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를 날리면 - 언론인 박성제가 기록한 공영방송 수난사
박성제 지음 / 창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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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뉴스는 보도국과 디지털뉴스국이 알아서 만든다. 기자들은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소신껏 기사를 쓴다. 데스크와 국장은 그것을 고치거나 손볼 수 있다. 그러나 사장은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MBC는 그런 언론사다. (17) "


 언론기관에 종사한 저자가 쓴 책이니만큼 우리가 경험해 온 굵직한 사건들을 하나씩 조명하며 조금 더 깊숙이 전달해준다. 잊었던, 혹은 담아두었던 사건들이 기억속에서 끌려나올 때마다 새삼스럽고 충격적이다. 그 시간들을 다 지나와서 또 지금 이런 현실이라니.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서일까 우리가 어리석고 이기적인 탓일까. 


 광화문에 볼일이 있어 다녀올 적이면 하루에도 진영을 나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있는지 놀랍다. 정말 이 많은 사람들이 서로 극렬히 대치된 저마다의 신념에 뿌리를 두고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이들이 이렇게 행동하게 된 바탕에는 언론의 영향도 크다고 생각한다.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검증되지 않은 자극적인 보도들. 어떤 종편 채널에선 사담으로도 나누지 않을 내용을 출연진들이 앉아 방송으로 내보낸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언론의 태도가 천차만별이라 당황스러울 정도이다. 지금 뉴스를 볼 때면 빙산의 일각만이 주어지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익이 눈을 가리면 입도 거짓을 말하는 데 부침이 없는 것일까. 책에서도 '블랙리스트'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는데 요즘의 행보를 보면 없어지지 않은 리스트가 다시 채워질 흐름을 보인다. 그 자체를 부정하면서 더욱 천연스럽게.


 가볍지 않은 내용인데 어느샌가 페이지가 줄어있다. 홀리듯이 책을 읽어나가게 되는 것이 확실히 문장이 명료하고, 사건들이 일부러는 아니어도 자극적인 면이 있어 기대보다 흥미롭게 읽었다. 예상하기로는 감성을 좀 팔고 딱딱한 내용이 될까 싶었는데, 현란하게 돌아가는 최근 국정과 언론의 행보에 '이 시기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는 내용만 담아도 책장이 금방 넘어갔다. 


 " 그렇다면 좋은 언론은 어떤 사명을 추구해야 하는가. 많은 언론인들이 '권력을 감시하고, 사회적 약자를 대변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하다. 마치 '학생은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린다. 나는 거기에 '인권을 수호하고, 전쟁이 아닌 평화를 지향하며, 지구 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을 더하고 싶다. (200) "


 마치 인기 영화 시리즈의 슈퍼히어로가 할만한 대사같다고 생각했다. 언론이 권력 감시와 약자 대변의 기능만 해줘도 대중들은 차고도 넘치게 만족할텐데. 학생이 공부 열심히 하기도 힘든 것은 맞으니까. 책을 읽는 동안, 그리고 짧은 서평을 쓰면서도 조심스러웠지만, 저자의 바람처럼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언론이 언론인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단 희망찬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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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야 할 세계 - 제13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문경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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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이 단순해졌지만 반복되는 일상이 딱히 지겹지는 않았다. 감정마저 뭉툭해져서 이제는 외로움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일이 오래전 추억 같았다. 자신을 동여매고 있던 감정의 매듭들이 헐거워진 게 나쁘지 않았지만 살을 파고들던 서릿발 같은 마음들이 이따금 그립기도 했다. (16) "


 '사랑이 우스운 나이까지 단숨에 흘러가길' 바란다는 노래가사를 두고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곤 했다. 딱히 사랑만이 아니라 속을 복잡하게 하는 감정과 관계들에게서 조금은 거리를 둘 수 있는 시간이 흘러갔으면 바라기도 하고, 혹은 나이를 먹으면 정말 점차로 무던해지게 될까 궁금했다. 책을 읽다 '외로움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일이 오래전 추억 같'다는 문장을 보고 같은 말을 하는구나, 나는 언제쯤 공감하게 될까 싶었다.


 가제본이 도착했을때, 주어진 분량은 길지 않았다. 금방 읽겠구나, 싶었는데 100쪽도 채 되지 않는 일부분만을 손에 들고도 한참을 천천히 읽었다. 문장이 섬세하고 힘이 있었던 까닭이다. 삶에서 짜여져 나온 문장들은 어느 것 하나 가볍지 않았다. 시선이 예사로 지나는 것을 막고 한글자씩 오롯이 읽도록 이끌었다. 시종일관 무겁고 심각한 눈으로 읽었는데 책의 내용 때문만이 아니라 요즘 계속되는 사건과 현상의 무게감 때문이기도 했다. 


 생각하기로는 학교에서 선생님의 권한으로 '전방위적인 교육'이 이루어진 거의 마지막 세대일 것이다. 머리길이나 교복 등 품행에 대한 단속과 규정, 체벌이 허용되었고 교권의 위기보다 학생의 인권이 더욱 흐리던 때를 지나온 이미 낡은 세대라 요즘 뉴스를 보면 놀랍기만 하다. 낡고 고루한 소리만 무신경하게 내뱉는 어른은 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옛날과 비교하려는 자신이 튀어나온다. 하물며 실제로 교사 출신인 작가는 무엇을 무엇으로부터 '지켜야 할 세계'로 바라보았을까 궁금했다. 


 방직 공장의 여공들과 함께 싸우던 엄마를 둔 윤옥도 싸우는 사람이 되었다. 사복경찰에게서 정훈을 도망시키던 무모했던 여대생에서, 지호를 찾으러 원주로 내려간 누나에서, 시영의 담임이 되어주고 싶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어 아이들과 멋진 수업을 연주하고 싶은, 학교라는 장소에서 싸우는 교사가 되었다. 더불어 기주와의 재회를 기점으로 동생 지호를 입양 보내야 했던 과거가 풀어지며 윤옥의 안에 맺혀있는 '한풀이(19)'가 무엇일지 깨닫게 되었다.


 짧지 않게 읽어낸 분량이 역시나 너무 짧아 아쉽게 느껴질만한 흡입력이었다. 윤옥의 쓸쓸한 마지막으로 가기까지 아직 못다한 많은 이야기들이 남아있어 뒷이야기가 궁금하기만 하다. 다소 무거울 것 같은 인상이지만 일단 읽어보면 그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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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인생은 흐른다 - 이천 년을 내려온 나를 돌보는 철학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지음, 김한슬기 옮김 / 페이지2(page2)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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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독서가들이 그렇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인상깊은 부분이나 의문이 생기는 곳에 표시를 해두거나 따로 메모를 하기도 할 것이다. 나의 경우엔 전에는 일일이 책갈피를 꼽아두기도 했는데 나중에 정리하며 떼는 것도 손이 많이 가고 표시 테잎도 낭비되는 것 같아 요즘은 핸드폰으로 그때그때 사진을 찍거나 따로 적어둔다. 왜 이런 얘기를 꺼내냐면, '그럼에도 인생은 흐른다'를 읽으면서 표시하고 싶은 부분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인상적인 부분을 일일이 따로 남겨두려다 책의 모든 부분을 필사하는 것과 다름없어질 것 같아 그저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새로 어떤 책을 읽기로 마음 먹었을 때 재미있을 것 같다, 취향에 맞을 것 같다는 가늠을 어느 정도 해보는데 예상을 뛰어넘어 마음에 들었다. 다만 읽는 내내 요즘말로 순살이 되도록 맞는 기분을 느꼈다. 이렇게 맞는 말만 아프게 때려넣어도 되는걸까. 읽다보면 이 문장에도 맞고, 저 문장에도 맞아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한숨을 쉬다가 이 정도면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게 맞나, 나잇값은 하고 있나, 성인으로써 이대로 괜찮은가 끝없는 반성에 들어가게 된다.  


 " 자신조차 못한 일을 타인에게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애정을 찾는 행동은 우정이 아닙니다. 혼자서는 견디기 힘드니 타인에게 기대려는 행위일 뿐입니다. (23) "


 " 인간은 자기 재산을 넘보는 사람을 가만히 두고보지 못합니다. 누군가 자기 땅을 조금이라도 넘어오려고 하면 주저하지 않고 돌을 들고 무기를 휘두릅니다. 하지만 타인이 자기 인생을 침범하도록 내버려 둡니다. 심지어 인생 전체를 순순히 남의 손에 넘겨주기도 합니다. 단 몇 푼이라도 돈을 내어주는 일은 꺼리면서 삶을 내어주는 데는 주저함이 없습니다. 재산에는 인색하면서 시간을 나누는 데는 거리낌이 없으니, 정작 아껴야 할 것을 낭비하고 있는 꼴이 아닙니까? (24) "


 정말 책의 초반에 나오는 내용인데 벌써 뼈도 멘탈도 가루가 되어 버린 기분이다. SNS 줄이겠습니다. 타인의 평가에, 좋아요에 자아를 의탁하는 일희일비를 하지 않겠습니다.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싶어진다. 솔직히 제목은 '그럼에도 인생은 흐른다'고 이래도 저래도 지나갈 일은 지나가기 마련이라는 조금은 물렁한 느낌을 주는데, 반대로 내용은 맵다. 이천 년을 내려온 철학이 얼마나 '지금'에 반영될 수 있겠냐며 얕보았다가 이천 년동안 변치 않고 사람을 야무지게 패주는 던 경력에 압도되었다. 요즘 멘탈이 좀 풀렸다거나, 따끔한 자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읽으면 정신이 번쩍 들 것이다.   


 누군가는 여전히 이 책이 고루한 소리만 늘어놓는 것은 아닐까 의심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부는 틀림없이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161)' 현실성도 잡고 있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거의 다이다'는 농담을 진담과 다름없이 하는 요즘 세대가 봐도 공감할만한 어조다. 개인적으로 책장에 쌓인 책들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책을 사서는 안 됩니다', '평생 동안 제목조차 다 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책을 쌓아둔 서재가 다 무슨 소용입니까? 거대한 책 더미는 가르침이 아닌 부담을 줄 뿐입니다. (227)'는 내용도 그냥 넘기기 어려웠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책 사다놓고 안 읽는 사람'의 호칭을 정하는 글을 본 적 있는데, 그에 따르면 소장학파이자 책곰팡이인 입장에서 '비우기'를 실천하지 못한 미련이 또 한 번 들쑤셔졌다. 


 정말 공감되고, 마음을 후벼파는 내용이 많은 책이다. 겉표지나 제목을 보고 다소 딱딱하게 느껴지거나 재미없을지도 몰라 선뜻 읽을 시도를 하기 어렵다면 부담을 내려놓아도 괜찮겠다. 각 장이 1~2 페이지 정도 분량으로 짧게 되어 있어 생각보다 읽기 수월하고, 어조가 냉랭하여 자기계발서 같이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감이 없이 짧게 일침을 놔주는 느낌이다. 지금 다시 보니 표지에 '어느 철학자의 차가운 위로'라고 쓰여진 문구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염려를 내려놓고 가볍게 하루에 한두장 정도 읽으며 그날의 자기반성을 해봐도 좋겠다. 마음은 조금 괴롭지만 연말이 다가오며 느슨해진 정신에 기강 잡는 시간도 필요하니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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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 창비청소년문학 122
이희영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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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런데 형은 양배추를 좋아했을까? (98) "


 처음엔 13살 차이나는 쌍둥이와도 같은 형을 잃은 '혁'이의 성장통을 담은 이야기인가 싶었다. 책안에 품은 세 갈래의 큰 내용 중 한 부분인것은 맞지만 생각보다 우울한 분위기로 흐르지는 않았다. 형과 같은 교복을 입은 나를 보는 부모님, 그리고 형을 아는 사람들의 반응에서 언제나 형이라는 존재를 그림자처럼 붙이고 다녀야 하는 혁이 부담스럽지는 않을지 염려도 되었다. 하지만 읽을수록 혁이는 형의 존재를 의지하고 궁금해하는 쪽에 더 가까워서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형, 진이의 흔적을 함께 따라갈 수 있었다. 혁이 진이에 대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사람은 여러가지 면을 가지고 있고 누군가에 대한 정의는 각자가 주워든 작은 조각들에 지나지 않는 다는 걸 실감했다. 


 " 형에 대해 모두가 조금씩 다른 기억을 지녔다면 선생님의 눈에 비친 선우진이란 사람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기억은 시간에 의해 깎이고 마모됐겠지만 남아 있는 작은 흔적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189) " 형과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간 혁은 '가우디'라는 가상현실에서 형의 흔적을 찾게 된다. 부모님, 형의 친구, 형을 아는 선생님들 모두가 형을 알지만 형에게 숨겨져 있는 세상이 있었다는 사실은 모른다. 유일한 공유 친구 '곰솔'만이 그 세상을 안다. 형이 사라진 4140일간의 세계를 혼자서 지켜온 곰솔은 누구일까? 모두가 가진 형의 조각을 모으고 나면 혁은 기억도 희미해진 형에 대해 조금은 더 알게 될 수 있을까?


 사람에게 여러가지 모습이 있듯이, 책 안에서도 여러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여러 면에 대한 내용이 책의 세 줄기 중 하나기도 했다. 언제나 잘 관리된 진이의 방을 그려볼 때면 그리움과 슬픔의 맛, 형의 흔적을 찾아 곰솔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과정에선 미스터리어스 한 맛, 도운이의 고백을 들을 때면 코끝이 짠한 맛, 곰솔이 쓴 편지의 내용을 하나씩 읽을 때면 달고 씁쓸한 풋사랑의 맛을 음미한다. 읽고 나면 한동안 여기저기 남아있는 맛의 여운을 음미하게 된다. 끝맛은 아릿한 희망을 닮았다. 과거를 회상하기에도, 혹은 그 시기만의 감수성을 끌어올리기에도 좋은 책이었다. 

 

 책 안의 '학교란 시간마저 멈춰 버린 곳(28)'이란 표현이 인상적이다. 가끔 아주 오래 전 지나온 시간들을 떠올리면 그 시절이 소중한 줄 모르고 흩어보낸 것 같단 생각을 한다. 예전엔 공감하지 못했지만 지금 버스나 거리에서 학생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면, 그때 어른들이 왜 '좋을 때'라고 입을 모아 말했는지 이제는 이해한다. " 십 년 가까이 학생으로 살아오면 알게 된다. 학교란 클리셰 범벅이어도 관객몰이에 곧잘 성공하는 액션 영화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모든 장면이 너무 뻔해 지루하지만, 적당히 긴장감도 있고 분주하며 가끔은 생각지 못한 일들도 일어나니까. (11) " 십 년 가까이 학생으로 살아올 때는 학교가 클리셰 범벅의 액션 영화 같겠지만, 십 년 이상 지나보낸 어른의 눈에 학교는 언제 틀어도 좋은 명화 같다. 좋은 영화는 언제나 관객에게 저마다의 감상을 남겨주는 법이다.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의 매력 중 하나는 사이의 미묘한 감정 흐름, 관계의 거리감, 누군가의 이면 같은 복잡한 문제를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봐준다는 것이다. 과한 얼룩을 만들어내 눈을 현혹하지 않고도 집중을 이끌어내고 공감을 얻어낸다. 개인적으로는 도운이와 혁이 서로를 '길들여가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낚시를 하는 조용한 시간을 함께 나누며 내 마음을 좀 더 열어도 괜찮겠다는 우정을 쌓아가는 모습이 마치 어린왕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약간의 부딪힘 마저도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위한 밑바탕으로 만드는 솔직함이 부럽기도 했다.   


 " "그렇게 친구들이랑 왁자지껄 어울리다 보면......" 녀석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심리적으로 지칠 때가 있어. 그럴 땐 이렇게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 "그거 알아? 인간도 방전되는 거. 그때는 꼭 충전해 줘야 한다?" (183) "


 새롭게 친해진 관계에서 누군가 나를 두고 벽을 치는 사람, 모임이 끝나고 난 뒤에는 관계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나는 '도운'처럼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방전이 되어 버리곤 했다. 지금보다 더 어리고 유연하지 못했던 때 자신이 소진되듯이 에너지가 고갈되는 것이 싫어, 아무리 애써도 만나서 헤어지고 난 뒤의 시간마저 쏟아내기 힘들어, 적당한 거리를 둔다는 게 저런 평을 만들어냈던 것 같다. 그때는 꽤 당황스러웠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상대방 나름의 섭섭함 표시였던지도 모른다. 요즘은 내향성 외향성이란 성향유형이 유행해서 이런 차이를 재미로라도 많이 알고 있지만 그때는 혼자만의 시간을 더 필요로 하는 성향을 벽을 치는 것으로 느꼈을지도 모른다. 


 " 그런데 너는 영원히 열여덟에 갇혀 버렸구나. (207) "


 한동안은 밝은 분위기의 해피엔딩이 예상되는 컨텐츠만 소비하려고 했었다. 세상이 워낙 심란해 창작의 영역에서는 어두운 내용을 만나고 싶지 않았었다. 그 버릇이 아직 남아있어 진이의 부재로 필연적인 슬픔을 담고 있는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를 읽으면서 마음 한 쪽이 무겁기도 했다. " 메타버스에서 퇴장하듯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형은 두 번 다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입장하지 못했다. 그것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고작 다섯 살이었던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23) " 누군가의 죽음이 이런 느낌으로 남겨질 수도 있구나, 요즘은 게임 캐릭터도 만들고, 메타버스의 아바타도 있으니 죽음도 가상 공간의 접속을 종료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겠구나 문득 깨달았다. 그럼 서비스 종료는 세상의 종말과 같을까.


 책의 핵심인 세 줄기 중 마지막 하나는 곰솔과 진의 관계였는데 읽는 내내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분위기가 좋았다.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을 공유한 두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비밀리에 둘만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관계성이 예쁘게 그려졌다. " 만약 갈 수 있다면 꼭 도록 한 권을 사고 싶었어. 그리고 전시회를 관람한 후에 밖으로 나와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거야. 미술관 입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달라고. 그렇게 부동 자세로 카메라를 향해 엄청 어색한 미소를 짓는 거지. 하지만 아무 의미 없을 거야. 내 옆에 더는 네가 없을 테니까. (89) " 그리고 그 관계의 끝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 옅은 수채화같은 풍경에 먹먹함을 더한다.


 " 나는 내 미래에 이 두 갈래 길만 존재한다고 믿었어. 너와 함께하거나, 아니면 자연스레 멀어지거나. 그 외에 다른 길이 있을 줄은 전혀 예견하지 못했지. 어떻게 그 엄청난 결말을 상상할 수 있겠어. (161) " 상상할 수 없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미래와, 이미 과거가 된 상실이 교차하며 곰솔과 진이 간직한 둘만의 접점이 예쁜만큼 안타까워진다. 다 피어내지 못하고 스러진 첫사랑의 순간을 배우들의 감정을 담은 연기로 표현하는 장면을 보면 더욱 몰입이 잘 될 것 같아 읽으면서 이 책이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교실과 복도에서 눈인사조차 나누지 않는 우리가 이렇듯 한 공간에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야. "너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어." 내가 말했지. 너는 그제야 고개 들어 나를 보았어. "나도 나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어." 네 아바타가 빙긋이 웃었어. 두 눈이 사라지는 미소를 보며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지. 내 헤드셋에도 열 센서가 작동할 것 같았거든. 누군가를 마음에 담아 두는 일은, 타인이 아닌 낯선 스스로를 만나는 시간인 것 같아. 그 사실을 너를 통해 배웠어. (121) "


 "결국 모든 작품은, 저만 보고 느낄 수 있는 백의 공간에서 탄생한다고 봐야죠.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백의 공간이 있습니다. 남들은 볼 수 없는, 어쩌면 이해시킬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 말이죠. 숲은 또 하나의 백의 공간입니다. 인간의 감각과 언어로는 완벽하게 그 세상을 볼 수 없으니까요. (141) "


 존재하는지 몰랐던 '이런 면' 과 자신만의 '백의 공간', 그 고유한 세계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것인지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언뜻 하루키의 '사람은 누구나 태엽감는 새'(태엽감는 새.1995.문학과사상)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타인에게 나를 이해시킬 수도 없다. 우리는 서로를 오독한 채 이해했다 여기며 미소짓거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끝없이 갈구하다 체념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동안은 그 단절을 실감하고 캔버스에 담긴 화가의 의도와 세계를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그 안에 들어갈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치부해버렸던 시기도 있었다. 지금은 보이는 세계를 내 식으로 바라봐도 틀린 것이 아니라 확장이 될 수 있다고 마음을 바꿨지만 볼 수 있고, 없음에 고민했던 시기와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어 한참 머물렀던 부분이었다.  


 " 부조는 그 나름의 분명한 아름다움이 있다. 부조 작품을 보며 누구도 조각된 면 너머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타인이 보여 주는 모습을 존중하되, 그것이 전부라 단정 짓지 않으면 된다. 좋은 인상을 주었든, 나쁜 이미지로 남든 간에 말이다. (234) " 이 뒤로 이어지는 문장들이 어쩌면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의 가장 안쪽에 숨겨놓고 싶었던 단단한 알맹이가 아니었을까. 책을 읽으며 따라갔던 세 가지 큰 흐름들 중에서도 가장 진한 여운을 남기도록, 알 수 없는 울퉁한 껍질 속에, 달콤한 과육 안에 자리잡은. 상대방에 대해 온전히 알기 위해 다가갈수록 몰랐던 면들을 발견하게 되고, 나 자신에게도 다 드러내지 못한 수많은 모습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과정들이 이해이고 사랑이고 삶임을 음미한다. 


 " 나는 그렇게 너의 정원을 돌보기 시작했어. (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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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은 창백한 손으로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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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펼치자 책장안에서 광고용으로 끼워넣은 듯한 작은 책자 하나가 보였다. 가끔 출판사에서 신간을 소개하는 안내지를 끼워놓기도 하듯이. 책틈이 그대로 벌어질까봐 우선 그것부터 빼내었다. '낙원의 기억' 본편의 외전이었다. 10장도 채 안되어보이는 얇고 작은 외전이 따로 들어있다는 것부터 기대되기 시작했다. 기왕 찾은 김에 그어둔 선을 하나 넘기로 했다. 외전부터 읽어보기로. 티코, 만우절, 학주가 이어지면서 김이 살짝 샜다. 오래된 유머와 더 오래된 풍경이 그려지는 듯한 전개였다. 마지막 한 줄로 그 전형적인 장면을 비틀어 내기 전까지는. 갑자기 본편의 내용이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외전을 먼저 읽는게 맞았을까? 마지막에 읽는게 맞았을까? 


 생각해보니 그 짧은 외전에 인물과 상황, 흐름이 충분히 그려지는 내용을 담아냈다는 것이 '낙원은 창백한 손으로'를 더욱 기대하게 만들었다. 마치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의 시작이 15년 전 사소한 하루의 풍경에서 비롯되었음을 알린다. 문득 그저 유희거리에 불과한 뒷말이 15년의 감금과 복수로 이어지게 된 영화 '올드보이'가 떠오르며 기대감을 부풀린다. 이런 도입부를 만들어낸 저자에게 충분한 여백이 더 주어진다면 또 얼마나 탄탄한 세계를 표현했을까. 그런데 그게 스릴러라면?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설렐만한 작품의 등장이다. 


 " 둘 중 반드시 범인이 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죽어버렸으니까. (115)"


 살인사건이 벌어진 현재와 15년 전 민재, 도진, 이한, 서현, 윤석의 유쾌한 과거가 오가며 둘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걸까 궁금해지게 만든다. 강력반 형사인척 하며 호프집 사장을 속여 밀린 알바비를 받아내는 연극을 펼치던 패거리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15년이 지나고 난 뒤에도 계속 되는 죽음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흉흉한 소문이 도는 에덴 병원, 그곳에서 민재와 이한이 본 것은 무엇일까 점차 긴장감이 더해지며 내용에 몰입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굳이 그런 곳을 가보자고 나선 민재의 경솔함이 피곤했다. 공포영화를 보면 금기를 어겨서 모두를 위험하게 만드는 역인데, 이런 역할이 없으면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겠지만 '굳이 왜 저런 행동을 하지?' 싶은 인물이기도 하다.


 어떤 부분은 다소 촌스러운 에피소드인 것 같지만, 장기자랑으로 핑클의 무대를 할 정도의 과거임을 감안하면 고증을 잘 한 것도 같다. 그 시절 감성이 정말 그랬던가 싶다. 초반에 흥미로웠던 흐름에 비해 뒤로 가면서 어떤 흐름이 이어질지 예상이 되기도 하지만,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게 만드는 매력도 있다. 장편이지만 빠른 호흡으로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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