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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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도 그렇게 되었다. 소문 속 그 여자애가 되었다. (132) "

 " 모두 연기 같았다. 2008년 7월 14일의 자기만 진짜 같았다.(184) "

 

 전부터 목록에 올려놓았던 책인데, 천천히 읽고 쓰는 것은 그보다 더 오래 걸렸다. 학교 다닐 적에 누군가 물건을 잃어버리면 선생님은 그 물건을 가져간 사람과 잃어버린 사람을 둘다 혼냈다. 가져간/훔쳐간 사람도 잘못이 있지만, 자기 물건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사람도 잘못이 있는거야.라는 말, 나와 비슷한 세대라면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그때는 그 말이 그렇게 맞는 줄 알았다.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도 내 물건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잘못이 있고 그래서 이렇게 교실의 분위기를 흐리게 만든 잘못이 있다고. 물건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누가 친구의 물건에 손을 댄 것인지 친구를 의심하게 만든 잘못이 있다고.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정말 잘못이었을까 싶어진다. 선생님에게 학급문제라는 골치거리를 안겨준 잘못을 다르게 표현한 것은 아니었나.

 

 피해자에게 책임묻기, 피해자의 무결함을 따지는 일은 그런 생각에서부터 시작된 건 아니었나 생각했다. 범죄의 피해자에게 '왜 조심하지 못하고'라는 말이 따라붙고, '어쩌다가'라는 말에는 늦은 시간이나 외진 길이나 어떤 옷차림었던가 같은 부연들이 뒤를 잇는다. '마치 네 물건을 잘 관리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이 그걸 훔쳐가고 싶게 만든 너의 잘못도 있는거야' 라는 비논리처럼. 그 모든 꼬리표는 사실 무용한 것이고, 단지 가해자가 범죄를 저지르기로 마음먹고 실행한 행위가 잘못일 뿐이다. 오히려 평소 그런 사람이 아닌데 우발적으로, 혹은 술김에 실수로 라는 덧붙임이 가해자의 면책을 돕는다.

 

 제야가 술을 마신 것은 그 행위 자체로 피해자를 흠집내고, 당숙이 술을 마신 것은 취해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던 상황으로 참작된다. 하지만 피해자가 그날 입고 있었던 옷은, 머물렀던 장소는, 취할 수 밖에 없었던 행동은 범죄피해의 원인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가해자가 평소에 열심히 일한 것은, 이웃 사람과 인사를 잘 나눈 것은 저지른 죄의 면책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상황들은 시비를 가리는 상황에서 너무나 쉽게 자주 불공정하게 고려된다. 피해자의 순수성, 피해자다움을 두고 제야는 " 어째서 내가 의심받는가. 어째서 내가 증거를 대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설명해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사라져야 하나. (133) " 괴로워한다.

 

 책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오늘 200만명이 넘게 청원에 동의한 N번방 유료회원들의 신상공개 청원이 불발되었다. 신상을 공개하지 않기로 한 경위가 마뜩찮았다. 경찰이 내놓은 '범죄예방 효과 등 공개에 따른 실익이 높지 않다고 판단해 회부하지 않기로 했다' 는 말에 이 필수적인 절차에서 따져야 할 '실익'이 무엇이며, 이 파렴치한 범죄 행위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왜 전달되지 않는지, 가해자/가담자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상황이 뭔지 경찰이 정말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현실인가 의문스러웠다. "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진짜 알게 되는 것의 간극은 크고 깊었다. (48)" 는 말이 나오는데,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가 마땅히 옳게 가야한다고 믿는 길과 현실이 보여주는 굴절의 격차가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 제야는 사람이 저마다 다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사람이 선해지고 나빠지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섭리가 있다면, 삶의 지도가 있다면 그것을 보고 싶었다. 다른 길이 있는지, 다른 삶이 가능했던 건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더라도 알고 싶었다. 그럼 조금은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60) "

 

 " 제야는 울고 싶지 않았다. 울면 멈출 수 없고, 밤새 울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면 약해지는 것 같았다. 제야는 벌떡 일어나 앉고 싶었다.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기지개를 켜고 크게 소리를 내고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강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꼼짝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굳은 채로, 무거운 채로 할 수 있는 건 우는 일 뿐이었다. 제야는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155) "

 

 책에서 제야의 괴로움이 드러나는 부분들이 사실적이라 어렵고 버거웠다. 그리고 실제로는 이보다 더 고통스럽고 아플 것이라 짐작하니 막막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요즘은 사람이 제일 무섭고 험해서 어떻게 살아내야할지 염려스럽다. 우리가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악의를 품고 지나가는 사람들 중 만만해보이는 사람을 골라 일부러 밀치고 시비를 걸다 느닷없이 이유없는 폭행을 가하는 사람을 마주하게 될 것인지 아닌지 모른다. 일단 피해를 입고 난 뒤에는 피해자의 생존과 안전은 어디에도 보장받을 수 없었다는 씻을 수 없는 충격과 상처를 남기는데, 가해자의 인권이 집중적으로 보호를 받는 현실이 부조리하게 느껴진다. 법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피해자의 권리가 일방적으로 침해당했음에도 왜 충분히 해결되지 않는 피해와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지 의문이 생긴다.

 

 " 나는 그가 스스로를 혐오하고 증오하길 원한다. 내가 나를 혐오하게 된 만큼, 증오하고 자책하고 망가뜨린 만큼, 아니 나보다 훨씬 더 크고 깊게, 변명 없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수치스러워하길.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렇다면 ...후략...(200)"

 

 우리 사회의 끔찍한 범죄자들이 마땅히 죄값을 받기를 바란다. 피해자가 고통스러운만큼, 피해를 입은 그 이상의 처벌을 받아야 옳은 게 아닐까. 그래야 누군가는 엄중한 규율의 무게를 의식할 것이고, 누군가는 자신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규칙이 언제고 필요할 때 구성원들을 지키고 보상해줄 것이라고 믿으며, 최소한 잘못에 맞는 댓가를 치를 수 있도록 단죄할 시스템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믿음을 갖고 살 수 있을 것이다. 혐오스럽고 역겨운 범죄들에 지쳤고, 가담자들에게 그만큼의 죄값이 지워지기를 바란다. 이 간단한 사회의 정의가 구현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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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김수현 지음 / 놀(다산북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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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에세이다. 어떤 내용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적당한 공감, 적당한 위로, 적당한 유머를 만날 수 있다. 읽기에 무난한 책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달리 말하면 실망스러운 내용이기도 하다. 읽기에는 편하고 소소하게 재미있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지울 수도 없고 당장 서점의 에세이 코너에 가면 각종 캐릭터들을 앞세워 나온 시리즈물로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내용이다. 범람하는 힐링 에세이들을 헤쳐나가다 문득 몇권이나 이런 책을 읽는다고 해서 피로했던 몸과 마음이 정말 나아질 수 있을까 싶다. 늘 그렇듯 자신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자신 뿐이라는 말이 그 안에 써있는데.

 

 요즘은 책들도 했던 말을 반복해서 하는 것 같다. 그만큼 위로가 필요한 시기라는 뜻일까, 어찌됐든 그 판에 박힌 내용들이 계속해서 누군가의 선택을 받고 있다는 뜻이니까. SNS의 보여지기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거나, 어른들의 잔소리에 대처하는 자세, 남에게서 오는 자존감의 한계,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 인간관계 끊기, 무례한 사람에게 대처하는 방법 같은 내용, 간단히 줄여서 써봤지만 아마 익숙한 주제들일거다. 여기에 짧게 나누어진 각 장의 마지막마다 인터넷에서 봤을 법한 유행어 같은 것을 그림으로 표현해 장난스럽고 센스있는 마무리를 더했다.

 

 어찌되었든 제목만큼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마음에 들었었다. 이 책이 읽고 싶었던 이유도 제목에 있었다. 남에게 민폐끼치지 않는 진상이 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신경썼던 것들에 좀 지쳐있었다. 얼마 전 개인적인 문제로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큰 마음을 먹고 주위 사람들에게 넌지시 물어봤는데 하나같이 '뭘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하는 대답을 해줬다. 조언을 해주면서 '너라면 어떻게 생각할 것 같냐'고 물어보길래 생각해보니, 내 입장에서는 상대방의 행동을 크게 연연하지 않을 것 같지만 다른 사람들 모두가 내 마음같지는 않을테니 가능하면 조심하고 싶어서 작은 일도 이리저리 고민을 키워서 했었다.

 

 혈기왕성하던 시기가 지나고 생각해보니 십년 전 쯤의 나와 지금의 나는 좀 달라졌다. 책에서는 '사람 고쳐쓰는 것 아니'라고 했지만, 나라는 사람의 근본자체가 확 변하지는 않았더라도 어떤 생각이나 행동들은 경험을 통해 조금씩 설정값이 달라지긴 한다. 사람의 마음을 잃는 일이 너무 한순간이고 얻는 것은 뜻대로 되지 않더라는 것을 시간을 통해 배운 것이 컸다.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산다는게 말은 참 좋은데 정말 쉽지 않다. '조금만 더'라고 생각하는 욕심에서 '무리'를 하게 되는데 이걸 내려놓는 일이 어렵다. '조금만 더'가 항상 '무리'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뭐를 '조금만 더' 노력할 것인지, 내려놓을 것인지 어렵지만 구분해가는 중이다.

 

 읽다가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친구 자취방(89)에 대한 내용이었다. 화장실에서 물때를 보고 놀랐다는 어찌보면 별 것 아닌 내용인데 내 눈에는 다른 사람의 집에 있는 흠을 주변에 전달하는 행동처럼 보였다. 학교다닐 때 나름대로 충격을 받았던 경험 때문인데, 친구집에 놀러갔다 와서 뭘 하고 놀았다는 얘기가 아니라 살림살이에 대한 평가를 하는 애가 있었다. 집이 이렇더라, 우리집은 이렇게 하는데 걔네집은 저렇더라, 잘사는 것 같다 못사는 것 같다 등의 내용을 마치 재밌는 이야기꺼리처럼 말하는 걸 보고 놀라 그 뒤로 사람을 집에 잘 초대하지 않게 됐었다. 책에서는 엄마가 항상 집안을 잘 관리해주시는 덕분에 불편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됐다는 내용으로 흘러갔지만, 어쩐지 마음이 찜찜했다. 

 

 소소하게 짬이 날 때마다 머리를 식히는 겸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지만, 어딘지 익숙한 내용과 약간의 불편함을 가지고 봤다. 차라리 흔한 위로와 유머를 버리고 공감에서부터 시작하는 좀 더 내밀하고 진솔한 글을 썼다면 좋았을 것 같다. 상황은 다 공감이 되는데 그게 뻔하게 흘러가서 '괜찮아요'라는 위로로 정리되는 것이 아쉬웠다. 생각해보니 읽었던 에세이들 중 마음에 들었던 책의 공통점은 남들 다 하는 위로와 조언을 늘어놓은 내용이 아니라 솔직한 내용으로 인간적인 공감을 이끌어내는 글에 있었다. 다음에 나올 저자의 책은 좀 더 깊어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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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도키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9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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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 도키오'를 읽기 전에 책장을 정리했었다. 벽 한쪽을 차지한 책장을 살펴보니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이 몇 권 있었다. 사실 있었는지도, 내가 샀었는지도 모르게 책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유명한 이름값만큼이나 당연하다는 듯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이 있었고, 떠올려보니 그때도 재밌게 몰입해서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특히 '백야행'이 그랬다. '아들 도키오'는 이번에 처음 읽었는데, 어떤 내용인지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어도 순식간에 책을 읽어버릴 정도로 재밌게 읽었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알면서 읽으면 이어질 내용을 예측하게 되거나 중간에 흥미를 잃을 수도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그 다음 전개를 궁금해하며 읽었다. 대단한 사람이었다. 

 

 " 저 사람이 젊음 탓에 실수하는 모습을 보는 건 괴롭다 ... (327) " 는 도키오의 말처럼 다쿠미가 정말 싫은 느낌의 사람이라 나 역시도 읽는 동안 괴로웠다. 생판 남의 눈으로 봐도 보고 있기 괴로울정도로 철없는 모습을 보이는데, 도키오의 마음이 어땠을지 이해가 됐다. 도키오를 통해 다쿠미가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성장하기를 기대하며 읽었는데 아주 극적이지는 않아도 조금씩 선을 지키며 행동하는 모습을 보인 점이, 읽으면서는 아쉬웠지만 나중에는 납득이 되는 내용이었다. 답답한 상황에서 주인공이 '먼치킨'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사이다' 결말을 내놓길 바라는 데에 익숙해졌었나보다.  

 

 책을 읽다보니 문득 마음이 서늘한 것이 어쩌면 미래의 누군가가 나에게도 찾아왔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허황된 생각이 진짜건 아니건 스스로 질문해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지? 누군가 내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괴롭다고 생각하게 행동했던 적은 없었나? 미래인을 만났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것이 좀 우스울지 모르지만 화들짝 자신에 대해서, 또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지난 인연들에 대해서 되돌아보았다. 반대로 만약에 나는 과거의 누군가에게 찾아갈 것인가 생각도 해봤다. 젊은 시절의 부모님을 만나러 간다면 어떨까, 무슨 말을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같은 생각들을 오래도록 해봤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게 가장 좋겠지만.

 

 소설은 미래에서 온 아이라는 타임슬립 소재만으로도 흥미로운데 그 안에 심각한 사건도 얽혀 있어서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이어진다. 갑자기 사라진 다쿠미의 (전)여자친구가 휘말린 사건과 다쿠미가 그동안 외면했던 뿌리찾기가 자연스럽게 한데 얽혀 전개된다. 제멋대로인 다쿠미가 도키오의 말만은 무시하지 못하고 따르게 되는 장면을 볼 때마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겠지만 핏줄의 운명적인 끌림!으로 미래에서 왔다는 도키오의 말을 믿어주기를 기대했다. 뻔한 신파는 싫다고 생각하면서 감동이 몰려오는 내용이 있지 않을까 미련을 가졌다. 이를테면 허생원이 '자네 왼손잡이인가'하는 것처럼. 그래서 좀 아쉽기도 했다.

 

 어떤 기억들이 살아가면서 잊혀지고 흐려진다는 것에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결과를 품고 있어서 지난 시간들을 자꾸 까먹는 나이가 된 것을 좀 덜 섭섭해하려고 마음먹었다. 적지 않는 분량의 책인데 한번 읽기 시작하니 쉴 틈 없이 쭉 읽혔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다쿠미를 두고 자신이 가장 아끼는 캐릭터라고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매력이 덜해서- 사실은 너무 별로라 끝까지 정이 가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내용이 재미있어서 무리없이 읽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를 다시 만나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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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만든 공간 -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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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대되는 책이었다. 평소에 주로 카페에서 책을 읽고 짧게나마 글을 써서 정리해놓는다. 생각해보면 책을 읽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 집이라는 내밀하고 자유로운 공간을 두고 왜 굳이 카페를 찾아 책을 읽고 이런저런 볼일을 보는지 때로 마음이 찜찜했다. 무엇에 끌려 카페를 찾게 되는가 스스로도 그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했던 탓이다. 그러던 중 요즘 독서실이 좁고 칸이 막힌 개별적이고 고립된 과거의 공간에서 개방된 테이블을 공유하는 공간으로 바뀌어가는 흐름에 대한 분석을 보고 나름의 답을 찾았다.*(SBS스페셜 내 아이 어디서 키울까 2부 공간의 힘) 나도 모르게 했던 행동의 답이 공간의 구성에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이 책이 퍽 궁금했는데, 읽어보니 꽤 재밌고 괜찮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저자를 텔레비전의 한 프로그램에서 알게 되었는데, 아주 인상적으로 접했던 것이 한국에 커피숍이 많은 이유에 대한 설명이었다. 한국에 커피숍이 많은 이유는 그곳이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구실을 하기 때문(*유현준의 도시이야기 공원과 스타벅스의 차이)이란 내용이다. 그때 문득 과거에 비해 사람들이 모일 공간이 부족해졌다는 생각이 환기되었다. '공간이 만든 공간'에서도 카페의 테라스를 툇마루에 비유(220)해 놓았는데, 그 둘이 내외부 구분이 없는 열린 공간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사람들이 모여서 교류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는 공통점을 통해 우리가 왜 커피를 많이 마시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가끔 인터넷에 올라온 고민글 중에 귀농의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이사를 갔다가 인간관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곤란함을 겪은 사람들의 실패담을 본 적 있다. 공통된 어려움이 이웃들이 아무때고 집에 찾아와 가족들끼리의 시간을 방해받고 당연스레 소소한 간식거리 등을 요구하거나 문을 닫아놓은 방 등 사적인 공간을 함부로 들어와서 괴로웠다는 것이다. 한쪽의 입장으로 쓰여진 내용이기는 하지만 읽으면서 불편한 점이 있었겠구나 싶었는데 책을 읽고 다시 생각해보니 그들이 특별히 무례하고 텃세를 부리려는 악의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책의 전반부에 걸쳐 설명된 벼농사 식의 인간관계를 맺기 때문이구나 하고 이해되었다. 다르다는 점은 분명 스트레스 요인이 되겠지만, 도시형 생활방식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관계맺는 방식의 차이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되돌려 생각해보니 9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집 문이 잠겨있고 집 열쇠가 없으면 옆집을 찾아갔다. 자연스럽게 옆집에 가서 인사하고 텔레비전도 보고 간식도 먹고 끼니때가 되면 밥도 함께 먹으며 열쇠를 들고 외출한 가족을 기다렸다. 이때 주를 이뤘던 복도식 아파트들 마저 아파트가 이웃과의 교류 단절을 대표하는 주거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문을 열어놓고 생활하며 '복도를 골목처럼' 이웃끼리 교류하는 문화가 남아있었다. 그때의 기억을 가지고 성장한 사람들이 많지만, 지금의 도시는 좀 더 확고히 나의 공간과 외부를 분리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지금 익명이 된 이웃에게 그때처럼 나어린 자녀를 잠시간 위탁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면 불가능에 가깝다. 서로 그만큼의 신뢰도 없을 뿐더러 요즘은 그런 행동이 민폐로 생각될 것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최근들어 집에 게스트룸을 마련해두는 인테리어가 늘어났다는 점이다. 툇마루와 사랑방 등이 없어지고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여 교류하는 일이 전보다 줄어들었다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는 손님을 초대해 숙박까지 제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는 것이 독특하다. 더불어 화장실도 집주인이 내밀하게 쓰는 개별 화장실과 좀 더 개방적인 용도로 쓸 수 있는 화장실을 집 안에서도 분리해놓는 점도 그렇다. 이럴때는 두 화장실의 인테리어와 소품 등에도 차이를 두어 확연한 용도 구분을 해두기도 한다. 책에서도 이점에 대해 얘기가 나왔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았지만, 또 언젠가 이런 변화에 대해서도 쓴 책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읽으면서 재밌었던 몇몇 부분을 꼽아보면 '드래곤 볼'이 갖는 의미도 인상깊었고, 돛(169)의 등장과 함께 동서양의 교류가 가능케 되는 부분에서 돛과 비행기 구조의 공통점에 대해 읽어도 바로 이해되지 않고 아리송하길래 순간 문과적 한계를 체감한 것이 스스로 어이가 없어 좀 웃었다. 그래서 그게 무슨 법칙인지 설명해줄 이과를 구합니다.. 건축과 철학의 융합에 대한 부분에서 해체주의가 극단적으로 반영된 부부침실(340)의 디자인도 재미있었다. " 부부는 항상 떨어져서 잠을 자야 한다 " 는 문구와 나뉘어진 두 침대의 사진이 인상적이었는데, 저 문구가 마치 논증을 거친 명제처럼, 또 약간은 산악회 유머처럼 보인다.

 

 '폼지'(342)에 대한 부분에서 거의 즉각적으로 동대문 디지털 플라자가 떠올랐는데, 이런저런 논란이 있어도 심지어 흉물이라는 지적이 있어도, DDP가 상징적인 건물임에는 분명하단 생각을 했다. 하지만 실제로 DDP를 디자인한 자하 하디드는 폼지가 아닌 '라이노'라는 소프트웨어를 사용(351)했다고 한다. 아마 그 뒤를 잇는 논란의 건물이 롯데월드타워가 아닐까 싶은데, 무리한 건축허가나 지반의 불안정성, 주변과의 부조화 등의 문제가 따라붙어 있지만 어느새 서울시민들의 생활속 미세먼지 측정도구처럼 쓰이거나 불꽃놀이를 하면 각종 포털에 그 사진이 올라오는 명소가 되었다. '에펠탑 효과'같은 심리가 적용된 것일까?

 

 책을 읽기에 앞서 또 하나 기대했던 내용이 인터넷 공간에 대해서였다. 책에서도 이 '인류역사에 없던 공간'(368)의 등장을 다룬다. 물리적인 공간을 뛰어넘은, 실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이 공간-인터넷 플랫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궁금했었다. 그동안 사람들이 현실과 연결된 가상의 공간에서 서로 다른 자아를 이용하는 뒤틀어짐 문제가 많았지만, 앞으로 가상현실이 더 발달하게 되어 실재적인 공간이 가상의 공간과 더 긴밀하게 연결/대체되는 변화가 어떤 식으로 영향을 줄까 궁금해진다. 인터넷 플랫폼과 초연결 사회에 대한 내용이 다른 부분에 비해 덜 집중적인 것 같아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지금까지의 분석보다 앞으로의 흐름이 더 기대될 내용이라 생각한다.  

 

 기대하면서 읽었는데, 그만큼의 즐거움을 충족하는 책이었다.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한 내용이라 궁금한 점도 많았고 전문적인 내용이 어려우면 어떡하나 염려도 되었는데, 낯설지 않고 어렵지 않게 풀어냈다. 막히는 부분이 없이 잘 읽힌다는게 정말 큰 장점이었다. 설계도나 건축물의 사진 자료도 직관적으로 내용이 이해될 수 있도록 첨부되어 있어서 책의 구성도 잘 설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면에서는 반복적인 내용을 길게 끌고 가는가 싶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진입장벽이 낮고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을만한 흐름을 유지하는 호흡이 좋았다. 벌써 여러권의 책을 낸 만큼 글도 참 잘쓰시는 듯. 어떤 사람에게 추천해줘도 큰 호불호 없이 읽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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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뒤에서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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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읽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책은 한참동안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실에 있는 탁자 한켠에 놓아둔 읽을 책들의 목록 안에서 몇번이나 순서가 밀렸다. 쌓아뒀던 책들도 지금은 거의 다 사라지고 몇권 남지 않았는데, 다른 책을 먼저 읽었다가 몇장 읽지 않고 그만두고 오늘 그냥 갑자기 '문 뒤에서'를 먼저 집어들었다. 아무래도 집중이 안될 것 같아 조금 읽다가 재미없으면 정말 그만 둬야지 그런 마음이었다. 정말 솔직하게.

 

 원어로 책을 읽어도 그럴까. 번역되어 나온 책을 보면 가끔 특유의 꾸밈, 묘사가 좀 부담스럽고 어색하게 느껴진다. " 그는 키가 크고 말랐으며, 벌써 젊은이였고, 젊은이처럼 비쿠냐 원단의 긴 회색 바지에 다른 옷에 비해 색조가 무거운 직물 재킷을 입고, 호주머니에 열 개비짜리 마케도니아 담뱃갑을 넣고, 목에는 실크 넥타이를 매고 다녔다.(27)" 같은 어딘지 어색한 문장이 그렇다. 주인공이 사춘기이고 예민한 성격이기 때문에 초반에는 그 신경질적임을 견디는 것도 어려웠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보니 이미 책의 중반에 와 있고 그 다음 내용이 어떻게 될지 계속해서 궁금해졌다. 분량 자체가 160쪽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책이긴 하지만 초반의 어수선함, 바탕 다지기같은 작업이 지나고 나면 확 재미있어져서 순식간에 읽게 된다. 끝까지 관통하는 '문 뒤에서'라는 제목의 의미와 함께 내용의 여운도 깊게 남는다. 성석제의 '첫사랑'을 보는 것 같기도하고, 이 또래에 흔히 있을 법한 현실감을 잘 살렸다.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한 막장 소재들도 넘쳐나는 와중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화인처럼 찍힌 그날'이라는 문구는 좀 애매했다. 이런 일이 얼마나 흔하냐면, 싸이시절에도 그랬지만 아직도 SNS 저격글이란 이름으로 이런 상황에 대한 경고문구를 만들어놓은 사진들이 10대들에게는 유행처럼 돌아다닌단다. '너 호박씨 까는거 내가 모를 줄 알았지' 어쩌고 하는 내용으로. 친군줄 알았는데 내 뒷 얘기하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는 상처가 흔하긴하지만 어쨌든 당하면 속은 상할 사건이긴 하겠다.

 

 솔직히 말하면 숙제를 같이 하는 그룹이니 초대니 하는 말들 때문에, 주인공이 게이인가, 혹은 저 동네 애들은 저렇게 좀 끈끈하게 친구관계를 만드는가 싶은 의문이 들었었다. 오텔로라는 친구에게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냐고 떠보듯 물어보는 것도, 또 그의 덩치에 의지했다는 표현도 그랬다. 풀가가 카톨리카들 앞에서 말했을 때도 그렇고. 애초에 둘이 숙제를 핑계로 딴짓을 할 때도 마찬가지로, '저게 진짜로 그렇게 된다고?' 싶은 도시전설의 발견이었다. 남자들의 우정이 원래 그런 것이란 말이야......? '첫사랑'의 서양 버전 같다.

 

 카톨리카의 행동도 이해못할 것이 상처주고 싶었던 걸까, 진짜 갑자기 오지랖을 부리고 싶었던 걸까. 갑자기 왜? 둔한 중년의 감성이 기민하게 눈치채지 못한 뭔가가 있는 것 같다. 무슨 심리들인 것이지 대체. 사춘기처럼 예민하던 시절에는 이런 글을 읽으면 인과관계가 보일 듯 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성질급한 한국인이 되어서 혹은 좀 무덤덤한 둔치가 되어서 그런지 '왜 저렇게 행동하지'싶은 의문만 남는다. 누가 설명해줬음 좋겠다. 어쨌든 짧고 재밌다. 무슨 내용일지 몰라 미뤄뒀었는데 진작에 후딱 읽어치울걸, 싶었다. 조르조 바사니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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