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두 권 대출해 읽었다. 두 권을 하루에 연달아 이어서 1권과 2권의 감상이 비슷하다. 이 책 1권에도 똑같이 리뷰 남길 예정.
책을 읽으며 김정선 작가님께 '아저씨레이디'라는 애칭을 붙여 드렸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니 꼭 아저씨라고는 단언할 수 없어서 급한대로 '50대레이디'로 변경했다.
저자가 이사 후 세계 문학 전집 도장깨기를 하신 책이다. 이 기획, 너무 흥미로워서 '젠장, 나도 하고 싶다고-!!'라고 생각했다. 글은 저자의 일상으로 시작하고, 읽은 책 줄거리 요약, 그 책에 대한 저자의 생각으로 끝난다. 간혹 일상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기도 한다. 편안하게 읽기 좋은 책이었다.
이 책은 고전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다. 어떤 책이나 다 그렇겠지만 특히 고전이라 불릴 만한 책들은 사골처럼 우려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텍스트를 가지고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 수 있다. 내가 생각지 못한 점을 다른 사람이 짚어주는데, 나온 지 오래 됐기 때문에 그 양이 풍부하다. 연구자, 서평가, 비평가, 그리고 나 같은 아마추어들.
하지만 이 책을 특히 더 추천하고 싶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저자가 고전이라고 해서 무지성으로 좋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저자는 50대니까 덮어놓고 무작정 좋다고 할 짬은 아니긴 하다. 또 이런 책을 낼 만한 고전문학 독자라면 무작정 좋다고 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서평이나 해설이 아니라 사적인 리뷰이기 때문에 불호 의견을 좀 더 서슴없이, 솔직하게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점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작년 겨울로 돌아간다. (저번에 썼던 이야기 반복이다.)
누군가 헤세의 『데미안』에 대한 글을 썼다. 그 글이 지적하는 점은 여자 캐릭터를 잘 다루지 못한다, 그런 거였는데 나는 백 번 천 번 동의했다. 『데미안』은 남자들의 그사세(그들이 사는 세상)였다.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이나 싱클레어가 그렇게 앓은 베아트리체가 그나마 좀 등장한 여자 캐릭터다. 베아트리체를 먼저 말해보자면, 이 여자의 육성은 없다. 그냥 싱클레어 앞에 한 번 나타났을 뿐인데 모르는 남자(싱클레어)의 상상 속에서 욕망만 당하다가 결국 다른 모르는 남자(데미안)로 덧씌워지며 끝난다. 에바 부인은... 제정신인가? 아들보다 어린 남자한테 쟁취될 거라고 말하는 아줌마가 세상에 어디 있나. 너무 수동적인 캐릭터였다는 인상이 남았다. 『데미안』 읽은 지 햇수로 사오 년이 넘은 듯하다. 그래서 틀린 부분도 있을 수 있다.
헤세의 다른 작품도 그렇다. 남자 주인공을 참 많이 쓰고 여자 캐릭터는 주변화된다. 아예 등장하지 않는 작품도 있다는데, 나는 헤세를 싫어해서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 『싯다르타』와 독서 에세이, 서평집만 읽었다. 싫어한 거 치고 많이 읽었지? 좋아하려고 노력해 봤지만 좋아할 수 없었다. 독서 에세이와 서평집에서도 그가 상정한 독자는 남자였다. 여자가 아니다. 가만 보면 헤세는 여자는 자기라는 남자와 동등한 고차원적 사고를 못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나만의 생각은 아니고 누가 지적했던 거다. 앞서 언급한 글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리고 이 지적이 중요한 이유는 여자 캐릭터를 못 다루는 창작자들의 문제는 대략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내가 열내며 주객전도까지 하는 이유다.
이제 진짜 왜 중요한지 말한다. 고전은 어차피 지난 시대의 것이고, 그 시대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소위 '빻은' 점을 지적할 필요가 없다, 그런 지적을 나는 받아들이지 않겠다, 이런 주장을 보았다. 이게 말이 됨? 시대상의 한계로 여자들이 결혼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결혼을 통해 이득을 취하려는 꽃뱀 같은 여자들만 득실거리는 식으로 묘사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감안할 만한 것이고, 후자는 지금도 대차게 까일 만하다.
물론 이 책을 찾아 읽을 정도면 이렇지는 않으리라고, 나는 나와 취향이 겹치는 독자들에게 희망을 품고 있다.
아래에 인용한 문장들을 보면 저자는 작품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이렇게 열을 낸 건 나 때문이기도 한데, 좋게 말하면 수용하는 폭이 넓으며 이해심 많은 사람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리뷰, 서평을 읽으며 내가 비판하지 않고 넘어간, 하지만 눈치챘더라면 욕했을 지점들을 알아야 한다.
앞서 이 책은 사적이라고 했는데, 저자가 글에 많이 드러나는 것이 장점으로 작용한다. 개인적으로 저자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아서 처음에는 불호 요소였다. 하지만 한 사람의 약 이 년 정도의 삶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보니 나도 모르게 애착이 생겼다. 잘 지내시길 바란다.
1권의 표지가 마음에 든다. 책 본문 같아서. 2권도 귀엽지만, 1권만 못한 것 같다.
화자 스스로 말하듯 이 작품은 ‘인생의 소설‘이라고 이름 붙일 만하다.하지만 인생과 삶을 견제할 낭만주의의 힘은 여전히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치기 어린 경솔함에 삶은 눈살을 찌푸리겠지만, 삶 또한 우리에게 경솔한 판단을 내리고 경솔한 짓을 서슴없이 행하기도 하니까. 게다가 우리를 가르치려고 들 뿐만 아니라, 언제든 대체 가능한, 전체를 위한 부분으로만 취급할 때도 적지 않고. 그럴 땐 잘난 척하는 삶을 향해 낭만주의의 펀치를 힘껏 날리고 싶어진다. 비록 그 펀치가 부메랑처럼 고스란히 내게 와 꽂힌다고 해도. "그래서? 그냥 그렇다는 말"(123쪽). _예브게니 오네긴 - P126
푸가초프의 난을 소재로 소설을 쓴다면 푸가초프나 푸가초프에 동조했다가 배신하는 인물이 주인공이고, 맞붙는 세력 간의 정치적 갈등이나 황제를 참칭하는 자의 개인적인 고뇌가 주된 내용을 이루리라고 예상하게 된다. 그런데 주인공은 진압군에 속한, 정치적 입장도 문명치 않은 장교인 데다, 딱 한 번 베푼 선행 덕분에 살육이 자행되는 양쪽 진형을 무시로 오갈 뿐만 아니라, 그렇게 오가는 이유 또한 팽팽한 긴장 속에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쓰는 소설의 정체를 작가 스스로 불분명하게 만들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_대위의 딸 - P131
그런데 독재 권력의 무자비한 횡포와 간악함을 고발하려는 욕심이 지나쳤을까. 오웰은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오브라이언의 입을 통해 역사 속 권력자들과 달리 자신들은 오직 권력 그 자체를 목적으로 권력을 잡았노라고 주장하게 만든 것. 물론 권력은 권력 그 자체를 먹고 산다. 하지만 자신이 권력 그 자체를 목적 삼아 권력을 잡았노라고 주장하는 권력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권력은 대의를 이루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권력자들의 공통된 논리다. 하지만 권력을 잡고 나서는 순서가 바뀌는 것도 매뉴얼처럼 정해져 있다. 대의는 도구에 불과하고 권력이 목적이 된다. 이것이 권력을 탐하는 자들의 위선을 드러내 줄 유일한 급소다. _1984 - P225
그러니 오브라이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빅 브라더와 오브라이언을 비롯한 내부 당원들은 이를테면 ‘순수한‘ 권력주의자들일 뿐 위선자들은 아닌 셈이다. 오웰은 자신이 비판하고 고발하려는 상대에게서 급소를 빼앗고는 신(神) 같은 존재로 만들고 말았다. 도무지 어찌해볼 수 없는 권력의 신.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걸까. _1984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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