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 세사르 바예호 시선집
세사르 바예호 지음, 고혜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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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때로 시집을 읽지만 한동안 뜸했다. 어제 하루종일 날이 흐리더니 오늘은 제법 춥다. 온종일 거리를 쏘다니다 돌아온 이가 길바닥엔 은행이 떨궈놓은 흔적이 폭탄처럼 늘어졌다고 푸념했다. 별 일 없는, 그래서 서러운 한 해가 하루처럼 가고 있다. 무상한 시간을 관조하는 9월의 저녁, 열어놓은 창가 곁에서 읽기 좋을 시집 한 권을 만났다. 다산책방에서 출간한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의 세사르 바예호는 어쩌면 익숙치 않은 시인이다. 하지만 그를 아는 이에게 세사르 바예호는 "무한한 애틋함[une infinie tendresse]-La Vie d'Adèle"으로 새겨질 만한 20세기 현대시의 거장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절판 이후로 그의 시집에 목말랐을 많은 이들에게 반가운 소식으로 다가온 이 시선집은 독특한 감각으로 눈길을 끌고 마침내 독자를 사로잡는다.

 

 시는 마치 소설처럼, 혹은 한 편의 일대기를 담아낸 흑백 필름처럼 거대한 흐름으로 다가온다. 그의 삶과 밀접하게 얽매인 시어들 속에서, 때로 치열하게 때로 깊은 구렁 안으로 파고들며 책장을 넘기게 된다. 시 안에 담긴 한 사람의 삶과 한 시대의 민낯이 산산이 부딪혀오는 충격을 안으며 이 "불행한 만찬"을 "데려와달라고 한 적이 없는" "눈물의 계곡"에서 "언제까지 여기 있"도록 머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세사르 바예호는 시를 통해 내면과 정신 안의 관념을 스치고 지나가는 인생의 찰나를 잡아채고, 삶 그 자체에 뛰어들어 날 것의 속살을 헤집어 드러낸다. 그리하여 다소 낯설고 이국적인 감각들 사이에서 가슴 깊숙이 내려앉는 영혼의 공명을 발견한다. 읽으면 읽을수록 낮고 어두운 구석구석을 감싸 지나는 시인의 애틋한 시선이 느껴진다. 인생이 싫었던 냉소가 아닌 연민으로.

 

 몇 편의 시들을 마음닿는 대로 소리내어 읽다가 그가 들려주려 했던 운율에 결코 닿지 못함을 좌절하기도 했다. 외국의 시를 접할 때마다 의미 자체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한편, 옮긴이의 책머리에도 표현되어 있듯이 번역된 시 감상에 한계를 느낀다. 짧은 생각이지만, 원문과 번역본, 원어 음성으로 시를 녹음한 QR코드가 함께 있다면 감상의 영역이 폭넓게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이 쓰여진 모든 언어로 시를 감상할 수 없기에 늘 목마름으로 요구되었던 원문으로의 감상 욕구를 조금이나마 충족할 수 있는 방안이 아닐까. 학습 교재에서는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는 방식이기 때문에 원문 감상이 필요한 시집에도 도입된다면 좋을 것 같다. 때로 어떤 시들은 소리내어 낭송되는 그 방식으로 그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에서도 "아에이오우의 아픔"이 특히나 그런 경우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마음에 드는 시들을 한두편 감상과 함께 옮겨내어 볼까 생각해봤지만, 한권에 하나씩 읽어 모두가 내면에 켜켜이 쌓이는 경험을 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재미있는 점은 처음 바예호의 시를 옮겼을 당시는 IMF로 위축된 사회 정서를 고려하여 표제로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가 선택되었던 것에 비해, 지금 새로이 개정증보판을 내며 선택된 표제작은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인 것이다. 약 20년 사이의 간극에서 얼어붙은 사회 안에서도 희망을 말하던 시집이 어쩌다 이제는 인생조차 싫은 날을 읊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정말 예리하게도, 희망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기보다 나의 어제, 혹은 오늘, 어쩌면 내일일지도 모르는 인생이 싫었던 날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변화된 흐름을 잘 따라간 세련됨으로 감상 욕구를 자극하는 소장할만한 시집이다. 가을이 가기 전에 꼭 한 번 감상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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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놀이 2017-11-05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담아만 두고 아직 손을 못대고 있는 책입니다. 가을이 다 가는데 어쩌지요~~ 표제에 대한 지적은 테일님이 맥락을 제대로 짚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같아도 지금으로서는 바뀐 표제가 더 맘이 끌리네요~~

테일 2017-11-08 19:16   좋아요 0 | URL
아.. 저도 가을을 지나오는 동안 오히려 더 책을 덜 읽은 것 같습니다. 시월은 특히 더 그랬네요. 게으름을 피웠다기 보다는... 가을을 타는가 봅니다. 낯선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시집이었습니다. 언제라도 짬을 내셔서 한 번 읽어보시길... 11월까지는 가을이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