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의 방 - 2019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진유라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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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신의 삶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들어갔을 대 그리고 그 삶이 고통스러울 때 그 고통을 준 사람이 개인이 아니라 체제나 거대한 국가일 때, 힘없는 개인은 국가에 대한 분노를 자기 자신으로 돌린다는 사실을 무해는 뒤늦게 깨달았다. 분노의 대상으로 국가는 너무 거대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자기 학대였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혹할 정도로 엄격했다. (p.107) "

 

 백반집에 가면 식사 손님들 쪽으로 틀어놓은 텔레비전에 탈북민이 나오는 프로그램이 나올때가 있다. 아마 주로 노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프로이리라. 언젠가 어떤 테이블에서 혼잣말인듯 들으라고 하는 말인듯 큰소리로 떠들어댔던 말이 문득 머리속에 박혀있다 떠올랐다. '남한 사람들은 북한 사람을 당해낼 수가 없어. 북한 사람들 눈에는 독한 기가 있어.' 특히나 목숨을 내걸고 북한을 벗어나 남한까지 내려온 사람들은 다른 체제나 문화 속에서 어수룩해보일지라도 그 근본에는 더 강하고 굳은 의지가 있어서 쉽게 보면 안된다는 그런 내용의 말이었다. 그래서 북한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남한 젊은이들은 그래서 안된다고 혼을 내기도 하는 말을 두서없이 더 늘어놓았다. 확실히 어색한 방송용 화장과 차림을 하고 앉아있는 그들은 어설퍼보여도 카메라 앞에서 전혀 기죽지 않고 당당해보였다. 목숨을 건 저마다의 탈북기도 따라할 엄두가 안나는 내용이어서 노인의 말이 불만스럽기는 해도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었다.

 

 '무해의 방'을 읽고 한동안 멍하니 있다 문득 떠올린 것이 그때의 기억이었다. 바로 저 일이 내 안에서 무해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속물적이고 직설적인 경험이었다. 무해는 어떤 사람인가. 책 한 권을 그녀에 대해 읽고서도 무해는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너무나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삶의 어떤 큰 결단을 내려서 남한으로 온 그녀의 삶에는 확실히 커다란 굴곡이 존재했다. 그녀가 쫑의 죽음을 가장 큰 고통으로 꼽은 남편의 상실과, 소설가가 되겠다는 아들의 선언이 가장 큰 위기로 다가온 시어머니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삶이 있고 나의 상처와 남의 티끌을 비교해서 판단하여서도 안되지만 내가 보기에도 무해와 무해가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 사이에는 확연히 다른 뭔가가 존재했다. 그것은 무해의 삶을 읽어낸 나와도 너무나 먼 거리가 존재해 나는 굵고 진한 글씨로 드러날 몇가지 사실 외에는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 그저 몇번이고 무해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말 밖에 할 것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무해의 내면과 과거가 항상 이질적으로 느껴졌는데, 치매라는 병이 그녀를 무너뜨리는 과정만큼은 너무나 남들과 같았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생각 품고있는 과거가 개인의 삶의 모든 과정을 무차별적으로 지우고 선별하여 재생시키는 병과 만나자 오히려 옅어진다. 법이 아니라 병 앞에서 모두가 평등해지는 것일까. 무해는 탈북 과거를 가진 여자가 아니라 주전자를 태우고 동네에서 길을 잃고 강아지 밥 주는 일을 잊는 보통의 초로기 치매 환자가 되어버린다. 그것이 무해를 조금은 가깝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읽으면서 구병모 작가의 '파과'를 자주 떠올렸다. '파과'의 주인공인 할머니 킬러 조각 역시 저항할 수 없는 노화를 겪으며 삶을 바라보는 눈과 태도가 점점 달라지는 모습을 보인다. 치매를 앓는 소설의 주인공이라 하면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이 유명하지만 어쩐지 그보다는 '파과'의 조각이 무해와 더 비슷하게 느껴졌다. 비록 무해는 조금 젊은 편이지만 노인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이 저마다의 특색을 지니고 등장하는 것은 반가웠다.

 

 " 되돌아가봤자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도 이미 혜산에는 없었다. (p.118) "

 

 '무해의 방'에서 가장 눈을 끌었던 문장이다. 무해가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할 때 나온 문장이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의 시인의 유명한 시처럼 어떤 의미가 된다는 것이기에, 그녀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없어지자 무해가 떠날 수 있는 마음을 굳히게 된 것일까. 혜산에 그녀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없다면 무해가 떠나가는 곳 어디에도 그녀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없는 건 마찬가지이다. 무해는 그녀가 탈북자이기 때문에 이방인인것처럼 느낀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녀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녀는 어디에서도 심지어 혜산에 남아있었어도 뿌리없는 흔들림을 느꼈을 것만 같다. 그리고 그 흔들림을 중국 어딘가의 콩과 카스테라 냄새가 나는 아이 페이도 느낄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쯔와 두 다리가 없는 그녀의 아들이 페이의 뿌리가 되어줄 수 있었을까. 무해가 떠난 곳에서 여자로 태어난 페이는 카스테라 대신 할머니가 사온 색색의 사탕과 초콜릿을 먹으며 무사히 뿌리내릴 수 있었을까. 아무래도 그 아이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도 없었을 것 같다.

 

 남겨진 페이를 떠올리면서 무해가 모래에게 하는 말들, 특히 차조심해야 한다고 하는 잔소리가 한참 애틋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무해의 기억이 더 깊고 복잡하게 뒤섞이면서 모래대신 '페이'하고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는 날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무해의 방은 그녀의 세계를 축소시킨 모습으로, 또 기억의 여러 부분들을 각기 따로 나누어 둔 내면의 공간으로 해석되었다. 굳게 닫아 잠가두었던 수많은 방 중 어떤 방이 열릴 것인가 기대하는 마음으로 읽다가, 그녀의 세계가 한칸짜리 방 안에 집어넣어진 듯 갇힌 기분으로 머물기도 했다. 모든 방을 열어본 들 또 한 방에 오래도록 머문 들 그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너무나도 당연하게 무해와 그녀 뿐 아닌 그 누구라도 영영 이해할 수 없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방이 행성처럼 멀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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