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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
에느 리일 지음, 이승재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송진'을 읽으면서 계속 떠올렸던 생각은 정신질환은 유전되는가'였다. 아버지에서 이어져 오는 어떤 '낌새'는 환경적인 측면에 의해서 키워지는 것인지 역시 당뇨같은 병력처럼 DNA같은 것에 붙어서 새겨져 내려오는 것인지 생각했다. 정신병력이 유전된다는 말은 얼마나 위험한가. 송진은 한 가족의 네 세대에 걸친 이야기다. 홀데트 섬에 외따로 사는 호더 가문의 옌스는 조용한 아이었다. 그의 아버지 실라스는 솜씨가 좋은 목수였고 약간의 저장강박도 있었다. 실라스와 옌스에게는 둘만의 비밀이 있었는데, 실라스가 관을 만들때면 그 안에 둘이 함께 들어가 누워 여러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딱히 나쁠 일 없는 어찌보면 부자간의 유대가 돈독해지는 시간으로 느껴지는 이야기지만 아버지의 깊은 내면을 더 파고들어간 듯한 옌스에게는 딱히 좋은 영향을 주는 시간이 아니었던 듯하다. 실라스가 개미가 들어간 호박을 간직했던 것처럼 옌스도 그만의 호박을 만들게 됐다.
누군가를 잃어버린다는 경험은 어떤 영향을 끼칠까. 옌스가 점점 더 폐쇄적으로 변하게 된 것은 자신 주변 사람들을 전부 속수무책으로 떠나보냈다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어떤 경우는 스스로의 선택이었지만, 딸 리우와 떨어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 엘세를 죽이게 만들었다. 옌스는 형제는 모웬스와 여러모로 다른 성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데 그럴 때마다 그의 운명이 불행하도록 정해져 있는 것 같아 불편했다. 옌스를 두고 '결국 미치게 될 거야' 라며 그런 운명으로 몰아가는 느낌이랄까. 책을 읽으면서 좋아하는 티비 시리즈에 나오는 인물이 떠올랐다.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FBI 수사관인데 그는 마음속 깊이 자신이 정신분열을 앓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에게 정신분열을 앓고 있는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두려워했던 것처럼 이 불길한 '낌새'는 유전과 성장 환경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대를 이어 이어지는 것일까.
최근 미국 시카고대 연구진이 과학저널 '네이처 유전학'에 발표한 13만 가족과 그 구성원인 48만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질병간의 유전적 유사성이 환경적 상호관계보다 강하지만 신경정신 질환의 경우 비슷한 영향을 준다고 한다. 살아남은 아이, 리우를 떠올렸다. 테디베어를 소중히 끌어안은 소녀의 안에 분명 옌스의 그림자가 들어있다.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홀데트 섬에서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은 채 어둠만을 달리다 자란 소녀, 리우에게 정상적인-평범한 삶이 가능할까? 의문을 품게 만든다. 그 부분은 꽤 교묘했다. 리우가 태어나 자라온 환경을 깊숙히 보여주면서도 가끔씩 그 애의 안에 뭔가 다른 것이 빛나고 있는 것처럼 여지를 주었다. 다른 아이들과 대화해본 적 없는 어린 소녀, 죽은 쌍둥이 남동생과 대화하며 자란 소녀는 한편으로 할머니의 팬케이크를 기쁘게 먹는 소녀이고, 의문을 갖고 생각하며 행동할 줄 아는 소녀였다. 리우도 어둠을 가졌을까, 그 애는 옌스가 모든 것을 담아 키워낸 또 다른 호더 중 하나가 아닐까. 리우를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계속해서 바뀐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대부분이 다 불쌍한 영혼들이지만, 여기서 가장 나쁜 사람이 있다면 마리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호더 가문의 가장 유일하고 가냘팠던 희망의 존재는 그녀였으리라. 그녀를 사랑하게 됐을때만 해도 옌스의 삶에도 희망이 보였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한다는 의무는 없지만, 옌스같은 사람을 사랑하기로 했다면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방식 말고 다른 길도 생각했어야 했다. 그저 어린 리우에게 몰래 편지를 좀 쓰는 것 같은 불확실하고 소극적인 방법말고.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어린 아이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마리아도 정도와 방향이 다른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일까 싶어진다. 침대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정도로 살이 쪘다는 것은, 거기에도 어떤 이유가 있을테니까. 혹은 옌스의 외모는 둘째치더라도 섬에 들어와 그와 사랑에 빠진 일도 그녀 안에 어떤 '낌새'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짐작을 하게 한다.
솔직히 말한다면 존속살인같은 심각한 문제들도 있지만, 옌스를 대표하는 가장 큰 특징인 '저장강박증'은 좀 흔한 문제다. '세상에 이런 일이'같은 프로그램에서도 종종 나오지않는가. 그 특유의 나레이션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간 집안엔 발 디딜 틈이 없다. 세상에 어르신, 지내시기는 괜찮으신 거예요?"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그리고 병적일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특히나 노인층에) 정도만 다를 뿐 흔한 저장강박을 가졌다. 쇼핑백이나 포장종이를 버리지 않고 모아두는 것이나, 서랍안에 언젠가 쓸 일이 있을거라 기대하며 오래된 물건들을 넣어 두는 것처럼, 누구나 조금쯤은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호더 가문의 '낌새'로 저장강박을 묘사할 때마다 속으로 '덴마크에서는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이 없나봐' 생각했다. 아마 벌써부터 방송국에서 홀데트 섬으로 찾아갔을텐데 말이다.
"어둡고 악마적인 동시에 사랑스럽고 생명력이 가득한, 뇌리에 깊이 박히는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평에 혹해서 사랑스러운, 아름다운 구석을 찾아봤는데 어휴, 너무 더러워서 찾을 수가 없었다. 로엘이 호기심과 또 묘령의 소년을 위해 호더 가문이 살고 있는 그 집에서 버틴 것이- 이층까지 올라갈 결심을 한 것이 대단할 정도로 더럽고 역겨운 환경이었다. 이런 비슷한 느낌으로 편해영 작가의 '사육장 쪽으로' 라는 책이 떠올랐다. '송진'이 흥미로웠다면 이 책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싶다. 방향성은 다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좀 비슷한 것 같다. 로엘이 혹 아동성애자는 아닐까 의심하는 시간도 있었다. 예민함과 또 생각 이상의 호기심과 관용이 그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방향으로까지 전개되지 않아서 찝찝함을 좀 덜 수 있었다. '시간이 걸리는 일들'이 남아 있지만 때로 시간이 문제인 결말도 있다. 리우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계속해서 염려하며 책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