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 - 권기태 장편소설
권기태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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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는 가끔 발뒤꿈치에도 굳은살이 배겨서 칼로 슥슥 도려냈었다. 잘라낸 그 단단한 살들을 만지작거리면서 어린 나는 말없이 슬펐다. 회사에서 밀려나고 가게마다 망해서 결국 여기까지 온 아버지. 소 발굽을 잘라내면 아마 이럴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밀리지 않을 거고 이런 소 발굽이 내 살에서 나오지도 않을 거다. _ p.182 "

 

 첫 직장을 들어갔던 때가 떠오른다. 십여년 정도 지난 일이다. 좋은 곳도 아니고 별다른 포부는 없었지만 그때 느꼈던 긴장과 부담은 생생하게 느껴진다. 규모가 크지 않은 곳이라 나와 같은 시기에 입사한 신입은 한명이었다. 전공분야는 내가 더 적합했지만, 다른 신입의 동문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교수의 추천을 받지 않고 들어오는 나와 같은 경우가 특이한 쪽이었다. 일을 배우는게 늦은 편인 나와 달리 신입은 센스있었다. 우리가 의지할 곳은 서로 뿐이지만 불현듯 의식되는 평가의 눈길 앞에서 조금 더 나은 점수를 받으려 노력하는 경쟁자이기도 했다. 있는동안 가장 가깝게 지내고 종내 퇴사도 같은 날 했지만, 처음 무리에 스며드는 과정동안은 부정할 수 없는 경쟁자였다. 지나와 생각해보면 서로 경쟁을 할만큼 노력할만한 가치가 없는 곳이었는데 그때는 그랬다. 

 

 '중력'을 읽으며 불쑥 그때의 생각이 떠올랐다. 숨이 막히는 소설이었다. 우주인이 되기 위해 경쟁하는 후보들의 과정을 따라붙으며 높아져가는 중력의 무게를 함께 느끼는 기분이다. 티비에서 해주는 경쟁 프로그램은 즐겁게 보는 편이라 몰랐는데, '중력'안의 경쟁은 내 발목까지 붙드는 기분이 들어 어딘지 찝찝했다. 이진우가 실제로 겪었던 직장에서의 문제보다 우주인이 되기 위한 선발 과정 동안을 지켜보며 지난 직장생활을 떠올렸다는 점이 우스웠다. 우주인씩이나 되지 않아도 우리의 삶에는 고난과 역경이 버젓하다.

 

 소유즈 복사 자료에 대해 추궁당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이해하기를 놓아버리기에 이르렀다. 자료를 얻는데 도움을 받았고, 부주의했고의 여부를 떠나 과정의 진실을 투명히 밝히는 일에 대해 끝까지 함구한 이진우의 선택을 공감하기 어려웠다. 복사물이 어디서 어떤 과정으로 주어졌는지 밝히는 일이 그것이 명료한 사실일 뿐이어도 김태우의 꿈을 뺏게 되는 것이라면 자신의 꿈은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김태우는 그의 꿈을 지켜주지 않았는데도. 다 잊고 있었지만 이 지점에 이르러서 역시나 과거의 경험이 떠올랐다.

 

 삶은 우리가 문학 시간에 '소나기'를 읽은 뒤로 항상 복선을 품고 있다. '소나기'만 읽지 않았어도 삶 속에 숨겨진 복선이 좀 덜했을까. 얼마 전에 갑자기 지난 일기를 읽어보고 싶어졌다. 어떤 날은 상세하기도 하고, 어떤날은 '날이 좋다'며 한줄 흘려놓은 일기를 보다 첫 직장에서 당시 고뇌와 괴로움을 담은 일기를 발견하고 잊었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중력'을 읽다 또 떠올리고 말았다. 선임에게서 프로그램 작동 인수인계를 받던 중 근 5년 이상의 데이터가 한번에 날아가는 심각한 오류가 생겼고 오류를 발견했을때 담당자는 내가 되어 있었다. 그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며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중에 문제의 작동을 선임이 시연했다는 것을 떠올렸는데, 그때 그 사실을 밝힐 것인지 아니면 불이익을 감수하고 묻을 것인지 고민했던 일이었다.

 

 이진우의 결정을 비난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이지만, 실제로 내가 저런 상황에 처했을 때 나 역시 입을 열지 못했다. 수많은 불만을 안에 품고서도 왜인지 사고를 친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진우의 경우는 그대로 묻히고 넘어갔지만, 그때의 일은 선임이 자신이 한 일이라고 사실을 밝히며 나섰다. 그랬어도 현 담당자의 나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며 무고했던 나를 함부로 재우쳤던 사람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사는게 그렇다. 진실을 밝힌다해서 그에 맞는 결말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똥물만 번져나가는 일도 많다. 그 직장이 똥간같아서 똥같은 결말만 주어진 것도 있지만. 지금도 그 동네쪽은 더러워서 안간다.

 

 우주를 꿈꾸는 드리머들의 이야기를 읽고 똥간같던 첫직장에 대한 깊은 혐오만 내뱉어 놓은 리뷰라 애석하다. 그들의 도전은 그렇게도 크고 야심찼는데 읽은 사람의 데이터 베이스에 한계가 있었다.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음습하고 구질한 리뷰에 더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우린 다 경쟁자였고, 남의 허물에 똥물도 튀겨보며 살아왔으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생생한 중력을 느낀다. 이진우가 중력을 느끼는 순간에 떠올렸던 것들이 나의 중력이기도 하다. 당신이 느낄,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는 중력이기도 하다. 다만 딱 지구에서 두발로 버텨 살아갈만큼의 중력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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