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의 냄새
박윤선 지음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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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시절에 여름이면 수영장에 갔다. 가서 수영을 배운 것은 아니고 그저 물을 휘다니며 놀았을 뿐이라, 아직도 수영은 커녕 잠수도 못한다. 수영을 배우러 간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수영장엘 자주 갔냐하면, 그때는 그랬다. 동네 아이들끼리 서로 이름을 불러가며 '노올자'하고선 오늘은 앞산으로 오늘은 수영장엘 오늘은 골목에서 이리저리 어울려 놀았다. '수영장의 냄새'를 보고선 그때의 물의 일렁임, 수영장에서 놀고 나면 꼭 먹었던 컵라면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수영장의 냄새'에 그런 유년의 반짝임이 담겨있는걸까 생각했는데, 들여다 본 물속은 생각보다 깊고 어두웠다. 그때의 자신을 '국민학교 이학년'으로 소개한 것으로 보아 어린시절이 나와 그리 떨어지지 않은 때였던 것 같았는데 민선의 세계는 성숙했다. 초등학교 이학년 때 나는 어떤 집에서 사는지 신경이나 썼던가, 싶었다. 분식집 가서 밥도 혼자 잘 사먹고 학원엘 가는 모습이며, 꽤 조숙한 관계망을 보며 민선이는 혹시 서울에서 살았던걸까 싶어졌다. 서울 출신들에 대한 편견이 조금 있나보다.

 

 아홉살 무렵에 있던 일을 떠올려보면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 일학년 때까지는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서 학교를 가느라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 같은데, 이학년은 그런 기억도 없다. 다만 시험을 잘 보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그랬다. 일학년 때는 학교를 다닌다는 것에 적응하느라 시험같은 것을 봤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데, 그 무렵에 남들보다 잘 못한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실망감의 기억이 난다. 민선이 수영장엘 가기 싫어하는 이유가 공감됐다. 지금은 그럴수도 있지, 하지만 그때는 그런게 창피하고 싫었다.

 

 흔히 어린시절에 겪은 일들은 금방 잊거나, 잘 이해하지 못해 상처가 덜할거라 생각하는데 때로 어떤 상처들은 온 시간을 들여 깊게 자리잡는다. 민선이는 신발을 버린 일, 친구들과 병원 놀이를 한 일들도 상처로 남아있겠지만, 시간이 흘러 인경이가 전학 간 이유에 대해 이해하게 됐을 때 그때도 상처를 받게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리다는 이유로 저질렀던 잘못들을 떠올려본다. 정말 잘못이 잘못인줄 모르고 행동했을까, 그때도 사실 아주 조금은 하면 안되는 행동에 대한 구분이 있었던 건 아닐까.

 

 뉴스에서 나오는 소식들을 볼 때 저렇게 어린애들이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할 생각을 했을까 싶은 사건들이 나온다. 아이라서 어른과 같은 생각을 기준으로 행동을 판단하면 안된다고 하지만, 타인에게 자신이 겪고 싶지 않을 행동을 하는 아이들은, 정말 잘잘못을 몰라서 장난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일까 생각이 미친다. 그 아이들이 모방하는 세계가 더욱 나빠지지 않기만을 소망하게 된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을까, 같은 비관적 생각을 하게 된다. 매일 들려오는 점점 더 나쁜 소식들에 지칠 때면.

 

 아직도 수영장에서는 소독약 냄새 같은 것이 날까? 얼마 전 수원을 갔다 길을 걷던 중 작은 수영장이 있는 센터를 들렀다. 센터 안에 수영장이 있는 줄은 몰랐지만 어디선가 물비린내 같은 것이 나서 인공폭포 같은 것이 있나, 목욕탕이 있나 싶어 둘러보니 레인이 몇 개 안되는 수영장이 있었다. 최근에는 호텔의 수영장 같은 곳 말고는 가본 적이 없어 관념 속의 수영장 다운 수영장을 본것이 오랫만이었었다. 여전히 그곳에는 수영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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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 - 국선변호사 세상과 사람을 보다
정혜진 지음 / 미래의창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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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으면서 나 스스로는 정리할 수 없는 생각들이 맴돌았다. 지금까지는 변호인이 필요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분명 내 입장이 되어 겪어봐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테지만, 변호의 역할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접할 수 있는 법정의 세계는 대체로 이렇다. 세상에 저런 일도 있단 말인가 싶을 4주간의 조정기간이 필요한 사랑과 전쟁 류, 주로 뉴스에 나올만한 사건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형편없는 죄값이 선고되는 부당해보이는 구조, 아주 드물게 부당한 죄를 벗어나도록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이중 변호와 관련해서 내가 접하게 되는 것이 보통 '왜 저런 사람을 변호해주나'싶은 일들이 많기 때문에 필요성과 그들의 입장이 의문스러웠다.  

 

 처음에는 자잘한 생계형 범죄나 불우했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해 재판에 이른 사람들의 사건을 보여주면서 저자가 어떻게 그들을 이해했는가 나도 공감해보려 했다. 하지만 읽을수록 혹시 변호사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이해가 매우 크게 필요한 직업이었던가 싶기만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실천하고 있는걸까. 죄도 결국 사람이 저지르는 일이기에 죄를 저지른 사람도 함께 싫어지는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 돈이 필요해서 중고나라 사기를 저지르고, 불우한 어린시절 때문에 술에 의존하게 되어 무전취식을 하고, 술에 취해 자기도 모르게 불을 냈다는 사람들의 사연을 보면서 그들이 말하는 인과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장 인상깊은 사건이 자고 있던 친구의 이불에 불을 붙인 사건이었다. 그는 탈북민이었는데, 같이 사는 친구와 불화로 다퉈 술에 취한 상태에서 불을 질렀으나 해를 입히려는 고의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입장에서는 친구에 대한 섭섭함, 오해가 쌓인 일일뿐이었으나 나는 친구의 입장이 더 공감됐다. 친구는 목숨을 걸고 어려운 탈북에 성공했으니, 힘들어도 자신을 다잡고 잘 살아서 탈북민들에 대한 인식도 좋게하고 싶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피고인은 힘든 순간에 술에 의존했고, 친구가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원망섞인 섭섭함을 품었다. 같은 상황에서 각기 다른 태도를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좋지 못한 선택을 한 사람들에 대해 어디까지 공감하고 이해해야 하는가 고민했다.

 

 지난 10월 생계곤란으로 열흘을 굶은 한 사람이 마트에서 음식물을 훔쳐 체포된 사건을 기사로 보았다. 그의 사정을 들은 피해자도 선처를 바랐고, 지자체에서 그의 재활을 돕기 위한 방향으로 마무리 된 내용이었다. 그의 곤란이 다른 방식으로 알려졌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런 딱한 사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사건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장치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사진관에서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변호가 어디까지 필요할까. 가족력, 불우한 과거와 술 때문에 우발적으로 지인을 찔렀다는 사람은? 삶이 힘들어 마약에 손댔다는 가장은?

 

 저자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와 그릇이 나보다 넓은 사람이기 때문에 변호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럴 수 없어서 읽으면서 어쩌면 국선변호사의 자격은 남을 잘 믿어주고 착할 것이라는 요건이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피의자들이 대는 핑계같은 말에도 귀기울이며 참고하는 자세가 감탄스러우면서 한편으로는 왜 그렇게까지, 싶었다. 그 사람들의 사정도 있지만 엄연히 피해를 본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그들의 억울함은 고려하지 않는걸까 생각하기도 했다. 게다가 술 때문이라는 이유가 너무나 많이 이용되는 사회에 의문과 불만이 커지고 있기 때문에, 책에서 나오는 중독 혹은 술에 취해서 그랬다는 말들도 더욱 마음의 빗장이 단단해지게 만들었다.  

 

 더욱이 이 가련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잘못들은 너무도 쉽게 유죄를 판결받지만 정작 사회의 근간을 해치는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 중 돈과 권력이 많은 사람들은 그 죄값을 다 받지 않는 일이 너무나 많다. 이들이 변호를 통해 법망을 피해가는 것도 지겹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변호사를 선임할 경제적 능력이 충분한데도 돈을 아끼기 위해 국선 변호를 선택하여 세금을 낭비하는 일이 있다는 것도 불만스러웠다. " 삶의 효율을 요구하는 시대에 삶의 자세와 가치를 길어내다 "는 표지문구의 어떤 면모를 책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읽으면서 마음이 답답했다. 차라리 우리는 더 효율적이어야 하는 것 아닐까.

 

 국선 변호인의 세계가 궁금하다면 관심을 갖고 읽어볼만 할 것이다. 도리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왜 사회의 구조는 이리도 허술한 것일까, 명백히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도 변호가 필요할까 이런 의문들을 가지게 되버렸지만. 사실 그 이유를 알고 있지만 일반적인 통념에 맞지 않는 판결에 대한 뉴스를 많이 접하다보니 좀 더 부정적이고 까질하게 읽게 된 것 같다는 생각도 이제야 든다. 혹시 지금 사람이 좀 싫다면 저자가 만난 우기기, 남의 말 듣지 않기, 화내기 등을 잘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례를 보고 더 속이 터질 수 있으니 조심하길 바란다. 사람와 얽힌 직업은 무엇이든 정말 쉽지 않구나 싶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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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미움들 - 김사월 산문집
김사월 지음 / 놀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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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 선 문장들은 아주 솔직하다. 사람은 일기를 쓰면서도 전부 솔직할 수 없는 법이라고 하니 사실 그녀의 솔직함은 조금 비틀리고 가리워진 채 드러날만 할 만큼의 솔직함이겠지만. 그렇다면 솔직하다기보다는 대범하다고 해야할까. 처음엔 내가 자신에 대해 드러낼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내용을 읽으며 공감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젊었을 때는 이 모든 것이 좀 덜 무서웠던 것도 같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티를 내지는 않아도 무섭고 두려운 것들이 많아졌다. 김사월의 과감함이 어쩐지 염려스러울만큼.

 

 " 나는 '지금' 꾸미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지금은 안 꾸몄지만 언젠가 내가 원하면 겉모습을 꾸미는 데 기꺼이 돈과 노력을 바칠 것이며 그때는 지금보다 매력적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53) "

 

 김사월은 몇 살일까 생각했다. 내가 잘 모르는 작가는 내가 모르는 삶을 내가 모르는 방식으로 살고 있다. 뮤지션인 그녀는 클럽에 가서 빵디를 흔들고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하고 데이트 어플을 쓰고 초커를 하고 독일로 떠난다. 나는 그 적극적인 삶의 태도에 조금 거리감을 느낀다. 한편으로는 자궁경부암 예방 주사를 맞고, 프리사이즈 옷을 입는 몸을 욕망하고, 스타벅스에 가고, 화장을 했다가, 꾸밈에서 벗어나려 시도한다. 나는 이 평이한 생활의 흔적에 공감한다. 그리고 김사월은 이렇게나 자신을 드러내는데도 영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책을 읽다 문득 그녀가 누군지 궁금해 검색해봤을때 실제로 그녀의 나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더욱 묘했다. 알 것 같은데 모르겠는 사람다웠다.

 

 짧게 이어지는 글들은 처음엔 놀라웠다가 갈수록 귀여워졌다. 모르는 사이에 꼰대화 된 유교걸인 내가 클럽에 갔다가 강간당하거나 살해되는 것이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두렵지 않다는 문장에서 지나치게 놀랐던 것일까. 이어지는 소소한 단상들은 이십대후반, 어쩌면 서른 정도의 여성들이 느끼고 생각할만한 보편적인 것들이라 꽤 익숙한 느낌이었다. 특히 나는 가끔 강남을 갈때마다 느끼는 강북으로의 회귀 열망, 무엇보다 종로에서 느끼는 편안함을 갖고 있어서인지 종로에 대한 그녀의 찬양이 썩 마음에 들었다. 비록 그녀는 딱히 강남 때문도, 회귀 열망같은 것도 아니라 그냥 종로를 좋아한다 하더라도 종로에 대한 애정만으로도 '우린 같은 민족이었어'하고 속삭인다.

 

  " 내가 욕망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섹스하는 상상을 해본다. 나보다 어리고, 예쁘고, 재능 있고, 너를 이해해주고, 아무튼 나는 아닌 어떤 이는 너를 몹시 흥분시킨다. (22) " 

 

 본격적인 사랑과 연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3부의 내용은 오히려 너무 감성적인 것 같아 그냥 그랬는데, 1부에서 읽은 사랑과 욕망에 대해 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나 역시도 한때 그 둘이 같은것이라 믿었는데, 언젠가부터 그 둘이 너무나 별개의 것으로 떨어져있다는 것을 느꼈다. 사랑과 욕망의 질량이 같을 수 없고,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해야 한다는데, 사랑도 섹스도 다 따로 할 수 있고, 욕망이 식었다고 사랑마저 버릴수도 없는, 그러나 그 둘은 같아야 한다는 믿음에서 묶여있을 뿐이다. 나는 항상 그점이 안타깝고 때로는 서글펐는데 지금은 어쩐지 무덤덤하다. 그건 사랑때문일까 욕망때문일까. 갈수록 사랑도 욕망도 힘을 잃고 어려워진다.

 

 그녀가 남긴 우울의 기록을 보다가 문득 나는 우울해질 수 있는 사람일까 궁금했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많은 일들에 대해 무감해졌기 때문에 우울이라는 감정에 빠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이 무감해지는 일도 우울의 하나일까 싶어졌다. 상담을 받고 약을 먹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해야할 일을 하는 것으로 그녀가 나아가고 있다면, 나는 부정적인 태도를 줄이기로 했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도움 안 됨 긍정적인 사람들과 얘기해라.' 라는 남극 펭 선생의 짤을 보고 불현듯 그래야겠다 싶었다. 나는 차고 넘치게 부정적인 사람인데, 이런저런 일들로 나 자신도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다.

 

 요즘의 여성들이라면 김사월의 글에 꽤 공감하지 않을까 싶었다. 어디까지를 요즘의 범위로 잡아야 하는지 좀 애매하지만. 처음 너무 전위적인거 아닐까 이를테면 홍대의, 음악을 하는, 같은 키워드로 전해지는 독특함이 도드라지는거 아닐까 생각했던 것도 기우였다.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맑았다 흐려지는 자신을 하루하루 느끼는 보통의 문제많은, 사랑스러운 우리였다. 여성들로 꾸려진 독서모임이 있다면 한번쯤은 가볍게 '사랑하는 미움들'을 읽고 20대와 한때 내가 겪었던 거칠고 흐린 날에 대해 이야기해본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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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애의 도시 이야기 - 12가지 '도시적' 콘셉트 김진애의 도시 3부작 1
김진애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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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사람얼굴 토기가 나온 경산 소월리 유적에서 신라시대 기록이 정자체로 적힌 나무통 문서를 추가로 출토했다고 한다. 1600여년 전 신라 고대사를 가늠해볼만한 유산이 되리라 주목을 받고 있는 이 발견에 대한 기사를 공들여 읽었다. 긴 시간을 잠들어있었을 기록이 깨어나게 된 일이 어쩐지 안타깝지만 설레이는 일이다. 고대의 도시가 남겨놓은 아스라한 기록물이 비교적 온전히 1600년의 시간을 너머 우리의 손에 전해졌다니. 십수세기 전에 그 자리에 터전을 이루고 살았던 사람들 삶을 감싼 베일이 한장 걷어졌을 때 내 손에는 '도시 이야기'가 들려있었다. '도시 이야기'의 세번째 콘셉트가 기억과 기록이었다. 도시에 우리가 무엇을 기록하고 남길 수 있을까 막연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소월리 유적이 그 답을 자연스럽게 알려주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의 관심이 도시와 건축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 전에도 있어왔지만, 대중적으로 주목하게 된 것은 그리 길지 않은 때라 생각한다. 언제부터였을까 생각해보면 '밀고 지어내는 일'에 맞췄던 초점을 비교적 '조화롭게 의미를 두고' 만들어내는 것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시기를 떠올려보자. 그리 길지 않은 때라는 말에 공감할 것이다. 요즘은 건축과 공간에 대한 책이 나오고 매체에도 건축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소개된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 삶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렇지 않다고 낯설게 생각한 때에도 익숙한 건축물과 유명한 도시를 통해 관심을 끌고 보는 이를 매료시켰다. '도시 이야기'의 저자 김진애도 '알쓸신잡'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도 도시와 건축은 이제 막 관심을 갖게 된 분야인데다, 어쩐지 전문적이고 어려워보이는 느낌에 선뜻 유명한 책을 집어 읽기에 문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성공한 여성의 당당한 모습으로, 도시와 건축물을 접근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친근함으로, 다가온 그녀의 책이 반가웠다. 그녀가 제시한 12가지 도시에 대한 콘셉트는 도시가 안고 있는 의미들이 이렇게 많은가 싶을 정도로 다채로웠다. 12가지 콘셉트들은 도시에 이런 면이 있나 싶다가도 그곳이 사람이 사는 공간이라고 떠올리면 이내 수긍되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알았던, 그리고 알아채지 못했던 도시의 여러 면모들을 좀 더 깊이 생각하며 책을 읽게 되었다. 좋지만도 나쁘지만도 않은 도시는 사람과 닮아있었다. 그 자체로 살아있는 무엇과 같이.

 

 제일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첫번째 콘셉트였다. 가장 많이 다녀본 장소들이 나와서 공간을 익숙하게 그려볼 수 있었다. 서울시내와 광장, 흥미로운 건 사대문이라는 공간이 아직 통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도 미세먼지 관련 정책으로 사대문 안에 5등급 차량 운행 제한을 둔다는 기사가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다. 오래된 도시의 구획은 사람들로 인해 이어져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다. 뒤에 이어진 권력의 공간, 청와대나 국회같은 곳도 자주, 매일같이 바라보던 시설이라 그 곳들을 보며 내가 자연스럽게 어떤 생각을 하고 감상을 가졌는가 떠올려보니 신기하고 재밌었다. 놀랍게도 나는 그 권력의 장소들을 내심 꽤나 상징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2호선을 타고 지나가며 보이는 한강과 국회의사당의 풍경을 매번 애써 눈에 담는 것처럼. 이런 감상은 그들이 원하는대로의 반응인 것일까, 사회구성원이 자연스럽게 가지는 애착인 것일까 궁금해졌다.

 

 우리나라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기록 덕후들의 나라인터라 개발이 어려울 정도로 '땅을 파면 뭐가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공룡 발자국부터 역사적 기록물의 발견까지, 기록과 보관의 DNA가 우리 유전자에 잘 새겨져 있음을 느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 가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우리 나라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볼 때면 가장 특징적인 풍경이 아주 현대적인 건물들과 전통적인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외국인들이 특별하게 생각하는 만큼 한국만의 이 풍경을 아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한때는 오래되고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으로 바꾸려는데 급급했던 때도 있었다. 이때 스러져간 것들에 대한 아쉬움탓인지 요즘은 컵 하나도 빈티지한 것을 찾아쓰고 일부러 오래된 공간을 찾아가는 흐름이 생겼다. 너무 가까운 과거의 향수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는 시선도 있고, 이또한 지나가는 유행일수도 있지만, 이런 기호가 무분별함을 막을 수 있는 숨통이 된다면 좋겠다는 저자의 생각에 크게 공감했다.

 

 개인적으로 여행가는 것을 좋아하는데, 왜 해외여행을 떠나는가에 대한 질문도 인상적이었다. 익명성을 위해서! 낯선 곳에서 일회적인 타인들 사이에서 느끼는 개방감은 확실히 특별하다. 유명한 사람이 아니어도 느낄 수 있는 이 개방감은, 하루를 구성하는 체험활동과 시간활용에 관대해지고 과감함해지게 만든다. 평소의 자신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해외 여행이 주는 큰 매력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책을 읽으면서 여행이 그래서 좋았구나, 그래서 편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한국인은 먹보니까, 그 나라에 가서 먹어봐야할 맛집 목록을 깨고와야 한다는 사명감도. 우리의 여행준비에는 필수적으로 먹을 것에 대한 검색목록이 있다. 왜 해외여행을 가는가에는 익명성도 있겠지만 그 위에 맛집이 있다. 이 핵심동기를 간과했다는 점이 크게 아쉬웠다. 많은 사람들이 동감하리라 생각하는데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기도 했다.   

 

 읽는 이의 이목을 가장 집중시킬만한 것은 일곱번째와 아홉번째, 열한번째 콘셉트가 아닐까 생각했다. 차별, 차이, 혐오, 양극화같은 키워드는 최근 몇년을 관통하는 사회의 분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에 나오는 '앉싸,서싸'같은 인싸 단어를 책을 보고 알았다는게 어색했다. 별걸 다 줄인다더니 진짜 쓰는걸까, 싶었다. 그리고 엘시티같은 초고층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는 부산은, 태풍에 유리가 깨졌는데 쉬쉬한다더라 하는 괴담과 경관을 해치는 흉물이다, 홍콩같이 마천루 랜드마크가 될 것이다같은 얘기만 건너듣다가 저자의 시각이 담긴 글을 읽어보니 이래저래 우리 사회의 구조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책에서 담아낸 콘셉트들에 대해서 겉핥기식이라도 한번쯤은 접해보고 생각해봤다는 점이 재밌었다. 도시라는 주제가 우리 삶에서 전혀 낯선 것이 아니라는 확인을 했다. 우리나라엔 왜 간판이 이리도 많은 것일까에 대한 의문, 불만까지도.

 

 '도시' 이 거대한 규모의 공간을 한 권의 책에 어떻게하면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담아낼 수 있을까 고민한 흔적이 전해지는 책이었다. 마치 우리가 어떤 낯선 도시에 막 도착했는데, 그 곳에 대한 안내판 앞에 서서 대략적으로 훑어보게 된 느낌이다. 낯선 주제일지도 모르지만 읽기 쉽고 재미있는만큼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도시 이야기'를 읽으며 키운 관심으로 더 깊은 도시와 건축에 대한 책들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초판 한정 부록으로 '도시는 여행 인생은 여행'이라는 작은 책을 함께 받았는데, 이 책은 저자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있어서 이 책을 먼저 읽고 '도시 이야기'를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초판 한정이니 빨리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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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코리아 2020 -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의 2020 전망
김난도 외 지음 / 미래의창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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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렌드 코리아 2020의 초반 부분을 읽으며 2019년을 다시 점검해보았다. 아직 2019년이 적지 않게 남아있지만, 대충 올해가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쪽집게 수능 강사들이 꼽은 예상 문제가 시험에 나왔을때 이런 기분을 느낄까? 2019를 갈무리해놓은 키워드 하나하나가 익숙했다.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인지 확실히 지난 해에 내놓은 전망이 한 해에 담겨 있었다. 그저 유행이라고 치부하고 지나갔던 것들이 왜 우리 사회의 트렌드로 자리잡았는지 정리된 글을 보니 나름 그 의미가 새롭고 재밌긴 했다. 문득 어쩌면 우리는 그럴 것이다,고 예상되는 트렌드를 따라잡기 위해 한 해를 보낸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팬톤에서 매년 올해의 컬러를 뽑는 것처럼.

 

 당장 내일의 날씨도 맞추기 어려운데 내년의 트렌드를 전망해보는 이 책은 매번 점검하는 눈으로 읽게 된다. 나름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눈으로 어디 뒤쳐지거나 의아한 구석이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이런 시선으로 '트렌드 코리아'를 읽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유행의 순환이 더욱 짧은 주기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책으로 나오는 과정을 거치는 순간 그 뒤에 등장하는 것들에 대한 반영을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펭수의 인기나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사건 같은 정말 최근에 일어난 이슈들까지 책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랐다. 이 정도의 신선함과 시각이라면 1년에 두 번 나온대도 재밌게 볼 것 같았다.

 

 2020에서 내세운 마이티 마이스라는 두문자 자체는 언제적 마이티 마우스를 끌어온걸까 싶은 느낌이 들었는데, 키워드 중 하나인 오팔세대와 연결해서 생각하면 또 긍정하게 되는 고리가 생겼다. 오팔세대나 업글인간같이 봤을 때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지는 키워드들이 있었는데 2020년을 보내면서 익숙하게 자주 사용하는 용어들로 자리잡게 될까 궁금해졌다. 반면 멀티 페르소나나 팬슈머같은 키워드들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새로운 트렌드로 꼽을만큼 신선한가 생각해봤을때 좀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드는 주제들이었다. 특히 멀티 페르소나 같은 경우는 가정과 학교, 사회같이 개인의 공간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여러 모습을 한 자신이 다르게 기능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않아도 늘 행해왔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 전체적인 어조는 긍정적이다. 특히 이러한 긍정적 시선이 '오팔세대'에 대한 부분에서 특히 잘 나타났다. 베이비붐 세대들이 맞는 시니어기를 기존 은퇴와 노년의 삶의 형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하고 변화에 적응하며 활기차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강조했다. 실제로 유튜브 사용하는 중장년층이 늘어났다는 기사를 접하기도 해서 긍정적인 해석이 수긍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키오스크의 도입으로 '디지털 소외 계층'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는 지적을 더 많이 접해왔고, 실제로 부모님에 대해 염려했던 터라 뒤처짐을 비교하고 조바심을 야기하는 예시가 될까 염려도 됐다.

 

 그 밖에는 '스트리밍 라이프'라는 키워드에서 의외성을 발견했다. 아직도 MP3파일로 음악을 듣지 않으면 어딘가 아쉬운 마음이 드는 만큼 스트리밍과 거리가 먼 세대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넷플릭스를 이미 수개월간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일상 깊숙이 자리잡은 트렌드 키워드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확 일꺠워주는 순간이었다. 주제가 주제이다 보니 책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얼마나 고전적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꼰대인가-를  점검해보게 되었는데 스트리밍 라이프를 산다는 것이 넷플릭스를 이용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면 트렌드에 따라 좀 긍정적으로, 젊게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었다. 관심이 안가거나 모르는 주제가 없을 정도로 트렌드를 잘 짚어냈기 때문에 누구나 읽기 좋을 것 같다. 트렌드 코리아의 출간이 올해 벌써 12번째라고 하는데 그 저력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2020이라는 내년 연도의 숫자도 상징적이지만, 13년 전의 첫 기획이 연말 각 출판사마다 트렌드 시리즈 출간을 앞다투게 만들 정도로 큰 관심을 모은 책이란 점도 의미있는 것 같다. 돼지해부터 시작하여 쥐의 해까지 왔다. 어떤 의미에서는 한 바퀴를 돈 것이다. 2020년 연말에 새로운 전환점에 선 트렌드 코리아 2021을 읽으며 한해동안 어떤 흐름들이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게 될까, 성급하지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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