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확실히 "연애의 기억"은 파격적이다. 끊임없이 케이시 폴이 그와 수전 사이의 "사랑"이란 것을 늘어놓은 문장들을 반쯤은 회의적이고 경멸적인 눈으로 읽어내렸다. 솔직하자면 문체는 건조하고 복잡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의 회고라고 치기엔 열아홉 그대로의 거칠고 서툰 표현들이 문득 튀어나왔다. 게다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비유적 표현들도 많았기 때문에 읽는 흐름조차 매끄럽지 못했다. 줄리언 반스의 신작이 주는 기대감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아무리좋게 표현하려해도, 혹은 불분명한 말들로 덮으려 해도 열아홉의 소년과 마흔여덟의 여자가 사랑한다는 내용은 곱지 않다. 반대의 경우라도 그렇다. 솔직히 더욱. 그러다 그들이 가입한 테니스 클럽으로부터 '사정상' 회원 자격을 박탈 당했을 때부터 뭔가 느낌이 왔다. 삼분의 일에 달하는 내용동안 기다려왔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됐다는 느낌.

"첫사랑은 삶을 영원히 정해버린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래도 이 정도는 발견했다. 첫사랑은 그 뒤에 오는 사랑들보다 윗자리에 있지는 않을 수 있지만, 그 존재로 늘 뒤의 사랑들에 영향을 미친다. 모범 노릇을 할 수도 있고, 반면교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뒤에 오는 사랑들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도 있다. 반면 더 쉽게, 더 좋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 물론 가끔은, 첫사랑이 심장을 소작해버려, 그 뒤로는 어떤 탐침을 들이밀어도 흉터 조직만 나올 수도 있지만. p.136"

아아, 아름다운 말들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지겨웠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첫사랑에 관한 의미부여에 염증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건축학개론'이야 대히트를 쳤지만, 그 사이에 많은 시간이 지났고 또 한번 첫사랑을 이야기하는 '너의 결혼식'같은 경우는 비슷한 맥락으로 스러져버렸다. 첫사랑이 아름답고 강렬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은 맞지만, 첫사랑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매몰된 자들은 대개 그 뒤의 삶이나 사랑에게 무례하다. "연애의 기억"에서 중간중간 이런 대목을 마주할 때마다 지루한 첫사랑 타령을 굳이 지켜봐야할까 의심했다. 한편으론 첫사랑이 지나보내며 찢어지고 그을린 상처의 시간을 지나왔더라도, 결국 '첫사랑이 뭐 저렇게까지 대단하다고' 하며 무덤덤해진 까닭은 자신이 무감한 탓이거나 남자가 아니기 때문인가 의문도 가져봤다. 흔한 말로 남자의 마음엔 여러개의 방이 있고, 여자는 하나만... 어쩌고 하는게 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폴은 무모했고, 수전의 선택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도주'같은 말들도 한심했다. 연애의 기억이라기 보다는 파멸과 막장의 변명같은게 더 잘 어울렸다. 전혀 행복하거나 사랑스러운 시간이 느껴지지 않는 사랑이야기였다. 젋고 잘생긴 청년과 사랑에 빠지는 중년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파격적이게도 그렇지 않았다. 인생은 실전이고, 여기에 실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한 내용이다. 연애소설이라면, 연애소설이 맞다면, 좀 더 달콤해도 좋았을텐데, 아쉬웠다. 누구에게 이 책을 추천해줄 수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줄리언 반스를 좋아하는 독자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식으로 표현해보자. 나는 열아홉이었고, 나는 사랑은 썩지 않는 것이라고, 시간과 퇴색에 내력이 있다고 믿었다. p.102"

사랑을 믿는 사람들이 가지는 사랑에 대한 믿음은 맹목적이고 강압적이다. 감정적 휴지기에 들어간 것인지 수많은 감정선의 경계를 무참히 오가는 사랑이란 감정이 대체 무엇인지 의문을 느끼는 요즘, 왜 사랑이 이토록 절대적인 것으로 묘사되어야 하는가를 곱씹으며 읽었다. 읽으면서 우호적인 시선은 없었다. 열아홉과 마흔여덟의 사랑에 우호적으로 보일 구석이 없지 않은가. 시대가 맞지 않는 사랑은 서로의 시기를 침범하고 온전치 못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연애의 기억"이 그 모든 것을 납득시킬만한 무언가를 담아낼 수 있을까? 이 모든 불편함에서도 조금이나마 마음을 움직일만한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런 기대로 책을 읽었다. 그리고 끝내 깨달았다. 계속 의심하고 차가운 눈으로 멀찍이 떨어져 바라봤지만, 사랑을 믿고 싶었던 자신이 어딘가에 있었음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