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 창비청소년문학 122
이희영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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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런데 형은 양배추를 좋아했을까? (98) "


 처음엔 13살 차이나는 쌍둥이와도 같은 형을 잃은 '혁'이의 성장통을 담은 이야기인가 싶었다. 책안에 품은 세 갈래의 큰 내용 중 한 부분인것은 맞지만 생각보다 우울한 분위기로 흐르지는 않았다. 형과 같은 교복을 입은 나를 보는 부모님, 그리고 형을 아는 사람들의 반응에서 언제나 형이라는 존재를 그림자처럼 붙이고 다녀야 하는 혁이 부담스럽지는 않을지 염려도 되었다. 하지만 읽을수록 혁이는 형의 존재를 의지하고 궁금해하는 쪽에 더 가까워서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형, 진이의 흔적을 함께 따라갈 수 있었다. 혁이 진이에 대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사람은 여러가지 면을 가지고 있고 누군가에 대한 정의는 각자가 주워든 작은 조각들에 지나지 않는 다는 걸 실감했다. 


 " 형에 대해 모두가 조금씩 다른 기억을 지녔다면 선생님의 눈에 비친 선우진이란 사람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기억은 시간에 의해 깎이고 마모됐겠지만 남아 있는 작은 흔적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189) " 형과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간 혁은 '가우디'라는 가상현실에서 형의 흔적을 찾게 된다. 부모님, 형의 친구, 형을 아는 선생님들 모두가 형을 알지만 형에게 숨겨져 있는 세상이 있었다는 사실은 모른다. 유일한 공유 친구 '곰솔'만이 그 세상을 안다. 형이 사라진 4140일간의 세계를 혼자서 지켜온 곰솔은 누구일까? 모두가 가진 형의 조각을 모으고 나면 혁은 기억도 희미해진 형에 대해 조금은 더 알게 될 수 있을까?


 사람에게 여러가지 모습이 있듯이, 책 안에서도 여러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여러 면에 대한 내용이 책의 세 줄기 중 하나기도 했다. 언제나 잘 관리된 진이의 방을 그려볼 때면 그리움과 슬픔의 맛, 형의 흔적을 찾아 곰솔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과정에선 미스터리어스 한 맛, 도운이의 고백을 들을 때면 코끝이 짠한 맛, 곰솔이 쓴 편지의 내용을 하나씩 읽을 때면 달고 씁쓸한 풋사랑의 맛을 음미한다. 읽고 나면 한동안 여기저기 남아있는 맛의 여운을 음미하게 된다. 끝맛은 아릿한 희망을 닮았다. 과거를 회상하기에도, 혹은 그 시기만의 감수성을 끌어올리기에도 좋은 책이었다. 

 

 책 안의 '학교란 시간마저 멈춰 버린 곳(28)'이란 표현이 인상적이다. 가끔 아주 오래 전 지나온 시간들을 떠올리면 그 시절이 소중한 줄 모르고 흩어보낸 것 같단 생각을 한다. 예전엔 공감하지 못했지만 지금 버스나 거리에서 학생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면, 그때 어른들이 왜 '좋을 때'라고 입을 모아 말했는지 이제는 이해한다. " 십 년 가까이 학생으로 살아오면 알게 된다. 학교란 클리셰 범벅이어도 관객몰이에 곧잘 성공하는 액션 영화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모든 장면이 너무 뻔해 지루하지만, 적당히 긴장감도 있고 분주하며 가끔은 생각지 못한 일들도 일어나니까. (11) " 십 년 가까이 학생으로 살아올 때는 학교가 클리셰 범벅의 액션 영화 같겠지만, 십 년 이상 지나보낸 어른의 눈에 학교는 언제 틀어도 좋은 명화 같다. 좋은 영화는 언제나 관객에게 저마다의 감상을 남겨주는 법이다.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의 매력 중 하나는 사이의 미묘한 감정 흐름, 관계의 거리감, 누군가의 이면 같은 복잡한 문제를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봐준다는 것이다. 과한 얼룩을 만들어내 눈을 현혹하지 않고도 집중을 이끌어내고 공감을 얻어낸다. 개인적으로는 도운이와 혁이 서로를 '길들여가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낚시를 하는 조용한 시간을 함께 나누며 내 마음을 좀 더 열어도 괜찮겠다는 우정을 쌓아가는 모습이 마치 어린왕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약간의 부딪힘 마저도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위한 밑바탕으로 만드는 솔직함이 부럽기도 했다.   


 " "그렇게 친구들이랑 왁자지껄 어울리다 보면......" 녀석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심리적으로 지칠 때가 있어. 그럴 땐 이렇게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 "그거 알아? 인간도 방전되는 거. 그때는 꼭 충전해 줘야 한다?" (183) "


 새롭게 친해진 관계에서 누군가 나를 두고 벽을 치는 사람, 모임이 끝나고 난 뒤에는 관계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나는 '도운'처럼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방전이 되어 버리곤 했다. 지금보다 더 어리고 유연하지 못했던 때 자신이 소진되듯이 에너지가 고갈되는 것이 싫어, 아무리 애써도 만나서 헤어지고 난 뒤의 시간마저 쏟아내기 힘들어, 적당한 거리를 둔다는 게 저런 평을 만들어냈던 것 같다. 그때는 꽤 당황스러웠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상대방 나름의 섭섭함 표시였던지도 모른다. 요즘은 내향성 외향성이란 성향유형이 유행해서 이런 차이를 재미로라도 많이 알고 있지만 그때는 혼자만의 시간을 더 필요로 하는 성향을 벽을 치는 것으로 느꼈을지도 모른다. 


 " 그런데 너는 영원히 열여덟에 갇혀 버렸구나. (207) "


 한동안은 밝은 분위기의 해피엔딩이 예상되는 컨텐츠만 소비하려고 했었다. 세상이 워낙 심란해 창작의 영역에서는 어두운 내용을 만나고 싶지 않았었다. 그 버릇이 아직 남아있어 진이의 부재로 필연적인 슬픔을 담고 있는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를 읽으면서 마음 한 쪽이 무겁기도 했다. " 메타버스에서 퇴장하듯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형은 두 번 다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입장하지 못했다. 그것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고작 다섯 살이었던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23) " 누군가의 죽음이 이런 느낌으로 남겨질 수도 있구나, 요즘은 게임 캐릭터도 만들고, 메타버스의 아바타도 있으니 죽음도 가상 공간의 접속을 종료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겠구나 문득 깨달았다. 그럼 서비스 종료는 세상의 종말과 같을까.


 책의 핵심인 세 줄기 중 마지막 하나는 곰솔과 진의 관계였는데 읽는 내내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분위기가 좋았다.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을 공유한 두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비밀리에 둘만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관계성이 예쁘게 그려졌다. " 만약 갈 수 있다면 꼭 도록 한 권을 사고 싶었어. 그리고 전시회를 관람한 후에 밖으로 나와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거야. 미술관 입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달라고. 그렇게 부동 자세로 카메라를 향해 엄청 어색한 미소를 짓는 거지. 하지만 아무 의미 없을 거야. 내 옆에 더는 네가 없을 테니까. (89) " 그리고 그 관계의 끝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 옅은 수채화같은 풍경에 먹먹함을 더한다.


 " 나는 내 미래에 이 두 갈래 길만 존재한다고 믿었어. 너와 함께하거나, 아니면 자연스레 멀어지거나. 그 외에 다른 길이 있을 줄은 전혀 예견하지 못했지. 어떻게 그 엄청난 결말을 상상할 수 있겠어. (161) " 상상할 수 없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미래와, 이미 과거가 된 상실이 교차하며 곰솔과 진이 간직한 둘만의 접점이 예쁜만큼 안타까워진다. 다 피어내지 못하고 스러진 첫사랑의 순간을 배우들의 감정을 담은 연기로 표현하는 장면을 보면 더욱 몰입이 잘 될 것 같아 읽으면서 이 책이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교실과 복도에서 눈인사조차 나누지 않는 우리가 이렇듯 한 공간에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야. "너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어." 내가 말했지. 너는 그제야 고개 들어 나를 보았어. "나도 나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어." 네 아바타가 빙긋이 웃었어. 두 눈이 사라지는 미소를 보며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지. 내 헤드셋에도 열 센서가 작동할 것 같았거든. 누군가를 마음에 담아 두는 일은, 타인이 아닌 낯선 스스로를 만나는 시간인 것 같아. 그 사실을 너를 통해 배웠어. (121) "


 "결국 모든 작품은, 저만 보고 느낄 수 있는 백의 공간에서 탄생한다고 봐야죠.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백의 공간이 있습니다. 남들은 볼 수 없는, 어쩌면 이해시킬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 말이죠. 숲은 또 하나의 백의 공간입니다. 인간의 감각과 언어로는 완벽하게 그 세상을 볼 수 없으니까요. (141) "


 존재하는지 몰랐던 '이런 면' 과 자신만의 '백의 공간', 그 고유한 세계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것인지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언뜻 하루키의 '사람은 누구나 태엽감는 새'(태엽감는 새.1995.문학과사상)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타인에게 나를 이해시킬 수도 없다. 우리는 서로를 오독한 채 이해했다 여기며 미소짓거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끝없이 갈구하다 체념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동안은 그 단절을 실감하고 캔버스에 담긴 화가의 의도와 세계를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그 안에 들어갈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치부해버렸던 시기도 있었다. 지금은 보이는 세계를 내 식으로 바라봐도 틀린 것이 아니라 확장이 될 수 있다고 마음을 바꿨지만 볼 수 있고, 없음에 고민했던 시기와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어 한참 머물렀던 부분이었다.  


 " 부조는 그 나름의 분명한 아름다움이 있다. 부조 작품을 보며 누구도 조각된 면 너머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타인이 보여 주는 모습을 존중하되, 그것이 전부라 단정 짓지 않으면 된다. 좋은 인상을 주었든, 나쁜 이미지로 남든 간에 말이다. (234) " 이 뒤로 이어지는 문장들이 어쩌면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의 가장 안쪽에 숨겨놓고 싶었던 단단한 알맹이가 아니었을까. 책을 읽으며 따라갔던 세 가지 큰 흐름들 중에서도 가장 진한 여운을 남기도록, 알 수 없는 울퉁한 껍질 속에, 달콤한 과육 안에 자리잡은. 상대방에 대해 온전히 알기 위해 다가갈수록 몰랐던 면들을 발견하게 되고, 나 자신에게도 다 드러내지 못한 수많은 모습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과정들이 이해이고 사랑이고 삶임을 음미한다. 


 " 나는 그렇게 너의 정원을 돌보기 시작했어. (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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