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증발 - 사라진 일본인들을 찾아서
레나 모제 지음, 스테판 르멜 사진, 이주영 옮김 / 책세상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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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간다. 무엇을 하며 보냈는지 말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다. 자신의 길을 찾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일자리를 찾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아내가 집안 살림을 도맡고 있지만 그렇게 계속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다. 짐짝 같은 테루오, 무능력한 테루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빨갛게 달군 쇠처럼 내게 와닿았다. 부끄러워서 외출도 하지 않았다. 다시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들자 내 자신이 두려웠다. 형편없는 놈 아닌가? 내 나이 이제 서른 살이다. 숨어버리는 것은 쉽지만 다시 일어서는 것은 쉽지 않다. -p.227 19 테로오의 고백, 2년 만에 귀가"

 

 많은 젊은 세대들이 특히나 이 부분에 공감할 것이라 생각한다. 젊은 세대에 한정짓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무엇에 대입하던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실패가 감당하기 어려운 리스크로 돌아오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모든 이에게 공감을 살 것이다. '증발자'의 사정을 다 이해하기 어렵고, 다른 체계의 사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때로 이 차이를 옳고 그름의 시선으로 판단하려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바로 저 단락을 읽으며 약간이나마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인간증발'은 다름을 이해하지만 인정하기에 어려운 시대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회의 또 하나의 이면을 생생한 시선으로 가리킨 책이다. 흥미로운 시선으로 본문을 따라가다 보면 인식하지 않은 채 지나쳤던 주위의 인물들로 사고가 확장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뉴스와 통계를 보며 실종자와 자살자에 관한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지만, 이전까지는 증발해버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못했다. '인간증발'은 자신의 존재를 생활 모든 기반에서 마치 소멸된 것처럼 없애버린 "사라진 일본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낯선 사회 현상과 직면하기 위해 잡은 '인간증발'안에서 오히려 현 시대를 관통하는 문제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었다. 스스로 사라져버리는 10만명의 일본인들과 그 사실을 감추고 싶어하는 일본 사회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 세대의 공감이자 곧 다가올지도 모르는 '사라질 한국인들을 향하여' 권하는 조심스러운 경고였다.

 

 "알 수 없는 규칙, 격식, 장벽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복잡한 일본 사회에서 어두운 부분들을 조사하기란 생각만큼 녹록치 않다. 일본에서는 이질적인 것이 들어오면 배척을 받는 것 같다. 통역을 구하는 간단한 일도 신경 쓸 일이 많다. 처음 이메일을 교환할 때는 대부분 분위기가 좋다. 통역 비용, 통역 가능 시간, 업무 방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렇다. 그러다가 '인간증발'이라는 주제를 꺼내면 어김없이 모든 것이 멈춘다. 많은 일본이 통역사들이 장례식 같은 피치 못할 사정을 내세우며 거절한다. 드물지만 솔직하게 할 수 없는 사정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실패와 마주해야 하는 두려움, 주변에 이 불편한 문제를 질문해야 하는 곤란함 때문이다. -p.101 9 지옥의 캠프"

 

 인간이 증발한다. 매년 스스로 자신을 감추고 사라져가는 10만명의 일본인들에 대해 왜 프랑스인 저자가 주목하여 글을 썼을까, 하는 부분이 가장 먼저 의아했다. 그리고 어쩌면 일본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현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됐다. 문득 윗세대에게 특히 '진리'처럼 통용되는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약 10년 정도 앞선 사회문화현상을 보인다는 썰이 떠올랐으므로. 같은 동양 문화권이기 때문에 특히 유사성을 보이는 면도 있겠지만, 저탄생, 고령화 같은 사회문제들이 그러하듯 비슷한 생활수준을 가진 국가들의 사회문화적 변화 양상 또한 유사한 흐름을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증발'은 생각 이상으로 집요했다.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관람하는 것 같은 현장감을 주는 이 르포르타주는 한 존재가 사라지는 이유에 대해 넓고도 깊게 따라붙어 보여준다. 처음 책을 접했을 때는 막연히 스스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이전'시킨 사람들에 대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떠나 노숙인으로 산다던지, 자신의 생활 기반을 전부 버리고 연락 두절한 채 무연고의 지역에 흘러들어간다던지 하는 자체적 증발이 떠올랐다. 하지만 '인간증발'안에는 자살자, 귀농인, 히키고모리, 가출자, 납북자, 실종자 등등 여러 이유로 사라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카에가 보기에 일본 열도는 '압력솥'같다고 했다. 일본인들은 마치 약한 불 위에 올라간 압력솥 같은 사회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러다 압력을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수증기처럼 증발해 버린다. 증발 문제는 터부시되고 있지만 연간 자살자 수 3만 3,000명, 즉 매일 집계되는 자살자 수가 90명에 이른다는 말이다. 일본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간이라면 새어나가지 않는다. 새어나가는 것은 수도꼭지나 하는 일이다." 재즈 연주자이자 작가였던 보리스 비앙이 했던 농담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보리스 비앙의 철학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인간이기 때문에 사라진다. -p.128 11 실종자를 찾는 사람들 "

 

 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증발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게 되었던 것에는 자신의 내면에도 관계라는 사회망 안에서 스스로를 단절시키고 고립되고 싶다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최근의 관심사가 미니멀 라이프와 연관되어 삶을 더욱 단순화하는 것에 있는데, 그 중 한가지 압박이 인간관계에 포함되어 있다. '인간증발'에서도 불현듯 느껴지는 타인과 관계의 무게를 자각한 순간 모든 것을 놓아두고 사라져버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있게 읽은 부분이었다. 아마 이 제목을 통해 자신이 어떤 것을 연상했는지에 따라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불안-욕망이 무엇인지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판단에는 객관적인 사실 뿐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자신의 관점도 포함되니까.

 

 관심을 가지기엔 내용이 다소 딱딱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한번쯤 읽어두면 좋을 내용이다. 사회 현상과 인터뷰, 사진 등의 구성이 감각적으로 배치되어 부담스럽지 않고, 읽기 편한 글로 쓰여졌기 때문에 생각보다 진입장벽이 높지 않다. 고령화, 고독사와 같은 문제들이 일본의 신간에서 우리의 사회문제로 다가온 것이 오랜 기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처럼 '인간증발'에 대해서도 미리 읽어둔다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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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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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카 고타로의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를 통해 처음으로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을 만났다. 일본 작가들에게 붙여지는 '**월드'라는 수식이 그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일정한 작품 활동을 통해 구축되어야 주어지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사카 고타로 역시 월드라는 수식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는 소개가 꽤 흥미로웠다.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는 중세의 마녀사냥,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기업의 구조조정, 거짓말 탐지기 등등 여러 군데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설정이 남다르다. 거기다 이 책의 표지와 제목이 내용을 가늠하기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연막 작용을 한 탓에, 책을 집어들면 겉보기와는 다른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을 접하게 된다.

 

 가장 큰 바탕은 안전지구로 선정된 지역의 평화경찰에 의해 적발된 반사회적 인물들이 처벌당하게 된다는 설정이다. 이는 초반 기업의 구조조정에 대해 이야기하며 중세의 마녀사냥을 끌어들여 설명된다. 세상의 불균형과 불완전함이 야기하는 전체의 불안을 잠식시키기 위해 무작위의 특정인을 지목하여 마녀로 몰고, 절대 입증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지 못하면 죽임을 당하는. 마녀의 자백을 받기 위해 집행자들은 고문을 하고, 마녀는 고문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하여 처형 당하거나, 스스로 생명을 끊거나 아니면 끝내 버티다 고문을 당해 죽는다는 선택지밖에 없다. 구조조정과 소설 속 '안전지구'라는 제도는 이 모든 과정에 있어서 비슷한 면모를 가졌다.

 

 '지역안전을 지키는 과'와 평화경찰이 등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해당 지역뿐 아니라 주변 지역까지 아우르며 시민들이 스스로를 더욱 자제하고 억압하도록 만들고, 타인을 감시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사실 이런 자경활동 혹은 집단의 의심은 어느 시대나 어떤 형태로든 존재해왔던 부조리일 것이다. 특히나 일본 작가를 통해 무고한 사람을 상대로 가혹 행위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방법에 대한 묘사를 읽고 있음을 문득 떠올렸을때, 단지 표현된 문장이 주는 그 이상의 이유있는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더욱이 중간에 헌법 9조의 전수방위에 대해 언급하며 무방비, 아름답고 허무함, 가엾음 같은 표현을 마주하면서부터는 더더욱.

 

 합리적 절차 없이 가학적 성향을 가진 평화경찰에게 주어진 이 기묘한 책무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어 몸집을 불린다. 사람들은 타인의 공개 처형을 광장에서 즐기는 한 편, 고발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생활하고, 위험분자일지도 모르는 -어쨌든 돌아오지 못할- 주변인들이 맞이한 가정 방문의 현장을 외면한다. 그리고 이 안전지구에 등장한 진정한 불온세력/위험분자가 나타나며 이사카 고타로의 새 월드는 점점 더 흥미진진해진다. 기묘한 차림의 이 히어로는 불안한 세태를 바라보아야만 하는 독자에게 안도와 반가움을 주면서도 지극히 인간적인 한계점을 보여주며 떨치지 못한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확실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독자를 향해 질문을 던지는 듯한 이 도발적인 작품은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그리고 토론할 수 있을만큼의 여운을 남긴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중간중간 독특한 맥락으로 던져지는 미카베의 곤충 이야기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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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인정도 아닌 - 타인의 인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연습
이인수.이무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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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새롭게 1승을 올리는 퍼거슨의 명언을 깊게 새겨 소셜네트워크를 잘 쓰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 SNS 플랫폼은 여전히 잘 나간다. 뉴스에서도 빈번히 접하는 소식 중 하나가 SNS에서 더 많은 관심을 끌기 위해 위험한 도전을 하거나 자극적인 소재로 빈축을 사는 이들에관한 내용이다. 하루 중 아주 단순한 순간의 조각을 기록해두는 이 행위가 타인이 '좋아'하는 피드백을 만나면, 조각은 마치 이름난 예술작품처럼 변화된다. 수신자들은 열광하고 발신자는 '새로운 명예'를 얻는다. 타인이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더라도 조각 자체와 조각과 나 사이에 이루어진 감상의 근간은 달라지지 않는데, 왜 제 3의 평가가 신경쓰이고 필요한 것일까. '누구의 인정도 아닌'을 통해 이에 숨겨진 심리와 내면에 대해 좀 더 깊이 알아볼 수 있다.

 

 저자는 인정중독의 기인이 개인의 내부가 아닌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의 분위기", "가정, 학교, 직장, 종교,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 "사회적 압력"에서 온다고 한다. 이에 공감한 것이 최근 읽은 가족구성원-특히 자녀-의 외모에 대한 지적을 하는 것에 대한 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는 가족이기 때문에, 남들은 해주지 못하는 충고라서, 던지는 외모에 대한 지적이 상대에게는 깊은 상처가 되어 자기 자신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글 밑으로는 깊은 공감을 한 수많은 경험들이 달려있었다. 그 글을 통해 가까운 사이라서 혹은 도움을 주는 충고라 생각하고 하는 말이 불러오는 상처와 자존감의 상실에 대해 고민한 경험이 있어 '누구의 인정도 아닌'에서 제시한 관점을 관심있게 읽을 수 있었다.

 

 여기서는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압박해가며 타인에게 순응하는 인물상들에 대해 중심적으로 다룬다. 상대방이 자신을 떠날까봐 잘해주려 하거나, 실수하여 실망시킬까봐 더 완벽해지려고 하거나, 희생하고 포기해서 양보하기만 하려고 하거나, 미움이나 불화를 피하기 위해 화내거나 거절하지 못하는 모습들이 나온다. 한없이 착해서 답답하기까지한 이들의 깊은 내면과 불안을 안타깝게 읽다가, 또다른 양태의 인정중독자를 떠올렸다. 이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가치를 더 높이 책정받기 위해 온갖 진상과 추태, 패악을 부림으로써 만족하는 인정중독자들이 있다. 이들은 각종 서비스업계의 블랙리스트에 그 흔적을 깊고도 진하게 남긴다. '고객은 왕', '내가 누군지 알아?', '돈을 냈는데 왜 안돼?', '윗사람 나오라고 해' 등등의 고함으로 자신은 대우받고 있고, 대우 받아야 함을 확인하는 종족들이다. 특히나 이들은 자신의 내면이 아닌 타인의 내면을 갉아먹는 행동으로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피해자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여기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도 함께 다루었다면 더욱 흥미로웠을 것이다.

 

 읽으면서 인정중독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자기검열을 해보다가 인정욕구에 해당하는 범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예컨대, "하나 씨는 좋은 사람이야", "하나 씨는 매력적이야". "하나 씨는 유능해"와 같은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그래야 안심이 된다. 하나 씨는 '인정중독'이다. -p.21 인정에 중독된 사람들" 에서 열거된 것처럼 다양한 욕망들이 인정욕구에 포함된다면, 우리가 욕망하는 것들 중 넓은 의미에서 이것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그렇다면 약간의 과정을 섞은 SNS를 하고, 타인에게 마음에 없는 칭찬을 하는 우리들 역시 인정중독자인 것일까? 인정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모든 욕구를 거세해야 하는 것일까? 만약 당신이 타인의 인정으로 인해 만족/우울/불안을 느끼고, 목적화하여 행동한다면 그것은 중독의 양상을 띄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약간의 재미 혹은 우월감, 사회친교적인 배려, 체면을 고려한 행동이라면 안심하라. 당신은 괜찮은 사회인으로 잘 헤쳐나가고 있다. 그것에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다들 내색하지 않는 고민과 괴로움만큼의 무게를 짊어지고 어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자신을 포함 주위에 지나치게 SNS에 빠져 있거나, 늘 거절을 못해서 돈을 꿔주고도 받지 못하거나, 마음에 드는 바지 한 장 질러보지 못해서 이 문제에 대해 예민하게 고민하거나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추천해줄만 하다.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해도 공감을 통한 위로와 약간의 개선의지를 뒷받침해주는 내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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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의 비밀 높새바람 41
윤숙희 지음, 김미경 그림 / 바람의아이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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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웅녀가 어떻게 사람이 되었는지 아니?"

갑작스런 반야의 질문에 선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연히 알지. 사람이 되고 싶은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만 먹으며 햇빛이 비추지 않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지냈는데, 호랑이는 못 참고 동굴을 뛰쳐나가고 곰만 사람이 되었잖아. 사람이 된 곰이 바로 웅녀고."

"맞아. 근데 난 가끔 궁금해. 웅녀는 사람이 되어서 행복했을까? 사람이 되기 전에 함께 지냈던 곰 가족이랑 친구들이 보고 싶지 않았을까?" - p70 단군사당 "

 

 '반야의 비밀'은 독특한 매력이 있는 동화다. 서울에서 잠시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 지리산 마을로 오게 된 선재의 입버릇은 "얼른 서울로 가고 싶다!" 이다. 낯선 시골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선재가 할아버지를 따라 지리산을 오르다 비탈에서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위기의 순간, 선재는 불현듯 나타난 낯선 여자아이의 도움을 받게 된다. 선재는 자신을 도와주고 사라져버린 여자아이에게서 묘한 여운을 느낀다. 부모님의 출장이 길어져 선재는 지리산에서 잠깐 산골 학교를 다니게 된다. 전교생이 30명 밖에 되지 않던 작은 학교에서 선재는 자신을 구해준 '반야'라는 여자아이를 다시 만난다. 반야에게 도와줘서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은 선재는 말을 건넬 기회를 잡기위해 반야를 유심히 지켜보다 조금씩 미스터리어스한 점들을 발견하기 시작하는데...

 

 의문스러운 구석이 매우 많은 지리산 소녀 반야, 지리산에 던져진 도시 소년 선재. '반야의 비밀'은 두 아이가 점차 가까워지며 쌓아가는 풋풋한 우정과 지리산에 숨겨진 비밀, 인간과 자연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까지 독자에게 선사해준다. 지리산을 배경으로 한 한 편의 이 예쁜 동화는 우리의 개국신화인 단군신화에 있는 웅녀 설화가 모티브가 되었다. 독특한 설정이 주는 몰입감만큼이나 짜임도 탄탄해 동화의 끝의 끝까지 어떤 결말을 선사해줄 것인지 궁금함을 갖고 책장을 넘기게 만든다. 한없이 자연에 가까운 반야를 통해 선재 뿐 아니라 독자들도 지리산과 지리산의 풀, 열매, 계절에 한층 가깝게 다가가는 체험을 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그곳에서 돈으로도 금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친구를 사귀길 바란다.'는 아빠의 문자에서 느껴지는 위화감, 도시와 산촌에 대한 대조적인 설정, 전형적인 인물상을 가지고 있는 등장인물들, 다소 빠른 전개로 인물간의 연결고리가 탄탄해질 수 있는 충분한 요소를 다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 등이 아쉬웠다. 사춘기가 금방 온다는 요즘 초등학생, 열두살 나이의 아이들의 난이도 높은 교우관계를 고려한다면, 한두개의 사건을 더 넣어 선재와 반야가 깊은 교감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넉넉히 보여줬다면 흐름이 더욱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반야의 비밀'을 읽으며 깨끗하고 맑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재미있을 뿐 아니라 순수함이 묻어나는 자연 그대로의 소녀 반야의 안내를 받으며 지리산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기분이 든다. 곳곳에 놓여진 단군신화의 흔적을 살피며 신비로운 전설의 일부분이 잘 녹아든 미스터리 물을 즐기게 되는데, 모처럼 아련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동화를 만나게 된 듯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해볼 수 있고, 아이들이 책을 읽는다면 어떤 선택을 할지 생각해볼수도 있을 것 같다. 선재는 여러모로 아쉬움을 안겨주는 인물이었는데, 선재가 좀 더 용기있는 소년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며 독서를 마무리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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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엔드 - 과학과 종교가 재앙에 대해 말하는 것들
필 토레스 지음, 제효영 옮김 / 현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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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마다 여름이면 지구의 멸망, 인류의 심각한 위협을 소재로 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찾아온다. 그간 우리가 접해왔던 흥행작들의 목록만 봐도, 인류 내면에 자리잡은 두려움 면면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인공지능의 자각으로부터 시작된 기계의 반란 '터미네이터', 급격한 환경변화로 야기된 빙하기 '투모로우', 인간의 유전자 실험으로 탄생한 괴물 상어 '딥 블루 씨' 국내 영화로는 '연가시, 판도라, 부산행' 같은 전염병이나 핵발전소의 폭발, 좀비 바이러스 영화들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 소재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점이다. 현암사의 신간 "디 엔드 - 과학과 종교가 재앙에 대해 말하는 것들 / 핵에서 인공지능까지 인류의 불행을 불러올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심층 탐구"는 이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소재가 될 법한 요소들을 하나씩 분석한다. 

 

 읽으면서 회의감을 느끼는 부분이 많았는데, 대부분의 요소들에서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인간 자체를 혐오하는 사람만 어마어마한 재앙을 일으키고 막대한 피해를 낳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존재 자체가 지구에게는 피해를 일으키는 재앙적인 존재로 보인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가 저지를/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모든 파괴적 행위들 뿐만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 행하는 일들이 지구의 시간으로도 매우 짧은 기간 안에 자연적인 생태계의 파괴를 불러왔다. "인류는 겨우 몇백 년 동안 환경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다. 그것도 진화 속도가 따라올 수 없을 만큼 급격한 변화였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숲을 밀어버리고 바다를 오염시키고 생태계를 조각조각 분열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 p163 공룡과 도도새" 이는 상아가 없는 코끼리, 덩치가 작은 곰들이 나타나도록 만들었다.

 

 마지막 열네 번째 단락으로 가면 '사전 대응과 예방' 부분이 나오는데, 그동안 열거했던 문제들의 심각성에 비해 해결 방법은 미온적인 느낌을 받는다. 마치 영화 '터미네이터'의 설정처럼 한 고객 응대 서비스 용 인공지능이 자신들끼리의 은어를 만들어 대화를 나눈 사건, 우리가 익히 아는 몰디브라는 섬이 곧 바다 속으로 침몰할 위기에 처한 온난화의 심각성, 종교 간 분쟁으로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전쟁과는 상관없는 민간인들의 사망 소식 또한 매일같이 전해지는, "세계 어딘가에서 핵폭탄이 터지는 문제는 이제 가능성을 가늠하기보다 시점이 언제인지 파악하는 것이 대체로 더 중요한 사안이" 된 지금 가장 유력한 곳 중 하나인 북한 문제가 -비록 우리는 큰 신경을 쓰지 않으며 일상을 유지하지만- 심각하게 대두된 시기에 "믿음보다는 증거를, 계시보다는 관찰을, 종교보다는 과학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한 문장은 너무나 미약하게 느껴져 아쉽다.


 이 책은 인간에게 있는 소멸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를 다룬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죽음 이후의 세계와 내세를 기약하는 종교를 만들고, 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인구절벽에 대한 위기의식과 휴거같은 지구종말론 선동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환경오염으로 비롯된 온난화와 과학발전의 뒤를 따르는 인간을 뛰어넘는 인공지능, 인간과 유사해지는 로봇에 대한 불안감, 마지막 전쟁이 될 핵무기 등이 자기 자신에게서 부터 비롯된 것임에도 왜 인간은 그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느끼고 있는 많은 위협들에 대해 공감하는 한 편, 지구에서 살고 있는 다른 종들도 인류가 느끼는 이 두려움을 자각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부분이었다.

 

 "세상에는 우리가 의문을 가질 수는 있지만 '절대로' 답할 수 없는 현상이 존재할 수 있다. 이럴 때 인간은 바로 앞에서 잡힐 듯 가물거리는 생각을 '표면적으로 들여다보는'것이 전부일 뿐, 실눈을 뜨고 아무리 골몰해봐야 제대로 볼 수 없다. - p113 인류의 목숨을 위협하는 발명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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