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 효과 - 프루스트를 사랑한 작가들의 글쓰기
유예진 지음 / 현암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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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달간의 사이로 프루스트에 관한 책을 연이어 만나게 되어 어리둥절했다. 고전의 힘은 이토록 사그라들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져오는 관심과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던 것인가. 저 악명높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대표되는 프루스트에 관한 현암사의 이 신간을 보고 반가우면서도 곤란했다. 과연 이 쉽지 않은 주제로도 얼마나 읽지 않고 버티기에 어려운 매력적인 깊이를 선사할 것인가. 고백하건데, 아직 다 읽지 못한 뒷 권들을 마저 읽어내기에도 벅찬데도.

 

 저자는 '프루스트 효과'를 통해 프루스트를 사랑한 여덟 명의 작가들의 글쓰기를 풀어내었다. 그 여덟 명의 목록에 버지니아 울프, 롤랑 바르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질 들뢰즈 등의 이름이 올라있다는 것만으로 프루스트에 대한 증명은 더 필요치 않다. 때문에 이를 이용하여 이들 작가에 대해서 이들이 얼마나 프루스트의 영향을 받았는지 또 어떻게 프루스트의 영향에서 벗어나려 했는지 분석하며 소개하고 있다. 오직 프루스트에 대해서만 집중되지 않기 때문에 여덟명 중 자신이 좋아하거나 관심있는 작가에 대해 관심있게 읽어볼 수 있어 더 좋다.

 

 "프루스트 소설에서는 한 부분이 스스로 말을 하고, 그 자체로 존재함으로써 기호들이 발생한다. '시간'은 작품의 소재이며 동시에 주제가 되는데, 그럼으로써 부분들이 생기게 되고 그러한 부분들은 "하나의 퍼즐에 끼워 맞출 수 없는 조각들"처럼 서로 이어질 수가 없게 되며 각자의 공간에서 존재를 유지한다. 그와 동시에 들뢰즈는 시간을 가리켜 "서로에게 수용되기를 거부하고, 동일한 리듬으로 발전하지 않으며, 문체의 흐름에 의해 같은 속도로 이끌리지도 않는 부분들의 궁극적인 존재"라고 정의한다. - p.150 제5장 통일성의 재발견"

 

 때로 전문적인 분석과 지식이 옅보이는 내용이라 간만에 자세를 잡고 주의깊게 읽어야 했다. 우리가 이런저런 사변적 글을 쓸 때 흔히 말하는 '의식의 흐름'적 글쓰기가, 이를 대표하는 프루스트를 통해 다시 보게 되니 앞으로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짜임새있게 글을 쓰도록 노력해야겠구나 반성하게 되는 계기를 한번씩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는 개인적인 짧은 반성을 의식의 흐름으로 토로하였고, 최근 차원과 관련된 여러 차원의 우주와 시공간 개념들을 떠올리게 되는 부분이라 따로 옮겨보았다. 우리가 순차적으로 느끼는 시간의 흐름이란 것이 결국 다른 차원에서 동시간적으로 혹은 그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내용과 비슷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프루스트의 글도 어렵다는 것도.

 

 이는 베게트가 "지난 몇 주 동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두 번 완독하였으나 그에 관한 글을 쓸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며, "끝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처음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고백"했다는 내용에서도 느껴진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프루스트의 작품이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음을 이중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된다. 이 모호한 흐름에서 순차적 시작과 끝을 구분하기 어려움과 동시에 읽기 시작하나 결코 다 읽지는 못하기 떄문에 끝이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이 완독에 대한 부채의식을 없애기 위해 이러저러한 방편으로 책들을 읽지만 부채감은 완독하기 전까지 계속되리라는 불길한 느낌을 받는다.

 

 '프루스트 효과'만이 아니라, 얼마 전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여덟개의 시선으로 살펴본 타 출판사의 신간을 읽었다. 연속된 신간들의 등장에 국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지만 완독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이 문제적 작품에 대한 동시대적 재조명에 관심이 갔다. 개인적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다가 좌절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더 읽어보고 싶고 궁금한 마음이 들었는데, 꽤 만족스러웠다. 다시 완독할 용기는 나지 않는데, 그래도 궁금하고 미련이 남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왜, 지금 프루스트일까! 이는 최근 디저트 문화가 급격히 성장하게 되면서 케익과 마카롱에 밀린 마들렌이 시장 우위를 선점하려는 큰그림을 그린 것은 아닐까 싶다. 는 개인적 분석을 덧붙이며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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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성의 결정은 의심받을까?
터리스 휴스턴 지음, 김명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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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즘이란 말 자체가 혐오되고 부정되는 현실에서 어떤 것이 진짜 맞는 길일까 항상 생각해보게 된다. 여성은 세계와의 싸움에서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요지의 한 교수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현실을 비판하고 천장을 깨려 돌을 던져야 할 때조차 여성은 그것에 도전하려는 자신이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지부터 따져 묻는 자기검열의 코르셋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교수의 논조였다. 그때 '아!'하고 놀랐으나, 아직도 예민하고 민감한 주제로 다뤄지는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검열'이 그치지 않는다. 특히나, 일부에서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의 등장 조차도 원색적인 비난이 되는 시기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런 개인적 고민이 이 책의 내용과 비슷한 뜻을 갖고 있는 것 같아 관심이 갔다. 만약 반페미니즘 성향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페미니즘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가진 한계나 받는 차별은 분명 존재한다는 의식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항상 핑계가 많고 자신의 일을 제대로 처리 못하던 남성직원에 대한 따끔한 질책이 훗날 '이유없이 자신을 싫어하는 선임'이라는 표현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왜 여성상사의 지시나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은 채 상대방을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표현할까.

 

 "사람들은 여성과 남성이 스트레스 상황에서 똑같이 힘든 감정을 경험할 때도 여성이 감정을 내비치면 더 가혹하게 평가한다.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분노가 번득이거나 감정이 상했을 때의 표정을, 그녀가 진짜 감정적이거나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창으로 여긴다. 다시 말해 성격적 결함으로 여기는 것이다. 헌트의 말에 따르면, 그런 여성은 남성과 함께 연구실에서 일하지 않는 게 좋다. 똑같이 좌절하거나 풀 죽은 표정인 남성은? 그 표정은 일시적인 것이다. 하필 운 나쁜 날 그를 목격했을 뿐이다. -p.287 5장 스트레스는 여성을 취약하게 하는 대신 집중하게 한다" 

 

 책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지적하는 부분이 있었다. 때문에 특히 해당 장은 유의하여 읽었는데, 특별히 예상을 넘어서는 해석은 없었다. '여성은 감정적이다'는 흔한 고정관념이 이런 해석을 야기하는 것이다. 다만 명료히 정리되어 있는 내용을 읽으며 개인적 체험 역시 갈무리하는 시간이 되었다. 물론 이 책에서도 여성이 가지는 특질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은 있다. 여성과 남성을 넘어 성의 구분이 이분법이지 않은 시대에서 이를 나누는 것 자체가 불만족스러움을 주지만, 이 특질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태도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감안하고 읽을만한 수준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여성의 행동에 대해 '여성적 특질'로 구분지어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전형이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 여성은 공간감각 능력이 뒤떨어져서 운전을 잘하지 못한다는 '김여사'라는 표현이 그 대표적인 예다. 미숙한 운전 실력으로 어이없는 실수를 하는 개개인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운전을 하는 사람이 집에서 밥이나 할 것이지 운전대를 붙들고 나온 여자들인것만은 아니다. 이들이 좀 더 주의깊게 운전하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빨리 가고 싶은 당신을 답답하게 만들지라도, 혹은 벼락같이 당신의 앞을 차지해 휙 달려가버린 얌체로 느껴질지라도, 이들 모두가 '김여사'로 통칭되며 능력이 더 낮은 존재로 치부될 수는 없다. 

 

 우리는 사회가 원하는 역할상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이는 넓게보면 남녀노소를 떠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이 사회에서 요구되는 각각의 역할에 맞춰 개인에게 부담을 지우는 것이다. 우리가 '코르셋'이라고 부르는 '**는 **해야한다' 류의 이미지가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역할에 대한 제약을 넘어서 권리와 의무에 대한 제한까지 이어진다면 이를 개선해야함은 분명하다. 이전에 담론화되지 않았던 문제이고, 고정적인 관념으로 굳어진 문제를 깨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 변화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알고 자신을 정립하기 위해서 더 많은 텍스트를 접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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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 여덟 가지 테마로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앙투안 콩파뇽 외 지음, 길혜연 옮김 / 책세상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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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여름은 지나가버렸다. 야속하게도 절기 입추가 지나자마자 맹위를 떨치던 더위가 사라져 갑자기 찾아온 가을의 선뜩함에 어리둥절한지도 벌써 한달은 지났다. 금쪽같은 여름휴가를 프루스트와 함께하도록 권장하려 했던 이 사악한 책은 그만 여름을 놓치고 말았다. 어쩌면 여름휴가를 몽땅 독서에 잃어버릴 리 없을 것을 알아채고 부러 가을을 맞아 나섰는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모든 유용한 것들이 그러하듯, 이 책도 그만큼의 위험요소를 안고 있다. 이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정복하길 실패한 사람들에게도 다시 시작하면 완독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주말을 포함해 약 4박 5일간의 여름휴가 동안 가능할 생각만큼의 일이었다면 이미 실패한 적 없었을 일을.   

 

 아, 프루스트. 그의 이 만연하고 아름다운 작품은 그 이상의 큰 단점을 가지고 있는데, 분량이 많은데다가 이어지는 흐름이 순차적 시간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책에서 표현했듯 " "불행한 일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려면 중병이 들거나 한쪽 다리가 부러져야만 한다는 것이다"라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동생 로베르 프루스트가 한 이 말"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기위해 시도하였다 무참히 패배한 독서가들 중 하나로서, 약 5년 전 즈음에 한 출판사에서 새로이 출간한 것을 두 권 정도 읽다가 그쳤던 기억이 있다. 그때 처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접했는데, 읽기 까다로와 몇 문장을 되새기듯 반복해서 읽게 만들면서도 계속 다음 문장으로 눈길을 끄는 아름다운 문체가 매력적이었던 인상이 남아있다.

 

 책세상의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상세하고 면밀히 분석한 총 여덟 가지 테마로 구성되어 책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 독서가들의 믿음직한 길잡이가 되어줄만한 책이다. 이는 각 시간, 등장인물, 프루스트와 사교계, 사랑, 상상의 세계, 장소들, 프루스트와 철학자들 그리고 예술로 대표된다. 이 테마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이루는 기본 골자를 파악하도록 보조하면서 작품 면면의 의미로까지 확장되어 독자들의 사유를 확장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것도 벅찬데, 한 권 분량의 책이 하나 더 권장됨에 좌절할지 모르지만, 사실 중간에 첨부되어 실린 책의 분량이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약간의 부담을 덜어도 될 것이다. 더 솔직하자면,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을 읽으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굳이 완독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은 느낌도 든다.  

 

 개인적으로 철학들과 관련된 테마와 예술은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나, 어려움을 느꼈던 시간과 등장인물에 대한 테마에서 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기 어려웠던가 갈피를 잡도록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가장 심취해서 읽은 부분은 사랑 테마였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폭넓은 공감대와 큰 관심을 갖는 주제이기도 한 이 테마는 소제목 단락들마저도 하나같이 인상적이었는데, "혹은 결국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을 수 없음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또는 우리가 붙잡은 사람이 상상했던 것과는 퍽 다르다는 것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그러므로 행복한 사랑이란 없다. -p.132 제 4장 사랑 1 독자의 초상" 과 "그러므로 질투는 사람 자체보다 우리가 체험했다고 믿은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의심을 나타낸다. -p.161 제 4장 사랑 4 질투"의 부분들이 깊이 공감되었다.

 

 첫머리에 로베르 프루스트가 한 말이 특히나 공감되는 것은 얼마 전 토지를 두고도 병상이나 옥중에서 완독할 수 있는 작품으로 표현했던 한 티비 프로그램을 봤기 때문이다. 두 작품에 대한 묘사 뿐 아니라 가지는 의미 또한 비슷하고, 완독에 실패했다는 결과도 같아 개인적으로 연관하여 떠올리곤 한다. 때문에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생기는 한 편, 완독만이 독서의 형태는 아니라는 것 또한 동시에 생각한다. 완독하지 못한 책에 대한 부채의식을 갖는 것은 즐거움으로서의 독서가 아니니. 다만 각 부분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읽는 이를 이끄는 도움이 되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해석과 감상을 고정시키는 한계도 보인다. 물론 모든 길 잃은 독자를 위한 친절한 안내자가 되어주기 위한 선의는 분명히 드러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싶지만, 여러 이유로 어렵다면 가을을 맞아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으로 대체하여 시작해본다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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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천재가 된 홍 팀장 - 품격을 키우는 리더의 사람 공부
조윤제 지음 / 다산라이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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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이제야 논어일까? 현대인은 교육과 배움의 과정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 다시 잠을 자기까지 텔레비전과 신문, 인터넷 등의 모든 매체와 접촉하고,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게 된다. 주위를 맴도는 수많은 정보들 속에서 어느새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이 곧 힘이요, 자신의 가치인양 인식하게 되었다. 지식을 알려주는 방송 프로그램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알고 싶은 것을 몇 자 적어 넣기만 하면 수십 수백 가지의 정보가 나오는 지식 검색이란 프로그램도 생겨났다. 정보가 넘쳐나고 지식이 활발히 교류되면서 말을 절제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삼가던 시대는 사라졌다. ‘침묵은 금이고 웅변은 은이다.’, ‘가만히 있으면 절반은 간다.’라는 말 등의 절제하는 모습이 동서양을 막론하는 진리이자 미덕이었던 시대는 없어졌다.

 

 현대 사회는 서로 너무나 말이 많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자신을 알리고, 뽐내기 위해 사람들은 갖가지 지식을 습득하고 모은다. 더 많은 정보를 손에 넣고 떠들어야 그에 따라 자신의 존재가치가 상승한다고 믿는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정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주워 담아, 마치 그것에 대해 모르는 것은 세상에 도태되고 무지한 것으로 자신의 약점이 된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에 궁금한 것을 물으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자신의 단편적인 지식을 가지고 박사가 된 양 떠들어 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파악되지 않은 채 아무런 의심 없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된다.

 

  논어 공야장 5-27을 보면 십실지읍 필요충신여구자언 불여구지호학야 라는 말이 있다. 열 가구의 작은 고을에도 자신만큼 충실하고 성실한 사람은 있을 것이나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란 뜻이다. 하지만 공자가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다면 아마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있을 것이나 충실하고 성실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라고 반대로 말해야 했을 것이다. 그만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배움과 정보에 목이 말라 있다. 이전보다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과연 그것이 제대로 배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현대인들은 지식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실천 없이 그저 욕심껏 더 많이 정보를 모으고 입으로만 외우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제대로 그 지식을 배우고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논어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논어 천재가 된 홍 팀장'은 공 부장과 홍 팀장이 서로 대화를 주고 받는 상황을 통해 현대의 회사 생활과 논어의 내용을 절묘히 엮어놓았다. 때문에 문자 그대로 풀이되는 논어를 그대로 접하는 것보다 훨씬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풀어졌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실제 생활에서 사자성어를 사용해도 어색한 마당에 무려 논어를 인용한다는 것은 사실 부조화스러운 일이지만, 자기 자신의 뜻을 넓히기 위해서 한번쯤 읽어본다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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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크린 호랑이 - 중국은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려 하는가
피터 나바로 지음, 이은경 옮김 / 레디셋고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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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여러 나라 출신의 패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다양한 주제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티비 프로그램이 인기다. 거기에는 당연히 중국 출신의 패널도 자리하고 있는데, 때때로 보이는 중화사상의 그늘을 예민한 시청자들이 포착해 낼 때가 있다.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말하는 '지금은 미국이 세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지만 원래 중국이 그런 위치였다'는 혹은 '앞으로는 미국과 중국이 큰 나라가 되어 세계를 이끌 것이다', '중국이 1등 국가의 자리를 다시 되찾을 것이다'는 류의 발언들이 그렇다. 그런 표현들에 반감을 갖기 이전에 국민들의 정신 깊숙이 심어진 중화사상을 뿌리내려놓은 중국의 속내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새삼 직시해야 할 필요를 떠올렸다. 우스갯소리로 오직 한국만 일본을 낮게 본다는 말이 있는데, 중국 또한 그렇다. 그들이 급격히 성장한 지난 십여년의 기간동안 우리가 제대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는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앞서 예를 들었던 티비 프로그램의 패널의 발언처럼 중국인의 마음속에 중국은 대국이라는 것과, 지난 침체기 동안 잠시 세계의 패권에서 물러나있었지만 지금의 성장과 더불어 곧 본래의 자리를 되찾을 것이라는 생각은 당위적으로 자리한다. 여기서 '웅크린 호랑이'의 바탕이 드러난다. 지금의 그리고 앞으로의 중국인들이 교육과 문화로 자리잡을 이 생각은 이미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 강대국과의 충돌을 예상한다. 그리고 가장 첫 장에 바로 그 내용에 대한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다소 어렵지 않을까 싶었던 책의 내용이 현실감있게 다가오면서 진입장벽이 낮아지게 되는 계기였다. 이처럼 읽다보면 어려울 것 같은 단락의 주제들도 조금 생각해보면 일상적으로 한번쯤 궁금해봤을만한 문제들로 눈에 익혀지게 되는 면이 있다.

 

 사실 두 나라 사이의 패권다툼이 실제적인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32장의 '중국이 해상의 미 군함 혹은 괌이나 일본에 있는 미국 전진기지를 겨냥해 미사일을 발사한다면 미국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같은 질문들은 공감되지 못했다. 패권다툼이 생기더라도 양국의 전면전은 자국, 자국민의 피해만 남길 뿐이니 제 3국과 관련된 분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의 간접적인 방식에 그칠 것이지 않을까. 어디까지나 견제적인 미국의 시각에서 예상한 도발적 시나리오들은 아무래도 관조적인 시선으로 보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다만 몇가지 부분은 꽤 인상적이었는데, 특히 43장의 내용은 주변에 묻기만 해도 의견이 분분했다. 북한의 핵 위협과 사드 배치 등의 문제를 직면한 현 상황에서 '현재 아시아에서 더 우세한 군사 전략을 펼치고 있는 국가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이 등장한다. 책의 내용 보다 주변인들의 생각을 듣는 것이 더 노골적인 시각을 접할 수 있는 챕터였다.

 

 한참 외교적 입장 차이로 날선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때에 '웅크린 호랑이'를 읽어본다면 현 시류를 읽을 수 있는 도움을 줄 것이다. 흔히 경제적 분야로 연상되는 중국의 성장이 경제적인 면 뿐만이 아니라 정치군사적으로도 확장되고 있는 상황을 명료히 짚어냈다. 더불어 우리나라의 사드 배치에 대하여 반발하면서 압력을 가하는 한 편, 억압하고 있는 중국 내 소수민족들과 인접한 주변국가에 대한 압박적 태도를 유지하는 중국의 행보가 심상찮음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우리에게 중국은 어떤 상대일까. 앞으로 우리는 국제 정세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등을 이 책을 통해 분석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시각을 키우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입장이 아닌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고, 주제에 비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으니 한번쯤 읽어본다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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