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당신들 베어타운 3부작 2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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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일이다.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이름에 비하면 큰 감흥은 없었다. 심지어 빠뜨리지 않고 동성애자 코드를 챙겨 넣었다며 트렌디한 느낌을 받았다고도 했다. 하키와 성폭행, 끔찍한 사람들 같은 얘기가 사막에 이는 바람처럼 뜨거우면서 건조하게 지나가는 듯 했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전작에 관한 생각이었다. '베어타운'을 읽었을 때는 이를테면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알은체를 하겠지만 굳이 근처 카페를 찾아 들어갈 정도는 아닌 사이로 남았다. 그런데 '우리와 당신들'을 통해 짝사랑이 시작됐다. 뒤늦게도.  

 

" 가끔 착한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끔찍한 짓을 저지를 때도 있다. 하키팀의 스타였던 남학생이 여학생을 성폭행했다. 그리고 우리는 길을 잃었다. 공동체는 선택의 총합이고 두 아이의 진술이 엇갈렸을 때 우리는 그를 믿었다. 그게 더 쉽기 때문이었고, 여학생의 말이 거짓말이라야 우리가 평소처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진실이 밝혀졌을 때 우리는 마을과 함께 무너졌다. 우리가 모든 단추를 잘못 꿰었다고 말을 하기는 쉽겠지만 당신이라고 다르게 대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겁에 질리다보면, 한쪽 편을 선택하도록 강요를 받다보면, 뭘 희생해야 하는지 알다보면 그렇게 된다. 어쩌면 당신도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용감하지 않을지 모른다. 어쩌면 당신도 스스로 바라는 만큼 우리와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p.14 "

 

 연결되는 작품인 '베어타운'의 줄거리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다. '우리와 당신들'은 그 후의 내용인데 심각한 사건이 터지고 갈등이 절정으로 올라가는 '베어타운'보다 더 깊게 빠져들어 읽었다. 티비 드라마라면 초반 1~2회차가 전체적인 틀을 잡느라 진입장벽이 되는 느낌이다. '베어타운'이 그렇게 짧지는 않지만. 다만 그 장벽을 넘기만 하면 다음 회차를 기다리느라 일주일을 보내는 인생 명작으로 꼽을만한 드라마가 되듯 '베어타운'으로 틀을 잡고 난 뒤에 다시 만난 인물들은 하나같이 사연없는 사람, 매력없는 사람 없는 애틋한 내 새끼들이 된다. 한 마을이 있고 그 안에 살아가는 인물들을 너무나 많이 소개한다고 생각했는데, 다 '우리와 당신들'에서 이야기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둘 다 읽을 수 밖에!

 

 이제서야 프레드릭 배크만이 어떤 작가인지 알 것 같았다. 이런 매력을 왜 전에는 눈치 못챘을까. 다 같은 인물에 배경인데 왜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반짝임이 구석구석 엿보이는 걸까. '베어타운'은 그냥 재미로 보고 '우리와 당신들'은 빛나게 하려고? 혹은 책이 너무 길어지니까 1부 2부로 나눠서 그냥 두권으로 내본걸까. 둘다 재밌는데 내 성향 자체가 폭발하고 불타오르는 생생한 현장보다 폐허에 남은 불씨가 이리저리 흩어져 재를 날리는 황량함이 주는 음울하고 위태로움을 더 즐기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인상이 강하게 남는 부분을 만날 때마다 표시를 해놓았는데, 하다가 너무 많아서 그냥 놓아버렸다. 다 옮기면 책 한 권이니 그냥 읽어야지.

 

 " "결혼 생활은 하키 시즌이랑 비슷한거야, 여보. 가장 막강한 팀이라도 매 경기마다 제 실력을 백 퍼센트 발휘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워낙 실력이 출중하면 졸전을 쳘치더라도 이길 수 있잖아. 결혼 생뢀도 마찬가지야. 점심을 먹기 전에 와인을 마시고 근사하게 사랑을 나누고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고 싶은데 모래가 너무 뜨겁고 햇빛 때문에 화면이 너무 눈부신 게 가장 골치 아픈 문제인 휴가를 기준으로 결혼 생활을 측정하지는 않아. 일상을 기준으로, 집에서, 가장 낮은 수준에서, 서로 어떤 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문제를 해결하는지를 기준으로 측정하지." p.130 "

 

 마을의 이야기이다보니 서로를 낱낱이 알고 있고, 개인이 아닌 가족의 이야기로 묶여있다는 점도 좋았다. 그리고 그 관계안에서 작가가 닦아온 삶의 경험을 잘 녹여냈다. 결혼생활에 대한 저 부분도 좋았지만, 이 자체가 결국 한 사람을 판단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이 좋았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자신보다 지위가 낮거나 형편이 어렵거나 상황이 곤궁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과 비슷하게 겹쳐 들린다. 무엇이든 가장 어렵고 좋지 않은 상황에서 진면목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면서도 재밌다.

 

 전에 '베어타운'을 읽으면서 트렌디하다고 평한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이 게이임을 숨기고 있는 소년 '벤이' 때문이었다. 사실 그때는 넷플릭스의 '빨간머리 앤'에 흑인이 등장하거나, 친구들과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커밍아웃을 하는 일이 생기는 것처럼 다양성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처럼 생각했다. 그런데 벤이가 절친을 짝사랑하는 게이소년이 아니라 하키 선수로 바로 서고 남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이번 편은 트렌디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꽤 감동이었다.  

 

 " 그녀가 침대에 눕자 아들이 뺨을 닦아주며 얘기한다. "제가 웃긴 애기 하나 해드릴까요? 저더러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서 여자친구를 절대 못 만날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거 엄마 잘못이에요. 왜냐하면 저는 엄마랑 아빠가 서로 바라보는 것처럼 저를 바라봐줄 사람을 찾거든요." 안-카트린은 보보의 큼지막하고 맹하고 어리숙한 머리를 그녀의 이마에 대고 세게 누른다. 그가 결혼하는 걸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빠가 되는 걸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산다는 건 우라지고 우라지고 또 우라지게 힘든 거라 가끔은 거의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아무리 원래 그런 거라지만 말이야. p.124 "

 

 '우리와 당신들'은 벤이, 마야, 아나, 아맛, 보보, 레오 모든 아이들이, 그리고 베어타운 안의 모든 인물들이 자신만의 우주를 갖고 그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별은 폭발하고, 어떤 별은 새로 태어나고, 어떤 별은 가장 밝게 빛나고, 어떤 별은 혜성처럼 쏜살같이 지나가 머무르지 않는다. 프레드릭 배크만은 성실하면서도 끈질기게 그들의 삶을 펼쳐내 보여주었다. 알고보면 나쁜 사람은 없다는 말처럼 때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가 비틀어진 걸음을 걷게 된 돌부리가 있을 수 있고, 눈이 가려져 길을 잃은 것일수도 있고, 다시 제대로 걷기 위해 걸음을 떼는 과정일수도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그래서 좋았다. 평면적인 사람이 없어서 나쁘게 보일지라도 미워하지 않게 된다.

 

 " 아맛은 징징거리지만 리파가 말허리를 자른다. "그만해! 너는 여기서 탈출할 거야. 왜 그런 줄 알아? 네가 포기하건 안 하건 여기 이 아이들은 네가 하던 대로 할 테니까. 그러니까 연습해! 네가 NHL 선수로 뛰고 인터뷰하는 모습이 텔레비전에 중계되면 여기 출신이라고 얘기할 수 있잖아. 할로 출신이고 네 인생을 허송세월하지 않았다고. 그러면 이 동네 아이들은 전부 네 얘기를 들을거야. 그러면 내가 아니라 너처럼 되고 싶어 할 거야." 리파는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는다. "야, 이 이기적인 새끼야! 너 정도 되는 재능을 타고날 수 있다면 이 동네 다른 아이들은 뭐든 내줄 수 있다는 걸 몰라?" 아맛의 손이 떨린다. 리파가 다가와 다시 여덟 살 시절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 그를 끌어안는다. 리파가 아맛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고 속삭인다. "너랑 같이 달릴게. 그래야 네가 정신을 차릴 수 있다면 여기 있는 미친놈들이 전부 여름 내내 너랑 같이 달릴 거야." p.173 "

 

 거기에 진한 우정과 꿈을 좇아 성공해나가겠다는 아름다운 열정도 담겨있다. '베어타운'에 '우리와 당신들'까지 분량이 적지 않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 꼭 읽어보길 바란다. 처음 답답한 부분에서 포기하고 싶어진다면 존버는 승리한다는 말을 새기며 끝까지 읽어나가길. " 그 아이는 오늘 밤에 곤히 잠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안에 깃들어 있던 곰은 방금 전에 눈을 떴다. p.307 " '우리와 당신들'을 읽으며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줄도 몰랐던 프레드릭 배크만에 대한 덕심도 눈을 떴다. 이 두 권이면 당신도 찾게 될 것이다.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숨은 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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