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게 (반양장) - 기시미 이치로의 다시 살아갈 용기에 대하여
기시미 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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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어가는 용기, 나이 든 '지금'을 행복하게 사는 용기란 인생을 바라보는 눈을 아주 조금 바꾸는 용기인지도 모릅니다. _ p.93 4장 다시 살아갈 용기"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을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최근 대형 검색 포털 사이트의 내리막을 실감했을 때였다. 길게 풀어서 돌려말할 것 없이 '네이버'는 한 시대를 풍미한 검색 엔진이었다. 서로의 지식을 나눈다는 의미로 누구나 질문하고 답변할 수 있는 '지식인'이며, 개인 '블로그'에 사진과 정보를 빼곡히 올려놓은 글들로 정보를 검색하고 얻은 경험이 구세대라면 당연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십대들은 이 정보의 창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초록창을 켜서 00하는 법 등을 검색했던 우리와 달리 구글과 유투브에 정보를 검색한단다. 다른 이유는 차치하고서라도 특히 게시글, 사용 방법 등을 설명해놓은 글을 보는 것보다 유투브에 올라온 영상을 보는 방법을 선호한단다. 읽는 세대에서 보는 세대로 변화한 것이다. 학교 교실에 우리가 생각하는 칠판이 사라지고 대형 스크린이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변화는 분명하다. 덧붙여 과학시간에 공부한 뒤로 누군가 침을 튀기면 '아밀라아제 나왔어/묻었어' 하던 장난도 '아밀레이스'로 표기가 바뀌었단다. 그렇다면 '아이오딘'은 무엇일까? 구세대들이여, 세대차이를 느껴보라.

 

 신체적인 노화는 사실 스무살이 넘어가면서부터 해가 다르게 작년이랑 차이가 남을 서서히 느껴온터라 조금씩 늙어가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데, 정신적인 부분 요즘의 세태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느낄때면 타격이 크다.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쉽게 보편의 상황에서 어리둥절해지고 만다. 거리에서 어떤 여자가 혼잣말을 하길래 이상한 사람인가 생각했더니 줄이 없는 이어폰을 꼽고 있더라, 혹은 청소년들이 '문상' 있냐 가져왔냐 하는 말을 하길래 애들이 웬 문상을 하는가 싶었는데 알고보니 문화상품권의 줄임말이더라는 얘기는 우습지도 못한 일화가 됐다. 하다못해 편의점 간식도 'ㅇㄱㄹㅇ'이니 'ㅂㅂㅂㄱ'니 하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는 세상이니 더욱 그렇다. 세상의 속도에서 뒤쳐지며 생기는 이런 어리둥절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질 것이다. 책에서는 좀 더 먼 삶의 시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지만, 어찌됐든 책의 제목과 가까운 나이이다보니 조금씩 멀어지는 것들을 떠올리며 책을 읽었다.

 

 마음의 준비는 가볍게 시작했지만 책은 시종 진지한 어조로 노화와 간병,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소 고루한 면도 있다. 인생을 계절에 비유한 표현도 지나치게 익숙해서 큰 위안이나 전환이 되기 어렵고, 본인이 늦은 나이에도 한국어 배우기에 도전하고 있다는 내용이나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의 재활에 대한 내용 등은 의지에 박수를 보내고 싶지만 어쩐지 멀게만 느껴진다. 나도 소소한 도전을 해야겠다기 보단 '대단하시네요' 하고 말아버리게 된다. 거기에 부모님의 나이듦에 관한 내용은 인상적이면서 안타까웠다. 고령화와 핵가족화를 넘어선 1인 가구의 증가 등으로 심화될 노인 간병 등의 문제를 인생의 한 부분으로 다룬 점에는 공감되었다. 그런데 간병으로서 오는 어려움을 " '부모와 함께 있는 시간이 생겼다'라고 생각해보(p.162) "자는 맺음은 매우 아쉽다. 물론 매우 옳은 말이고,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는 그 시간조차 소중했다는 것을 느끼게 되지만 실제적 간병 상황, 간병인에 대한 현실적 조언보다 못한 형이상학적인 위로의 말만 남겼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어지는 8장과 9장의 내용은 좀 더 계발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어 아쉬웠던 마음을 풀어가며 읽었다. 전체적인 내용보다 소제목들이 간결하고 핵심적이라는 인상이 남았다. 자기계발서여서인지, 일본저자 특유의 감성을 건드리려는 의미부여들 때문인지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큰 감흥을 받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마침 계절도 가을이고, 올해도 벌써 다 끝나가고, 나는 한 살 더 늙는거고, 혹은 이제 곧 마흔 즈음이 되가고, 아니 이미 넘은지 오래고, 어쩐지 마음이 우울하고, 문득 살펴본 부모님 얼굴에서 주름을 더 발견했고, 갑자기 한숨도 나오는 것 같고, 날은 또 왜 이렇게 빨리 어두워지는지 모르겠는 마음이 자꾸만 불쑥 솟아나는 사람들은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어른이 되니까 하고싶은대로 하고 살고 좋다!거나, 가을이 되니까 붕어빵 사먹을 수 있어서 이득!이라거나, 할로윈, 크리스마스, 눈오는 날 제일 좋아! 등 약간의 긍정적임이 남은 사람들보다 인생의 황혼, 가을과 겨울이라는 계절, 한 해의 마무리가 아쉽기만 한 사람들에게 어쩌면 조금 공감을 사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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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츠러들지 않고 용기있게 딸 성교육 하는 법 - 성교육 전문가 손경이의 딸의 인생을 바꾸는 50가지 교육법
손경이 지음 / 다산에듀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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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이 그러하겠지만, 이미 성인이 된 세대들은 성교육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과 비웃음을 가지고 있다. 언제고 성교육은 진짜로 궁금하거나 필요한 것을 교육시켜준 적이 없었으며, 인생의 어느 시점에 몇번을 받아도 늘 음지에서부터 전해오는 정보와 문물을 앞서나갔던 적이 없었다. 성교육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 한두시간 수업 대신 시간을 때우는 기능을 하는 것 외에는 아무 장점이 없었다. 물론 학생 시절에 그만하면 큰 장점이라 쓸모는 없어도 성교육 시간을 좋아했다. 인체 해부도가 나오면서 어느결에 남자의 정자가 여자의 난자를 만나러 갔는지 모를 영상물을 감상할때면 어두운 틈을 타서 좀 졸수도 있고, 서로 알건 다 알면서 모르는 척 아는척 '응~? 그러니까 조심해!' 하고 끝맺는 선생님의 민망함도 우스웠다. 옆학교에서는 순결 서약을 하면 사탕도 준다던데, 순결이고 뭐고 사탕이나 나눠주지 하는 부러움도 있었다.

 

 나의 성교육 인식은 어디에 머물러 있느냐면, 그 이름도 찬란한 '구성애' 강사였다. 그것도 세대가 맞아서라기 보다 그 이전의 성교육은 전무했고, 구성애 강사의 성교육 내용이 워낙 큰 화제로 다가온 솔직한 성교육이라 기억에 남아있을 뿐이다. 그 이후로는 딱히 성교육에 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성교육의 유용함에 대한 불신도 불신이거니와 성인이 되고나니 어른에게도 성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아서였다. 이 두가지 이유 모두 손경이 저자의 '움츠러들지 않고 용기있게 딸 성교육 하는 법'을 읽고 난 뒤에 생각해보니 크나큰 착각이었다. 십수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성교육은 큰 발전과 변화를 이뤄냈고, 아이들에게 올바른 성교육을 하려면 성교육 부재 여건 속에서 자라난 어른들부터 성교육을 하기 위한 성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수많은 성교육의 반복 등장으로 게슈탈트 붕괴가 일어날 것만 같지만, 결론은 이 책은 굉장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의 가치를 매우 얕잡아보고 책읽기를 조금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 그럼 한 번 조금 읽어줘볼까 하는 마음으로 책을 들었다. 반성합니다. 하지만 핑계를 대자면 성교육에 대해 뿌리깊은 불신을 갖게 한 기성 교육과 문화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뿐, 천성이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게다가 '딸' 성교육하는 법이라니. 안 읽어도 알 것 같은 생일, 가슴 몽우리, 처녀막 등의 단어들이 벌써부터 지루했다. 그런데 '움츠러들지 않고 용기있게 딸 성교육 하는 법'은 달랐다. 딸 성교육하는 법이라고 했는데, 읽다보면 부모의 성과 인식을 교육하고 있다. 읽다보니 교육 당하고 있는 책이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기존의 혹은 쉽고 편한 길로 가는 교육법을 원한다면 당황할 것이다. 진짜 아이의 성교육에 대해 고민하며 읽는 부모라면 책을 읽고 난 뒤에 더 크게 다가오는 '스스로 공부해야 한다'는 과제에 무거움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이 책이 만족스러운 점은 표괄적인 의미의 성교육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최신의 민감한 주제들을 예로 들면서. 성 고정관념에 대해 이야기할때는 연예인 봉태규의 아들 시하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아주 가볍게 티비로 보면서 의문을 품었거나 공감했던 내용으로 관심을 끌고 이해를 돕는다. 젠더교육에 대한 주제에서는 다양성을 함께 언급한다. 인종, 장애같이 디폴트 밸류된 고정관념에 대해 건드린다. 성폭력에 관한 주제에서는 예방 옷차림, 행동수칙을 조언하기 보다 생존의 중요성, 피해자에게 씌워지는 프레임, 미투 등의 주제를 다룬다. 어쩌면 페미니즘이나 미투 같은 단어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자체만으로 이 책을 못견딜지도 모른다. 하지만 딸을 가진 부모라면 그 아이를 위해서 이 책을 읽고 어떻게 성교육을 할 것인지, 주체성과 자기 결정권을 어떻게 심어줄 것인지 고민해본다면 좋겠다. 흥미롭고 인상깊게 읽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쁜 마음으로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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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김신회 지음 / 놀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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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년전쯤 일이다. 갑자기 왼쪽 손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무거운 것을 들지도, 손목의 위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아파서 덜컥 겁이 났다. 주로 사용하는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이 아픈 것도 이유를 모르겠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팔목에서부터 뼈에 구멍이 생기고 있는건 아닌지 염려되었다. 덜컥 차를 얻어타고 아는 사람에게 들은 대학병원을 찾아갔다. 주차해서 접수를 하러 가니 교수님의 진찰을 받으려면 대기가 삼사개월은 넘어간다고 했다.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그냥 돌아오고서 한동안 손목을 부여잡고 생활했다. 내 진료 대기 차례가 되자 통증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의 저자 김신회가 오른손에 통증이 생겨 강제휴업 상태로 들어간 계기를 통해 이 책을 썼다는 것을 읽고는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 왼쪽 손목이 아팠던 나는 어땠던가.

 

 이 에세이는 몇 퍼센트의 진실을 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꽤 생생하다. 정말 너무나도 가까웠던 지인과 일년을 함께 살고 난 뒤에 어색해졌다는 단락에서는 불편함마저 느껴졌다.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졌다는 이유가 크겠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집 한 켠을 내어줄 정도로 살가웠던 지인이 데면해졌다면 그 이유가 어디서부터 왔을지! 그리고 본인은 왜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것인지! 게다가 이런 내용을 글로 써도 되는 것인지! 까지 걱정이 앞섰다. 날 것 그대로의 내용은 아니겠지만, 원래 작가들은 자기의 모든 것들을 이렇게 내놓는데에 주저함이 없는 것일까. 이런 상황의 자신에게는 모두에게 다 사랑받을 수 없으므로 관대해지고, 스타벅스 계산대 앞에서 무슨 음료를 마실까 가벼운 고민을 불특정 다수에게 묻는 결정장애의 타인의 삶에선 움츠리면 나아갈 수 없으니 변화해보자고 말하는 것도 어색했다. 맞는 말이고 좋은 충고이긴 한데, 관대함의 범위가 나와 타인에게 다른 느낌?이 들었다.

 

 이런 생각들은 초반 부분을 읽으며 주로 들었는데, 사실 이런 날카로운 반응이 돋아나는 것은 저자의 탓이라기 보다는 내 개인적인 일들이 에피소드와 반응해 떠올랐기 때문이 더 컸다. 워낙 생활감이 묻어나는 주제들이어서 비슷한 경우가 나에게도 하나씩은 있었다. 이유를 잘 모른채 멀어지게 된 관계나 속으로만 삼키고 끊어낸 관계도 있었고, 밀떡과 쌀떡에 대한 선호도나, 다소 어려운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한 생각, 사야된다고 생각하면서 몇번이나 무슨 제품으로 살지 간만 보고 사지 못한 물건들, 선물에 대한 관점을 토론했던 기억도 있었다. (선물을 할 때 실용적인 물건을 고르는지, 필요하지 않아도 있으면 좋을만한 물건을 고르는지 혹은 내가 받고 싶다고 생각한 것을 고르는지, 상대방이 원하는 물건을 고르는지 에 대한 토론) 그런 일상적인 내용들 사이에서 나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 생각은 나와 다른데? 왜 이런 생각을 했지? 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이 나왔던 것이다.

 

 그러다 '사과의 타이밍'에 관한 내용을 읽으면서 날선 마음이 점차 공감하고 이해하는 시선으로 변해갔다. 자연스럽게 이 사람도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에서 저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지 하며 달라졌다. 그러자 그때 그렇게 생각했구나, 그래서 이렇게 생활하고 있구나 하고 가볍게 저자의 일상을 듣듯이 편안하게 책이 읽혔다. 시선이 좀 더 관대해졌을 뿐인데, 타인의 시선과 삶을 이해하고 바라보자 내 것도 인정받은 듯한 기분이 들며 스스로에게도 '그럴 수 있어'하며 관대해졌다. 처음엔 저자는 손이 아픈 동안 이 책을 위한 준비를 했는데, 나는 손목이 아픈 동안 대체 뭘 했었지?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 그때 아팠지. 좀 더 잘 쉬었어야 했는데 팔목을 너무 썼어. 하고 생각도 해본다.  에세이라는 분야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나름 좋은 마무리로 잘 읽어냈던 것 같다. 다른 무엇보다 책 속의 당신은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알아가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실제로는 이런 사람이 아닐수도 있고 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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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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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연애의 기억"은 파격적이다. 끊임없이 케이시 폴이 그와 수전 사이의 "사랑"이란 것을 늘어놓은 문장들을 반쯤은 회의적이고 경멸적인 눈으로 읽어내렸다. 솔직하자면 문체는 건조하고 복잡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의 회고라고 치기엔 열아홉 그대로의 거칠고 서툰 표현들이 문득 튀어나왔다. 게다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비유적 표현들도 많았기 때문에 읽는 흐름조차 매끄럽지 못했다. 줄리언 반스의 신작이 주는 기대감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아무리좋게 표현하려해도, 혹은 불분명한 말들로 덮으려 해도 열아홉의 소년과 마흔여덟의 여자가 사랑한다는 내용은 곱지 않다. 반대의 경우라도 그렇다. 솔직히 더욱. 그러다 그들이 가입한 테니스 클럽으로부터 '사정상' 회원 자격을 박탈 당했을 때부터 뭔가 느낌이 왔다. 삼분의 일에 달하는 내용동안 기다려왔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됐다는 느낌.

"첫사랑은 삶을 영원히 정해버린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래도 이 정도는 발견했다. 첫사랑은 그 뒤에 오는 사랑들보다 윗자리에 있지는 않을 수 있지만, 그 존재로 늘 뒤의 사랑들에 영향을 미친다. 모범 노릇을 할 수도 있고, 반면교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뒤에 오는 사랑들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도 있다. 반면 더 쉽게, 더 좋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 물론 가끔은, 첫사랑이 심장을 소작해버려, 그 뒤로는 어떤 탐침을 들이밀어도 흉터 조직만 나올 수도 있지만. p.136"

아아, 아름다운 말들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지겨웠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첫사랑에 관한 의미부여에 염증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건축학개론'이야 대히트를 쳤지만, 그 사이에 많은 시간이 지났고 또 한번 첫사랑을 이야기하는 '너의 결혼식'같은 경우는 비슷한 맥락으로 스러져버렸다. 첫사랑이 아름답고 강렬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은 맞지만, 첫사랑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매몰된 자들은 대개 그 뒤의 삶이나 사랑에게 무례하다. "연애의 기억"에서 중간중간 이런 대목을 마주할 때마다 지루한 첫사랑 타령을 굳이 지켜봐야할까 의심했다. 한편으론 첫사랑이 지나보내며 찢어지고 그을린 상처의 시간을 지나왔더라도, 결국 '첫사랑이 뭐 저렇게까지 대단하다고' 하며 무덤덤해진 까닭은 자신이 무감한 탓이거나 남자가 아니기 때문인가 의문도 가져봤다. 흔한 말로 남자의 마음엔 여러개의 방이 있고, 여자는 하나만... 어쩌고 하는게 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폴은 무모했고, 수전의 선택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도주'같은 말들도 한심했다. 연애의 기억이라기 보다는 파멸과 막장의 변명같은게 더 잘 어울렸다. 전혀 행복하거나 사랑스러운 시간이 느껴지지 않는 사랑이야기였다. 젋고 잘생긴 청년과 사랑에 빠지는 중년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파격적이게도 그렇지 않았다. 인생은 실전이고, 여기에 실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한 내용이다. 연애소설이라면, 연애소설이 맞다면, 좀 더 달콤해도 좋았을텐데, 아쉬웠다. 누구에게 이 책을 추천해줄 수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줄리언 반스를 좋아하는 독자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식으로 표현해보자. 나는 열아홉이었고, 나는 사랑은 썩지 않는 것이라고, 시간과 퇴색에 내력이 있다고 믿었다. p.102"

사랑을 믿는 사람들이 가지는 사랑에 대한 믿음은 맹목적이고 강압적이다. 감정적 휴지기에 들어간 것인지 수많은 감정선의 경계를 무참히 오가는 사랑이란 감정이 대체 무엇인지 의문을 느끼는 요즘, 왜 사랑이 이토록 절대적인 것으로 묘사되어야 하는가를 곱씹으며 읽었다. 읽으면서 우호적인 시선은 없었다. 열아홉과 마흔여덟의 사랑에 우호적으로 보일 구석이 없지 않은가. 시대가 맞지 않는 사랑은 서로의 시기를 침범하고 온전치 못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연애의 기억"이 그 모든 것을 납득시킬만한 무언가를 담아낼 수 있을까? 이 모든 불편함에서도 조금이나마 마음을 움직일만한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런 기대로 책을 읽었다. 그리고 끝내 깨달았다. 계속 의심하고 차가운 눈으로 멀찍이 떨어져 바라봤지만, 사랑을 믿고 싶었던 자신이 어딘가에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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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너를 찾아서
케리 론스데일 지음, 박산호 옮김 / 책세상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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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이상으로 내용이 잔혹해서 당황스러웠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버린다면 어떨까. 에이미는 결혼식으로 앞두고 약혼자를 잃었다. 바다에서 발견된 약혼자의 시신은 상태가 좋지 않아 마지막 인사를 할 수도 없었고, 그의 가족은 잔인하게도 두사람이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날 그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룬다. 충격적인 상황 앞에서 수상한 여자가 다가와 '당신의 약혼자는 살아있다'고 한다. 모두가 그의 죽음을 인정하라고 위로하고 조언해주는 상황에서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최근에 개봉한 '서치'라는 영화를 봤는데 그와 비슷한 느낌을 좀 받았다. 서치를 재밌게 봤다면 이 책도 흥미롭게 읽지 않을까 싶다.

 

 이미 제목에서부터 '사라진 너를 찾'는다고 했기에, 약혼자의 죽음과 그가 살아있다는 증언?들에 에이미가 왜 빨리 약혼자를 찾아나서지 않는 것일까 흐름이 좀 느리다고 생각했다. 한국식 전개라면 내 눈으로 봐야겠다며 시신도 확인하고, 빠르면 약혼자 제임스의 상자가 몇 개 없어졌을 때부터 뒷조사를 시작하거나 늦어도 반년 안에는 찾아나섰을텐데. 제임스의 형인 토머스가 거액의 유산을 건네줬을때 자금 삼아서 마지막 목격지로 추적을 나섰을 것이다. 숨은 비밀을 파헤치는 스실러물로 변했겠지만 아마 그런 식으로 내용이 전개됐어도 재밌었을 거다. 하지만 나라마다 행동과 생각 방식이 다르니까, 이 책은 에이미가 상실을 어떻게 극복해나가는지 천천히 보여준다. 어쩌면 그 느린 전개가 이 이야기의 핵심이 된다.

 

 한동안 영화든 책이든 결국은 끝이 좋게 마무리되는 것들만 골라보았다. 아예 가볍고 밝은 하이틴 영화 목록을 늘여놓고 줄줄이 본 적도 있다. 가볍게 말했지만 안그래도 현실이 우울한데 굳이 다른 매체로도 우울한 내용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사라진 너를 찾아서'를 읽으면서도 전형적이지만 에이미가 오랜 연인이자 친구인 약혼자 제임스를 무사히 되찾아오고 다시 사랑하며 사는 결말이 오길 기대하며 읽었다. 느린 전개 속에서 에이미의 삶이 흘러가고 이언이 그녀에게 다가가고 점점 사랑에 빠지는 것을 지켜보며 그런 결말이 오지 않을까봐 마음을 졸였다. 순간에는, 결국은 순간일 수밖에 없는 그 현재에선 최선의 선택들로 결말이 났지만 개인적으로는 마지막까지 고통스러운 흐름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책 안의 핵심적인 내용이 나오게 된다.

해리성 정체성 장애를 앓던 어머니를 가진 이언과 해리성 둔주 혹은 기억상실을 앓고 있는 약혼자를 둔 에이미의 만남은 지나치게 극적이었다. 너무나 같은 결핍을 가진 사람이 서로를 만나 한쌍이 된다니. 게다가 해리성 둔주로 만들어진? 나타난? 또 다른 자아를 인정해버린다니. 그럴 수 있을까. 그저 괴로운 사건으로부터 갈라져 내려온 또 하나의 인격인데도. 카를로스라는 인물이 가진 19개월의 삶으로 제임스의 20여년을 대체할 권리를 주는 것이 옳을까. 주변인들이 그를 그렇게 놔둘 수 있었다는 것이 새삼 선뜩하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한 사람의 삶을 방치해버리다니. 에이미는 카를로스가 된 제임스에게 의지대로 살 수 없는 삶을 강요하지 않겠다며 관계를 정리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했고, 심지어 아이까지 둘이나 두고 있다는 현실에 질렸던 게 가장 컸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자신에게 새로이 다가온 다른 인연을 만나도 괜찮다는 면죄부 또한 주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의심했다.

 

 사랑이란 것이 뭘까.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었던 이후로 -사랑이 너무나 취약하고 형편없는 지속성을 가졌음에도- 그것이 다이아몬드처럼 영원한 것이라 세뇌되었던 기억 때문에, 이에 지나친 환상과 무결함을 추구해왔던 것 같다. 현실이 그렇지 않을수록 더욱 이상적인 것에 매달리듯이. 때문에 에이미의 경우에도 사랑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폭력적이어서 읽으며 더욱 공감했었다. 그리고 그만큼 괴로웠다. 그녀가 오랫동안 사랑한 제임스를 과거로 묻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건 이언같은 사람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이언이 없었더라면 그녀의 선택이 어땠을지 궁금해졌다. 그래도 그녀는 사라진 약혼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혼자 자신의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 점이 가장 아쉽게 남을 것 같다. 이언이라는 기댈 곳, 도피처가 없는 에이미의 행보가 미지수로 남아서. 어쩌면 속편이 그 아쉬움을 메워줄지 모르겠다. 속편은 없지만 이 책의 마지막이 다음을 예고하듯이 끝을 맺는다. 이 점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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