URL
몸이 기억하는 게 진짜 무서운 거 같아요 저는... 30년까진 안 살았지만ㅋㅋㅋ 초딩때 친 곡 지금도 악보 보면 처음엔 좀 버벅거리다가 칠 수 있게 되는 게 진짜... 놀라움...

우끼 2023-08-29 07: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피아노고라니….!!!!아니 기적을 행하는 고라니님

책식동물 2023-08-29 17:44   좋아요 3 | URL
제가 행하는 기적!!!!!!!!!!!!!!!!!!!!!!!!!!!!!!!!!!
그것은 바로 ˝밍기적˝

우끼 2023-08-29 18: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래된 유우머..

책식동물 2023-08-29 18:16   좋아요 1 | URL
하........................................................................................노잼고라니된 kibun.

잠자냥 2023-08-29 21:43   좋아요 1 | URL
요즘 아프다더니…. 유머부터 맥이 빠지는 고라니

책식동물 2023-08-29 21:51   좋아요 1 | URL
잠자냥 님/ 정말 슬프군요. 제가 이래봬도 어렸을 때 꿈이 개그맨이었는데 한국 개그무대는 저의 성향과 맞지 않고 미국 스탠드업코미디를 하자니 아시아 억양 낭낭한 아시안 여성의 개드립은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가끔 주변인들을 대상으로 개그 한 번 치고 마는데 아프다보니 감 다 떨어졌네 어휴,,, 어휴,,,~~~

우끼 2023-08-29 21:53   좋아요 1 | URL
아직 자책은 이릅니다 선생님 저는 아직 믿어요. 밍기적 이런건 고라니님 답지 않게 어디서 가져와서 그런거겠죠….

책식동물 2023-08-29 21:53   좋아요 1 | URL
우끼 님/앞으로도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끼 2023-08-29 21:55   좋아요 1 | URL
생각해보니 밍기적만큼 적절한 유우머가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을것같아요 고전이 명전…??

책식동물 2023-08-29 22:05   좋아요 1 | URL
우끼 님/이것은 클리셰가 노잼인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