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말씀은 나무 아래에서
아오야마 미치코 지음, 손지상 옮김 / 네오픽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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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 말씀은 나무 아래에서'라는 제목이 독자를 사로잡았을 것이다. 이 알쏭달쏭한 제목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채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먼저 문자 그대로 수긍했을 것이라는 점이 이 책의 가장 재밌는 부분이다. 그냥 자신도 모르게 고양이님이 나무 아래에서 무슨 말씀을 하신다면 들어야지, 하고 생각하게 된다. 고양이에게 말씀이라는 높임말을 붙이는 것도 이상하게 어색하지 않다. 고양이를 모시는 집사들이 무분별하게 제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와중에 책의 내용은 의외로 평범하다. 고양이님이 나무 아래에서 말씀을 해주시는 내용이 아니었다!

 

 각 에피소드의 인물들이 마음속으로 고민을 안고 있을 때 들린 어느 신사에서 미쿠지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만나면 참배당 앞 다라수-엽서나무-의 잎을 한장씩 줍게 되는데, 그 나뭇잎에 써있는 문구가 고민을 해결할 열쇠가 되어준다. 그래서 고양이 말씀은 나무 아래에서,라는 제목이 되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진짜 말하는 고양이가 나올줄 알았기 때문에 미쿠지라는 고양이의 존재나 나뭇잎에 써있는 문구를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다는 건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가장 재미있었던 건 두번째 잎사귀 '티켓'의 내용이었다. 사춘기 딸과의 관계를 어찌할 바 몰라 전전긍긍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전에 일본에서는 가족들이 욕조의 목욕물을 같이 쓰기 때문에 사춘기가 된 딸이 아빠가 들어갔다 나온 탕의 물을 쓰고 싶지 않아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는데, 여기서도 냄새난다는 말을 듣게 될지 모른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아버지의 소심함? 절절함이 웃펐다. 게다가 본인은 엄청난 고민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아내가 보기에는 너무나 부러운 부녀관계였던 것 같아 끝까지 몽글몽글하게 재밌게 읽었다.

 

 첫번째 이야기는 어떤 내용일까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읽기도 했고, 내용적으로도 큰 매력을 못 느꼈는데 주인공 미하루가 달리기를 한다는 것은 인상적이었다. 지난 여름 달리기를 조금 해봤는데, 달리기는 확실히 매력있는 운동이었다. 여러 생각을 하면서 뛰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달리는 그 자체에 몰입하게 되고 힘들지만 달리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생각이 복잡해서 괴롭거나 의욕이 부족해서 고민이라면 겨울동안 맛있는 것을 먹고 따뜻하게 잘보내고 날이 다시 풀리고나면 달리기를 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 쓰다듬어주는 건 좋은데, 먹이는 주지 마. 우리 집은 아파트라서 못 키우니까. 책임지지 못할 거면 애초부터 어중간하게 애정을 줘서는 안 돼.(321) " 일곱번째 잎사귀의 한 부분이다. 나에게도 이런 고양이가 있다. 아파트 입구에서 자주 돌아다니는 녀석인데 귀여워는 하지만 키울 수는 없어 잘 지내고 있나 오가며 확인해본다. 넉살 좋고 애교많은 녀석이라 동네 사람들에게 밥도 잘 얻어먹고 제법 보살핌을 받지만 '책임'은 무거운 것이라 구조되지는 못하고 있다. 사람만 보면 어디든 따라가서 함께 살고 싶다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항상 안타깝다. 그 고양이가 생각나서일까 일곱번째 이야기와 에필로그까지 따뜻하게 마무리 됐지만 어쩐지 씁쓸한 느낌으로 책을 덮었다.

 

 하지만 책은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가끔 '난 평소에 책을 잘 안읽는데 읽은 책 중에서 재밌는 책 추천해줄만한 게 있느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그때마다 책을 읽고 재밌다고 느끼는 건 사람마다 달라서 어떤 책을 추천해줘야 할지 곤란했었는데 아마 이 책이라면 추천해줘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연말을 맞아 다른 사람에게 가볍고 재밌게 읽을만한 책을 권해주고 싶다면 '고양이 말씀은 나무 아래에서'를 꼽아도 좋겠다. 일본 책 특유의 문체나 문화에 거부감이 있지 않다면 무난하게 읽을 것 같다.

 

 129 하6 류소 -> 류조 

338 상 드냥 ->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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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는 어떻게 세상을 정복했는가 - 진실보다 강한 탈진실의 힘
제임스 볼 지음, 김선영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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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격적인 제목이다. 태그달때 개소리라고 달아도 되는 것인가 조금 고민했다. 책을 읽기 전에 먼저 떠올린 것은 연예인 솔비와 유세윤이 SNS로 한 실험이었다. 자신들의 파급력을 이용한 이 영리한 시도는 거짓된 뉴스가 어떤식으로 퍼지는지, 진실과 거짓 중에서 어떤 뉴스가 선택받는지 또 잘못된 뉴스에 대한 정정보도는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실험이었다. 결과가 뻔한 이 실험은 사람들이 그저 흥미를 끌만한 자극적인 뉴스를 원하고 진실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저 뉴스를 소비해버릴 뿐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이를 떠올리며 '개소리는 어떻게 세상을 정복했는가'를 통해 좀 더 깊이 이 문제를 파고들어가 보고 싶었다.

 

 " 이제 시스템을 떠받드는 한 가지 영역이 남았다. 바로 개소리 퍼즐의 마지막 중요한 역할을 맡은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바로 당신이다.(154) "

 

 읽기 좋은 책은 아니었다. 거침없는 어조로 개소리, 가짜뉴스, 정치인, 독자, 유권자들을 향해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이 책을 읽으며 주장의 출처와 근거에 대해 이견이 있다면 자신의 트위터로 연락하라며 계정을 공개해놓은 자신만만함이 인상적이었다. 정말 보이는대로 믿을 것이냐고 물어오는 글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팩트체크 할 생각 없이 그저 책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눈으로 읽어버린 독자가 된 것이 아이러니했다. 이렇게나 자신있는 저자가 쓴 글이라면 제대로 팩트체크해서 썼겠지, 싶은 생각. 가짜뉴스가 바라는 독자의 허점이 이것 아닐까.

 

 " 우리가 링크와 사이트를 보는 동안에도 가짜뉴스 생태계는 굴러간다. 누구나 피드에서 이런 이미지를 봤고 대부분이 공유했다. 그리고 내가 동의하는 내용이라면 보통 사실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내 생각과 일치하는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를 접했을 때 사실인지 확인해본 경우가 각각 얼마나 되는가? 우리 모두는 이 문제에 얼마간 책임이 있다.(165) "

 

 지난 미국대선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데, 이번 대선 이후로도 트럼프의 행보에 대한 기사들을 매일같이 접하고 있는 탓에 트럼프가 얼마나 미디어를 자극적으로 다루는데에 소질이 있는가 생각해보게 되었다. 매번 화제가 되는 그의 트위터 활용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그의 재선이 실패된 데에는 유권자들의 성숙이 밑받침한 것인지 혹은 이 또한 인종적 이슈와 관련된 입맛 맞추기가 성공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재밌는 것은 이번 미국 대선을 치르면서 정권과 관련된 출처와 근거가 불분명한 뉴스를 많이 접했고 문득 이 책을 읽으며 자각했다는 것이다. 바다 건너의 소식이기 때문에 한번 더 걸러져서 알려질텐데도 바이든이 성적인 물의를 일으켰다거나, 노환이 우려된다거나, 친일에 더 가깝다거나, 캠프에서 투표수를 높이기 위해 보석금을 대신 내준다는 뉴스를 접해본 적이 있다. 물론 이 글들을 보면서 한번도 팩트체크를 해보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경험이 있을까,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국내에서는 은근히 트럼프의 재선을 바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자가 강조했던 '책임'이 여기서 느껴졌다.

 

 " 아무리 우리가 교육을 받았고, 양질의 정보와 저질 정보를 분간할 수 있다고 자부해도 여러 심리적 이유로 개소리에 넘어간다. 또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과 일치하고 나의 사회적 규범에 맞으며 신호 보내기나 집단 정체성 강화에 쓰고 싶은 정보들을 많이 접한다. 우리가 꼭 개소리를 믿는다는 뜻은 아니지만,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기 쉽다. 개소리의 영향력은 새삼스럽지 않지만 우리가 개소리에 사로잡히는 기제를 아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된다.(264) "

 

 우리 나약한 수용자들이 평소 아무리 견제한다고 해도 넘쳐나는 뉴스들 모두 균형있게 살펴보는 것은 어렵고 본능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맞는, 소화하기 좋은 뉴스를 찾아 받아들이려 할 것이다. 결국의 돈과 이권 앞에서 좌우되는 문제이다. 시종일관 날카로운 지적을 하지만 마지막 장의 조언은 오히려 미진했다. '개소리'를 작정하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조언이 먹힐리가 없을텐데, 이런 마무리 외에 달리 다른 결말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아쉬웠다.

 

 '개소리는 어떻게 세상을 정복했는가'를 통해 그동안 스스로를 저급한 가짜뉴스의 피해자라고 생각해왔던 것을 전환하게 되었다. 또 하나 궁금한 것은 4차 산업혁명 이후로 뉴스를 만들어내는 것도 사람을 대신해 인공지능이 맡게 된다면 어디에 치우치지 않고 목적 또한 없는 정보 전달 그대로의 뉴스를 접하게 될 수 있을까? 혹은 뉴스는 사람이 만들지만 그에 대한 팩트체크는 인공지능이 대신하게 될까. 정보의 전파, 파급력이 갈수록 커지는 사회에서 앞으로는 이를 어떻게 다루게 될지 궁금해지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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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내가 반짝일 확률 99% VivaVivo (비바비보) 43
사라 후지무라 지음, 장혜진 옮김 / 뜨인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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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청소년 도서를 읽는데, '너와 내가 반짝일 확률 99%'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외국 청소년 소설, 외국에도 그런 장르가 있다면, 어떻게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청소년 소설이라고 하기 보다는 그, 제시카가 최근에 낸 책과 비슷한 느낌이다. 번역체여서 그런가 아니면 글쓰는 스타일이 달라서 그런가 특유의 느낌이 있는 것 같다. 분량 자체도 적지 않아서 그동안 읽어왔던 한국 청소년 소설이랑은 살짝 다른 신선한 스타일이구나 싶은 생각을 했다.

 

 소설의 내용은 일본계인 올리비아와 한국계인 조나가 만나 자신들의 꿈과 열정, 그리고 풋풋한 사랑까지 키워간다는 다소 정석적인 흐름이다. 다만 생각보다 로맨스적인 부분에서는 불이 켜지는 느낌이 없다. 동양인 가족 특유의 교육열이 빛나는 캐릭터가 있어서 그런가 오히려 스케이팅과 성장 부분에 더 집중이 되어 있어 보인다. 이상하게도 올리비아가 일본계이고 또 피겨를 하고 있다는 설정 때문인지 읽으면서 약간 껄끄러운 느낌도 있었다.

 

 작가의 말을 읽어보면 아이들이 동양인이 주류인 책을 읽으며 성장할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까워 자신이 직접 책을 쓰게 됐다고 하는데 오히려 그 마음이 더 공감됐다. 아직까지도 동양계는 공부벌레나 컴퓨터 오타쿠 같은 이미지에 브릿지 머리로 묘사되는 전형성이 있으니까. 서양의 시선으로 보는 동양계에 대한 공통적인 불만이랄까 이제는 좀 진절머리나는 몰이해와 무지함을 짚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본 '반쪽의 이야기'라는 오리지널은 그 선을 반 발자국 정도 넘은 것 같다. 이건 추천.

 

 예체능 하는 아이들이 읽는다면 공감하는 부분이 많이 있을 것이다. 책에서도 보통의 학생으로 돌아간다는 표현들이 나오는데, 아무래도 특출난 재능에 대한 열망과 좌절, 주변 친구들과는 다른 목표를 가지고 생활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예체능쪽을 경험한 아이들이 가지는 연대의식이나 공감대가 많겠다. 반면 보통이나 평범한으로 수식되는 쪽에서는 책을 읽을 때 다소 아쉬운 표현이 될 것 같다.

 

 날이 추워지니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계절적 추위가 꼭 아이스링크 장이 주무대가 되기 때문에 옮아오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여름에 읽으면 좀 시원하게 느껴질려나. 주인공들은 열일곱으로 나오지만 아무래도 이쯤되면 책은 본인 나이보다 살짝 위의 연령대에 관심을 갖게 될테니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 정도의 독자들이 읽을 법 하다. 전에 넷플릭스 얘기를 꺼냈는데, 어쩌면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나올 것 같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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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와 모라
김선재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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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무리 살아도 여전히 처음인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108) "

 

 두 소녀, 그리고 그녀들이 자라나 두 여자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노라, 곤륜산에서만 자라는 돌배나무를 뜻하는 이름을 가진 노라와 모라, 가지런한 그물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모라. 이 둘은 7년동안 자매로 함께 살았다. 초등학교 때 노라의 엄마와 모라의 아빠가 재혼하며 동갑내기 자매가 된 두 사람은 20년만에 모라의 연락을 통해 재회하게 된다. 엄마와 아빠가 다시 헤어지게 되면서 둘은 다시 타인이 되었지만, 어느 한 때 이들이 가족이었다는 사실이 두 사람을 묶어두는 질긴 연이 되어준다.

 

" 욕하기를 그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마음이었다. 내가 엄마에게 배운 건 욕뿐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나는 온갖 종류의 욕을 그 절벽 위에서 내질렀다. 미워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의지로 움직여지는 건 아니었다.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22) "

 

 노라는 알 수 없는 여자다. 노라가 어딘가 결여된 듯한 인상을 주는 까닭은 노라의 엄마에게서 비롯된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했다. 예쁜 아이, 그러나 그 마저도 무심한, 타인의 감정 앞에서 뭘 해야할지 모르는 사람으로 자라난 노라를 모라의 시선으로 보며 질투했다. 노라는 엄마에게서 항상 상처를 받아왔지만 모라의 시선에서는 그런 엄마도 노라를 모라보다 더 챙겼다. 모라 아빠의 손을 외면하던 노라와 노라 엄마가 노라에게 쥐어주던 용돈을 모른척해야 했던 모라. 자꾸만 모라에게 마음이 더 쓰이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 ......근데.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나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한숨을 쉬면서도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번진 루주 자국을 거즈 손수건으로 정리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나에게도..... 내 삶이라는 게 있어.(52) "

 

 부모님이 사실은 나와 다른 우주를 가지고 있는 별개의 존재라는 사실은 가끔 너무 외롭다. 노라의 엄마가 너무나 차갑게 보이지만 그 안에서 피할 수 없는 진실을 본다. 어린아이에게는 생존의 위협이나 다름없을 말이겠지만 지금 나이에서 보니 자신의 삶이 있다는 부모의 말이 아직도 씁쓸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이제와 문득 노라와 모라 뿐 아니라 엄마와 아빠의 시선도 볼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두 사람은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노라와 모라를 바라보았을지 어떤 삶을 살았을지 궁금해졌다.

 

 " 언제부턴가 나는 이해한다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 싫었다.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관심을 보이며 이해하려고 드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걸 알고 난 뒤로는 더욱 그랬다. 정말이지 내가 아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를 너무 쉽게 이해한 나머지 다소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건 이해가 아니라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자주 생각했다. 이해와 동정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쪽이 훨씬 대하기 편하다.(100) "

 

 처음엔 노라를 싫어하면서 노라에게 연락한 모라가 불편했다. 그런데 모라의 이 문장이 마음을 끌었다. 나는 누군가를 너무 쉽게 이해한 적 없었나. 타인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어느 순간들이 사실은 다 오해였고, 나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더욱 쓸쓸하게 만들어 배웅한 적은 없었던가 마음이 철렁했다. 그러고나니 모라가 노라를 바라보며 차곡히 마음에 쌓아두었을 순간들이 어쩐지 눈에 밟혔다. 둘다 애틋한 면이 있지만 모라가 더 마음 쓰이는 까닭은, 그건 아마 내가 타인의 시선을 모라만큼 의식해서이기도 할테다.

 

 잔잔한 이야기를 읽으며 최근 장례식장에 다녀온 날 밤을 떠올렸다. 코로나의 여파로 찾아오는 이는 적었고, 검은 상복을 입은 지인은 술잔을 한두잔 주고받다 '아무도 내 마음은 모른다'는 말을 지나가듯 흘렸었다. 날은 너무 춥고 밤이 늦어 지나가는 차도 별로 없었던 그날 밤 헛헛한 배웅을 받으며 어찌할 바 모르는 위로를 건네야만 했던 때가 내가 노라같고 그가 모라같고 그랬던 것 같다. 노라와 모라가 함께 한 시간이 비슷한 상황이어서 그랬을까, 책을 읽으며 그날이 많이 생각났다.

 

 다산북스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미공개 사전 독자를 모집하는 기획이 있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에 모험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데, 출판사에서 진행하는 이 기획은 그러나 분명 나를 기쁘게 할 것이라는 어떤 확신을 내포한 불확실성이라 언제나 기쁘게 신청한다. 겉이 온통 하얀 가제본을 받아들고 묵직한 느낌을, 그리고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문장을 샅샅이 살폈다. 혹시나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리게 될까? 아직은 하얀 표지 위에 어떤 제목을 붙이고 싶을까 생각해보며 읽었다. 가족이 관련된 제목이 아닐까 싶었는데 두 주인공의 이름이 곧 제목이었다.

 

 책을 읽고 난 뒤에 '노라와 모라'가 김선재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됐는데, 이름이 익숙해 되짚어보니 전에 작가의 시집 '목성에서의 하루'를 읽은 적 있었다. 그래서 시인으로 알고 있던 탓에 '노라와 모라'를 쓴 김선재 작가가 맞나 아닌가 헷갈렸었다. 그때 인상적으로 꼽은 시가 '그린란드'라는 시였는데,  " 환승역에서 알았죠 집은 떠나는 순간부터 사라지는 곳이라는 걸 " 이란 문장으로 시작된다. '노라와 모라'도 어쩐지 '그린란드'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은 것은 그 사이를 연관짓고 싶은 기분탓일까. 시집도 함께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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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서 선택한 완벽한 삶
카밀 파간 지음, 공민희 옮김 / 달의시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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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 알았어?" "당연히 알지!"(19) "
 
 세상에, 자신이 암이라는 사실과 남편과의 가정이 파탄났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순간이 이럴 수 있을까. 멀리서 보면 희극인가 싶은 비극적 순간의 시작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막장과도 같은 시작에 정신이 쏙 빠진다. 게다가 톰에게도 고통스러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로맨스 소설 똥차 구남친 같은 적반하장 모먼트에 함께 분노하며 리비의 비극에 함께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감명깊게 본 '이 투 마마'의 멕시코 대신 만료된 여권과 환전이 필요없는 푸에르토리코를 향해 함께 떠났다.
 
 " "만회활 기회를 주지 않을래요? 당신에게 근사한 걸 보여주고 싶어요." "내가 뭔지 맞춰보죠. 당신 바지 속에 들어있는 걸 말하는 거겠죠."(188) " 
 
 우리의 리비가 어떤 상태인지 알려주는, 그리고 날 웃긴 부분이다. 책은 술술 읽힌다. 하루아침에 남편에게 배신을 당하고, 시한부나 다름 없는 악성 종양이 몸 안에서 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리비의 행보는 거침없다. 화내고 울고 또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쫓기듯이 움직인다. 전개가 빠르다보니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답답한 부분은 없고 시원시원하다. 사이다 전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에 쏙 들어할 것 같은 흐름이다. 바로 벤츠같은 남자가 등장해서 밀당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로의 등장은 로맨스 소설의 도입부 느낌이 난다. 
 
 익숙하지만 실로 소름돋는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만약 나라면 상대방이 숨기고 있는 혹은 스스로도 정확히 규정하지 못한 성적취향을 가늠할 수 있을까. 리비가 톰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주변에게 알리자 그녀를 제외한 친구들은 시기가 늦던 빠르던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고 답한다. 얄미운 사람들. 알고 있었으면서 왜, 알려주지 않아서 결혼까지 하게 뒀을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누구도 말을 해줄 수는 없었을거란 생각도 든다. 솔직히 이제는 재연 상담 프로그램 같은데서 본 적 있는 흔한 소재일수도 있지만 그래도 볼 때마다 자극적으로 관심을 끈다.
 
 한참 몰입해서 재미있게 읽다가 문득 리비는 나보다 어리고 그럼에도 병에 걸렸고 나는 건강검진 예약을 앞두고 있다는데에 생각이 미쳤다. 건강검진이라는 건 위내시경 같은 것 때문에 굶어야 한다는 게 고달프다는 것 말고도 이제 어쩐지 찜찜하다. 모든게 다 좋고 건강하다는 결과가 나온다면 한동안 안심하겠지만 어디가 안좋아서 추가 검사가 필요하다거나 경과를 지켜봐야한다고 나오면 그 뒤부터 어쩐지 몸이 진짜 안좋은 것 같은 기분도 들고 혹시라도 진짜 어디가 아프다고 하면 어쩌나 싶은 불안도 섞여있다. 나의 불안과 함께 리비의 인생이 최악으로 끝나지만은 안길 바라며 책을 읽었다. 
 
 그리고 리비가 '죽음 앞에서 선택한 완벽한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결말은,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하면 좋겠다. 시간을 한두시간쯤은 쉽게 없애줄만한 재밌고 시원시원한 전개의 책으로 길어진 저녁 시간을 보내는데에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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