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인을 위한 미래 인문학 - 새로운 세대를 위한 지적 탐험
윤석만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2월
평점 :
절판


 

 '교양인을 위한 미래 인문학'은 재밌다. 읽기 편하고, 다양한 주제의 내용을 접근성 좋게 다룬다. 최근에 읽은 야마구치 슈의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철학은...'이 실용의 측면에서 철학을 삶의 무기화했다면 '... 미래 인문학'은 멸종 위기의 교양인을 양성하기 위해 이 정도는 알고 사유해볼 준비가 되있으셔야 하지 않으시겠냐는 제안서 같았다. 물론 읽기보다 보기에 더 익숙한 현대인들의 독해력과 참을성을 잘 고려한 양식으로 읽기에 부담없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지대넓얇' 류의 책에 익숙하거나 관심이 있다면 커피체인점 한구석에서 백색소음을 배경으로 무난히 읽을만하다.

 

 이전에 읽었던 '철학은...'이 재밌는 책이긴 했는데, 과연 여타의 소설이나 '~해도 괜찮아' 류의 접근성 좋은책들에 비해 얼마만큼의 반향을 얻을 수 있을까 싶었는다. 그런데 생각보다 인터넷에서 영업?내지는 반응이 보이는게 아닌가. 그 성공의 밑받침에는 '철학은...'의 미끼상품과도 같았던 '르상티망'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그동안 쉽게 '신포도'라고 표현해왔던 개념의 고급스런 대체어를 소개하면서 지적 허영심을 소소하게 채울 수 있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그런데 이 '...미래 인문학'은 그 이상의 재미와 기능을 장착하고 있다. 그리스, 로마, 몽골, 중국 등의 문화와 역사를 망라하며 미래에 대한 탐구를 곁들이고 있기 때문에 책으로 읽는 '알쓸신잡' 같다.

 

 재밌었던 몇가지 부분을 소개하자면 첫째로 기계, 인공장기와 컴퓨터로 대체될 수 있는 미래 인간을 두고 어디까지 기계와 인간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현시점에서 우리는 인공장기를 단 사람을 기계로 구분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래에 한 사람의 신체와 기억을 본떠 옮겨와 인공으로 만든 휴머노이드가 있다면 그 사람의 지인은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휴머노이드를 자신의 친구로 인정해줄까? 이런 전면적인 개조가 아니더라도 뇌를 바꾸는 '더 게임'이라는 영화처럼 외형은 바뀌었으나 기억정보를 담고 있는 뇌를 인증을 통해 바뀐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줄까? 이런 가벼운 의문들부터 시작한다.

 

 다음으로는 저출산에 대한 살벌하게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이 문제를 (p.110 7 바보가 돼 버린 사람들)의 내용과 이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됐다. 역플린효과 혹 덤앤더머로 비유되는 인류의 지능저하 문제에 관련한 카툰을 전에 본 적이 있는데, 교육과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아이를 적게 낳고 반대의 경우에서 아이를 더 많이 낳기 때문에 인류 지능의 평균이 낮아지게 될 것이란 내용이었다. 재밌는 점은 우리나라의 경우 생활에 여유가 있을수록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 기반을 마련하는 경우가 많고 그렇지 못한 경우 둘 다 포기하는 세대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물론 '미래 인문학의 바보가 돼 버린 사람들'에서는 단지 부모세대의 교육 소득수준 뿐 아니라 기술발전을 통한 알고리즘 수집을 바탕으로한 선택적 정보제공, 이미지와 동영상 중심의 뇌의 피동화를 함께 언급했다. 다만 저출산 문제가 대두되는 한편 인류가 가진 심각한 문제 중 하나로 인구과잉과 자원 고갈이 꼽힌다는 점이다. 이는 다운그레이드를 추구하는 책 초반의 타노스의 주장(p.69 1 타노스의 변명/ p.198 8 여섯 번째 대멸종, 지구 파멸을 앞당기는 인류)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이쯤되면 인구의 문제는 독일과 영국에서 출산률 비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슬림 이주민들로 넘어가고, 난민 문제로 번진다. 거기에 인도나 중국 같은 나라의 보호/관리되지 않는 출생자들과 인권문제도 따라온다.

 

 '미래 인문학'은 친절하게도 책의 한 권에 걸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내용들을 자연스럽게 접근시키며 독자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권한다. 이를테면 철기 사용에 따른 문명의 발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p.211 1 2500년 전 철기 혁명으로 활짝 핀 인문의 꽃) 자연스럽게 관포지교 같은 고사성어를 끌어와 소개한다. 거기에 다른 참고서적이나 이론보다 더 효과적으로 다양한 영화의 내용을 예로 들어준다. 덕분에 대부분의 내용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우민화의 대표적 장치인 3S 중 영화(Screen)가 교양서적의 이해를 돕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최근 접한 교양서 중 가장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딱딱한 책의 인상에 굴하지 않고 (...) 넓은 관심을 받게 된다면 좋겠다. 이 책을 통해 중고등학교의 논술이나 토론 그룹 활동을 하면 괜찮을 것 같다. 현실적으로 관심이 높을만한 문제들로 구성되어 있고 무엇보다 쉽고 재밌다. 여러 상황에 참고할 수 있도록 영화가 소개되어 있다는 것도 강점이다. 잘은 아니어도 기본은 알고 싶은 초심자에게 반가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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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 - 권기태 장편소설
권기태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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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는 가끔 발뒤꿈치에도 굳은살이 배겨서 칼로 슥슥 도려냈었다. 잘라낸 그 단단한 살들을 만지작거리면서 어린 나는 말없이 슬펐다. 회사에서 밀려나고 가게마다 망해서 결국 여기까지 온 아버지. 소 발굽을 잘라내면 아마 이럴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밀리지 않을 거고 이런 소 발굽이 내 살에서 나오지도 않을 거다. _ p.182 "

 

 첫 직장을 들어갔던 때가 떠오른다. 십여년 정도 지난 일이다. 좋은 곳도 아니고 별다른 포부는 없었지만 그때 느꼈던 긴장과 부담은 생생하게 느껴진다. 규모가 크지 않은 곳이라 나와 같은 시기에 입사한 신입은 한명이었다. 전공분야는 내가 더 적합했지만, 다른 신입의 동문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교수의 추천을 받지 않고 들어오는 나와 같은 경우가 특이한 쪽이었다. 일을 배우는게 늦은 편인 나와 달리 신입은 센스있었다. 우리가 의지할 곳은 서로 뿐이지만 불현듯 의식되는 평가의 눈길 앞에서 조금 더 나은 점수를 받으려 노력하는 경쟁자이기도 했다. 있는동안 가장 가깝게 지내고 종내 퇴사도 같은 날 했지만, 처음 무리에 스며드는 과정동안은 부정할 수 없는 경쟁자였다. 지나와 생각해보면 서로 경쟁을 할만큼 노력할만한 가치가 없는 곳이었는데 그때는 그랬다. 

 

 '중력'을 읽으며 불쑥 그때의 생각이 떠올랐다. 숨이 막히는 소설이었다. 우주인이 되기 위해 경쟁하는 후보들의 과정을 따라붙으며 높아져가는 중력의 무게를 함께 느끼는 기분이다. 티비에서 해주는 경쟁 프로그램은 즐겁게 보는 편이라 몰랐는데, '중력'안의 경쟁은 내 발목까지 붙드는 기분이 들어 어딘지 찝찝했다. 이진우가 실제로 겪었던 직장에서의 문제보다 우주인이 되기 위한 선발 과정 동안을 지켜보며 지난 직장생활을 떠올렸다는 점이 우스웠다. 우주인씩이나 되지 않아도 우리의 삶에는 고난과 역경이 버젓하다.

 

 소유즈 복사 자료에 대해 추궁당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이해하기를 놓아버리기에 이르렀다. 자료를 얻는데 도움을 받았고, 부주의했고의 여부를 떠나 과정의 진실을 투명히 밝히는 일에 대해 끝까지 함구한 이진우의 선택을 공감하기 어려웠다. 복사물이 어디서 어떤 과정으로 주어졌는지 밝히는 일이 그것이 명료한 사실일 뿐이어도 김태우의 꿈을 뺏게 되는 것이라면 자신의 꿈은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김태우는 그의 꿈을 지켜주지 않았는데도. 다 잊고 있었지만 이 지점에 이르러서 역시나 과거의 경험이 떠올랐다.

 

 삶은 우리가 문학 시간에 '소나기'를 읽은 뒤로 항상 복선을 품고 있다. '소나기'만 읽지 않았어도 삶 속에 숨겨진 복선이 좀 덜했을까. 얼마 전에 갑자기 지난 일기를 읽어보고 싶어졌다. 어떤 날은 상세하기도 하고, 어떤날은 '날이 좋다'며 한줄 흘려놓은 일기를 보다 첫 직장에서 당시 고뇌와 괴로움을 담은 일기를 발견하고 잊었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중력'을 읽다 또 떠올리고 말았다. 선임에게서 프로그램 작동 인수인계를 받던 중 근 5년 이상의 데이터가 한번에 날아가는 심각한 오류가 생겼고 오류를 발견했을때 담당자는 내가 되어 있었다. 그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며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중에 문제의 작동을 선임이 시연했다는 것을 떠올렸는데, 그때 그 사실을 밝힐 것인지 아니면 불이익을 감수하고 묻을 것인지 고민했던 일이었다.

 

 이진우의 결정을 비난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이지만, 실제로 내가 저런 상황에 처했을 때 나 역시 입을 열지 못했다. 수많은 불만을 안에 품고서도 왜인지 사고를 친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진우의 경우는 그대로 묻히고 넘어갔지만, 그때의 일은 선임이 자신이 한 일이라고 사실을 밝히며 나섰다. 그랬어도 현 담당자의 나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며 무고했던 나를 함부로 재우쳤던 사람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사는게 그렇다. 진실을 밝힌다해서 그에 맞는 결말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똥물만 번져나가는 일도 많다. 그 직장이 똥간같아서 똥같은 결말만 주어진 것도 있지만. 지금도 그 동네쪽은 더러워서 안간다.

 

 우주를 꿈꾸는 드리머들의 이야기를 읽고 똥간같던 첫직장에 대한 깊은 혐오만 내뱉어 놓은 리뷰라 애석하다. 그들의 도전은 그렇게도 크고 야심찼는데 읽은 사람의 데이터 베이스에 한계가 있었다.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음습하고 구질한 리뷰에 더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우린 다 경쟁자였고, 남의 허물에 똥물도 튀겨보며 살아왔으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생생한 중력을 느낀다. 이진우가 중력을 느끼는 순간에 떠올렸던 것들이 나의 중력이기도 하다. 당신이 느낄,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는 중력이기도 하다. 다만 딱 지구에서 두발로 버텨 살아갈만큼의 중력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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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당신들 베어타운 3부작 2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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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일이다.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이름에 비하면 큰 감흥은 없었다. 심지어 빠뜨리지 않고 동성애자 코드를 챙겨 넣었다며 트렌디한 느낌을 받았다고도 했다. 하키와 성폭행, 끔찍한 사람들 같은 얘기가 사막에 이는 바람처럼 뜨거우면서 건조하게 지나가는 듯 했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전작에 관한 생각이었다. '베어타운'을 읽었을 때는 이를테면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알은체를 하겠지만 굳이 근처 카페를 찾아 들어갈 정도는 아닌 사이로 남았다. 그런데 '우리와 당신들'을 통해 짝사랑이 시작됐다. 뒤늦게도.  

 

" 가끔 착한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끔찍한 짓을 저지를 때도 있다. 하키팀의 스타였던 남학생이 여학생을 성폭행했다. 그리고 우리는 길을 잃었다. 공동체는 선택의 총합이고 두 아이의 진술이 엇갈렸을 때 우리는 그를 믿었다. 그게 더 쉽기 때문이었고, 여학생의 말이 거짓말이라야 우리가 평소처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진실이 밝혀졌을 때 우리는 마을과 함께 무너졌다. 우리가 모든 단추를 잘못 꿰었다고 말을 하기는 쉽겠지만 당신이라고 다르게 대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겁에 질리다보면, 한쪽 편을 선택하도록 강요를 받다보면, 뭘 희생해야 하는지 알다보면 그렇게 된다. 어쩌면 당신도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용감하지 않을지 모른다. 어쩌면 당신도 스스로 바라는 만큼 우리와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p.14 "

 

 연결되는 작품인 '베어타운'의 줄거리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다. '우리와 당신들'은 그 후의 내용인데 심각한 사건이 터지고 갈등이 절정으로 올라가는 '베어타운'보다 더 깊게 빠져들어 읽었다. 티비 드라마라면 초반 1~2회차가 전체적인 틀을 잡느라 진입장벽이 되는 느낌이다. '베어타운'이 그렇게 짧지는 않지만. 다만 그 장벽을 넘기만 하면 다음 회차를 기다리느라 일주일을 보내는 인생 명작으로 꼽을만한 드라마가 되듯 '베어타운'으로 틀을 잡고 난 뒤에 다시 만난 인물들은 하나같이 사연없는 사람, 매력없는 사람 없는 애틋한 내 새끼들이 된다. 한 마을이 있고 그 안에 살아가는 인물들을 너무나 많이 소개한다고 생각했는데, 다 '우리와 당신들'에서 이야기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둘 다 읽을 수 밖에!

 

 이제서야 프레드릭 배크만이 어떤 작가인지 알 것 같았다. 이런 매력을 왜 전에는 눈치 못챘을까. 다 같은 인물에 배경인데 왜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반짝임이 구석구석 엿보이는 걸까. '베어타운'은 그냥 재미로 보고 '우리와 당신들'은 빛나게 하려고? 혹은 책이 너무 길어지니까 1부 2부로 나눠서 그냥 두권으로 내본걸까. 둘다 재밌는데 내 성향 자체가 폭발하고 불타오르는 생생한 현장보다 폐허에 남은 불씨가 이리저리 흩어져 재를 날리는 황량함이 주는 음울하고 위태로움을 더 즐기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인상이 강하게 남는 부분을 만날 때마다 표시를 해놓았는데, 하다가 너무 많아서 그냥 놓아버렸다. 다 옮기면 책 한 권이니 그냥 읽어야지.

 

 " "결혼 생활은 하키 시즌이랑 비슷한거야, 여보. 가장 막강한 팀이라도 매 경기마다 제 실력을 백 퍼센트 발휘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워낙 실력이 출중하면 졸전을 쳘치더라도 이길 수 있잖아. 결혼 생뢀도 마찬가지야. 점심을 먹기 전에 와인을 마시고 근사하게 사랑을 나누고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고 싶은데 모래가 너무 뜨겁고 햇빛 때문에 화면이 너무 눈부신 게 가장 골치 아픈 문제인 휴가를 기준으로 결혼 생활을 측정하지는 않아. 일상을 기준으로, 집에서, 가장 낮은 수준에서, 서로 어떤 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문제를 해결하는지를 기준으로 측정하지." p.130 "

 

 마을의 이야기이다보니 서로를 낱낱이 알고 있고, 개인이 아닌 가족의 이야기로 묶여있다는 점도 좋았다. 그리고 그 관계안에서 작가가 닦아온 삶의 경험을 잘 녹여냈다. 결혼생활에 대한 저 부분도 좋았지만, 이 자체가 결국 한 사람을 판단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이 좋았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자신보다 지위가 낮거나 형편이 어렵거나 상황이 곤궁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과 비슷하게 겹쳐 들린다. 무엇이든 가장 어렵고 좋지 않은 상황에서 진면목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면서도 재밌다.

 

 전에 '베어타운'을 읽으면서 트렌디하다고 평한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이 게이임을 숨기고 있는 소년 '벤이' 때문이었다. 사실 그때는 넷플릭스의 '빨간머리 앤'에 흑인이 등장하거나, 친구들과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커밍아웃을 하는 일이 생기는 것처럼 다양성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처럼 생각했다. 그런데 벤이가 절친을 짝사랑하는 게이소년이 아니라 하키 선수로 바로 서고 남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이번 편은 트렌디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꽤 감동이었다.  

 

 " 그녀가 침대에 눕자 아들이 뺨을 닦아주며 얘기한다. "제가 웃긴 애기 하나 해드릴까요? 저더러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서 여자친구를 절대 못 만날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거 엄마 잘못이에요. 왜냐하면 저는 엄마랑 아빠가 서로 바라보는 것처럼 저를 바라봐줄 사람을 찾거든요." 안-카트린은 보보의 큼지막하고 맹하고 어리숙한 머리를 그녀의 이마에 대고 세게 누른다. 그가 결혼하는 걸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빠가 되는 걸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산다는 건 우라지고 우라지고 또 우라지게 힘든 거라 가끔은 거의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아무리 원래 그런 거라지만 말이야. p.124 "

 

 '우리와 당신들'은 벤이, 마야, 아나, 아맛, 보보, 레오 모든 아이들이, 그리고 베어타운 안의 모든 인물들이 자신만의 우주를 갖고 그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별은 폭발하고, 어떤 별은 새로 태어나고, 어떤 별은 가장 밝게 빛나고, 어떤 별은 혜성처럼 쏜살같이 지나가 머무르지 않는다. 프레드릭 배크만은 성실하면서도 끈질기게 그들의 삶을 펼쳐내 보여주었다. 알고보면 나쁜 사람은 없다는 말처럼 때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가 비틀어진 걸음을 걷게 된 돌부리가 있을 수 있고, 눈이 가려져 길을 잃은 것일수도 있고, 다시 제대로 걷기 위해 걸음을 떼는 과정일수도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그래서 좋았다. 평면적인 사람이 없어서 나쁘게 보일지라도 미워하지 않게 된다.

 

 " 아맛은 징징거리지만 리파가 말허리를 자른다. "그만해! 너는 여기서 탈출할 거야. 왜 그런 줄 알아? 네가 포기하건 안 하건 여기 이 아이들은 네가 하던 대로 할 테니까. 그러니까 연습해! 네가 NHL 선수로 뛰고 인터뷰하는 모습이 텔레비전에 중계되면 여기 출신이라고 얘기할 수 있잖아. 할로 출신이고 네 인생을 허송세월하지 않았다고. 그러면 이 동네 아이들은 전부 네 얘기를 들을거야. 그러면 내가 아니라 너처럼 되고 싶어 할 거야." 리파는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는다. "야, 이 이기적인 새끼야! 너 정도 되는 재능을 타고날 수 있다면 이 동네 다른 아이들은 뭐든 내줄 수 있다는 걸 몰라?" 아맛의 손이 떨린다. 리파가 다가와 다시 여덟 살 시절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 그를 끌어안는다. 리파가 아맛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고 속삭인다. "너랑 같이 달릴게. 그래야 네가 정신을 차릴 수 있다면 여기 있는 미친놈들이 전부 여름 내내 너랑 같이 달릴 거야." p.173 "

 

 거기에 진한 우정과 꿈을 좇아 성공해나가겠다는 아름다운 열정도 담겨있다. '베어타운'에 '우리와 당신들'까지 분량이 적지 않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 꼭 읽어보길 바란다. 처음 답답한 부분에서 포기하고 싶어진다면 존버는 승리한다는 말을 새기며 끝까지 읽어나가길. " 그 아이는 오늘 밤에 곤히 잠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안에 깃들어 있던 곰은 방금 전에 눈을 떴다. p.307 " '우리와 당신들'을 읽으며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줄도 몰랐던 프레드릭 배크만에 대한 덕심도 눈을 떴다. 이 두 권이면 당신도 찾게 될 것이다.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숨은 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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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 불확실한 삶을 돌파하는 50가지 생각 도구
야마구치 슈 지음, 김윤경 옮김 / 다산초당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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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는 흥미로웠다. 이 책의 장점은 실전을 외치는 극진공수도처럼, 시중 다른 철학서들과의 차별화로 '현실 쓸모에 집중'했단다. 이는 1장 03 혁신과 성과 부분에서 최근 내가 겪은 실전과 맞닿는다. 지인의 회사에서 들려오는 썰을 듣다보면 그 회사는 원론적인 인사관리의 틀을 그대로 반영해 체계를 잡았단다. 직급호칭파괴, 연차/반차 사용시 상급자 결제가 아닌 스케줄 공유, 차등 성과급 지급 폐지 등등 들을 때마다 전형적인 블랙기업에 몸담은 전력 뿐인 나의 이해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 미씽 링크들을 품고 있었는데, 비슷한 내용을 이 책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그중 하나인 근로자의 노동/발전 동기를 보상(보상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성장의 동력으로는 의미가 없어진다는 연구결과, 아마도 임금과 생산성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이 아닌 개인의 성장, 그를 위한 추진으로 보는 시각이다. 근로자의 입장에선 성장이 아니라 돈을 벌려고 일을 하는건데요? 하는 의문이 든다. 매주 월요일 지난 주에 샀던 로또종이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커피 한 잔을 성수처럼 받들며 출근해야만 하는 직장인들에게 현실 공감을 얻을 수 있겠는가. 다 늙어서 성장같은건 됐으니까 그냥 일을 한만큼 보상을 돈으로 달라구요! ...

 

 ... 이렇게 힘차게 외치는 일개미 노동자에게 저자는 칼뱅의 예정설까지 끌어와 "천박한 합리주의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는 베버의 주장이 궤변으로 들릴지도 모른다.(p.79)" 고 재차 강조한다. 하지만 본인도 어쩔 수 없는, 아직도 '노동-보상의 공식'이 사회의 정설로 쓰이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비로소 '근로자의 성장'이란 주제가 논의의 탁자에 오를 번호표라도 받을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사회의 틀을 바꾸지 않으면 개인의 의식은 변화될 수 없고, 이런 상황에서 원론적 구조만 끌어와봤자 기업조차 '천박한 합리주의의 피해자들'에게 인류애가 상실될만한 배신만 당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나름 재밌게 읽었는데, 이 외에도 '자아실현을 이룬 사람일수록 인맥이 넓지 않다'는 제목을 달아놓은 부분은 인간관계 파탄난 사람의 입장에서 읽기도 물리는 '매슬로의 욕구 5단계'를 희망차게 바라볼 여지를 준다는데서 좋았다. 하지만 나의 바스라진 인간관계는 자아실현과는 관계없었다. 현실에선 자아실현 잘 된 사람이 인맥도 잘 관리하는 걸로... "악마의 대변인(p.135)"에 대한 내용에선 기본 속성이 회의적인 탓에 회의시간에 참지 못하고 딴지걸어 쓸데없이 일이나 떠안고 정이나 맞던 모난돌이었던 자신을 반성했다. 시키지도 않은 역할을 본능이 주워담았다니 앞으로는 지양해야 할 태도다.

 

 재밌기는 해도 대부분의 내용을 반신반의 했다. 다만 "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하며 이 사회를 이루고 영위하는데 크고 작은 부분 역할(p.4)" 중에서도 가장 작고 작은 부분에 기여하고 있는 나의 철학서 일독이야 별 쓸모 없겠지만, 저자가 역설하는 "철학을 배우지 않고 사회적 지위만 얻"은 "문명을 위협하는 존재, 한마디로 '위험한 존재'가 된(p.6)" 교양없이 천박한 정치가 사업가들이 열심히 돈과 권력을 좇아준 덕분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훌륭히 망가졌는가는 확실히 입증된 탓에 책의 신뢰도는 조금 올라갔다.

 

 하지만 회의에서 본인의 "발언으로 마치 구름 걷히듯 사안을 해결할 실마리를(p.7)" 낼 때면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며 놀라고 기쁜 표정으로 물어온다고 묻지도 않은 자기자랑을 드러낸 부분에서는 조금 없던 정도 떨어졌다. 나도 종종 저런 말을 듣곤 하는데 그 경우에 보통 내가 내놓은 생각이 좀 병맛이거나 남 앞에 꺼내놓기 비열한 수를 담고 있을 때 였다. 그 외에는 별다를 것 없는 말을 사회적 립서비스로 추켜세워줄 때다. 저자 본인의 경우도 자의식 빼고 잘 생각해보시길.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는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친절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저자가 철학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로 과거 자행돼 온 잔인한 역사의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함을 들었는데, 문득 이 사람 일본인 아니었나? 의구심이 들었다. 그쪽 나라 초계기 그만 날리고 말합시다. "아무리 이치에 맞는 말이라 해도 그 말을 하는 화자가 도덕성을 의심받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의 힘을 이끌어 낼 수 없(p.71)"음을 아리스토텔레스가 꼽았다고 했으니. 애국심으로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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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1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테일님 설연휴 잘 보내시고 늘 건강하소서!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

테일 2019-02-02 20:37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
 

 

 

 

 

 모처럼 영화를 보러 나갔다. 예매해두고 어떤 내용이었는지 한두번 찾아보고는 잊었다. 영화표가 하나 생겨서 무슨 영화를 볼까 하다, 누구와 함께 보기 어려울 것 같은 영화를 일부러 골랐다. 신도림으로 예매했는데 상영관은 단 하나고 겨우 23석의 자리는 금방 사라져갔다. 수많은 상영관들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영화들은, 나도 본 것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일률적이었다. 그게 보통이고 평범한 것일테다.

 

 집 밖으로 나설 때마다 항상 오랜만에 나왔단 생각을 한다. 어제 나갔어도 오늘 나갈 때가 되면 집 밖 공기의 냄새가 새로우면서도 익숙하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을 오르면서 길가 건물 앞 계단, 빛이 들어선 자리에 작은 구르마를 세워두고 가만히 앉아있는 할머니를 보았다. 햇빛이 들어선 자리래도 겨울의 그것이 얼마나 따뜻하려냐마는 구르마 위에 야트막히 모아놓은 폐지를 흘긋 보고는 혼자 막막했다.

 

 버스에 앉아 오래도록 "할머니의 먼 집" 이라는 영화를 떠올렸다. "할머니의 먼 집"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삶을 끝내려 아흔이 넘으신 할머니가 자살을 기도했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내가 죽는 것도 누가 죽는 것도 너무나 무서운 나는, 언제 죽으려나 아침에 일어나 또 살아있음을 지긋해하는 노년의 삶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알고나는 보이는 것들은 더 무서웠다. 고통스러운 삶이 계속된다는 게 어떤 것일까.

 

 예매한 영화는 "가버나움"이었다. '자인', 출생기록 조차 없는 어쩌면 열두 살인 소년. 소년은 자기 앞에 주어진 삶을 경멸한다. 자신을 낳고 형제들을 낳은 부모를 원망하여 고소하기에 이른다. 자인은 학교도 가지 못한 채 마른 몸을 휘청이며 가족의 생계를 돕는 도구처럼 쓰여진다. 그럼에도 자인은 살아내려 발버둥친다. 날선 눈에 불을 담고 삶이 주는 고통에서 달아나려는 소년의 몸짓이 애처롭다.

 

 자인은 누구를 상대로도 거릴 것 없이 욕하고 달려든다. 소소한 좀도둑질 정도는 태연히 해내고, 결국엔 사람을 찔러 잡혀들어간다. 자인의 거친 행동은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연상시킨다. 난간에 앉아 가래침을 뱉고 질펀히 욕을 하던 꼬마, 불완전하고 준비되지 않은 보호자 밑에서 천진히 방치되던 플로리다의 '무니'를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다시 만난다.

 

 하지만 여행길 골목에서 마주쳤다면 가방 주머니를 확인하고 발걸음을 재우치게 만들 이 각다귀같은 소년도 결국은 아이다. 디즈니랜드로 도망치면 아동보호국 직원을 따돌릴 수 있을거라 믿은 무니처럼, 자인도 커피를 많이 마시면 까만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스웨덴에만 가면 내 방을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삶이 저절로 주어질 거라 믿는다. 살아내는데 이골이 난 아이도 그 거리에선 더 교활한 어른의 희생물일 뿐이다. 

 

 제대로 된 방도, 음식도, 옷도 없이 아이를 낳아 키우는 자인의 부모는 지독히 가난하다. 남은 식구들을 위해 초경이 시작된 자인의 여동생을 나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보낸다. 그 거리의 많은 소녀들이 그렇게 팔려가 비슷한 삶을 살거나 목숨을 잃는다. 고작 한두살 터울의 오빠만큼도 가족을 챙기려하지 않는 부모는 '하나를 가져가면 하나를 주시는' 뜻에 따라 또 다른 아이를 임신한다.

 

 '나를 왜 낳았나, 또 태어날 동생의 삶을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는 자인의 물음이 법정에 퍼질때, 그 아버지는 '나도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결혼한 것을 후회한다'고 한탄하고 그 어머니는 '나는 최선을 다했다. 내 입장에 서보지 않은 누구도 나를 비난할 수 없다. 나를 비난 할 수 있는 건 자신 뿐'이라며 눈물 흘린다. 이쯤되면 빈익빈부익부의 구조를 착실히 따르는 세상과 믿지 않는 신의 존재 마저 끌어들여 한숨을 내쉰다.

 

 아이없는 삶을 살려는 이유가 예전엔 아이보다 자신의 삶을 위해서 였다면, 요즘은 아이를 온전히 책임질 수 없다면 아이를 위해서 낳지 않겠다는 선택이 많다. 아이를 좋아하고 가족의 근간을 부부와 그 2세로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해가지 않을 이유겠지만 '가버나움'을 보며 절감했다. 자인의 아빠는 세상에 자신이 태어났다는 증거 -출생신고서류-를 찾는 자인을 때리며 세상에 아무 기록도 없는 유령/기생충과 같은 삶이라 소리지른다.

 

 이는 비단 가난한 나라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아무도 모른다"처럼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그늘진 생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반지하 쪽방촌에서 수급과 반찬 봉사로 삶을 연명하는 독거 노년의 삶도 그러하다. 당장 네이버 포털만 들어가도 노인, 아동, 해외, 동물 카테고리별로 정리된 빈곤 포르노가 개인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기에 충분히 전시되어 있다.

 

 자인의 삶이 특별히 더 고단할 것도 없는 베이루트 거리를 내밀하게 파고들때도 부감하여 조망할때도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차마 울 수 조차 없었다. 영화관 안의 어둠이 사라지고 나면 지금 나를 채운 이 괴로움도 함께 사라질 것을 안다. 당장 내 마음이 아파 눈물이나 조금 흘리고 마는 것이 악어의 눈물과 다를 것 없었다. 실제로 영화가 끝나고 짧은 통로를 걸어나오니 백화점, 호텔과 연결된 나의 세계였다.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 눈물 흘리지 않기를 차라리 잘했다. 이 쾌적하고 풍요로운 배경 안에서 울고 난 얼굴을 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으니. 그럼에도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영화를 추천한다. 적어도 밖으로 흘러보내지 못한 수분이 한 사람분의 얼룩으로 남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더 많은 얼룩이 남으면 언젠가 얼룩을 못 보거나, 그저 가리려하지 않고, 지워야만 될 때가 올테다.   

 

 

 

  할머니의 먼 집 / 아무도 모른다 / 플로리다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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