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오늘을 살다 -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나를 지켜내는 심리학
가토 다이조 지음, 이영미 옮김 / 나무생각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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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씻기 전에 세면대 앞의 거울에 서서 시간을 들여 얼굴을 뜯어보았다. 때때로 거울로 얼굴을 살피곤 하지만 보통은 잡티가 늘었는지 혹은 주름이 깊어졌는지 같은 것을 생각하곤 했다. 이번은 내가 어떻게 보일지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 ! 그럴 수 있을까- 보려고 했다. '불혹이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Abraham Lincoln "After 40 every man gets the face he deserves.")는 말이 있다. 가토 다이조의 "기꺼이 오늘을 살다"에도 인용(43)된 말이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얼굴은 어떤 모습이지 지금껏 이 얼굴로 살아왔으나 새삼 책임을 물으니 여직 철이 없어보이는 얼굴이 거울 앞에 있었다.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나를 지켜내는 심리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을 요즘 다양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는 치유계열의 응원책, 이를테면 -해도 괜찮아, 쉬어도 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쪽으로 예상하고 읽기 시작했다. 읽어보니 생각보다 강경한 어조에 자신이 일궈낸 삶의 성숙에 큰 만족을 드러내는 분위기로 치유보다는 조언계열에 가까웠다. 솔직히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성공한 인생은 인간관계로 결정 난다(74)' 같은 내용이 있어서 그랬다. 읽어보면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둬야 한다는 정도의 내용이긴 하지만 다소 공격적인 어조다. 인간관계로 결정나버리는 성공이란 뭘까.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초반의 거부감은 점차 줄어들고 어떤 마음으로 어떤 말을 전하고자 하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저자는 삶을 '매일매일 86400이라는 동등한 선물이 주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지 않다. "편안한 인생 같은 건 애당초 없다(6)" 고 단언하는 것처럼 삶은 저마다의 상황에서 각자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내야 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니 우리에게 지워지는 짐을 어떻게 하면 스스로 짊어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127)에 대해, 자신의 생존 비법을 알려주듯이 쓴 글이나 다름없이 느껴졌다. 여러 상황적으로, 특히 주변 환경같은 문제들로 힘들다고 느끼고 있다면 이 책의 내용에서 좀 더 와닿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

 

 3장과 4장의 내용들이 1, 2장보다는 더 괜찮았다고 생각하는데 솔직히 가장 집중해서 읽은 것은 맺음말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속으로 생각한 내용까지 그대로 읽힌듯한 문장은 " 내가 아무리 '인생의 짐을 짊어져라.'라고 써도 많은 사람들은 '그건 싫은데...'라고 속으로 생각할 게 뻔하다(224) " 마치 돗자리를 편 것처럼 예리한 통찰이었다. 이렇게 잘 아시는 분이 왜 왕도를 벗어나지 못한 소재들을 썼을까 싶다가도 결국 인생을 얘기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겠구나 깨달았다. 얕은 불평은 그만두고, 보기 싫어 외면한 곳을 곁눈질하듯이 나는 내 인생을 책임지고 살고 있는가 생각해본다. 무겁고 무거운 짐이다. 사람들이 다 그런 고민을 떠안고 살고 있는걸까.

 

 우리는 요즘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다'며 '쉬어가도 괜찮아'하며 위로를 받는다. 노오력하는데 질려버린 사람들, 그 중에 나도 짐을 내려놓고 한껏 자신에게 관대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네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네 몫의 짐을 지지 않고 어떻게 인생을 피해가려 했는지 보라고 말한다. '인생의 책임' 무엇보다도 던져놓은 그 질문 하나로 너무나 무거운 책이었다. 압박감에 불편한 마음이 들 때 그제서야 부제가 다시 눈에 들어온다. 이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을 지킨다고 한 것이구나 싶어진다. 한동안 치유계열의 책들로 위로를 많이 받았다면, 이번엔 이 책을 읽고 다시금 의지를 다져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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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흡혈마전
김나경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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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매력을 선보이는 책이다. 그런데 그 매력이 다 드러나지 못하고 끝나버려서 책 읽고 나서 아주 아쉬웠다. 유명 관광지엘 가면 한동안 경성 콘셉트로 옷을 맞춰입고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을 볼 수 있었다. 일제강점시기를 모던걸 모던보이의 근대화 감성으로만 향유하는 것이 문제라는 시각도 있지만 어쨌든 그 때의 시대적 배경은 많은 관심을 모았다. '1931 흡혈마전'의 배경도 딱 그 시기이다. 거기에 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서로만의 서사를 쌓아간다는 관계성까지, 책을 읽기 전에 기대가 컸다.
 
 읽으면서 궁금했던 것이 희덕이 어째서 특별한 사람인가 하는 점이다. 용기있고 착한 마음을 가진 인물인 것은 알겠지만 흡혈귀들의 힘이 왜 희덕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왜일까, 왜일까하며 읽었다. 왜 이 점에 주목하는가 하면 계월의 존재나 외모가 굉장히 특별하기 때문에 아주 매력적으로 보이는데, 희덕은 상대적으로 평범한 인상을 주는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희덕의 그 단한가지 특별함이 너무나 평범한 희덕을 계월에게만큼은 누구보다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계월에게 절대적인 인상을 주는 인물이 되기 때문에 둘의 관계가 또 '로맨스'를 떠올릴만큼 끈끈해진다. 모두가 날 기억에서 지우는데 단 한 사람만은 그게 통하지 않는다니. 로맨스물이었다면 '이게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면 난 친구없어'가 되는 것이다. 
 
 계월이 만주로 떠나는 길을 희덕이 함께 나섰으니 이 뒤에 또 함께할 모험이 있을 것 같아 뒷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게다가 처음 이 둘의 어색하던 호흡이 백작과의 사건을 함께 이겨내면서 다져진 뒤라 앞으로의 관계 변화가 기대되는 참이었다. 이번 이야기동안 학교 안에서의 적응, 일본과의 갈등,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에 대한 자각이 주를 이뤘다면 앞으로는 전통적 여성관을 강요하는 가족과의 갈등, 새로운 땅에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들이 색다른 재미를 주지 않을까. 다음편 주세요. 
 
 아니면 슬쩍 흘리듯이 나온 계월의 과거. 정리하듯이 짧게 나왔는데 이정도 서사면 계월과 백작의 관계편도 애증 서사 맛집이 아닐리 없다. 계월이 처음 마신 피는 대체 누구의 것인가. 계월의 마음이 변했을 때 백작한테는 과연 아무런 심리적 타격이 없었을까. 둘이 함께 한 70년 동안 서서히 절대적 존재로 여겼을 백작에게서 벗어나게 되는 계월의 의식 변화도 그려냈으면 재밌었을텐데. 희덕과 계월도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쌍방구원이지만 백작과 계월도 첫만남부터 구원서사였다. 흡혈귀한테 어떤 의미로는 죽음이 저주받은 삶을 마감하는 구원이기도 하니까 둘 사이도 흥미진진 맡아놓은 내용이니 전편도 주세요.
 
 이렇게 기대하는 바가 크고 더 파면 팔수록 큰게 나올 것 같은 가능성이 무궁무진한데, 뭔가가 피어날 듯 피어날 듯 채 피어나지 못한 느낌이 좀 아쉬웠다. 사건 해결도 생각보다 단순하게 끝나기 때문에 긴장감이 한껏 고조되었다가 맥없이 풀려버린다. 해리포터처럼 한 사건으로 2-3권 정도의 분량 전개가 되어야 좀 더 끈끈한 내용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 큰 규모로 책을 낸다는 건 모험이겠지. 그러니 이 책 인기가 많아져서 더 많은 희덕과 계월의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면 좋겠다. 신선한 재미를 느껴보고 싶은 독자라면 영어덜트 장르문학에 도전해보시길.
 

* 창비에서 책을 제공 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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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에 대한 인간의 예의 - 동물을 좋아하는 마음을 넘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
이소영 지음 / 뜨인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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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집 강아지. 그애를 빼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애는 토종견쪽에 속한다. 외양은 진도인데 엄격한 품종의 틀안에서 보면 진도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보기엔 진도라서 그냥 진돗개라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진도는 중형견이지만 사람들은 대형견으로 보고, 또 좋게는 용맹하게 나쁘게는 사납다고도 말한다. 토종견, 그리고 진도처럼 어느 정도 몸집이 있는 친구들과 함께 사는 반려인들은 알겠지만, 가장 익숙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친구들이랑 사는게 사실 제일 힘들다. 이애랑 함께 살면서 나는 두 번 다시 개와 함께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이애와 비슷한 친구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자꾸만 눈이 가서 더 알고싶지도 보고싶지도 않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너무나 많이 보게 되었다는 것도 한 몫 한다.

 

 책에서도 일명 '마당개' "밖에서 키우는 개(71)"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물어요, 문다고요(99)" 같은 내용도 우리집 강아지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내용이다. 진도 견주들은 진도에 대한 설명을 싫어하는 경우가 있다. '용맹하고 생존 능력이 뛰어나며' 같은 설명으로 진도들은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집 밖에서 키우는 것이 당연하고, 잔반을 주거나, 하루종일 묶어놔도 괜찮은 것처럼 여기기도 한다. 근데 키워보면 얘네들도 집에서 가장 좋고 푹신한 자리를 제일 먼저 찾아간다. 맛있는 간식을 손이고 발이고 다 주며 좋아한다. 개물림 사고가 나면 가장 먼저 도마위에 오르는게 진도들이다. 입마개 대상이 아닌데도 밖에 나가면 그 어떤 개들보다 먼저 시비붙게 된다. 견주들이 매번 설명하고 때로는 싸워도 항상 반복된다. 불평을 늘어놓으려 읽은 것은 아닌데 읽다보니 보아온 몰이해가 떠오르는 책이었다.

 

 이런 자신도 언제부턴가 동물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정말 좋아만하는, 귀여워하는 것만 좋아하는 입장에서 좋아한다는 말을 쓸 수 있을까? 좋아함이 그렇게 가벼워도 괜찮은 것일까. 동물들을 체험용으로 놔두는 카페에 가보거나, 동물원에 구경을 가거나, 외국의 체험형 관광상품을 동경하거나,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거리의 동물들을 한번 쓰다듬어보거나, 동물을 키우기로 마음 먹고는 어리고 품종이 분명한 특정 동물을 구매하려고 고려하거나, 과연 이 동물의 평생을 책임지고 반려할 수 있을지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은 일들이 마음에 걸렸다. 넓게는 육식까지도 확장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그 부분은 아직 미개척구간이니 넘긴다. 어찌되었든 좋아하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불편을 감수할 각오도 없이 동물을 좋아한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 책이 궁금했다. 읽으면 분명 마음이 불편해질거라 생각했다. 인간은 인간만 알고 그 외의 것들에게는 대체로 무례하니까.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나의 무례함이 덜어질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텀블러와 장바구니 사용같은 것들도 때로는 편리를 위해 생략하고, 일회용기가 지나치게 많이 나오는 배달음식도 끊을 수 없는 전적이 화려하다. 하지만 집에서 살고 있는 개 한마리와, 동네 사람들이 아무도 구조하지는 않지만 화단 구석에 잠자리와 먹이를 마련해주고 있는 고양이 한마리를 떠올리며 이 책을 읽고 싶었다. 내가 이들에게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를 마련하고 싶었다. 평소 고민해오던 문제와 비슷한 결의 내용도 있었고, 좀 더 확장된 채식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채식과는 관련이 없지만, 최근 집에 들어온 화분 때문에 식물에도 좀 더 관심을 갖게 된 참이라 생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조금은 달라졌나 싶은 시기다. 예전에는 계절을 느끼고 싶거나 집이 좀 심심한 것 같으면 충동적으로 화분을 샀었다. 키우는 데에 영 재주가 없어 몇번 말라버린 식물을 치우고나니 이것도 결국은 생명을 죽이는 일과 다름 없는 것 같아 더는 화분을 들이지 않았다. 식물을 키우는 일에도 책임과 예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통감한 것이다. 그런데 억지로 떠안은 화분이 생각보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얼마 전 꽃도 피우고 심지어 자구를 만들어 낸 것을 보니 반드시 죽이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나, 싶어졌다. 식물에 대한 관심은 코로나 때문인가 싶기도 하지만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고 존중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이 책이 사유의 시간에 한 조각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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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에
수잰 레드펀 지음,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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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은 '한순간에' 벌어진다. 차에 타고 있던 인원은 열한명, 그리고 개 한마리이다. 두 가족과 두 아이. 핀의 가족은 엄마와 아빠 둘째 언니 클로이, 클로이의 남자친구인 밴스, 그리고 핀의 동생 오즈. 엄마의 친한 친구인 캐런 이모네 가족은 밥 삼촌과 그 둘의 딸 내털리. 핀의 절친인 모런, 길에서 우연히 차를 태워주게 된 카일이라는 소년까지. 이 대인원이 탄 차가 추운 겨울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를 겪게 된다. 그 사고로 앞좌석에 앉아 있던 아빠는 큰 부상을 입고, 핀은 죽는다. 소설은 핀의 영혼이 남아있는 사람들이 사고와 함께 닥친 조난 상황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려진다.

 

 인물 관계가 단순하다면 단순하고, 또 사람은 누구나 여러가지 면을 가지고 있듯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면 또 그렇다. 사고도 한순간이지만 인물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 선택하는 것도 '한순간에' 이루어진다. 지극히 본능적이고 계산으로 그리고 절대 되돌릴 수 없는 선택들을 바라보며 과연 이 다음은 어떻게 될까 궁금함을 끝까지, 정말 끝까지 놓치지 않고 끌고가는 좋은 소설이었다. 독서모임 같은 것을 한다면 이 책 읽고 인물이며 상황이며 할 말이 진짜 많을 것 같다. 혼자 읽어서 누구랑 같이 애기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지금까지 공개된 북트레일러나 사건 초반의 줄거리만해도 많은 내용을 까고 시작하는 것이니 더이상 내용을 담지는 않겠지만 진짜 재밌다.

 

 요즘 흥한다는 사이다 마시는 속 시원한 만능 인물의 등장이나 사건 해결을 쭉쭉 밀고나가는 흐름은 아니다. 대신 앞으로 어떻게 될지 쪼이는 맛은 있다. 거기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복잡한 관계와 미묘한 심리 변화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여러각도로 인물들을 평면적이지 않게 다뤄낸 작가의 신중함이 마음에 들 것이다. 게다가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작가의 말이 따로 있는데 꼭 그 부분까지 다 읽어야 한다. 그럼 이 책의 의미가 또 한번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공을 들여 세상에 내놓은 책이었구나, 싶어진다.

 

 재미는 물론이고 요즘 계절에 잘 어울리기까지 한 책이다. '한순간에' 제목이 약간 강렬함이 부족한 것 같아 아쉬운데, 내용은 시작부터 한명 보내고 시작하는 화끈한 전개다. 영화 '투모로우'가 사실은 더 데이 애프터 투모로우 였으나 한국 사람은 모레라고 하고 하면 긴장감을 덜 느낀다고 해서 내일로 제목을 바꿔 나왔다는 영화 제목계의 전설같은 레전드가 내려오듯이 '한순간에'도 이름을 좀 더 강렬하게 지어서 나왔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목에 대해 이렇게 구구절절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유는 이 제목이 주는 기대감보다 책을 읽었을 때 느끼는 만족감이 비할 바 없이 크기 때문이다.

 

 책을 잡고는 밤을 새웠다. 초저녁에 잠깐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깨서 다시 잠이 오지 않길래 책의 두께를 보고는 한시간, 어쩌면 삼십분 정도만 읽으면 금방 다시 잠이 오겠지 싶어 책을 들었다가 그대로 다 읽고 아침이 됐다. 다시 잠이 오지 않을 전개로 정신은 오히려 맑아졌고 눈은 피곤한데 궁금해서 계속해서 뒷장으로 시선을 넘기게 된다. '한순간에' 읽을 분들은 넉넉하게 여유있는 시간에 시작하길 바란다. 책이 꽤 두툼한 편이라 두시간은 훅 지나간다. 그날 하루정도는 독자를 집 안에 붙잡아 둘 흡입력이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에 일조할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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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감정들 - 무엇이 우리를 감정의 희생자로 만드는가 자기탐구 인문학 4
조우관 지음 / 가나출판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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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둑맞은 감정'이라니 알쏭달쏭했다.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한 이 감정이 사실은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걸까? 감정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혹은 반사적으로 표현되는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누가 돌을 던져도, 노를 저어와도 평온한 호수같은 마음을 이루기 위해 화분을 들여 식물도 길러보려고 하는 참에 나는 궁금해졌다. 아무 상황에서나 솔직한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 성숙의 과정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억눌린 '감정의 희생'이었던걸까. 도둑맞은 줄도 몰랐던 내 감정이 혹시 나몰래 쓰리(...)된 것은 아닌지 꼼꼼히 따져보자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뭐야, 돌려줘요 내 감정...

 

 처음에는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하기 어려운 사회분위기에 대해 꼬집는 글인가 싶었는데, 웃는 얼굴(19)에 대한 내용을 보면 웃음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계발서들에서는 일부러라도 웃는 얼굴을 하면 더 긍정적인 효과가 생길 것이라 조언하는 것을 종종 봐왔는데 이 책은 자꾸 웃다가는 우스운 사람이 되니 가짜 웃음을 짓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동안 내가 써왔던 사회적 가면을 생각해본다. 웃는 가면을 썼을 때 분명 상대방이 무례하게 행동했던 적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본인보다 더 위압적이거나 무례한 가면을 쓴 사람에게 자신의 가면을 바꿔쓰지만 굳이 내가 그런 사람을 피하기 위해 무례한 가면을 쓰고다니고 싶진 않다. 대부분의 경우 웃는 가면은 다른 가면을 썼을 때에 비해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 더불어 상대방도 웃는 가면을 썼다면 더욱더. 진짜 웃고 싶을 때만 웃고 가짜 웃음을 짓지 말라는 말은 너무 삭막하다. 마치 좋은 아침일때만 '좋은 아침이에요'하고 인사하세요,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다른 것은 몰라도 웃음에는 인색해지지 말자. 웃는 것도 연습이고 습관이고 전염이다. 웃음이 강요된 사회라고 하지만 그나마도 한국사람들 기본 표정은 꽤 무뚝뚝한 편이라고 한다. 불편하거나 심각한 일을 얼버무리려는 상황 등을 빼고는 웃자. 진짜 웃고싶을때만 웃으면 인생 생각보다 웃을 일 없다.

 

 " 누군가는 매일 긍정 확언을 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100번씩 노트에 적으라는 말도 했다. 그런데 우주가 내 성공에 무슨 관심이 있어 주문과도 같은 혼잣말을 들어준단 말인가. 이는 긍정이 아니라 자기 환상이며 맹신에 불과하다.(45) "

 

 이렇게 눈에 불을 켜고 책의 내용에 반대만 하는 것은 아니고 위 문장에 무릎을 탁 치고 바로 옮겨 적어놔야지 싶었다.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하는 말이 어디서 왔는지 '연금술사'였나 싶은데 불평꾼은 이 말이 항상 마음에 차지 않았다. 바라는 게 있으면 거기에 맞는 방법을 찾아 노력을 해야지 100번씩 노트에 적는 것은 노트도 펜도 시간도 아까운 일 같다. 한동안 이런 류의 말과 책이 유행할때 예쁜 글귀로 전해지거나, 좋아요 누르고 소원 적는 행동이 잘 공감되지 않았다. 우주가 나한테 관심 있었음 벌써 나는 출생부터 남달랐겠지.

 

 표지에서 강조한 부정적 감정의 표출에 대한 내용이 2장에서 등장한다.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린시절부터 싫다는 말을 하지 않도록 학습된 탓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인가 돌아보게 되었다. 거절을 잘하는 사람인가. 주변 사람들의 생각은 각자 다르겠지만 스스로 평하기로는 거절 잘 못하는 사람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런데 돌이켜 떠올려보면 왜 거절했던 기억만 나는걸까. 대부분의 상황은 부탁없이 눈치껏 호응했던 것 같고, 직접적인 부탁이 들어오는 일은 거절할 공산이 크니까 부탁하기 때문에 거절로 이어지는 일들이 많았던 것 아닐까. 내 생각에 초등학교 때 지우개 잘 빌려줬던 것 같은데 그 이상의 것들은 왜 거절부터 했던 것 같지. 문득 나는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졌다. 내가 그리는 이미지의 나와 실제 나는 정말 다를까.

 

 어쨌든 집에서 싫다고 말하지 못하고 자란 아이가 사회에서 거절을 표할 수 있겠는가,하는 물음은 너무 과장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가정에서 학습된 것들이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는 하겠지만 이를 두고 만물 가정설처럼 말하기에는 조금 뭔가 아쉽다. 벌써 유치원, 초등학교만 다녀도 가정과 분리된 사회적 자아를 가지게 되는데다가, 부모님이 '싫어요'라고 못하게 했다는 것치고는 다들 그렇게까지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자라온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보다 더 본능적이고 계산적인 뭔가가 거절 못하는 사람의 내면에 있을 것이다. 비록 '모두가 노라고 할 때 혼자 예스라고 말하는' 태도를 오직 음식 메뉴 정할때 쓰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생각이지만, 암튼 그렇다.   

 

 읽다보니 책이 여러모로 흥미로웠는데 얼마 전 한참 인기있었던 '자존감'에 대한 내용도 새로웠다. 자존감은 이미 어린시절에 그것도 미취학정도 무렵에 이미 형성되니 그 이후의 노력들은 딱히 효과가 없다는 내용이다. 자존감이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자존심은 부정적인 느낌으로 여겨지고 진짜 중요한 것은 자존감이고 그걸 길러야 된다는 요지의 글을 많이 봤는데, 이미 그 글을 읽고 있을 때는 늦어버린 것이라니. 자존감을 기르기 위해 사소한 충고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를 보이는 자존감 부작용 사례들이 그래서 그랬던 거였나 짐작된다. 오히려 자존감은 됐으니 자존심을 챙기라는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 두개나 챙기기 복잡했는데 잘됐다.

 

 또 하나는 용서에 대한 내용. 용서라는 말이 나오면 '밀양'을 떠올리곤 하는데 이 책에서도 그 영화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진정한 용서가 존재할까. 남의 마음은 모르겠지만 내 마음안에는 없을 것 같다. 사소한 일들은 뭐 크게 문제 삼을 것도 없지만 용서가 어려울만한 큰 문제라면 겉으로는 용서한 척해도 진짜로 용서하지는 못할 것 같다. 용서라는 것이 참 어려운 게 피해자가 선량한 피해자의 위치에 있으려면 싫어도 용서를 해야 한다. 책에서도 나오지만 용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권력구조이기도 하다. 가해자가 사과를 하는데 이를 받아주지 않으면 피해자가 그 힘을 쥐고 흔드는 갑이 되어버리니 더이상 선량한 피해자로 봐주지 않는 것이다. 피해자의 선함을 유지하기 위해 가해자가 내민 사과에 용서를 내어주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책에서는 " 용서의 범주에 '처벌받지 않음'이 포함되지 않음(104) "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 법에서는 왜 합의를 통한 솜방망이 처벌이 이리 많을까.

 

 " 뇌신경 심리학자 이안 로버트슨은 사람이 권력을 가지면 뇌 구조가 '승자의 뇌'로 변한다고 주장했다. 고생을 이미 지나온 사람은 지금 고생을 겪고 있는 사람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고생 끝에는 어떤 낙이 있을까. 본인은 이루어낸 것을 아직도 겪고 있는 이를 보며 무시하고 깔보는 것이 그들의 낙이라면 그들이 진정 아픈 만큼 성숙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낙'이란 애초에 남들을 짓밟는 승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는 뜻이었을까?(60) "

 

 이 부분을 보며 정치인들의 타락을 떠올렸는데, 엘리트 길을 걸어온 판사들의 피해자 공감 능력 결여를 떠올려보면 고생을 지나왔건 지나오지 않았건 사회적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결여되는 것들이 공통적으로 생기는 것 같다. 젊은 시절 학생운동을 하며 자신의 신념을 불태웠던 사람들이 나이먹고 뱃지달고 동일인인가 싶을만큼 다른 행보를 보이는 것,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킬만한 추문을 일으키는 것을 보며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 근원적인 괴로움에 빠지지 말고 뇌구조가 변했다고 생각하면 좀 나으려나 싶다. 성공했으나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겸손하도록 노력하며 사는 사람은 자연히 고생을 겪고 있는 과정에 속하기 때문에 뇌구조가 아직 멀쩡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사람들이 유재석같은 사람을 보면 호감을 가지는가보다.

 

 의외로 3장에 들어서서 사랑, 질투, 상처, 외로움 같은 부분들은 평이했다. 주제가 주제니만큼 기대하며 읽었는데 뭔가 꽂히는 부분이 없이 넘어갔다. 수치심과 관련된 부분은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는데 이와 밀접하게 연관된 상처가 아직 극복되지 않은 듯하다. 다만 감정에 있어서 가장 많이 공감하고 있는 것은  " 과도하게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화를 냈다면, 나의 초감정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어야 한다. 너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감정에 대한 나의 편견 때문임을, 내 역사의 한 부분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음을.(163) " 이 내용이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비난하고 싶어질때 종종 생각하는 내용이다. 내 안에서 내가 원치않는, 싫어하는, 부정하고 싶은 나의 조각을 타인에게서 볼 때 타인을 비난하고 싶어진다는 것. 비슷한 내용인 것 같아 옮겨적어봤다.

 

 4장에서 감정흡혈귀라는 말이 나오는데, 흡혈귀라고 하니 어쩐지 매력적이다. 실제로도 타인의 감정을 조종하기 위해 영화 속 흡혈귀처럼 '적극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이기도(232)'한다는데, 그럼 더 좋아보이는게 아닌가. 내 감정을 제물삼아 접근하는 적극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상대라니 책에서 감정 조종자, 감정 포식자같은 표현도 나오던데 이런 표현이 더 괜찮아보인다. 감정 좀비는 좀 이상하고 흡혈귀는 매력적이야. 아마 요즘에는 비슷한 말로 가스라이팅한다고 하기도 하려나. 의존과 연결되어 있는 내용이고 요즘 빈번히 보게 되는 가정, 연인 사이 또는 위계관계에서의 문제라 관심있게 읽었다. 내가 감히 누군가의 감정을 조종해본적은 없지만, 나는 혹시 타인에 의해 영향을 받았던 적이 있던가 한번쯤은 생각해보았다.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의 감정에 눈치를 보게 되는 적은 있지만 이를 두고 그들을 감정 조종자라고 하기엔 조금 껄끄럽다. 누군가가 떠오른다면 심각한 정도의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자신의 감정에 대해 둔감한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들었다. 책에서 읽을 때는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감정일기를 써보는 건 어떠려나 싶어졌다.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뒷표지 날개를 보고 알았는데, 이 책이 가나 출판사에서 자기탐구 인문학 시리즈로 나온 네번째 책이었다. 기대 이상으로 재밌게 읽어서 그 전에 나왔던 책들도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졌다. 별 생각없이 읽었는데 생각을 정리하다보니 기억에 남는 부분들도 많고 이런저런 생각들도 이어지는 흥미로운 책이었다. 하루 정도는 책을 붙잡고 자신과 자신의 감정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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