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나는 여전히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몇 가지의 이유를 손꼽을 수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일종의 안정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비 오는 날의 묵직한 공기는 나를 차분히 눌러주어 고요히 침잠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습기 어린 장막이 드리운 듯 나에게 좀 더 집중하게 되고, 빗소리에 주변의 다른 소음들이 묻히는 것도 좋다. 사춘기 시절엔 특히 비 오는 날의 모든 것들이 좋았다. 머리카락과 옷이 젖는 것도, 찰박거리는 발걸음도 좋았다. 친한 친구와 갈 곳을 정하지 않은 채 어느 버스에 올라탄 적도 있었다. 종착지를 경유해 돌아오는 동안 오직 비에 젖어드는 거리를 보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느새 햇볕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아니, 갈망하게 된 것 같다. 무엇이 비어 있는지조차 몰랐던 어릴 때와는 달리 결핍이나 상실감을 알게 될 즈음부턴 강렬한 빛에 이끌리게 되었다. 볕이 좋은 날엔 나른한 고양이처럼, 읽던 책도 잠시 덮어 두고 오직 빛을 느끼며 조용히 호흡을 해본다. '비'는 새삼 나를 각인시켜 주었지만 '햇볕'은 빛 속에서 나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 같다. 빛을 느끼며 눈을 감고 있으면 나라는 존재가 점점 옅어지다가 이윽고 투명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해야 하고 극복하려 애쓸 필요 없이, 나 자신이 빛으로 가득 찬 것 같은 그 느낌을 좋아한다. 내 몸의 경계가 없어지고, 추구해야 할 것도, 도달해야 할 곳도 없이 내가 온 세상과 일치된 느낌 같은 것 말이다. 요가를 오랫동안 하고 있는 이유도 비슷한 것 같다. 몸을 경계 없이 움직이게 될 때 어느새 동작은 서서히 줄어들고 나의 호흡 외엔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게 된다. 어떠한 나로 경계 짓기보단 아무것도 아닌 내가 될 때 나는 더없이 가벼워진다.
특히 마음이 늘 활발히 움직이는 나는 그렇게 쉬어가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상념이 많은 나의 기질상 계속해서 정화해나가지 않으면 켜켜이 가라앉은 앙금들이 나를 질식시킬 것 같기 때문이다. 차오르면 비우고, 다시 차오르면 거듭 비우는 것이 나의 균형을 잃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정신은 많은 것을 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정신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측정하는 일뿐이다. 너무나 광대한 풍경은 우리들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속을 다 비워버리는 것이다. ˝ - 「행복의 충격」
김화영의 산문집 「행복의 충격」을 통해 카뮈의 스승이었던 장 그르니에를 알게 되었다. 김화영이 인용한 그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관능적인 풍요로움이 가득한 지중해 연안의 행복은 우리의 행복과는 달랐다. 김화영에 따르면 그동안 자신이 경험했던 행복은 반드시 아이러니컬한 형용사가 동반된 것들이었다. 어두운 행복, 비참한 행복, 눈물겨운 행복처럼 말이다. 하지만 프로방스에서 그가 경험한 것은 행복의 외침으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열린 풍경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행복의 충격'이었던 것이다.
˝불모의 땅과 어두운 하늘 사이에서 힘들게 일하며 사는 사람은 하늘과 빵이 가볍게 느껴지는 다른 땅을 꿈꾸게 된다. 그는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러나 빛과 둥근 구릉들로 진종일 마음이 흡족해진 사람들은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 ˝ - 「섬」에 부쳐서, 알베르 카뮈
장 그르니에의 산문집 「섬」에는 카뮈의 서문이 실린 것으로 유명하다. 카뮈는 이렇게 묻는다. 북쪽 사람들은 지중해 기슭으로, 혹은 빛의 사막 속으로 도망쳐 오지만, 빛의 고장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속으로밖에 또 어디로 도망칠 수 있겠냐고 말이다. 그르니에의 사유는 카뮈의 서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요컨대 「섬」은 우리들이 자연스럽게 발 딛고 있는 땅으로부터 뿌리를 뽑아내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고, 그르니에가 그리고 있는 여행은 섬에서 섬으로 찾아 떠나는 순례와 마찬가지인 것이라고 말이다.
"짐승은 즐기다가 죽고 인간은 경이에 넘치다가 죽는다. 끝내 이르게 되는 항구는 어디일까? 바로 이것이 이 책 전편을 꿰뚫고 지나가는 질문이다. ˝ - 「섬」에 부쳐서, 카뮈
그르니에의 「섬」을 읽으며 몇몇 문장에 마음이 움직였다. 격렬함보단 은은하고 고요한 동의였다. 하지만 그의 사유 자체보단 그의 정신이 더 와 닿았다. 원치 않는 고립의 섬이든, 자발적인 도피의 섬이든, 아니면 섬과 섬 사이를 끊임없이 방황하든, 스스로 딛고 있는 땅을 인식하려는 그의 정신적인 순례를 말이다. 자신의 정신을 영원히 정착시킬 수 있는 섬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나는 굳이 순례를 멈추고 싶지 않다. 오히려 나는 확신을 피하고 싶다.
˝공포심과 매혹이 한데 섞인다 ― 앞으로 다가서면서도 (동시에 도망쳐)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그칠 사이 없는 움직임의 대가를 받는 날이 찾아오는 것이니,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버리게 된다. 문득 공(空)의 자리에 충만이 들어앉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 - 「섬」
그르니에가 사랑했던 그의 고양이 물루는 해야 할 동작만을 정확히 했다고 한다. 고양이가 다리를 반쯤 편다면 그것은 다리를 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또 다리를 꼭 반쯤만 펴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란다. 그가 무릎 위에 몸을 옹크릴 때도 제가 가진 모든 애정을 남김없이 쏟아가며 옹크린단다. 매 순간 제 행동에 흠뻑 몰두한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필연적인 행동을 하는 짐승들의 세계는 침묵과 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르니에는 말한다.
하지만 필연만으로 살 수 없는 인간은 우연에 열려있어야 할 것 같다. 바라보기만 하는 섬이 아니라 도착할 수 있어야 하고, 다시 떠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섬과 섬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것은 침묵과 도약이 아닌 끊임없이 말을 걸고, 대답을 들으려는 노력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도피이든, 고립이든, 나에게 묻고 대답하며 나는 섬 사이를 방황하고 싶다. 때에 따라 비를 맞기도, 햇볕을 쪼이기도 하며 유연하게 살고 싶다. 영원한 정착이란 또 다른 고통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카뮈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섬」이 준 충격과 영향은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이외엔 비길만한 것이 없었다고. 하지만 지드의 감동은 찬양의 감정과 동시에 어리둥절한 느낌을 남긴 반면 「섬」이 보여준 감동은 자신들에게 알맞은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우리는 모랄이라는 굴레에서 해방되고, 지상의 풍성한 열매들을 노래할 필요를 새삼스럽게 느낄 형편은 아니었다. 지상의 열매들은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빛 속에 열려 있었다. 입으로 깨물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 - 「섬」에 부쳐서, 카뮈
오히려 이들은 자신들의 탐욕으로부터 딴 곳으로 정신을 돌릴 필요가 있었고, 야성적인 행복으로부터 깨어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섬」을 읽으며 약간의 어리둥절함을 느꼈었다. 내가 가져보지 못한 과잉의 풍요 속에서 메말라가는 정신을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환경에 따라 어떤 이는 부족함을 채워야 하고, 또 다른 이는 과함을 덜어내야 한다. 결핍 투성이는 까닭 모를 불안함을 느끼게 하고, 지나친 풍부함은 오히려 정신을 삭막하게 만든다. 결핍은 풍족한 미래를 기다리며 채움을 갈망하고, 과한 풍족의 희열 속엔 더 이상의 희망이 없기에 공(空)에 매혹당하는 게 아닐까 싶다.
우린 저마다 이렇게 다른 섬에 살고 있다. 하지만 채우고 비우는 과정의 끊임없는 순환 속에서 만나는 절묘한 균형의 순간이, 그때의 벅찬 희열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 같다. 때론 나와 다른 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하고, 비슷한 섬을 발견할 땐 다정히 말을 걸어보기도 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