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와 모라
김선재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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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무리 살아도 여전히 처음인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108) "

 

 두 소녀, 그리고 그녀들이 자라나 두 여자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노라, 곤륜산에서만 자라는 돌배나무를 뜻하는 이름을 가진 노라와 모라, 가지런한 그물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모라. 이 둘은 7년동안 자매로 함께 살았다. 초등학교 때 노라의 엄마와 모라의 아빠가 재혼하며 동갑내기 자매가 된 두 사람은 20년만에 모라의 연락을 통해 재회하게 된다. 엄마와 아빠가 다시 헤어지게 되면서 둘은 다시 타인이 되었지만, 어느 한 때 이들이 가족이었다는 사실이 두 사람을 묶어두는 질긴 연이 되어준다.

 

" 욕하기를 그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마음이었다. 내가 엄마에게 배운 건 욕뿐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나는 온갖 종류의 욕을 그 절벽 위에서 내질렀다. 미워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의지로 움직여지는 건 아니었다.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22) "

 

 노라는 알 수 없는 여자다. 노라가 어딘가 결여된 듯한 인상을 주는 까닭은 노라의 엄마에게서 비롯된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했다. 예쁜 아이, 그러나 그 마저도 무심한, 타인의 감정 앞에서 뭘 해야할지 모르는 사람으로 자라난 노라를 모라의 시선으로 보며 질투했다. 노라는 엄마에게서 항상 상처를 받아왔지만 모라의 시선에서는 그런 엄마도 노라를 모라보다 더 챙겼다. 모라 아빠의 손을 외면하던 노라와 노라 엄마가 노라에게 쥐어주던 용돈을 모른척해야 했던 모라. 자꾸만 모라에게 마음이 더 쓰이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 ......근데.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나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한숨을 쉬면서도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번진 루주 자국을 거즈 손수건으로 정리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나에게도..... 내 삶이라는 게 있어.(52) "

 

 부모님이 사실은 나와 다른 우주를 가지고 있는 별개의 존재라는 사실은 가끔 너무 외롭다. 노라의 엄마가 너무나 차갑게 보이지만 그 안에서 피할 수 없는 진실을 본다. 어린아이에게는 생존의 위협이나 다름없을 말이겠지만 지금 나이에서 보니 자신의 삶이 있다는 부모의 말이 아직도 씁쓸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이제와 문득 노라와 모라 뿐 아니라 엄마와 아빠의 시선도 볼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두 사람은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노라와 모라를 바라보았을지 어떤 삶을 살았을지 궁금해졌다.

 

 " 언제부턴가 나는 이해한다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 싫었다.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관심을 보이며 이해하려고 드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걸 알고 난 뒤로는 더욱 그랬다. 정말이지 내가 아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를 너무 쉽게 이해한 나머지 다소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건 이해가 아니라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자주 생각했다. 이해와 동정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쪽이 훨씬 대하기 편하다.(100) "

 

 처음엔 노라를 싫어하면서 노라에게 연락한 모라가 불편했다. 그런데 모라의 이 문장이 마음을 끌었다. 나는 누군가를 너무 쉽게 이해한 적 없었나. 타인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어느 순간들이 사실은 다 오해였고, 나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더욱 쓸쓸하게 만들어 배웅한 적은 없었던가 마음이 철렁했다. 그러고나니 모라가 노라를 바라보며 차곡히 마음에 쌓아두었을 순간들이 어쩐지 눈에 밟혔다. 둘다 애틋한 면이 있지만 모라가 더 마음 쓰이는 까닭은, 그건 아마 내가 타인의 시선을 모라만큼 의식해서이기도 할테다.

 

 잔잔한 이야기를 읽으며 최근 장례식장에 다녀온 날 밤을 떠올렸다. 코로나의 여파로 찾아오는 이는 적었고, 검은 상복을 입은 지인은 술잔을 한두잔 주고받다 '아무도 내 마음은 모른다'는 말을 지나가듯 흘렸었다. 날은 너무 춥고 밤이 늦어 지나가는 차도 별로 없었던 그날 밤 헛헛한 배웅을 받으며 어찌할 바 모르는 위로를 건네야만 했던 때가 내가 노라같고 그가 모라같고 그랬던 것 같다. 노라와 모라가 함께 한 시간이 비슷한 상황이어서 그랬을까, 책을 읽으며 그날이 많이 생각났다.

 

 다산북스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미공개 사전 독자를 모집하는 기획이 있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에 모험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데, 출판사에서 진행하는 이 기획은 그러나 분명 나를 기쁘게 할 것이라는 어떤 확신을 내포한 불확실성이라 언제나 기쁘게 신청한다. 겉이 온통 하얀 가제본을 받아들고 묵직한 느낌을, 그리고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문장을 샅샅이 살폈다. 혹시나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리게 될까? 아직은 하얀 표지 위에 어떤 제목을 붙이고 싶을까 생각해보며 읽었다. 가족이 관련된 제목이 아닐까 싶었는데 두 주인공의 이름이 곧 제목이었다.

 

 책을 읽고 난 뒤에 '노라와 모라'가 김선재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됐는데, 이름이 익숙해 되짚어보니 전에 작가의 시집 '목성에서의 하루'를 읽은 적 있었다. 그래서 시인으로 알고 있던 탓에 '노라와 모라'를 쓴 김선재 작가가 맞나 아닌가 헷갈렸었다. 그때 인상적으로 꼽은 시가 '그린란드'라는 시였는데,  " 환승역에서 알았죠 집은 떠나는 순간부터 사라지는 곳이라는 걸 " 이란 문장으로 시작된다. '노라와 모라'도 어쩐지 '그린란드'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은 것은 그 사이를 연관짓고 싶은 기분탓일까. 시집도 함께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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