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당신들 베어타운 3부작 2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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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일이다.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이름에 비하면 큰 감흥은 없었다. 심지어 빠뜨리지 않고 동성애자 코드를 챙겨 넣었다며 트렌디한 느낌을 받았다고도 했다. 하키와 성폭행, 끔찍한 사람들 같은 얘기가 사막에 이는 바람처럼 뜨거우면서 건조하게 지나가는 듯 했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전작에 관한 생각이었다. '베어타운'을 읽었을 때는 이를테면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알은체를 하겠지만 굳이 근처 카페를 찾아 들어갈 정도는 아닌 사이로 남았다. 그런데 '우리와 당신들'을 통해 짝사랑이 시작됐다. 뒤늦게도.  

 

" 가끔 착한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끔찍한 짓을 저지를 때도 있다. 하키팀의 스타였던 남학생이 여학생을 성폭행했다. 그리고 우리는 길을 잃었다. 공동체는 선택의 총합이고 두 아이의 진술이 엇갈렸을 때 우리는 그를 믿었다. 그게 더 쉽기 때문이었고, 여학생의 말이 거짓말이라야 우리가 평소처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진실이 밝혀졌을 때 우리는 마을과 함께 무너졌다. 우리가 모든 단추를 잘못 꿰었다고 말을 하기는 쉽겠지만 당신이라고 다르게 대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겁에 질리다보면, 한쪽 편을 선택하도록 강요를 받다보면, 뭘 희생해야 하는지 알다보면 그렇게 된다. 어쩌면 당신도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용감하지 않을지 모른다. 어쩌면 당신도 스스로 바라는 만큼 우리와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p.14 "

 

 연결되는 작품인 '베어타운'의 줄거리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다. '우리와 당신들'은 그 후의 내용인데 심각한 사건이 터지고 갈등이 절정으로 올라가는 '베어타운'보다 더 깊게 빠져들어 읽었다. 티비 드라마라면 초반 1~2회차가 전체적인 틀을 잡느라 진입장벽이 되는 느낌이다. '베어타운'이 그렇게 짧지는 않지만. 다만 그 장벽을 넘기만 하면 다음 회차를 기다리느라 일주일을 보내는 인생 명작으로 꼽을만한 드라마가 되듯 '베어타운'으로 틀을 잡고 난 뒤에 다시 만난 인물들은 하나같이 사연없는 사람, 매력없는 사람 없는 애틋한 내 새끼들이 된다. 한 마을이 있고 그 안에 살아가는 인물들을 너무나 많이 소개한다고 생각했는데, 다 '우리와 당신들'에서 이야기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둘 다 읽을 수 밖에!

 

 이제서야 프레드릭 배크만이 어떤 작가인지 알 것 같았다. 이런 매력을 왜 전에는 눈치 못챘을까. 다 같은 인물에 배경인데 왜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반짝임이 구석구석 엿보이는 걸까. '베어타운'은 그냥 재미로 보고 '우리와 당신들'은 빛나게 하려고? 혹은 책이 너무 길어지니까 1부 2부로 나눠서 그냥 두권으로 내본걸까. 둘다 재밌는데 내 성향 자체가 폭발하고 불타오르는 생생한 현장보다 폐허에 남은 불씨가 이리저리 흩어져 재를 날리는 황량함이 주는 음울하고 위태로움을 더 즐기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인상이 강하게 남는 부분을 만날 때마다 표시를 해놓았는데, 하다가 너무 많아서 그냥 놓아버렸다. 다 옮기면 책 한 권이니 그냥 읽어야지.

 

 " "결혼 생활은 하키 시즌이랑 비슷한거야, 여보. 가장 막강한 팀이라도 매 경기마다 제 실력을 백 퍼센트 발휘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워낙 실력이 출중하면 졸전을 쳘치더라도 이길 수 있잖아. 결혼 생뢀도 마찬가지야. 점심을 먹기 전에 와인을 마시고 근사하게 사랑을 나누고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고 싶은데 모래가 너무 뜨겁고 햇빛 때문에 화면이 너무 눈부신 게 가장 골치 아픈 문제인 휴가를 기준으로 결혼 생활을 측정하지는 않아. 일상을 기준으로, 집에서, 가장 낮은 수준에서, 서로 어떤 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문제를 해결하는지를 기준으로 측정하지." p.130 "

 

 마을의 이야기이다보니 서로를 낱낱이 알고 있고, 개인이 아닌 가족의 이야기로 묶여있다는 점도 좋았다. 그리고 그 관계안에서 작가가 닦아온 삶의 경험을 잘 녹여냈다. 결혼생활에 대한 저 부분도 좋았지만, 이 자체가 결국 한 사람을 판단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이 좋았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자신보다 지위가 낮거나 형편이 어렵거나 상황이 곤궁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과 비슷하게 겹쳐 들린다. 무엇이든 가장 어렵고 좋지 않은 상황에서 진면목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면서도 재밌다.

 

 전에 '베어타운'을 읽으면서 트렌디하다고 평한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이 게이임을 숨기고 있는 소년 '벤이' 때문이었다. 사실 그때는 넷플릭스의 '빨간머리 앤'에 흑인이 등장하거나, 친구들과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커밍아웃을 하는 일이 생기는 것처럼 다양성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처럼 생각했다. 그런데 벤이가 절친을 짝사랑하는 게이소년이 아니라 하키 선수로 바로 서고 남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이번 편은 트렌디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꽤 감동이었다.  

 

 " 그녀가 침대에 눕자 아들이 뺨을 닦아주며 얘기한다. "제가 웃긴 애기 하나 해드릴까요? 저더러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서 여자친구를 절대 못 만날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거 엄마 잘못이에요. 왜냐하면 저는 엄마랑 아빠가 서로 바라보는 것처럼 저를 바라봐줄 사람을 찾거든요." 안-카트린은 보보의 큼지막하고 맹하고 어리숙한 머리를 그녀의 이마에 대고 세게 누른다. 그가 결혼하는 걸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빠가 되는 걸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산다는 건 우라지고 우라지고 또 우라지게 힘든 거라 가끔은 거의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아무리 원래 그런 거라지만 말이야. p.124 "

 

 '우리와 당신들'은 벤이, 마야, 아나, 아맛, 보보, 레오 모든 아이들이, 그리고 베어타운 안의 모든 인물들이 자신만의 우주를 갖고 그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별은 폭발하고, 어떤 별은 새로 태어나고, 어떤 별은 가장 밝게 빛나고, 어떤 별은 혜성처럼 쏜살같이 지나가 머무르지 않는다. 프레드릭 배크만은 성실하면서도 끈질기게 그들의 삶을 펼쳐내 보여주었다. 알고보면 나쁜 사람은 없다는 말처럼 때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가 비틀어진 걸음을 걷게 된 돌부리가 있을 수 있고, 눈이 가려져 길을 잃은 것일수도 있고, 다시 제대로 걷기 위해 걸음을 떼는 과정일수도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그래서 좋았다. 평면적인 사람이 없어서 나쁘게 보일지라도 미워하지 않게 된다.

 

 " 아맛은 징징거리지만 리파가 말허리를 자른다. "그만해! 너는 여기서 탈출할 거야. 왜 그런 줄 알아? 네가 포기하건 안 하건 여기 이 아이들은 네가 하던 대로 할 테니까. 그러니까 연습해! 네가 NHL 선수로 뛰고 인터뷰하는 모습이 텔레비전에 중계되면 여기 출신이라고 얘기할 수 있잖아. 할로 출신이고 네 인생을 허송세월하지 않았다고. 그러면 이 동네 아이들은 전부 네 얘기를 들을거야. 그러면 내가 아니라 너처럼 되고 싶어 할 거야." 리파는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는다. "야, 이 이기적인 새끼야! 너 정도 되는 재능을 타고날 수 있다면 이 동네 다른 아이들은 뭐든 내줄 수 있다는 걸 몰라?" 아맛의 손이 떨린다. 리파가 다가와 다시 여덟 살 시절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 그를 끌어안는다. 리파가 아맛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고 속삭인다. "너랑 같이 달릴게. 그래야 네가 정신을 차릴 수 있다면 여기 있는 미친놈들이 전부 여름 내내 너랑 같이 달릴 거야." p.173 "

 

 거기에 진한 우정과 꿈을 좇아 성공해나가겠다는 아름다운 열정도 담겨있다. '베어타운'에 '우리와 당신들'까지 분량이 적지 않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 꼭 읽어보길 바란다. 처음 답답한 부분에서 포기하고 싶어진다면 존버는 승리한다는 말을 새기며 끝까지 읽어나가길. " 그 아이는 오늘 밤에 곤히 잠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안에 깃들어 있던 곰은 방금 전에 눈을 떴다. p.307 " '우리와 당신들'을 읽으며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줄도 몰랐던 프레드릭 배크만에 대한 덕심도 눈을 떴다. 이 두 권이면 당신도 찾게 될 것이다.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숨은 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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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개
추정경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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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겹게 얻어먹은 욕과 날려 버린 샷들이 악몽이 되어 찾아왔지만 다음 날이면 다시 라켓을 잡고 코트로 나가야 했다. 라켓을 잡는게 미친 듯이 싫은 날조차 코트 위에 서야 했다. 원치 않는 실패도 있었고 원치 않던 우승도 있었다. 서브가 잘 풀려 넣는 족족 에이스가 되는 날도 있었고, 죽어라 더블 폴트만 하는 날도 있었고, 경기가 꼬이는 날도, 더럽게 운이 나쁜 상대 선수의 불운을 밟고 올라서는 날도 있었다. 그런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는 사이 어쩌면 앞으로의 삶도 이렇게 허무하지 않을까, 스쳐가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p.50 "

 

 꽤 괜찮은 소설이다. 번역을 거치지 않은 장편을 읽은 것이 오랜만인데 테니스 세계가 낯설지라도 근간이 되는 배경과 심리가 익숙하다보니 편한 마음으로 즐겁게 읽었다. 한국문학을 잘 읽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가끔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읽다보면 안으로 파고들기만 하는 작은 틀에 지쳐 한국문학은 잘 읽지 않는다는 평이 있었다. 어떤 뜻으로 말하는지 알 것 같지만, 익숙하고 안정적인 배경을 잡힐 듯이 그리며 한 권을 읽고 나니 그래도 한국문학을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 맛?을 다른 것에서는 보기 어렵다. 누군가는 이 말도 어떤 뜻으로 말한건지 알아주겠지.

 

 초반 사건이 시작되는 단계에서는 인물과 틀을 잡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사건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독자도 함께 시작한다. 쏟아지듯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 고만고만한 급식들인데, 특출나게 사건을 추리해나갈만한 인물이 주인공인 것도 아니고 사건의 규모나 동기가 원대한 것도 아니다. 이것이 '안으로 파고드는 작은 틀'로 표현될만한 설정인가 싶은 부분이다. '검은개'는 결국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고, 맞물린 인물들 사이에서 욕망이 이리저리 네트를 옮겨다닌 궤적을 좇아 풀어나가는 이야기이다.  

 

 " 면회실의 문이 열리고 감청색 옷들이 어깨를 드밀며 쏟아진다. 일찍 들어와 봤자 제 부모에게 질펀히 욕이나 먹을 것들이 자신을 기다리는 무언가에 들떠 두리번거렸다. 어른 뺨치는 흉악무도한 사고를 치고도 그 속에 젖니도 여물지 못한 애가 들어 있음을 임 변은 이곳에서 확인했다. 장기가 파열될 때까지 급우를 때린 강심장이 제가 기르는 강아지 안부를 묻는가 하면 시멘트를 그대로 굳힌 듯한 근육 덩이가 제 엄마의 가슴에 파묻혀 소리 내어 우는 걸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p.180 "

 

 테니스 유망주 소년이 약물과 술에 취해 교통사고 상해 사건을 일으켰다. 피해자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보니 사건은 벌어져있었고 자신의 미래가 송두리채 망가져버린 그 날 밤,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소년의 발버둥을 담고 있다. 감방이나 다름 없는 감별소안에서 소년은 왜 누가 어떻게 자신을 이곳으로 보냈을까 생각한다. 무심히 지나보냈던 수많은 신호들을 하나씩 되짚으며 무엇 때문이었을지 제 주변에서 들끓고 있던 타인들의 욕망을 찬찬히 돌이켜본다. 이 순간들이 지나고 나면 사건의 진실도 알게 되겠지만, 소년도 어른이 되어버리리라. 

 

 책을 읽고 난 뒤에 '가버나움'이란 영화를 봤다. 감별소 안에서 만나게 되는 인물들에게서 자신을 낳은 부모를 고소하고 싶다 말하는 12살 소년 자인을 겹쳐본다. 요즘 청소년들은 자신의 어림을 수단으로 '처벌 받지 않을 혹은 처벌의 수위가 약할' 범죄를 계산하여 저지른다고 한다. 계산까지는 아니더라도 미성년이라는 보호의 테두리 안에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의지할 것이다. 이런 악의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날 때부터 버려졌다는 '해골'이나 석민우 같은 감별소의 아이들에게서 선악의 구분 앞에 자신을 둔 이기심과 태어나 보고 가진 세상의 악순환을 본다.

 

 그애들이 자연스럽게 임석을 의식하는 것은 본인들은 가져본 적 없는 미래를 손에 잡아본 사람을 무의식 중에 알아봤기 때문이다. 지금 한 공간 안에 있더라도 어찌되었든 시작점부터 달랐을 가능성의 냄새를 본능적으로 맡았다. 이 부분에서 주인공인 임석이라는 인물에 반감을 느꼈는데, 지나치게 아무것도 모르고 무심했던 본인의 탓으로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싶었다. 밖에서든 안에서든 그 존재 때문에 불거진 다툼에서 의도가 없었을지언정 임석이라는 인물이 무구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 사람의 밑바닥에 두 갈래 길이 있더라. 그것은 아버지의 고해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바닷속처럼 진원지를 알 수 없는 울림이 있었다. 점점 낄낄대던 웃음이 잦아들자 깊은 곳에서 퍼 올린 다음 말이 이어졌다. 두 길 중 하나는 심연이고 다른 하나는 나락이다. 상처를 껴안으면 심연으로 내려가는 거고 발버둥 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지. 빛이 없기는 매한가지나 한쪽은 상처가 벗이 되고 또 다른 한쪽은 어둠이 그 자체로 얼음송곳이 되어 나를 찌른다. 아비는 제 존재가 어디에 있는지 말하지 않았다. p.167 "

 

 인상적인 내용이었다. 중간에 어릴 적 키우던 황구에 대한 부분이나, 아버지 몰래 투견을 풀어주고 떠나려했던 성구의 행동에서 문득 1미터의 삶을 사는 개들에 대한 연민이 일었다. 우리 대부분의 삶도 자유롭지 못한 채 던지듯 놓아주는 눈 앞의 밥그릇만 핥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계속되는 경기에서 쏟아져오는 공을 받아치며 "앞으로의 삶도 이렇게 허무하지 않을까, 스쳐가듯 그런 생각이 들었" 던 한 소년의 생각처럼. 어떤 분류로 들어갈지 모르겠는데 청소년 소설처럼 느껴졌다. 제 나이의 학생들이 읽는다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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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순간
톰 말름퀴스트 지음, 김승욱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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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은 딱 세 가지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아주 중요한 세 가지. 그가 말을 하면서 자세를 바꾸고는 아주 단호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첫째, 잠을 잔다. 제대로 자지 않으면 버텨낼 재간이 없습니다. 둘째, 먹는다. 먹는 걸 잊어버리면 기운을 낼 수 없습니다. 셋째, 최대한 자주 병원을 벗어난다. 그러지 않으면 점차 머리가 이상해질 겁니다. _ p.49 "

 

나의 감성은 지금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 혹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생각해본다. 제목부터 감상적인 이 책을 내내 건조한 시선으로 훑어내리면서 조금 답답했다. 두서없이 적혀 내려가는 상황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느낌은 받았지만 깊이 공감하며 몰입하기 어려웠다. 서사에서 상황 전달만이 뚜렷하고 살을 붙여나가는 흐름이 부족했다. 글의 성향으로 본다면 남성독자에게 더 공감을 얻을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예전에 '아버지'라는 소설이 그러했듯, 부성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어필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 마음이 감동으로 물들지 못한 것은 한국식 신파에 지나치게 익숙해서 일지도.

 

 모두의 상황과 가치관은 다르겠지만, 이 책을 읽으며 결혼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예기치 못한 상황이 생기며 연인을 잃고 난 뒤에 발생한 문제를 보니 문득 예전에 어딘가에서 '너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연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로맨틱한 표현으로 결혼이라는 제도의 필요성을 어필한 문구를 본 기억이 났다. 그때는 제법 로맨틱하고 또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그 표현을 현실적 상황에 대입시킨 결과물이 이 책이겠구나 싶었다. 그렇지만 작년말 기사로는 우리나라도 동거내지는 사실혼 관계도 법적 가족 인정하는 법제화를 추진시킨다고 하니, 이 책을 읽고서도 결혼이 더 메리트있다고 여겨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나마 조금 마음을 움직인 것은 따로 옮겨온 저 세 가지 주의사항이 주는 현실감이다. 잠자리도 불편하고 입맛도 없어지는 병원 생활을 하면서 지키기 어렵지만 장기전을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라 인상적이었다. 머리가 이상해지기 보다는 우울감이 커지거나 알게모르게 체력을 떨어뜨리는 요소다. 그나마도 아픈 사람 앞에서 티낼수도 없는 변화이고. 누군가 간병 생활을 하고 있다면 때때로 찾아가 병원밖으로 데리고 나와 바람을 쐬이고 먹을 것을 사주시라. 병원으로 찾아와 위로와 격려를 건네주는 것도 고맙지만 그를 환기시키기엔 조금 부족할 것이다. '환기'는 설령 그가 원치 않더라도 그에게 필요한 일이다. 

 

 간만에 감동적인 책을 읽고 눈과 마음을 촉촉히 적시는 후기를 써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다른 리뷰를 보니 좀 더 깊이 공감하며 감동적으로 읽은 사람들이 많아 이 책을 감상하는데는 그 글들이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나와는 맞지 않았을 뿐이라고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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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귤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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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귤'을 읽는 동안 두통이 일었다. 그 두통이 '청귤'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지, 날이 추워지면서 몸상태가 난조를 보이는 까닭인지, 아니면 책을 읽기 싫었던 내가 만들어 낸 두통인지 모를 일이다. '청귤'의 탓이 아니더라도 '청귤'에는 두통의 책임소재를 물을만한 요소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어쩌면 근래의 정신이 순두부처럼 무뎌져버린 탓인지도 모른다. '청귤'의 표지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제발 미숙하고 일러 청량하고 싱그러운 이야기가 있으라 생각했는데, 그 안에서 시큼하고 씁쓰레한 것만 흘러나왔다. 머리도 아프고 뒷맛도 좋지 않아 책을 읽고 나서 공연히 개수대에 쌓여있던 설거지를 해보기도 하고, 잠깐 밖으로 나가 커피전문점에 다녀와볼까 생각해보다 냉장고 깊숙이 넣어둔 술을 한 캔 꺼내었다. 시원하고 짜릿한 것이 목을 따라 내려가자 그제야 좀 '청귤'에 대해 생각해볼 여유가 생겼다.

 

 사실 '로레나'라는 첫 시작부터 어딘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네일을 하는 로레나의 모습을 읽으며 얼마 전 휴가로 다녀온 베트남에서 받은 마사지가 떠올랐다. 나에게 처음 마사지를 해준 사람은 한눈에 봐도 어리고 체구가 작은 소녀였다. 베트남도 마사지도 처음이라 알아보며 '내가 마사지를 잘 받을 수 있을까'만 걱정했던 것과 달리 '마사지를 받아야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는 동남아 가면 1 일 3 마사지도 받는대더라며 불편함을 다독이며 마사지를 받았었다. 그런데 '청귤' 안에서 마사지를 받으며 외면했던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던 마음을 도망가지도 못하고 마주하고 만 것이다. 페디큐어를 하겠다며 로레나에게 발을 턱 들이민 큰 삼촌이 된 느낌이었다.  

 

 그 뒤로도 '청귤'은 내 안에 있던 불편함의 고리를 어떻게 찾아냈을까 싶게 하나씩 들이밀었다. 어릴 때 앓은 뇌수막염으로 사춘기시절까지 사시가 있던 혜정의 이야기는 어린시절 사시가 있었던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아이는 한쪽눈에 하얀 의료용 안대를 하고 다녔는데, 사시가 꽤 심해 초등학교 무렵 수술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애의 눈이 교정되는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한동안 조용한 따돌림을 당했다. 처음엔 그 아이의 눈이 상대방을 째려보는 것 같아서, 그 뒤로는 남들과는 달라서. 그 아이가 이사를 가기 전까지 나는 꽤 절친한 그애의 친구였는데, 수많은 추억이 생겼어도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는 것은 어린시절 혼자 놀이터 모래밭에서 놀고 있던 그애의 모습이었다.

 

 '청귤'을 읽으며 이상하게도 안으로 안으로 침잠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를 들어"준다기 보다는 내 안에 흩어져있던 조각들을 발견하는 것 같았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내볼까도 싶었지만 책을 읽고 너무 내 이야기만 하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나 역시도 좋은 이야기꾼은 아니니까. 소설집 안의 모든 내용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고 기대보다 무거웠지만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런 계기없이는 좀처럼 떠올리지 않을 것들을 문득 꺼내보게 되기도 했고. 흐린 가을날에 읽어볼만한 책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더 궁금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내 이야기만 늘어놓은 감상평이 되었지만, 이쪽은 진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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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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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연애의 기억"은 파격적이다. 끊임없이 케이시 폴이 그와 수전 사이의 "사랑"이란 것을 늘어놓은 문장들을 반쯤은 회의적이고 경멸적인 눈으로 읽어내렸다. 솔직하자면 문체는 건조하고 복잡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의 회고라고 치기엔 열아홉 그대로의 거칠고 서툰 표현들이 문득 튀어나왔다. 게다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비유적 표현들도 많았기 때문에 읽는 흐름조차 매끄럽지 못했다. 줄리언 반스의 신작이 주는 기대감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아무리좋게 표현하려해도, 혹은 불분명한 말들로 덮으려 해도 열아홉의 소년과 마흔여덟의 여자가 사랑한다는 내용은 곱지 않다. 반대의 경우라도 그렇다. 솔직히 더욱. 그러다 그들이 가입한 테니스 클럽으로부터 '사정상' 회원 자격을 박탈 당했을 때부터 뭔가 느낌이 왔다. 삼분의 일에 달하는 내용동안 기다려왔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됐다는 느낌.

"첫사랑은 삶을 영원히 정해버린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래도 이 정도는 발견했다. 첫사랑은 그 뒤에 오는 사랑들보다 윗자리에 있지는 않을 수 있지만, 그 존재로 늘 뒤의 사랑들에 영향을 미친다. 모범 노릇을 할 수도 있고, 반면교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뒤에 오는 사랑들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도 있다. 반면 더 쉽게, 더 좋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 물론 가끔은, 첫사랑이 심장을 소작해버려, 그 뒤로는 어떤 탐침을 들이밀어도 흉터 조직만 나올 수도 있지만. p.136"

아아, 아름다운 말들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지겨웠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첫사랑에 관한 의미부여에 염증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건축학개론'이야 대히트를 쳤지만, 그 사이에 많은 시간이 지났고 또 한번 첫사랑을 이야기하는 '너의 결혼식'같은 경우는 비슷한 맥락으로 스러져버렸다. 첫사랑이 아름답고 강렬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은 맞지만, 첫사랑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매몰된 자들은 대개 그 뒤의 삶이나 사랑에게 무례하다. "연애의 기억"에서 중간중간 이런 대목을 마주할 때마다 지루한 첫사랑 타령을 굳이 지켜봐야할까 의심했다. 한편으론 첫사랑이 지나보내며 찢어지고 그을린 상처의 시간을 지나왔더라도, 결국 '첫사랑이 뭐 저렇게까지 대단하다고' 하며 무덤덤해진 까닭은 자신이 무감한 탓이거나 남자가 아니기 때문인가 의문도 가져봤다. 흔한 말로 남자의 마음엔 여러개의 방이 있고, 여자는 하나만... 어쩌고 하는게 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폴은 무모했고, 수전의 선택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도주'같은 말들도 한심했다. 연애의 기억이라기 보다는 파멸과 막장의 변명같은게 더 잘 어울렸다. 전혀 행복하거나 사랑스러운 시간이 느껴지지 않는 사랑이야기였다. 젋고 잘생긴 청년과 사랑에 빠지는 중년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파격적이게도 그렇지 않았다. 인생은 실전이고, 여기에 실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한 내용이다. 연애소설이라면, 연애소설이 맞다면, 좀 더 달콤해도 좋았을텐데, 아쉬웠다. 누구에게 이 책을 추천해줄 수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줄리언 반스를 좋아하는 독자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식으로 표현해보자. 나는 열아홉이었고, 나는 사랑은 썩지 않는 것이라고, 시간과 퇴색에 내력이 있다고 믿었다. p.102"

사랑을 믿는 사람들이 가지는 사랑에 대한 믿음은 맹목적이고 강압적이다. 감정적 휴지기에 들어간 것인지 수많은 감정선의 경계를 무참히 오가는 사랑이란 감정이 대체 무엇인지 의문을 느끼는 요즘, 왜 사랑이 이토록 절대적인 것으로 묘사되어야 하는가를 곱씹으며 읽었다. 읽으면서 우호적인 시선은 없었다. 열아홉과 마흔여덟의 사랑에 우호적으로 보일 구석이 없지 않은가. 시대가 맞지 않는 사랑은 서로의 시기를 침범하고 온전치 못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연애의 기억"이 그 모든 것을 납득시킬만한 무언가를 담아낼 수 있을까? 이 모든 불편함에서도 조금이나마 마음을 움직일만한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런 기대로 책을 읽었다. 그리고 끝내 깨달았다. 계속 의심하고 차가운 눈으로 멀찍이 떨어져 바라봤지만, 사랑을 믿고 싶었던 자신이 어딘가에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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