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만든 공간 -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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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대되는 책이었다. 평소에 주로 카페에서 책을 읽고 짧게나마 글을 써서 정리해놓는다. 생각해보면 책을 읽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 집이라는 내밀하고 자유로운 공간을 두고 왜 굳이 카페를 찾아 책을 읽고 이런저런 볼일을 보는지 때로 마음이 찜찜했다. 무엇에 끌려 카페를 찾게 되는가 스스로도 그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했던 탓이다. 그러던 중 요즘 독서실이 좁고 칸이 막힌 개별적이고 고립된 과거의 공간에서 개방된 테이블을 공유하는 공간으로 바뀌어가는 흐름에 대한 분석을 보고 나름의 답을 찾았다.*(SBS스페셜 내 아이 어디서 키울까 2부 공간의 힘) 나도 모르게 했던 행동의 답이 공간의 구성에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이 책이 퍽 궁금했는데, 읽어보니 꽤 재밌고 괜찮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저자를 텔레비전의 한 프로그램에서 알게 되었는데, 아주 인상적으로 접했던 것이 한국에 커피숍이 많은 이유에 대한 설명이었다. 한국에 커피숍이 많은 이유는 그곳이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구실을 하기 때문(*유현준의 도시이야기 공원과 스타벅스의 차이)이란 내용이다. 그때 문득 과거에 비해 사람들이 모일 공간이 부족해졌다는 생각이 환기되었다. '공간이 만든 공간'에서도 카페의 테라스를 툇마루에 비유(220)해 놓았는데, 그 둘이 내외부 구분이 없는 열린 공간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사람들이 모여서 교류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는 공통점을 통해 우리가 왜 커피를 많이 마시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가끔 인터넷에 올라온 고민글 중에 귀농의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이사를 갔다가 인간관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곤란함을 겪은 사람들의 실패담을 본 적 있다. 공통된 어려움이 이웃들이 아무때고 집에 찾아와 가족들끼리의 시간을 방해받고 당연스레 소소한 간식거리 등을 요구하거나 문을 닫아놓은 방 등 사적인 공간을 함부로 들어와서 괴로웠다는 것이다. 한쪽의 입장으로 쓰여진 내용이기는 하지만 읽으면서 불편한 점이 있었겠구나 싶었는데 책을 읽고 다시 생각해보니 그들이 특별히 무례하고 텃세를 부리려는 악의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책의 전반부에 걸쳐 설명된 벼농사 식의 인간관계를 맺기 때문이구나 하고 이해되었다. 다르다는 점은 분명 스트레스 요인이 되겠지만, 도시형 생활방식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관계맺는 방식의 차이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되돌려 생각해보니 9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집 문이 잠겨있고 집 열쇠가 없으면 옆집을 찾아갔다. 자연스럽게 옆집에 가서 인사하고 텔레비전도 보고 간식도 먹고 끼니때가 되면 밥도 함께 먹으며 열쇠를 들고 외출한 가족을 기다렸다. 이때 주를 이뤘던 복도식 아파트들 마저 아파트가 이웃과의 교류 단절을 대표하는 주거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문을 열어놓고 생활하며 '복도를 골목처럼' 이웃끼리 교류하는 문화가 남아있었다. 그때의 기억을 가지고 성장한 사람들이 많지만, 지금의 도시는 좀 더 확고히 나의 공간과 외부를 분리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지금 익명이 된 이웃에게 그때처럼 나어린 자녀를 잠시간 위탁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면 불가능에 가깝다. 서로 그만큼의 신뢰도 없을 뿐더러 요즘은 그런 행동이 민폐로 생각될 것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최근들어 집에 게스트룸을 마련해두는 인테리어가 늘어났다는 점이다. 툇마루와 사랑방 등이 없어지고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여 교류하는 일이 전보다 줄어들었다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는 손님을 초대해 숙박까지 제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는 것이 독특하다. 더불어 화장실도 집주인이 내밀하게 쓰는 개별 화장실과 좀 더 개방적인 용도로 쓸 수 있는 화장실을 집 안에서도 분리해놓는 점도 그렇다. 이럴때는 두 화장실의 인테리어와 소품 등에도 차이를 두어 확연한 용도 구분을 해두기도 한다. 책에서도 이점에 대해 얘기가 나왔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았지만, 또 언젠가 이런 변화에 대해서도 쓴 책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읽으면서 재밌었던 몇몇 부분을 꼽아보면 '드래곤 볼'이 갖는 의미도 인상깊었고, 돛(169)의 등장과 함께 동서양의 교류가 가능케 되는 부분에서 돛과 비행기 구조의 공통점에 대해 읽어도 바로 이해되지 않고 아리송하길래 순간 문과적 한계를 체감한 것이 스스로 어이가 없어 좀 웃었다. 그래서 그게 무슨 법칙인지 설명해줄 이과를 구합니다.. 건축과 철학의 융합에 대한 부분에서 해체주의가 극단적으로 반영된 부부침실(340)의 디자인도 재미있었다. " 부부는 항상 떨어져서 잠을 자야 한다 " 는 문구와 나뉘어진 두 침대의 사진이 인상적이었는데, 저 문구가 마치 논증을 거친 명제처럼, 또 약간은 산악회 유머처럼 보인다.

 

 '폼지'(342)에 대한 부분에서 거의 즉각적으로 동대문 디지털 플라자가 떠올랐는데, 이런저런 논란이 있어도 심지어 흉물이라는 지적이 있어도, DDP가 상징적인 건물임에는 분명하단 생각을 했다. 하지만 실제로 DDP를 디자인한 자하 하디드는 폼지가 아닌 '라이노'라는 소프트웨어를 사용(351)했다고 한다. 아마 그 뒤를 잇는 논란의 건물이 롯데월드타워가 아닐까 싶은데, 무리한 건축허가나 지반의 불안정성, 주변과의 부조화 등의 문제가 따라붙어 있지만 어느새 서울시민들의 생활속 미세먼지 측정도구처럼 쓰이거나 불꽃놀이를 하면 각종 포털에 그 사진이 올라오는 명소가 되었다. '에펠탑 효과'같은 심리가 적용된 것일까?

 

 책을 읽기에 앞서 또 하나 기대했던 내용이 인터넷 공간에 대해서였다. 책에서도 이 '인류역사에 없던 공간'(368)의 등장을 다룬다. 물리적인 공간을 뛰어넘은, 실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이 공간-인터넷 플랫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궁금했었다. 그동안 사람들이 현실과 연결된 가상의 공간에서 서로 다른 자아를 이용하는 뒤틀어짐 문제가 많았지만, 앞으로 가상현실이 더 발달하게 되어 실재적인 공간이 가상의 공간과 더 긴밀하게 연결/대체되는 변화가 어떤 식으로 영향을 줄까 궁금해진다. 인터넷 플랫폼과 초연결 사회에 대한 내용이 다른 부분에 비해 덜 집중적인 것 같아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지금까지의 분석보다 앞으로의 흐름이 더 기대될 내용이라 생각한다.  

 

 기대하면서 읽었는데, 그만큼의 즐거움을 충족하는 책이었다.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한 내용이라 궁금한 점도 많았고 전문적인 내용이 어려우면 어떡하나 염려도 되었는데, 낯설지 않고 어렵지 않게 풀어냈다. 막히는 부분이 없이 잘 읽힌다는게 정말 큰 장점이었다. 설계도나 건축물의 사진 자료도 직관적으로 내용이 이해될 수 있도록 첨부되어 있어서 책의 구성도 잘 설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면에서는 반복적인 내용을 길게 끌고 가는가 싶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진입장벽이 낮고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을만한 흐름을 유지하는 호흡이 좋았다. 벌써 여러권의 책을 낸 만큼 글도 참 잘쓰시는 듯. 어떤 사람에게 추천해줘도 큰 호불호 없이 읽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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