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마더
에이미 몰로이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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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에 괴로운 책이었다. 곳곳에 전쟁같은 육아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 애가 계속 울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거나, 유축 시기를 놓쳐서 블라우스를 버리는 일, 신경이 예민해지고 우울증이 오고, 남편과 소원해지고 갈등이 생긴다. 아이 발달이 너무 느리거나 빠르진 않나, 남들보다 못하고 있는 건 없는지, 육아서에 나온 대로 해야하는데 왜 안되는지 게다가 일자별로 오는 '오늘의 조언' 레터는 읽기에도 고역이다. 누가 저런 말투로 하는 조언을 기쁘고 고맙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출산 한달만에 완벽한 몸매 관리를 해서 나타난 유명인의 관리 비법 메뉴얼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저게 가능해? 혹은 저게 필요해? 아니면 저게 정상이야? 같은.

 

 엄마란 대체 무엇일까. 여성이 엄마가 된다는 것이 뭘까. 아이를 낳으면서 여성들이 겪을 수 있는 다양한 문제를 프랜시, 콜레트, 넬, 위니, 스칼렛, 혹은 토큰을 통해 보여준다. 세상이 그들을 엄마가 되도록 쉽게 놓아두지 않는다는 것도 보여준다. 아이를 낳고 한 두 달쯤 지난 뒤에 엄마가 아이를 가족이나 혹은 육아도우미에게 맡기고 하루 저녁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외출-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다. 요즘은 엄마에게도 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알려져 있긴 하지만 바로 그 시간에 아이에게 어떤 문제가 생긴다면? '그때 애 엄마는 어디서 뭘 했대?'하고 엄마의 쉬는 시간이 비난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울 것이다.

 

 지인이 말했다. "애가 우는 바람에 밥 먹다가 그냥 나왔어/지하철에서 그냥 내렸어" 도시 여성 스릴러'라는 건 바로 그런 점 아닐까. 아이가 없어졌다는 것 말고 도시에서 여성으로 살면서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이 스릴러인 것이다. 부른 배를 안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출퇴근 하는 것, 회사에 임신 사실을 알리는 일, 출산휴가와 복직을 보장받는 것, 공공장소에서 울음을 터트리는 아기를 달래야 하는 일. 임신이 벼슬이냐는 시선과 맘충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 안에서 마땅히 사회구성원이 될 아기를 낳아 키워야하는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하물며 뉴욕같은 곳에도 진짜 '맘모임'이 있다고? 세상 어디든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구나 싶었다. 게다가 일명 '조리원 동기'같이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 위주로 만난다고 하니 '5월맘' 같은 좀 더 그럴싸한 명칭일 뿐 세상 돌아가는 건 다 비슷한가 보다. 입고 있는 옷, 아이를 태운 유모차같은 것을 비교하는 마음도 그랬다. 비교된다는 압박감에 벗어나고 싶지만 필요한 정보를 얻고 임신, 출산, 육아라는 과정을 터놓고 나눌만한 곳은 비슷한 시기에 같은 경험을 한 맘들뿐이라는 점도 공감됐다. 메신저 프로필에 아이 사진을 올려놓고 **맘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를 키우려다보니 그렇게 되더라며 어색하게 웃던 지인이 떠올랐다.

 

 마이더스가 유괴된 사건도 끔찍하지만, 책 표지에 써있는 "아기를 낳았다고? 축하해! 이제 모든 게 네 잘못이 될 거야." 라는 문구가 더 끔찍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은 아이를 낳고 첫 외출이라며 커피숍에서 대신 아이를 안아서 달래 재워주는 나에게 '간만에 너무 편하고 좋은데 이런 생각을 하는게 애한테 미안'하다고 했었다. 힘들었을텐데 잠깐 쉬면서 그새 죄책감을 느낀 것이다. 빗낱이 조금 떨어지던 그 날 유모차를 끌고 나오면서 누가 '비오는데 애 데리고 저렇게 밖에 나오고 싶을까' 하고 생각하면 어쩌나 염려했는데 비가 그쳐서 다행이라고 웃기도 했다.

 

 '퍼펙트 마더'가 도시 여성 스릴러로 꼽힐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마음에 드는 내용은 아니었다. 읽기에 피곤한 내용이었고, **맘이나 모임같은 문화에 지쳐있는 까닭이었다.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아마 엄마로서의 압박보다는 유괴와 주변인물들의 비밀같은 요소에 더 중심을 잡아서 전개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쩌면 책도 그렇게 읽는게 더 맞았을지도 모른다. 책을 무겁게 읽은 탓에 다른 사람들이 이 책의 어떤 면에 매력을 느끼게 되는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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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
에느 리일 지음, 이승재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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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진'을 읽으면서 계속 떠올렸던 생각은 정신질환은 유전되는가'였다. 아버지에서 이어져 오는 어떤 '낌새'는 환경적인 측면에 의해서 키워지는 것인지 역시 당뇨같은 병력처럼 DNA같은 것에 붙어서 새겨져 내려오는 것인지 생각했다. 정신병력이 유전된다는 말은 얼마나 위험한가. 송진은 한 가족의 네 세대에 걸친 이야기다. 홀데트 섬에 외따로 사는 호더 가문의 옌스는 조용한 아이었다. 그의 아버지 실라스는 솜씨가 좋은 목수였고 약간의 저장강박도 있었다. 실라스와 옌스에게는 둘만의 비밀이 있었는데, 실라스가 관을 만들때면 그 안에 둘이 함께 들어가 누워 여러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딱히 나쁠 일 없는 어찌보면 부자간의 유대가 돈독해지는 시간으로 느껴지는 이야기지만 아버지의 깊은 내면을 더 파고들어간 듯한 옌스에게는 딱히 좋은 영향을 주는 시간이 아니었던 듯하다. 실라스가 개미가 들어간 호박을 간직했던 것처럼 옌스도 그만의 호박을 만들게 됐다.

 

 누군가를 잃어버린다는 경험은 어떤 영향을 끼칠까. 옌스가 점점 더 폐쇄적으로 변하게 된 것은 자신 주변 사람들을 전부 속수무책으로 떠나보냈다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어떤 경우는 스스로의 선택이었지만, 딸 리우와 떨어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 엘세를 죽이게 만들었다. 옌스는 형제는 모웬스와 여러모로 다른 성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데 그럴 때마다 그의 운명이 불행하도록 정해져 있는 것 같아 불편했다. 옌스를 두고 '결국 미치게 될 거야' 라며 그런 운명으로 몰아가는 느낌이랄까. 책을 읽으면서 좋아하는 티비 시리즈에 나오는 인물이 떠올랐다.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FBI 수사관인데 그는 마음속 깊이 자신이 정신분열을 앓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에게 정신분열을 앓고 있는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두려워했던 것처럼 이 불길한 '낌새'는 유전과 성장 환경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대를 이어 이어지는 것일까.  

 

 최근 미국 시카고대 연구진이 과학저널 '네이처 유전학'에 발표한 13만 가족과 그 구성원인 48만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질병간의 유전적 유사성이 환경적 상호관계보다 강하지만 신경정신 질환의 경우 비슷한 영향을 준다고 한다. 살아남은 아이, 리우를 떠올렸다. 테디베어를 소중히 끌어안은 소녀의 안에 분명 옌스의 그림자가 들어있다.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홀데트 섬에서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은 채 어둠만을 달리다 자란 소녀, 리우에게 정상적인-평범한 삶이 가능할까? 의문을 품게 만든다. 그 부분은 꽤 교묘했다. 리우가 태어나 자라온 환경을 깊숙히 보여주면서도 가끔씩 그 애의 안에 뭔가 다른 것이 빛나고 있는 것처럼 여지를 주었다. 다른 아이들과 대화해본 적 없는 어린 소녀, 죽은 쌍둥이 남동생과 대화하며 자란 소녀는 한편으로 할머니의 팬케이크를 기쁘게 먹는 소녀이고, 의문을 갖고 생각하며 행동할 줄 아는 소녀였다. 리우도 어둠을 가졌을까, 그 애는 옌스가 모든 것을 담아 키워낸 또 다른 호더 중 하나가 아닐까. 리우를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계속해서 바뀐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대부분이 다 불쌍한 영혼들이지만, 여기서 가장 나쁜 사람이 있다면 마리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호더 가문의 가장 유일하고 가냘팠던 희망의 존재는 그녀였으리라. 그녀를 사랑하게 됐을때만 해도 옌스의 삶에도 희망이 보였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한다는 의무는 없지만, 옌스같은 사람을 사랑하기로 했다면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방식 말고 다른 길도 생각했어야 했다. 그저 어린 리우에게 몰래 편지를 좀 쓰는 것 같은 불확실하고 소극적인 방법말고.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어린 아이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마리아도 정도와 방향이 다른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일까 싶어진다. 침대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정도로 살이 쪘다는 것은, 거기에도 어떤 이유가 있을테니까. 혹은 옌스의 외모는 둘째치더라도 섬에 들어와 그와 사랑에 빠진 일도 그녀 안에 어떤 '낌새'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짐작을 하게 한다.

 

 솔직히 말한다면 존속살인같은 심각한 문제들도 있지만, 옌스를 대표하는 가장 큰 특징인 '저장강박증'은 좀 흔한 문제다. '세상에 이런 일이'같은 프로그램에서도 종종 나오지않는가. 그 특유의 나레이션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간 집안엔 발 디딜 틈이 없다. 세상에 어르신, 지내시기는 괜찮으신 거예요?"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그리고 병적일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특히나 노인층에) 정도만 다를 뿐 흔한 저장강박을 가졌다. 쇼핑백이나 포장종이를 버리지 않고 모아두는 것이나, 서랍안에 언젠가 쓸 일이 있을거라 기대하며 오래된 물건들을 넣어 두는 것처럼, 누구나 조금쯤은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호더 가문의 '낌새'로 저장강박을 묘사할 때마다 속으로 '덴마크에서는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이 없나봐' 생각했다. 아마 벌써부터 방송국에서 홀데트 섬으로 찾아갔을텐데 말이다.

 

 "어둡고 악마적인 동시에 사랑스럽고 생명력이 가득한, 뇌리에 깊이 박히는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평에 혹해서 사랑스러운, 아름다운 구석을 찾아봤는데 어휴, 너무 더러워서 찾을 수가 없었다. 로엘이 호기심과 또 묘령의 소년을 위해 호더 가문이 살고 있는 그 집에서 버틴 것이- 이층까지 올라갈 결심을 한 것이 대단할 정도로 더럽고 역겨운 환경이었다. 이런 비슷한 느낌으로 편해영 작가의 '사육장 쪽으로' 라는 책이 떠올랐다. '송진'이 흥미로웠다면 이 책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싶다. 방향성은 다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좀 비슷한 것 같다. 로엘이 혹 아동성애자는 아닐까 의심하는 시간도 있었다. 예민함과 또 생각 이상의 호기심과 관용이 그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방향으로까지 전개되지 않아서 찝찝함을 좀 덜 수 있었다. '시간이 걸리는 일들'이 남아 있지만 때로 시간이 문제인 결말도 있다. 리우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계속해서 염려하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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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방문자들 - 테마소설 페미니즘 다산책방 테마소설
장류진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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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 친구네 집에 놀러갔더니 친구는 없고 친구 누나가 자고 있었다. " 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글은 오히려 편안한 태도로 '그래 한 번 들어보자'할 수 있었다. 만성적 낚시글로 이미 면역력이 생기고도 남았음이다. 오히려 저정도의 이야기는 모르는 척 하지 않고 대놓고 웃으며 들을 정도의 가벼운 이야기아닌가. 그런데 '새벽의 방문자들'에서 읽은 내용들은 '수위가 괜찮은가'싶은 걱정이 들었다. 단순히 "옆집 문을 열었는데 옆집 총각이 자고 있었다" 뭐 이런 내용이 있어서가 아니다. 걱정되는 수위는 사회에 용인되는 정도의 허락된 페미니즘을 말하고 있는가였다. 자고로 페미니즘 발언이란 듣는 사람이 불편하지 않으실 수위에서 농담을 섞어가며 은근히 해야하는거 아닌가. 아니면 *페미, *충, 메** 되는거 아닌가. 저런 딱지 하나쯤 이 책 읽은 나한테도 가져다 붙이는 거 아닌가. 포스트잇처럼.

 

 솔직히 몇몇 글들은 저절로 나오는 욕같은 추임새를, 추임새같은 욕을 삼키며 읽었다. 나도 나이먹은 사람이라 그런지 드라마보며 몰입해서 욕하는 것처럼 문장으로 그려진 여자들을 향해 꼰대같은 조언을 해주고 싶어서 달싹였다. 진짜 가짜 구분을 못해서 그런걸까, 과몰입을 해서 그런걸까. " 이거 다 소설이야 " 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소설인 척 하는 진짜여서 그런걸까. 절대 인정하지 못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알 사람은 안다. 이건 진짜라고. 저 유명한 재연 프로그램인 '사랑과 전쟁'에서 '이거 다 방송국 놈들이 시청률 올리려고 일부러 자극적으로 쓰는거야'라는 순진한 의심론자들을 향해 '실제 사연은 더한데 방송용으로 순화해서 내보낸거에요' 했더랬지. 이 방문자들이 '이거 순한맛이에요' 하고 말한대도 오버는 아닐 것이다. 여전히 ㅍ자만 봐도 질색하면서 피해의식이란 말과 피곤하다는 말을 애용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믿지 않겠지만. 

 

 전부터 궁금했었던 영화를 이용하고 있는 플랫폼에서 서비스해주는 걸 발견하고 드디어 본 것이 며칠 전이다. 덕분에 '새벽의 방문자들'은 조금 묵혔다 읽게 됐지만 어쩐지 영화를 보고 책을 읽은 것이 더 괜찮은 흐름같이 느껴졌다. 영화는 가출청소년들의 생활을 단편적으로 그리고 비교적 순화하여 사실대로 보여준다. 이 얼마나 이상한 문장인가. 그런데 그렇다. 현실은 뭐 영화로 보여줄 수 있는 것보다 어떤 방면에서든 더할 것이고, 영화는 극히 일부의 모습만을 담아 최대한 사실적으로 보여주려고 애썼다. 그런데도 화면을 통해 보이는 주인공 소녀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려는 시도는 고역이다. 영화 줄거리는 간단하다. 절반은 담배를 피고 욕을 하는 장면이고 나머지는 침뱉고 맞고 때리고 술마시고 성행위를 하는 장면으로 채워져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의 반응이 '새벽의 방문자들'을 읽고 난 반응과 비슷할거라 생각했다. '진짜 저래?'

 

 대부분은 재밌게 읽었다. 아마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ㅍ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면 책 읽고 난 다음 친구를 만나 자기 인생에서 발견한 좀 '모잘랐던' 누군가를 떠올리며 썰을 풀고 한참을 웃거나 질색팔색 소름 돋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현관 모니터에 박제될만한 얼굴을 가진 사람들도 떠올릴지 모른다. 읽으면서 공감도 되고 재밌었는데, 다만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말이 괜찮은건지 생각이 들었다. 이젠 여류작가란 말도 안쓰는데. 너무나 이르지만 앞으로는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 방문자들이 새벽, 아침, 낮, 밤, 오후 언제든 또 찾아온다면 좋겠다. 아직도 남아있다던 그 이야기를 마저 해준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갖겠지. 앞으로 교보문고와 출판사에서 책에 참여한 작가들과 순차적으로 북토크를 갖는다고 하니 책을 재밌게 읽은 사람들이라면 이것도 신청해서 가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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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링 미 백
B. A. 패리스 지음, 황금진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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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확실히 계속 그 다음장을 향해 손이 넘어가게 만드는 흡입력이 있는 소설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비밀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나중에는 어떤 식으로 끝날지 궁금해서 계속 읽게된다. 사건이 12년 전 여자친구의 실종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해결되지 않은 과거와 현재를 바쁘게 오가며 주인공인 핀의 숨을 조여오는 전개는 꽤 흥미롭다. 핀이 숨기고 있는 12년 전 실종사건의 비밀, 여전히 발견되지 않은 실종된 여자친구 레일라, 레일라의 언니이자 핀의 새 여자친구 엘런의 복잡한 관계도 모두를 의심하게 만드는데에 한몫을 한다. 간단한 소개글에 "네가 망가져버렸으면 좋겠어. 내가 원하는 대로 다시 조립할 수 있게." 라는 문구를 본 뒤로 '브링 미 백'이 눈에 띌 때마다, 책을 읽을 때마다 에프엑스의 피노키오를 흥얼거리게 되었다. '따라따라따따따 짜릿짜릿 할꺼다 궁금투성이의 너 딱 꼼짝마라너 조각조각 따따따 부셔보고 따따따 맘에 들게 널 다시 조립할거야' 갑자기 왜 이 노래가 튀어나오나 싶겠지만 여기서 이걸 본 사람들도 아마 흥얼거리게 될거다. 

 

 기대가 컸던 탓인지 넉넉한 시간대를 잡아 흥미롭게 읽기 시작했지만 중간부터는 아쉬운 점이 좀 생겨났다. 핀과 엘런에게 레일라의 실마리를 가지고 협박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 많은 부분을 드러내놓은건 아닌지 싶었다. 특히 자매의 어린시절에 대한 부분에서는 거의 대놓고 숨겨진 비밀이 뭔지 알려주는 부분이라 읽는 입장에서는 더이상 혹시나 하고 망설이는 일이 없어졌다. 거기에 마트료시카의 역할은 상징적이기도 하지만 어쩐지 섬찟한 느낌을 주는 소재로 이용한 것 같아 진부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러시아의 전통인형이긴한데 생김새나 특징이 때에 따라서는 괜히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면이 있는 점이 '엄마가 섬그늘에-'하는 동요가 공포스러운 상황에서 나올때 괜히 무섭게 들리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섬집아기가 거의 클리셰처럼 쓰이듯이 안에 여러 크기의 인형들이 잔뜩 채워져있는 마트료시카도 전형적인 상징성을 보여준다.

 

 사랑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 같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레일라와 엘런의 과거를 보면 폭력적인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너무나 크게 자리잡고 있어서 그녀들이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핀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핀 역시도 큰 틀에서 보면 과연 레일라를 " 진심으로 사랑했 "던 것이 맞나 싶은 의문을 갖게 만든다. 엘런을 레일라 대신 만난 것은 분명하지만 핀이 사랑했다고 하는 레일라의 육감적인 몸매, 빨간 머리카락, 녹색이 섞인 갈색 눈동자 같은 것들 말고 그녀의 본질을 바라보았던 건지 궁금하다. 시종일관 핀과 레일라, 엘런이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생겨난 일들이라고 표현되었지만 사랑보다는 굴절된 상처, 고통, 욕망 같은 것들에 더 가깝게 보인다. 여기서부터는 가을방학의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를 떠올린다. '너같은 사람은 너 밖에 없었어' 하는 가사를.

 

 재밌는 점은 지나고보면 다들 분명하게 레일라 혹은 레일라의 납치범을 두고 미친사람이라고 단언한다는 것이다. 핀과 엘런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어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특히 루비가 바로 제정신 아닌 사람이라고 하는 부분이 뜻밖에 일반적 반응이라 소설 안에서 갑자기 현실로 확 돌아오게 된다. 핀의 시점에서 누가 무슨 의도로 레일라의 흔적을 남겨두며 접근하는 건지 한참 궁금해하다가 왜 핀은 주변에 알려서 도움받을 생각을 안하고 혼자 나서는 것인가 하고 거리를 두고 읽게 된다. 알고보니 핀의 마음에 걸리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알고보면 가장 평범하고 정상적인 인물이었던 루비를 사건과 엮는 내용이 많은데 오히려 루비보다 문제 많은 세명의 주요 인물들을 제외하고서 핀의 친한 형 래리가 더 이상해보였다. 핀이 가진 이상 행동들을 " 무슨 일이야, 인마? " 같은 말로 발벗고 나서서 해결해줄 수 있는걸까. 레일라는 탐탁치 않아하고 엘런은 받아들였다는 것도 찜찜한데 루비와 여행을 떠났다는 것도 의아한 조합이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라 조금 끼워맞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남은 듯해서 아쉬웠다. 소재도 파격적이라기 보다는 이정도면 흔하지 않은가 싶고. 다만 계속 궁금하게 남는 것이, 만나는 사람이 갑자기 실종되어 버렸다면 혹은 더이상 만날 수 없게 되었다면 그 사람과 닮은 형제자매와 사랑에 빠지거나 대신해서 만나고 싶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개인적으로는 굳이 비슷한 타입을 또 찾을 필요가 있을까, 찾더라도 같은 사람이 아니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싶은데 '너 말고 니 언니' 처럼 비슷하지만 다르다는 데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궁금하다. 한사람의 취향이 소나무라 같이 자라고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형제자매에게 관심이 생기는 것과 같은 성장배경으로 취향도 비슷해서 둘이 한 사람을 똑같이 좋아하게 되는 일 역시 삼각관계의 전통적 공식 중 하나긴 하지만, 실종된 상대 대신 이라는 설정이 쉽게 이해가능한 범위인지 역시나 핀도 제정신 아닌 면이 있어서였는지 모르겠다.

 

 이쯤되면 '조각조각 따따따' 하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조각나는건 네가 아니라 나의 입장이었고, '너같은 사람은 너 밖에 없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이게 과연 사랑 때문이란 말인가, 이게 사랑이냐 하고 묻고싶은 내용이었다. 뒤로 갈수록 아쉽지만 초반에 놓아둔 여러 설정들이 중반까지는 재밌게 이어지므로 여름을 맞아 읽어볼만한 스릴러 물이다. 브링 미 백을 읽고나니 어쩐지 여름엔 러시아로 휴가를 떠나고 싶어진다. 마트료시카를 기념품으로 사오고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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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의 방 - 2019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진유라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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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신의 삶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들어갔을 대 그리고 그 삶이 고통스러울 때 그 고통을 준 사람이 개인이 아니라 체제나 거대한 국가일 때, 힘없는 개인은 국가에 대한 분노를 자기 자신으로 돌린다는 사실을 무해는 뒤늦게 깨달았다. 분노의 대상으로 국가는 너무 거대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자기 학대였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혹할 정도로 엄격했다. (p.107) "

 

 백반집에 가면 식사 손님들 쪽으로 틀어놓은 텔레비전에 탈북민이 나오는 프로그램이 나올때가 있다. 아마 주로 노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프로이리라. 언젠가 어떤 테이블에서 혼잣말인듯 들으라고 하는 말인듯 큰소리로 떠들어댔던 말이 문득 머리속에 박혀있다 떠올랐다. '남한 사람들은 북한 사람을 당해낼 수가 없어. 북한 사람들 눈에는 독한 기가 있어.' 특히나 목숨을 내걸고 북한을 벗어나 남한까지 내려온 사람들은 다른 체제나 문화 속에서 어수룩해보일지라도 그 근본에는 더 강하고 굳은 의지가 있어서 쉽게 보면 안된다는 그런 내용의 말이었다. 그래서 북한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남한 젊은이들은 그래서 안된다고 혼을 내기도 하는 말을 두서없이 더 늘어놓았다. 확실히 어색한 방송용 화장과 차림을 하고 앉아있는 그들은 어설퍼보여도 카메라 앞에서 전혀 기죽지 않고 당당해보였다. 목숨을 건 저마다의 탈북기도 따라할 엄두가 안나는 내용이어서 노인의 말이 불만스럽기는 해도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었다.

 

 '무해의 방'을 읽고 한동안 멍하니 있다 문득 떠올린 것이 그때의 기억이었다. 바로 저 일이 내 안에서 무해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속물적이고 직설적인 경험이었다. 무해는 어떤 사람인가. 책 한 권을 그녀에 대해 읽고서도 무해는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너무나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삶의 어떤 큰 결단을 내려서 남한으로 온 그녀의 삶에는 확실히 커다란 굴곡이 존재했다. 그녀가 쫑의 죽음을 가장 큰 고통으로 꼽은 남편의 상실과, 소설가가 되겠다는 아들의 선언이 가장 큰 위기로 다가온 시어머니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삶이 있고 나의 상처와 남의 티끌을 비교해서 판단하여서도 안되지만 내가 보기에도 무해와 무해가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 사이에는 확연히 다른 뭔가가 존재했다. 그것은 무해의 삶을 읽어낸 나와도 너무나 먼 거리가 존재해 나는 굵고 진한 글씨로 드러날 몇가지 사실 외에는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 그저 몇번이고 무해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말 밖에 할 것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무해의 내면과 과거가 항상 이질적으로 느껴졌는데, 치매라는 병이 그녀를 무너뜨리는 과정만큼은 너무나 남들과 같았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생각 품고있는 과거가 개인의 삶의 모든 과정을 무차별적으로 지우고 선별하여 재생시키는 병과 만나자 오히려 옅어진다. 법이 아니라 병 앞에서 모두가 평등해지는 것일까. 무해는 탈북 과거를 가진 여자가 아니라 주전자를 태우고 동네에서 길을 잃고 강아지 밥 주는 일을 잊는 보통의 초로기 치매 환자가 되어버린다. 그것이 무해를 조금은 가깝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읽으면서 구병모 작가의 '파과'를 자주 떠올렸다. '파과'의 주인공인 할머니 킬러 조각 역시 저항할 수 없는 노화를 겪으며 삶을 바라보는 눈과 태도가 점점 달라지는 모습을 보인다. 치매를 앓는 소설의 주인공이라 하면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이 유명하지만 어쩐지 그보다는 '파과'의 조각이 무해와 더 비슷하게 느껴졌다. 비록 무해는 조금 젊은 편이지만 노인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이 저마다의 특색을 지니고 등장하는 것은 반가웠다.

 

 " 되돌아가봤자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도 이미 혜산에는 없었다. (p.118) "

 

 '무해의 방'에서 가장 눈을 끌었던 문장이다. 무해가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할 때 나온 문장이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의 시인의 유명한 시처럼 어떤 의미가 된다는 것이기에, 그녀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없어지자 무해가 떠날 수 있는 마음을 굳히게 된 것일까. 혜산에 그녀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없다면 무해가 떠나가는 곳 어디에도 그녀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없는 건 마찬가지이다. 무해는 그녀가 탈북자이기 때문에 이방인인것처럼 느낀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녀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녀는 어디에서도 심지어 혜산에 남아있었어도 뿌리없는 흔들림을 느꼈을 것만 같다. 그리고 그 흔들림을 중국 어딘가의 콩과 카스테라 냄새가 나는 아이 페이도 느낄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쯔와 두 다리가 없는 그녀의 아들이 페이의 뿌리가 되어줄 수 있었을까. 무해가 떠난 곳에서 여자로 태어난 페이는 카스테라 대신 할머니가 사온 색색의 사탕과 초콜릿을 먹으며 무사히 뿌리내릴 수 있었을까. 아무래도 그 아이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도 없었을 것 같다.

 

 남겨진 페이를 떠올리면서 무해가 모래에게 하는 말들, 특히 차조심해야 한다고 하는 잔소리가 한참 애틋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무해의 기억이 더 깊고 복잡하게 뒤섞이면서 모래대신 '페이'하고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는 날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무해의 방은 그녀의 세계를 축소시킨 모습으로, 또 기억의 여러 부분들을 각기 따로 나누어 둔 내면의 공간으로 해석되었다. 굳게 닫아 잠가두었던 수많은 방 중 어떤 방이 열릴 것인가 기대하는 마음으로 읽다가, 그녀의 세계가 한칸짜리 방 안에 집어넣어진 듯 갇힌 기분으로 머물기도 했다. 모든 방을 열어본 들 또 한 방에 오래도록 머문 들 그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너무나도 당연하게 무해와 그녀 뿐 아닌 그 누구라도 영영 이해할 수 없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방이 행성처럼 멀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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