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머니에게
윤성희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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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속이 복잡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할머니와 나 자신이 얽힌 이야기를 끌어오고 싶지 않다.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또 고통스러운 이야기기 때문에 굳이 풀어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책의 내용이 내용인지라, 그런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어떤 이야기인지 읽어보고 싶었고, 자연스럽게 비교도 하고 지난 시간을 떠올리게도 됐었다. 책을 읽으며 했던 생각들을 전부 꺼내어 둘수는 없을 것 같아 이리저리 잘라내다 보니 별로 할 수 있는 말이 남아있지 않았다. 풀어낼 수 없는 말들이 쌓여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차라리 밝고 희망찬 얘기로 채워져있는 소설들이라면 좋았을 것을. 얼마 전 읽은 '씨씨 허니컷 구하기'는 할머니와 소녀가 나오지만 '나의 할머니에게'와는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나의 할머니에게'를 읽고 기분이 좀 묵직해졌다면 '씨씨 허니컷 구하기'가 조금 위로가 되지 않을까,싶다.

 

 남아있는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유한함을 절감한 뒤로는 항상 남은 시간들이 간절해졌다. 그래서인지 손보미 작가의 '위대한 유산'에서 1918년에 태어나 1972년에 죽은 할아버지(108)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리 단명한 것은 아니라고 적혀있어 눈을 의심했다. 환갑에 미치지 못하게 50여년 남짓 살았다는 것인데, 짧지 않은가. 시대가 시대니만큼 평균수명이 지금과는 다르겠지만 그래도 짧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두고 얼마나 더 살았어야 할머니를 만족시킬 수 있었을까(108) 생각하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정해진 기간이 없었으리라 생각도 되고, 어찌되었건 떠난 사람을 생각하면 계속해서 같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일 밖에는 없을텐데 왜 그리 차게 썼을까 싶었다.

 

 가장 좋았던 글은 백수린 작가의 ' 흑설탕 캔디'였다. 다른 부분들이 비터한 느낌을 갖고 있다면, '흑설탕 캔디'는 이름답게 스윗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인 박난실 할머니와 프랑스인 브뤼니에 할아버지의 연애담인데 열일곱 첫사랑의 마음을 간직한 노년의 조심스러운 풋사랑같은 느낌이라 좋았다. 확실히 다시 읽어봐도 나이만 다를 뿐이지 닿을 듯 말 듯한 감성을 그대로 가진 첫사랑 이야기와 다름없다. 때로 나이는 먹어가는데 철은 안드는 것 같아 더 나이를 먹고서도 언제까지나 마음은 이렇게 어른이 되질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할 때가 있었는데, 난실씨가 브뤼니에씨를 만나 떠올린 생각들이 마음에 박혔다. 지금의 나도 상상하지 못했었지만, 노년의 나는 어떨까, 늙지 않은 마음을 부여잡고 노인인척 살아가게 될까. 

 

 '위대한 유산'은 스릴러 분위기가 났고, '선베드'는 할머니에 대해서라기 보다는 불안정한 진서에게 더 관심이 갔다. 어찌되었든, 친구가 없고 가끔은 선을 지키지 못하는 그래서 결국은 혼자 남겨지게 될까봐 염려하는 진서의 모습에서 나와 주변의 닮은 점들을 발견했다. 이쯤되니 사는게 바쁘다는 핑계로 멀어진 친구들도 많아지고, 간신히 붙잡고 있는 인연들을 어떤 사소한 실수로라도 잃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과잉되고 불안정해보이는 진서지만 이상하게 그녀에게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나의 할머니에게'에서 가장 솔직히, 마음에 들었던 글은 윤성희 작가의 작가 노트 (35) 내용이었다. 그냥 거기에는 진짜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은, 진짜.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손녀를 앞에 두고 화투점을 치거나 민화투를 칠지도 모른다는 그런 꿈을 꾸게 만드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할머니'의 존재성을 전면에 내세운 첫 소설집'이라는 띄지 문구가 눈에 띈다. 뭘 그렇게까지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파과'에서도 할머니 킬러가 나오질 않는가. 어쨌든 '나의 할머니에게'는 기획이나 디자인이 신선했다. 여섯명의 작가들이 할머니를 주제로 각기 펼쳐낸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는 점도, 무엇보다 표지의 묘한 질감이, 중간중간 끼워진 갈피를 펼치면 만날 수 있는 조이스 진의 그림들마저 남달랐다. 다만 첫 소설집인지라 '할머니'라는 주제를 통해 작가들이 그려낸 내용이 다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는 게 아쉬웠다. 첫 소설집이니까 두번째나 세번째가 혹시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앞으로 책이 더 나오게 된다면 이보다는 좀 자유로운, 혹은 넓은 시선으로 '여자 어른'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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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대충 살고 가끔은 완벽하게 살아 - 읽고 쓰고 만나는 책방지기의 문장일기
구선아 지음, 임진아 그림 / 해의시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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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 더 밝은 느낌의 내용일거라 생각했는데, 시작부터 느낌이 달랐다. 짧은 꼭지를 여러 개 늘어놓은 형식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첫 시작인 '어중간한 재능'의 내용부터 확실히 눈길을 끌었다. 읽기 바로 전에 가볍게 읽어볼 요량으로 창비에서 나온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라는 만화를 한 권 읽었기 때문에 고양된 감성과 맞물려 비슷한 내용을 담은 첫 내용이 더 깊이있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아마, '다들 그런 생각 한번쯤은 하고 살지'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일부의 재능있는 사람들이나, 자기객관화가 안되는 사람들을 빼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재능이 아주 빼어나거나 탁월하지 못함을 이유로 실망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글쓰는 것이 그랬다. 대단하게 글쓰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좋아하는 정도의 마음과 그래서 조금 더 쓰고, 가끔은 조금 더 잘 쓰는 일들이 생기는 것으로는 글써서 밥먹고 살기는 힘들다.를 넘어서 불가능하다. 아주 어렸을 때는 그럴 수도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읽는 것에서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에 생각이 옮겨가게 되면서는 안되겠구나 깨달은지 오래다. 이처럼 재능이랄 것도 없는 좋아함을 가진 사람도 그러한데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 언젠가 기회가 올 것 같은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말하는 갈 수도 접을 수도 없는 마음은 또 어떠할까. 어쩐지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때로는 대충 살아도 된다고 해줄만한 부분이 나올 때까지는 읽으면서 계속 이런 기분일까 좀 걱정됐었다.

 

 "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건 내가 돈을 많이 벌어 두었거나 정력이 좋아서, 진짜 용기가 충만해서가 아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다. "아, 그때 해 볼걸......"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나서 "이게 아니었네" 혹은 실패했어도 "그래도 재밌었지"라고 돌아보거나 "운이 없었어"라고 핑계를 대 보는 게 나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생각보다 멋지게 해낼 수도 있으니까. (38) "

 

 직장을 그만두고 하고싶은 일을 찾아 떠난 사람들의 분위기는 대체로 비슷하다. 물론 나도 회사를 그만 둔 경험이 몇 번 있지만, 대부분은 하고싶은 일을 하기 위해 떠났다기 보다는 '아, 더럽다 더럽다 이제는 진짜 더럽고 힘들어서 못해먹겠다' 싶어서 그만두고 그 다음엔 전보다는 낫겠지 싶은 곳으로 들어가 또 돈을 벌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회사를 그만두지 말라고 충고하는 쪽의 마음과 더 가까웠다. 특히나 나도 모르게 '요즘같은 세상에'라는 말이 입에 붙은 것마냥 나왔다. 한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며 사는 것이 정말 좋을까. '그래도 재밌었지' 같은 말이 통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인지 그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궁금한 것이 책을 얼마나 좋아하길래 책방을 할 수 있을까,이다. 책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역시 구매는 인터넷, 그도 아니면 대형서점, 심지어 중고책 마저도 대형서점에서 운영하는 매장을 들리는데 대체 얼마나 사랑해야 '좋아하는 일'로서의 업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일까. 문득 초등학교 시절부터 꿈을 물어보는 일을 그만해야 되겠다 싶어진다. 그때부터 내가 할 수 있는 현실적 직업 진로 탐색을 해야지, 항상 물어보는 것은 꿈뿐이고 나중에 되돌아보면 현실과 꿈 사이의 거리가 너무나 멀어서 쓸데없이 상처를 받는다. 어렸을 때 꿈이라고 꿀 수 있는 직업들은 몇몇의 인기 직종이 대부분을 차지하도록 한정적이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커서 이런 일을 하고 있을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직업을 만나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읽다가 새삼스러웠던 부분이 있었는데, '기다리는 건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75)'의 내용이었다. 책방에 와 줄 것이라 믿었던 지인들이 오지 않은 일을 두고 "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에게 마음이 없다(76) " 며 씁쓸함을 남겨둔 글이다. 지인이 개업한 가게를 인사,응원차 찾아가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은 하지만, 직장인으로만 살아봐서 그런지 내가 일하는 장소에 지인들이 찾아오는 일은 고맙지만 썩 편한 상황만은 아니어서 잘 몰랐던 생각이었다. 친구가 연 술집을 일년만에 가까스로 찾아갔던 적이 있어 그 애가 " 척 하지만 진짜 마음을 내어주기는 힘들다(76) "고 생각했을까봐 심란했다. 자신의 가게를 여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걸까 궁금해졌다. " 저도 책방이나 하면서 글이나 쓸까 봐요.(69)" 나 " 손님이 왔는데 책 설명 안 해 주시나요?(53) " 같은 말들을 헤치며 나아가다보면, 이런 손님들은 잘만 찾아오는데 위로가 되줄 친구가 안왔다면 마음이 퍽퍽해질수도 있으리라.

 

 재밌는 건 '시도와 실패(102)'라는 핵심어를 두고 확률 0%의 일을 50%로 올리기 위해 박보검과 사귈 확률에 관한 유명인의 말을 옮겨온 것이다. 멋진 태도이긴 한데, 본능적이라 할 만큼 박보검은 무슨 죄로 나의 성공 확률을 올려주기 위해 고백을 받아야 하는가 생각이 들었고, 어찌되었든 확률은 처음부터 끝까지 0% 아니었던가 싶었다. 무슨 값을 넣든 0만 나오는 자판기에 백번 천번 시도한다고 해서 1이 나올 일은 없는 것 아닌가. 안되는 일은 안되는 일로 놔둘 줄도 알아야 한다. 아마 사람 상대하는 일을 오랜 기간 해왔기 때문에 특히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면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안되면 되게하라'나 '일단 부딪혀보라' 같은 열정적 시도가 멀쩡한 메뉴얼 대로 일을 하는 서비스업 종사자들을 말려죽이는 행동지침이 됩니다. 본인 인생의 도전은 얼마든지 해도 좋지만 타인과 엮이는 일에서는 받아들이고 수긍할 줄도 압시다.

 

 현실과 가깝다가도 현실과 멀기도 한 것 같고, 읽는동안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이 책을 좋아해야할까 나랑 안 맞는다고 결론 지어야할까 가늠해보다, 나와 다른 사람이니 내 마음에 차는 글만 이어질 수는 없겠지하고 말았다. 마음에 드는 건 아닌데, 어떤 내용들은 또 공감도 되고 그랬다. 보통 책이 좋았는지 별로였는지 완벽하게 정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대충 정해본다.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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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혼자가 아닌 시간
코너 프란타 지음, 황소연 옮김 / 오브제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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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드디어 만났다. 내가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에세이를. 한동안 만난 몇 권의 에세이들은 꽤 괜찮았다. 나를 포함 책도 입맛대로 골라읽는 편인 사람들- 편독인들에게는 비선호 계열이 있기 마련인데, 나에게는 에세이가 그 중 하나였다. 그런데 최근에 읽은 에세이들은 이상하게도 읽는 족족 괜찮고, 재밌고, 공감도 되고 심지어 꽤 좋았었기 때문에 나의 '에세이 싫어'가 사실은 초장에 찍어서 먹는 브로콜리의 참 맛을 모르는 안타까운 편식같은 게 아니었나 의심했었다. 아니라고 하지만 사실 너는 에세이를 좋아하고 있었다, 같이. 하지만 '누구도 혼자가 아닌 시간'을 읽다보니 역시 그 마음에 들었던 몇 권이 우연히 찾은 나의 골든에세이가 아니었던가 싶어진다.  

 

 어쩌다보니 '누구도 혼자가 아닌 시간'을 진짜 혼자있는 시간에 읽었다. 들리는 소리는 가끔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말고는 없는, 옆집에서 간혹 들려오는 소음조차 없는 진짜 조용한 날에. 세련된 표지와 좋은 장정, 작가의 조금 남다른 이력말고는 그리 특별한 것이 없었다. 누군가는 이런 심심함을 사랑하고 공감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평범하고 흔하게 느껴졌다. 누군가 일기를 모아놓은 것 같다는 표현을 했는데, 읽기 전에는 그렇게 내밀한 내용이려나 싶었던 그 말이 책을 읽고 나니 그 유명한 일기는 일기장에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했다. 십여년 전 누군가의 싸이월드 다이어리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블로그 같은데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지나치게 차가운 감상만 늘어놓는 것 같아 어쩐지 미안해진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에 비해 얕고 통속적인 느낌이라 아쉬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보편을 꿰뚫는 깊이를 만나게 되길 기대했었는데. 인터넷 소설과 싸이월드 감성글, 페북 좋아요 같은 것들을 험난하게 거쳐온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경계해야 할 새벽감성 같은 것이 점철된 느낌이었다. 특히 238쪽에 있는 시? 아포리즘? 같은 글은 재빨리 다음장으로 손길이 넘어가게 만들었다. 아마도,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코너 프란타의 새 책이 그리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약간의 우울, 멜랑콜리한 감성을 느껴보고 싶은 10대, 20대라면 어쩌면 공감되거나 감성적으로 다가가는 책이 아닐까싶다. 좋게 말하면 세밀하고 순수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글들이 많다.  

 

 '누구도 혼자가 아닌 시간'을 계기로 내가 어떤 에세이들에 반응하는지 감이 좀 잡히게 된 것 같다. 먹고 살기 힘들다를 넘어 더럽다는 것을 온몸으로 경험한 비슷한 또래의 여성이 약간의 유머나 아이러니를 섞어 낸 글들이 좋은가보다. 고 짐작한다. 악질적인 편독가의 취향이 반영된 감상이니, 에세이를 좋아하는 너그러운 독자들은 개의치 않고 '누구도 혼자가 아닌 시간'을 읽어보길 바란다. 확실히 국내에서는 느낄 수 없는 외국 배경 특유의 감성을 느껴볼 수 있긴 했다. 반도가 아닌 대륙인의 생활상이 묻어난달까, 중서부 지역에서 자란 (177) 배경이나 샌프란시스코 외곽에서 바라보는 금문교(21)에 대해서 같이.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책이지만, 잘 맞는 독자들에게는 사랑받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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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씨 허니컷 구하기
베스 호프먼 지음, 윤미나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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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한테 내가 필요했던 날보다 나한테 네가 필요했던 날이 훨씬 더 많았어. (71) "

 

 제목이 무슨 뜻일까 생각했었다. 씨씨 허니컷이 이름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찾는다는 것 같기도 하고 구해준다는 것 같기도 한 말이 아리송했다. 소녀와 할머니, 복숭아 같은 단어를 살펴보면서 막연히 따뜻한 이야기겠거니, 생각해봤다. 막상 책을 읽으니 씨씨의 삶이 말 그대로 구해져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엄마도 아빠도 씨씨의 보호자가 되기를 포기했을때 누가 이 소녀를 구할 수 있을까 싶을 상황에 투티 할머니가 등장한다. 그녀는 말 그대로 씨씨 허니컷을 구한다. 아무 조건 없이, 마땅히 그애가 받았어야 할 관심과 사랑으로, 완벽하게.

 

 책을 읽으면서 다른 무엇보다 씨씨가 오델 할머니와 이별하게 되는 부분이 가장 마음 아팠고, 또 그래서 좋았다. 씨씨가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랑을 받았고, 또 오델 할머니의 삶에도 그애가 위안이 되었다는 게 좋았다. 오델 할머니와 함께 지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이별이 있다는 것도 알게 해줘서 좋았다. 투티 할머니와 떠나면서 혹시 갑자기 또 학대를 당하거나 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됐었는데, 그래서 끝까지 그애를 구해야만 하는 내용이 이어지면 어쩌나 싶었지만 씨씨가 만나게 된 모든 사람들이 (한두명을 빼면) 다 좋은 사람들이라 다행이었다. 

 

 배경이 되는 미국 남부에 대한 이미지는 다른 지역보다도 인종차별이 좀 더 심했던 것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올레타의 등장이 불안했다. 올레타가 씨씨에게 차갑게 대했기 때문에 앞으로 갈등이 생기게 될까 싶었다. 씨씨가 어리기 때문에 책에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올레타가 홉스 부인과 갈등을 겪는 내용처럼 흑인 차별의 뉘앙스가 조금씩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었다. 비슷한 느낌으로는 영화 '헬프'가 떠올랐다. 60년대 미시시피를 배경으로 흑인 가정부들에 대한 내용으로 올레타와 씨씨의 모습이 영화 속 에이블린과 스키터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인종 갈등에 대한 불안은 뜻밖에도 타이비 섬 해변에서 루카스 슬레이드(250)을 만나는 것으로 터져나왔다. '우리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우리 말을 믿어주지 않을거야'. 시간을 조금 뛰어넘어 80년대 말 9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한 영화 '델마와 루이스'가 떠올랐다. 성폭행을 당할 뻔 한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남자를 죽이게 된 두 여자가 도주를 결심하는 데에는 '우리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바탕이 되었다. 주류 사회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좌절되고 피해를 입고 있는지 보여준다. 60년 전의 흑인이, 30년 전의 여성이.  

 

 다행이도 이 강도 사건은 모두가 바라는대로, 올레타의 신앙심이 더욱 두터워질만큼 잘 해결되었지만, 그 뒤로도 그녀가 계속해서 모욕 당하고 (454) 차별 당하는 삶을 사는 것은 막지 못했다. 특히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홉스 부인이 한 공공연한 인종차별을 투티 할머니가 왜 방관했는지 모르겠다. 끝내는 평소에 사이가 안좋았던 굿페퍼 부인과의 싸움으로 화끈하고 시원한 마무리를 한 것으로 매듭지었는데, 투티 할머니가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평판이 그 행동에 대한 이유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씨씨 허니컷 구하기'에서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다. 

 

 괜찮은 성장소설이었다. 지나치게 말랑해서 무른 복숭아 같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씨씨가 가게 된 서배너는 미국의 남부 조지아 주의 도시로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배경이기도 한 곳이다. 50년~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와 67년도 엄마의 죽음을 기점으로 씨씨가 투티 할머니와 함께 서배너로 떠나게 된 시기(67년)도 비슷해서 영화 속의 서배너 풍경을 떠올리며 책을 읽었다. 씨씨의 극복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더 그려지지 않은 미래까지 희망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마무리되었다. 시나몬 롤과 복숭아를 떠올리며 읽을 수 있는 재미있고 감동적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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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눈
딘 쿤츠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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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기 전에는 저자에게 신이라도 내렸던가 싶었다. 코로나 19와 유사한 배경의 바이러스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쓸 생각을 했을까. 40년만의 잭팟이 터지다니. 그리고 중국의 어느 미친 과학자가 이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우한에서 바이러스를... 하는 음모론도 떠올렸다. 세상에 그렇지 않고서야 지역까지 콕 찝어 우한일 수가 있단 말인가. 책에서는 염력도 나오고 그러니 나의 음모론도 영 허무맹랑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막상 책을 손에 들고 나니 묵직한 두께감에 이걸 언제 다 읽나 걱정이 됐다. 하루이틀 덮어둔 책을 쏘다보다가 책을 들고 읽기 시작하니, 순식간이었다. 술술 읽혀서 1/4 정도 읽었을 때까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읽었다. 많아보였던 분량이 아무것도 아니게 생각됐다. 무엇보다 재밌었다. 단지 지금의 코로나 사태를 예견한 내용이 있다는 점만으로 역주행을 할 수 있었던 책은 아니었다. 어떤 내용인지 파악하기 위한 머리싸움이 필요없이 몰입해서 읽으면 될 뿐이었다.

 

 초반에 깔리는 으스스한 내용이 공포물인가 싶을 정도로 긴장감을 주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막힌 구석 하나 없는 빠른 사건 전개를 시원시원하게 따라가면서 오는 기분 좋은 스릴만 남는다. 계속 무서우면 밤에 불을 켜고 자려고 했는데 다행이었다. 크리스티나가 악몽을 꾸는 부분들은 먼 옛날 즐겨읽었던 '퇴마록'의 한 편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심약한 이를 마음 졸이게 했던 그 유명한 책의 국내편에 '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도다 ' * 의 내용이었다. 아마 추억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다소 허무맹랑한 설정이라 여길만한 부분들은 있지만, 그래도 매력이 더 많은 책이다. 강점 중 하나는 인물이었다. 책 속의 인물들이 복잡하거나 이중적인 면 없이 선악이 잘 드러났다는 점이 평면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저 단순하게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재미를 준다. 각 인물들에 맞는 결말을 갖게하는 권선징악적 구조도 좋았다. 세상이 험한데 소설 속에서라도 나쁜놈은 죗값을 치뤄야 제 맛. 주인공인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주체적인 여성이라는 점도 40년이 지나서도 수동적이지 않고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를 보여준다.  

 

 다만 꽤 마음에 들었던 시원시원한 전개는 장점이면서도 약점이었다. 안그래도 어려운 상황에 누구 한명이 말도 안되는 방해꾼 역을 해서 일을 꼬거나 하면 답답해서 하차하고 싶은 성질머리를 가졌는데, 이를테면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상황에서 안전한 쉘터에 잘 피해있는데 밖에서 누가 문 열어달랜다고 문 열어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도대체 왜 문을 열어주는가, 문 열어주면 꼭 감염자 한명이 딸려 들어와서 다 죽던데 영화도 안보나 싶은 울화가 치밀어서 그만보고 싶어지는데- 그런 전개가 없다. 다른 작품들도 이렇게 시원시원하다면 찾아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너무 시원시원하게 단 4일만에 거대비밀기관의 프로젝트를 다 파헤쳐버리는 과정이 아쉽기도 했다. 대니 없었으면 어쩔 뻔 봤는가. 모든 시작과 끝이 대니에서 대니에게로였다. 크리스티나와 엘리엇은 이용당했다!가 학계의 정설. 그리고 빠른 전개와 마무리가 어떤지 아쉬운 뒷맛을 남겼다. 이왕 분량이 400쪽을 훌쩍 넘길 것이면 500쪽이 넘든 600쪽이 돼서 두권이 되든 확실한 마무리를 보여줬어도 될텐데. 뒷심이 부족하다 느껴졌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큰 궁금함이었던 우한 폐렴에 대한 내용이야 큰 비중이 없이 흘러가듯 언급됐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로빈 쿡의 '돌연변이'라는 책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 책도 책장이 어찌 넘어가는지 모를만큼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나니 '어둠의 눈'을 재밌게 읽었다면 구해서 읽어봐도 좋겠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읽었는데 기대 이상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동안 읽어 볼 교양서로 추천해본다.

 

*바흐 칸타타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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