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님께서 선물해주신 시집이다.
시집은 얼추 안 읽은지 20년이 다 되어간다.
한창 감수성이 폭발하던 중고딩때 칼릴지브란이나 원태연의 시집에 잠깐 빠져있었던 적은 있었지만, 솔직히 시에 대해선
아직도 잘 모르겠다.
혹자는 피라미드로 그려보면 시라는 쟝르가 문학의 가장 최상위에 있는 언어의 수준이라고 하는데, 반사적으로 끄덕거릴 뿐 내심 대체적으로 호의적이진 않다.
특히나 아포리즘으로 버무려진 시들을 대하거나,
철학적인 시들을 접할땐 그저 읽기만 하기에도 벅차고
그 깊이의 환희에 다가서기도 전에 영원히 책장을 덮게 마련이다.
나에게 시는 한때 그저 감각적이고, 써먹기 근사한
어록의 향연일뿐 고뇌의 바닥까지 뚫고 내려가 공허와 적막의 공간에서 영혼이 찢기는 인생의 아픔을 표현한 글은 접할 기회가 없었다(?)...
유홍준의 시가 그러하다는 유레카님의 페이퍼를 읽고,
카푸치노와 함께 그를 만나보았다.
먼저 김언희님의 발문에서 소개한 전작 <나는,웃는다(2006)>에 실린 작품 한가지를 보고 가자.
주석 없이
탱자나무 울타리를 돌 대
너는 전반부 없이 이해됐다.
너는 주석 없이 이해됐다.
내 온몸에 글자 같은 가시가 뻗쳤다.
가시나무 울타리를 나는 맨몸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가시 속에 살아도 즐거운 새처럼
경계를 무시하며
1초 만에 너를 모두 이해해버린 나를 이해해다오.
가시와 가시 사이
탱자꽃 필 때
나는 너를 이해하는 데 1초가 걸렸다.
가시나무 울타리를 맨몸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직접‘의 세계에서 문자는 그 ‘직접‘을 가로막는 가시에 불과했을 것이다-108쪽
또 하나 시인 유홍준을 알 수 있게 하는 글을 보자.
‘게다가 유홍준에게는 에테르라고 밖에는 부를 수 없는 생기, 약동하는 활기가 있어서 함께 있는 사람들이 무슨 약이라도 돌려 마신듯이 그 기운에 취해 본 사람이 그 취기를 못잊어 밤낮 주야로 전화질을 해대게 하는 진풍경도 만든다. 그것도 사내가 사내에게-108쪽
책 한권을 읽고나면 포스트잇이 붙은 자리가 무수한 편이다.
그러나 이 시집은 5-6개 밖에 붙이지 못했다.
내가 대체적으로 큰 기복없이 편안한 삶을 살아 그의 억센 인생을 이해못해서는 아닐것이다.
오히려 난 처절한 삶에 대해 공감을 많이 하는 편이고,
항상 부족한 이들에게 마음을 주는 편이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이 시집을 이해못하는가....
애초에 시집을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읽은 게 잘못된 것일까.
사람을 좋아하는 그의 철학이 잘 드러난 시가 있다.
-사람을 쬐다
사람이란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
독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
사람이 사람을 쬘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손등에 검버섯이 핀다.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
인기척 없는 독거
노인의 집
군데군데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었다.
씨멘트 마당 갈라진 틈새에 핀 이끼를 노인은 지팡으로 끝으로
아무렇게나 긁어보다가 만다.
냄새가 난다, 삭아
허름한 대문간에
눈가가 짓물러진 할머니 한 사람 지팡이 내려놓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바라보고 있다.
깊고 먼 눈빛으로 사람을 쬐고 있다.-48쪽
요즘 우리는 혼술, 혼밥, 혼숙(?) 등으로 모든 게 혼자가 편한 세상에 살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쬐는 게 귀찮고, 번거롭다.
나부터가 그렇다.
이렇게 혼자 책을 읽고 사색하고 글을 쓰는 행복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이 되어 버리니
나의 이런 시간들을 뺏기는 사람과의 만남이 때론 불편하다.
마음속에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핀다고 하니,
때론 마음의 평온을 주는 ‘독거‘에는 댓가를 치러야 되는
부작용도 있나보다.
하지만 부작용을 감수할 만큼 우린 인간관계의 피로사회에 살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다음의 시를 보자.
- 미소를 닦다
미소는 흘러내린다.
미소는
흩어진다.
똥구멍으로 짓던 미소, 음부로 짓던 미소
내 입가의 미소는 수습이 잘 안된다.
휴지로 닦아도 잘 닦이지 않는다.
미소는 얼룩이다
어떤 얼굴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더 이상 미소를 지어선 안되는 얼굴도 있다.
제발 좀 웃기지 마라
행복할 일도 그만 생겨라
세수를 할 때마다 나는 미소를 씻는다.
마른 수건을 들고 축축한 미소의 물기를 닦는다
다 닦아버린다. -58쪽
이 시를 읽고 나서 전 ‘미소‘라는 행위가
인간 내심의 자유를 뺏는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웃기지도 않는데 웃어야하고,
남의 행복에 웃어줘야 하고,
무슨 예기인지도 모르는데 남이 웃으면 같이 웃어야 하고,
이렇게 처연하게 미소짓는 일상이 끝나고
겨우 녹초가 되어 집에 와서야 하루종일 흘러내린 미소의 얼룩을 씻을 수 있다.
남의 말을 잘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도덕률이
우리를 너무 옥죄고 있지는 않는가..
‘이런 유홍준의 시는 일견 가볍고 수월해 보이기도 한다.
가볍디가벼운 화산석으로 대충 쌓은, 틈새투성이 섬집 돌담들처럼, 그러나 이 가벼움과 수월성은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애써 성취한 가벼움이고, 애써 도달한 수월성이다.
화산석의 저 가벼움은 용암의 뜨거움을 거치지 않고는 이를 수 없는 가벼움, 제 안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난 다음에야 도달하게 되는 무서운 가벼움이다.(.....중략....) 유홍준의 시는 틈새 그 자체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으면서 틈새를 견지한다는 것, 그것이 요구하는 긴장과 집중은 결코 녹록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수월성과 가벼움은 모든 예술이 추구하는 궁극이다‘
-114쪽
시를 읽는 내내 정신병동의 풍경을 그린 내용이 많은지라
아마 시인은 그 병동에 원무 정도의 일을, 아니면 자원봉사 등의 일을 한 듯한데..확실치는 않다..
이런 이야기를 실은 의도가 나의 단견으로는
사람은 ‘모두 정신병자이자 모두 정신병자가 아니다‘ 란 말을 하고 싶어하진 않았는지 생각해본다.
깊어가는 가을 저녁, 한잔 카푸치노의 카페인이
시를 읽을 수 있게 도와준 것 같다.
그리고, 한술에 배부르냐만은,
그 중요한 ‘한술‘을 떠 먹여준 유레카님께
감사드린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다음에 만나는 시는 지금보다 더 내 곁으로 다가와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