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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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도 그렇게 되었다. 소문 속 그 여자애가 되었다. (132) "

 " 모두 연기 같았다. 2008년 7월 14일의 자기만 진짜 같았다.(184) "

 

 전부터 목록에 올려놓았던 책인데, 천천히 읽고 쓰는 것은 그보다 더 오래 걸렸다. 학교 다닐 적에 누군가 물건을 잃어버리면 선생님은 그 물건을 가져간 사람과 잃어버린 사람을 둘다 혼냈다. 가져간/훔쳐간 사람도 잘못이 있지만, 자기 물건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사람도 잘못이 있는거야.라는 말, 나와 비슷한 세대라면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그때는 그 말이 그렇게 맞는 줄 알았다.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도 내 물건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잘못이 있고 그래서 이렇게 교실의 분위기를 흐리게 만든 잘못이 있다고. 물건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누가 친구의 물건에 손을 댄 것인지 친구를 의심하게 만든 잘못이 있다고.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정말 잘못이었을까 싶어진다. 선생님에게 학급문제라는 골치거리를 안겨준 잘못을 다르게 표현한 것은 아니었나.

 

 피해자에게 책임묻기, 피해자의 무결함을 따지는 일은 그런 생각에서부터 시작된 건 아니었나 생각했다. 범죄의 피해자에게 '왜 조심하지 못하고'라는 말이 따라붙고, '어쩌다가'라는 말에는 늦은 시간이나 외진 길이나 어떤 옷차림었던가 같은 부연들이 뒤를 잇는다. '마치 네 물건을 잘 관리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이 그걸 훔쳐가고 싶게 만든 너의 잘못도 있는거야' 라는 비논리처럼. 그 모든 꼬리표는 사실 무용한 것이고, 단지 가해자가 범죄를 저지르기로 마음먹고 실행한 행위가 잘못일 뿐이다. 오히려 평소 그런 사람이 아닌데 우발적으로, 혹은 술김에 실수로 라는 덧붙임이 가해자의 면책을 돕는다.

 

 제야가 술을 마신 것은 그 행위 자체로 피해자를 흠집내고, 당숙이 술을 마신 것은 취해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던 상황으로 참작된다. 하지만 피해자가 그날 입고 있었던 옷은, 머물렀던 장소는, 취할 수 밖에 없었던 행동은 범죄피해의 원인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가해자가 평소에 열심히 일한 것은, 이웃 사람과 인사를 잘 나눈 것은 저지른 죄의 면책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상황들은 시비를 가리는 상황에서 너무나 쉽게 자주 불공정하게 고려된다. 피해자의 순수성, 피해자다움을 두고 제야는 " 어째서 내가 의심받는가. 어째서 내가 증거를 대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설명해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사라져야 하나. (133) " 괴로워한다.

 

 책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오늘 200만명이 넘게 청원에 동의한 N번방 유료회원들의 신상공개 청원이 불발되었다. 신상을 공개하지 않기로 한 경위가 마뜩찮았다. 경찰이 내놓은 '범죄예방 효과 등 공개에 따른 실익이 높지 않다고 판단해 회부하지 않기로 했다' 는 말에 이 필수적인 절차에서 따져야 할 '실익'이 무엇이며, 이 파렴치한 범죄 행위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왜 전달되지 않는지, 가해자/가담자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상황이 뭔지 경찰이 정말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현실인가 의문스러웠다. "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진짜 알게 되는 것의 간극은 크고 깊었다. (48)" 는 말이 나오는데,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가 마땅히 옳게 가야한다고 믿는 길과 현실이 보여주는 굴절의 격차가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 제야는 사람이 저마다 다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사람이 선해지고 나빠지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섭리가 있다면, 삶의 지도가 있다면 그것을 보고 싶었다. 다른 길이 있는지, 다른 삶이 가능했던 건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더라도 알고 싶었다. 그럼 조금은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60) "

 

 " 제야는 울고 싶지 않았다. 울면 멈출 수 없고, 밤새 울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면 약해지는 것 같았다. 제야는 벌떡 일어나 앉고 싶었다.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기지개를 켜고 크게 소리를 내고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강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꼼짝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굳은 채로, 무거운 채로 할 수 있는 건 우는 일 뿐이었다. 제야는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155) "

 

 책에서 제야의 괴로움이 드러나는 부분들이 사실적이라 어렵고 버거웠다. 그리고 실제로는 이보다 더 고통스럽고 아플 것이라 짐작하니 막막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요즘은 사람이 제일 무섭고 험해서 어떻게 살아내야할지 염려스럽다. 우리가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악의를 품고 지나가는 사람들 중 만만해보이는 사람을 골라 일부러 밀치고 시비를 걸다 느닷없이 이유없는 폭행을 가하는 사람을 마주하게 될 것인지 아닌지 모른다. 일단 피해를 입고 난 뒤에는 피해자의 생존과 안전은 어디에도 보장받을 수 없었다는 씻을 수 없는 충격과 상처를 남기는데, 가해자의 인권이 집중적으로 보호를 받는 현실이 부조리하게 느껴진다. 법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피해자의 권리가 일방적으로 침해당했음에도 왜 충분히 해결되지 않는 피해와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지 의문이 생긴다.

 

 " 나는 그가 스스로를 혐오하고 증오하길 원한다. 내가 나를 혐오하게 된 만큼, 증오하고 자책하고 망가뜨린 만큼, 아니 나보다 훨씬 더 크고 깊게, 변명 없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수치스러워하길.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렇다면 ...후략...(200)"

 

 우리 사회의 끔찍한 범죄자들이 마땅히 죄값을 받기를 바란다. 피해자가 고통스러운만큼, 피해를 입은 그 이상의 처벌을 받아야 옳은 게 아닐까. 그래야 누군가는 엄중한 규율의 무게를 의식할 것이고, 누군가는 자신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규칙이 언제고 필요할 때 구성원들을 지키고 보상해줄 것이라고 믿으며, 최소한 잘못에 맞는 댓가를 치를 수 있도록 단죄할 시스템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믿음을 갖고 살 수 있을 것이다. 혐오스럽고 역겨운 범죄들에 지쳤고, 가담자들에게 그만큼의 죄값이 지워지기를 바란다. 이 간단한 사회의 정의가 구현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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