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린저의 단편소설을 읽는 건 어떤 이들의 마음의 방으로 느닷없는 초대를 받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끔은 내 주변을 '음소거' 시키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샐린저의 소설에 그런 매력이 있다. 담담한 풍미를 지녀 안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 술을 몇 모금 넘긴 후의 느낌처럼 적당히 이완된 마음으로 집중하게 된다. 뭐가 뭔진 잘 모르겠지만, 굳이 알려고 하기보단 그저 듣고 싶어서, 좀 더 이야기해보라고 조르게 되는 기분 같은 거 말이다.



일상의 소음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들에게 집중한다. 읽던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도 지루하질 않지만 그렇다고 읽은 내용을 다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 이야기들엔 전과 후가 없기 때문이다. 설명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고 불현듯 시작해서 불현듯 끝나버리는 이야기들이다. 상황을 전혀 모른 채 그들의 특정 시간과 만나게 되고, 나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저 그 이야길 듣고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이 다른 삶 속에서 문득 그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같고, 「프래니와 주이」의 남매들 역시 주인공이나 배경이 되어 소리 없이 등장했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 버린다. 마치 내가 알고 있던 누구, 또는 누구의 누구를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 걸린 흑백사진 속에서 발견하곤 아릿한 그리움에 빠져드는 것 같다. 좀 더 알고 싶었지만 서로 다른 시공간이라는 차원 앞에서 속절없이 이별하게 된 기분이다.



그런 그들에게서 외로움과 두려움, 슬픔, 상실감을 느낀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지만 그들의 내면은 그에 맞서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여 뜻 모를 연민에 휩싸이게 된다. 단편소설의 장점은 느닷없는 시작과 느닷없는 끝에 있는 것 같다. 짧음 속에 충분한 기승전결이 있는 단편도 있지만 오직 전개만 있는 단편은 당황스러운 가운데 묘한 매력이 있다.



「아홉 가지 이야기」 중 특별히 더 기억에 남았던 것은 <웃는 남자>, <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 <테디>였다. 그리고 샐린저의 문학적 매력이 돋보였던 소설은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이었다. 평온한 듯 불안하고, 담담한 듯 슬픈 여운이 오랫동안 남았다. 주인공 시모어는 「프래니와 주이」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았음에도 존재감이 확실했던 일곱 남매의 맏이다. 또 다른 홀든이 연상되기도 했던 시모어를 좀 더 알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미련 같은 건 두지 말라는 듯 소설은 끝이 났다.



살다 보면 전과 후를 설명할 순 없지만 고요한 가운데 삶을 전환시키는 어떤 순간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선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란 생각은 오류라고 말한다. - ˝소리 없는 우아함. 이 아름다운 무음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고 말이다. 경험을 할 당시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삶, 그의 한 부분은 짧은 단편소설과 같지 않을까 싶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 같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결정적 순간이 바로 지금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이완과 집중이 필요해진다. 그리고 소리 없이 다가올 전환의 순간엔 다음 이야길 선택해야만 한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극적인 순간엔 늘 곁에 책이 있었다. 읽든 안 읽든 가까이 있어야 안심이 됐다. 아마도 주변의 여러 목소리들은 꺼둔 채 나의 소리를 집중해서 듣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 책이란 이완과 집중, 선택을 위해 숨처럼 필요한 존재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책들은 특별했고, J. D. 샐린저의 단편 역시 그렇게 지나갔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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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9-08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에스메를 위하여>가 좋았어요. 오랜만에 이 소설이 읽고 싶어지는군요. ^^

물고기자리 2015-09-08 21:22   좋아요 0 | URL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과 더불어 제일 맘에 들었던 소설이에요^^ 주인공과 대화하는 소녀도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홀든에게도 그랬듯이 삶의 전환이나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주는 소녀가 등장하는 것이 샐린저 문학의 매력적인 요소인 것 같아요. <바나나피시>의 시모어에게도 노란색 비키니를 입은 어린 소녀가 등장하고, 그 소녀와 이야길 나누는 부분이 유난히 기억에 남거든요 ㅎ

지금행복하자 2015-09-08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밖에 보지 않았는데~
읽어보고 싶게 하는데요~~

물고기자리 2015-09-09 00:29   좋아요 0 | URL
인물의 심상을 문학적인 우아함이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표현하는 작가들과는 달리 샐린저의 문장은 등장인물의 예민한 의식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적나라함이 매력인 것 같아요. 닦고 칠하고 조여진 문장도 아니고, 직유나 은유도 거의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묘사하거든요^^

샐린저는 개개인의 사람들에 대한 예리한 시선이 있어요. 부분부분을 흘려보내지 않고 예민하게 표현해서 전체보단 순간을, 큰 길보단 골목길을 먼저 보게 만드는 작가라고 생각해요. 세밀한 재료들을 보여주고 큰 그림은 알아서 그려보라는 거겠지요. 아무래도 정서적으로 예민할수록 샐린저의 문장에 이끌리는 것 같은데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작가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런 예민함이 좋더라고요 ㅎ 홀든을 좋아하셨으면 재밌으실 것 같아요^^

지금행복하자 2015-09-10 09:39   좋아요 0 | URL
샐린저의 다른 작품도 읽어봐야겠어요. 사실 호밀밭의 파수꾼도 아주 오래전에 읽어놔서요~~
읽을 책은 많은데.. 에궁.. 그래도 자꾸 늘어나네요~~ ^^
 

˝어떤 문제를 잘 제시하는 것과 그 문제가 사전에 해결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별개라고 믿는다. 마지못해 나는 여기에 '문제'라는 말을 쓴다. 솔직히 말한다면, 예술에는 문제 같은 것은 없다. 예술 작품이 그 문제의 충분한 해결인 것이다. ˝ - 앙드레 지드

 

 

 

오늘날의 독자들은 작가가 어떤 행위를 그리면 거기에 대한 작가의 찬성이나 반대를 분명히 밝히기를 요구한다며 앙드레 지드가 「배덕자」의 머리말에서 했던 말이다. 이 '문제'는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며, 작품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며 작가는 승리도 패배도, 기정사실로 제시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요컨대 나는 아무것도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잘 묘사하고 나의 묘사를 분명하게 드러내도록 노력했다.˝ - 앙드레 지드

 

 

 

배덕자 좁은 문과 서로 대극을 이루는 작품으로 지드가 오래전부터 2부작으로 구상했었다고 한다. 배덕자 악덕을 중심으로 기성 종교로부터 해방된 과도한 개인주의의 위험을 경고한다면, 「좁은 문」은 미덕을 중심으로 지나친 신비주의적 신앙의 위험을 고발한다는 것이다. 지드의 정신 속에선 두 주제가 경쟁적으로 자라고 있었으며, 한 쪽의 과잉이 다른 쪽의 과잉 속에서 은밀한 허락을 발견하며 둘 다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일기를 통해 고백했다고 한다.



주인공 미셸이 지난 3년간 겪은 일을 세 명의 친구에게 고백하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배덕자앙드레 지드와 아내 마들렌의 자전적 요소를 담고 있다. 지드 최초의 비극적 소설이자 심리소설의 걸작이라는 평을 받고 있지만 출간 당시엔 엄청난 스캔들을 야기하며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죽음의 날개가 스친 뒤에는, 중요하게 보이던 일도 이미 그렇지 않게 된다. 중요하게 보이지 않던 것, 또는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것이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 우리 머릿속에 쌓여 있던 온갖 지식이 분칠처럼 벗어져 곳곳에서 맨살이, 숨어 있던 진정한 존재가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그때부터 내가 발견하려고 마음먹은 '인간'이었다. ˝ (p369)

 

 

 

온통 학문 연구에만 심취했던 병약한 미셸은 책 외엔 거의 아무것도 보지 않은 채,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 스물다섯살이 되었고, 죽음이 임박한 아버지에게 기쁨을 드리기 위해 별 애정도 없는 마르슬린과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 후 떠난 여행 중 폐결핵이 발병된 미셸은 거의 빈사 상태가 되어 알제리의 비스크라에 도착한다. 마르슬린의 극진한 간호로 몸을 회복시키는 동안 아랍 소년들의 모습을 보며 '건강'에 반하게 된 미셸은 살고 싶다는 절박함을 느끼게 되었고 마침내 살게 된다. 그동안 많았던 생각에 비해 느끼는 일이 너무 적었던 그는 예전과는 달리 새로운 감각이 깨어남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자신을 팔랭프세스트에 비유했다. 나는 학자가, 같은 종이에서 최근에 쓰인 글자 밑에 있는 그보다도 훨씬 귀중하고 매우 오래된 원문을 발견했을 때 느낄 법한 기쁨을 맛보았다. 그 숨겨져 있던 원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읽기 위해서는 우선 최근에 쓴 글자를 지우는 게 급선무 아니었을까? ˝ (p370)

 

 

 

지워진 글씨가 다시 나타나게 하기 위해 미셸은 과거의 교육과 최초의 윤리관에서 얻어졌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의도적으로 멸시하거나 일소시켰다. 마르슬린은 미셸을 사랑했지만 그녀에겐 이미 새로운 존재가 되어가는 자신을 숨겼고, 그는 자신의 기만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지드의 「좁은 문」과 마찬가지로 「배덕자」 역시 인용되는 성경 구절이 있다.

 

 

 

˝지금은 네가 스스로 허리띠를 두르고 원하는 곳으로 다니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 - 요한복음 21장 18절

 

 

 

각주에 의하면 젊을 때 자유롭게 살던 베드로가 늙어서 때가 되면 손이 묶여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형을 당하리라는 예언의 말씀이라고 한다. 전체 3부로 이루어져 있는 「배덕자」에선 예수를 세 번 거부한 베드로 대신 미셸이 마르슬린을 세 번 거부한다. 1부에선 그녀를 거의 하루 종일, 매일, 혼자 내버려 두는 정도였지만 2부, 3부에선 가장 중요한 순간들에 그녀를 거부하게 된다. 이미 미셸에겐 마르슬린과의 일상이 몸에 맞지 않게 된 옷과 같은 행복이었다. 이런 미셸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며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치닫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소설이 바로 「배덕자」인 것이다.

 

 

 

˝오늘날 왜 시가, 특히 철학이 죽은 글자가 되었는지 자네는 아나? 시와 철학이 삶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야. 그리스는 삶을 그대로 이상화했어. 그래서 예술가의 삶은 그 자체가 이미 시의 실현이었거든. 철학자의 삶은 자기 철학의 실천이었어. (...) 오늘날에는 아름다움은 이미 행동하지 않고, 행동은 이미 아름다워지려고 애쓰지 않아. 그리고 지혜는 그것들과는 별도로 움직이네. ˝ (p433)

 

 

 

종교, 철학, 예술, 사랑, 개인의 이상 등 추구하는 것과 실제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에서 사람들은 불행해지고, 한편으론 그에 더 집착하게 되는 것 같다. 특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지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성장기의 결핍 또는 과잉은 스스로를 자각하는 순간부터 그것의 크기만큼 다른 쪽의 과잉을 향해 치닫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어느 쪽이든 한 쪽의 과잉은 삶의 균형을 잃게 만든다. 극단적인 과잉의 원인은 극단적인 결핍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미 잃었기에 좀 더 잃는 것이라고 말이다. 치우침은 자유가 아니다. 그 자체로 속박이라 여겨진다.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영웅적인 금욕주의 모두의 결말은 쌍둥이처럼 꼭 닮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성실하면서 동시에 성실한 체할 수는 없는 법이다. ˝ (p410)

 

 

 

우리가 어떤 기만으로 자신을 속이든, 우리는 자신의 결핍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대개의 사람들이 가장 증오하는 대상은 자신과 완벽히 다른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자신과 같은 기만을 타인에게서 발견하게 될 때, 그를 증오하며 자신의 기만에 화를 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에게 그것이 없으면 타인의 그것도 정확히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좁은 문」, 「전원교향곡」, 「배덕자」는 지드의 자전적 요소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훌륭했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을 깊이 있게 파고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고 있는 것을 수단으로 삼아 타인을 비판하거나 계도하며, 자신의 지성과 양심을 상대적 우위에 놓으려 했다면 지드 역시 평범한 개인에 불과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앙드레 지드는 문학이란 도구를 통해 다만 묘사함으로 자기기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기만에서 스스로 놓여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 쪽의 과잉이 다른 쪽의 과잉 속에서 은밀한 허락을 발견할 수 있으려면 그 둘 모두를 회피하지 않아야 하는 것 같다. 내면의 결핍을 모른 채 스스로를 속이고, 자신의 삶을 기만하지 않으려면 나를 슬프게 하고 화나게 하는 것들을 통해 나를 좀 더 잘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문학이 좋다. 모든 이에게 같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답을 스스로 찾게 하니 말이다..

 

 

 

˝나는 공감이 무섭다. 온갖 전염병이 모두 그 속에 숨어 있다. 사람들은 단지 강자들하고만 공감하게 되어 있다. ˝ (p467)

 

 

 

˝자신을 자유롭게 할 줄 아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어려운 건 바로, 자유로운 상태를 유지할 줄 아는 거야.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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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9-06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은 앙드레 지드 전작독서를 열심히 하시는군요. 저는 <좁은 문>만 읽어봤어요.

물고기자리 2015-09-06 23:29   좋아요 0 | URL
전작까진 아니어도 몇 권 더 읽으려고 해요. 읽고 싶었던 다른 책들도 있어서 순서를 정해야 하는 게 행복한 고민이에요^^

AgalmA 2015-09-07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드레 지드 내용은 다 가물가물하지만 읽을 때 옥죄어오던 기분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해요. 어려워서가 아니라 묘사나 위에 인용하신 대사가 날카로우면서 무거운 경고성 철학으로 다가와 굉장히 심적 부담감을 줬던...
한 템포 쉬어가는 뜻에서 브라우티건을 꼭 보셔야 할 듯 :)

물고기자리 2015-09-07 08:27   좋아요 1 | URL
저도 종종 다른 쪽의 과잉으로 치닫고 싶을 때가 있어서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 안 그래도 장바구니에 담아두었습니다ㅎ
 

 

 

앙드레 지드전원교향곡 제목의 느낌으론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을 연상하게 되지만 실상은 어느 목사의 도덕적인 위선과 자기기만을 폭로하는 내용이다. 지드의 전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많이 읽히는 작품이라는데 그의 자전적 요소를 담고 있기도 하다.



1916년 이래, 앙드레 지드는 집안과 절친한 목사의 아들이자 삼십 년 연하인 당시 16세 소년과 동성애를 시작하는데 1918년 지드의 아내 마들렌은 둘의 관계를 알게 되고, 분노와 충격으로 그가 보낸 모든 편지를 태워 버렸다고 한다. 지드는 이 사실을 알고 며칠 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이중적인 성생활을 하면서도 아내의 사랑과 존경을 믿고 싶었던 자신의 자기기만적 환상이 무참히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전원교향곡」은 바로 이 시기인 1918년 상반기에 집필됐다고 한다. 내용을 전혀 모른 채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한동안은 작중 화자인 목사의 순수한 신앙을 믿게 된다. 보호자 없는,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가르치고 돌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씩 머리를 갸우뚱 거리게 된다. 자신을 속이고, 아내의 슬픔을 무시하며, 이후 소녀를 사랑하게 되는 아들의 마음 역시 교묘히 짓밟는, 더없이 천진한 듯 자신의 신앙과 사랑을 묘사하고 합리화 시키지만 목사의 가증스러운 기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는 늘 성경의 말씀을 인용해 자신의 사랑을 포장하고 스스로를 속인다.



아름다운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는 것, 주인공이 목사라는 것만으로 처음엔 그의 순수한 신앙심과 사랑을 의심하지 않게 되는데 이 소설이 뛰어난 점은 주인공의 이중성을 완전히 드러내지도, 완벽히 숨기지도 않는 적절한 교묘함에 있는 것 같다. 적나라하지 않는 적나라함이 그의 기만을 오히려 크게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화자인 목사는 늘 자신을 선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그래서 더 가증스럽게 느껴지니 말이다.



평론가들에 의하면 목사가 인용하는 성경 구절은 성경의 문맥과는 동떨어진 상태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선별적인 인용, 또는 누락시킨 것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소설적 측면에서 보면 그 역시 작가적 역량으로 보인다. 원래의 의미를 축소하거나 변형시켜 목사의 욕망이나 진실을 교묘히 은폐하는 역기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드의 소설에는 유난히 성경 구절이 많이 인용된다. 하지만 그 역시 「좁은 문」의 알리사나 「전원교향곡」의 목사처럼 성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자기합리화를 위해 선별적으로 인용하거나 핵심 구절은 고의적으로 누락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모른다 하더라도 「좁은 문」을 읽을 때 알리사를 진정한 신앙인이라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알리사에게 신앙은 일종의 고결한 도피처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제롬의 사랑은 알리사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단 그의 머릿속에서 아름답게 승화시킨 사랑 자체에 대한 사랑인 것 같았다. 알리사는 그런 제롬의 사랑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사랑을 받기 위해 자신을 계속해서 드높은 경지에 올려놓아야만 했다. 하지만 알리사는 행복할 수 없었고, 그럼에도 제롬의 사랑을 포기할 수 없어 의지할 수 있는 성경 구절 뒤로 숨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런 모든 것들엔 그들이 자라온 환경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한다.



앙드레 지드는 「좁은 문」의 제롬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가 열두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론 어머니의 과잉보호 아래 엄격한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두 살 위인 외사촌 누이 마들렌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는 「좁은 문」의 알리사를 떠올리게 한다. 지드는 친구들로부터 목사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열광적인 구도자였지만 다양한 경험을 한 이후엔 동시대인들을 부르주아 사회의 도덕적, 종교적 구속으로부터 해방하고, 열정적인 삶을 계시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게 된다. 그런 이유로 그는 보수주의자들과 카톨릭계 작가들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엔 정치, 사회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가졌고 프랑스의 비인간적인 식민 정책과 제국주의를 비판했다. 그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여성 해방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기도 하는데 이런 이유들로 그는 '현대의 양심'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렇게 무신론적 휴머니즘의 선도자였지만 그럼에도 복음서와 그리스도에 대해 여전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삶과 작품 성격을 규정짓는 결정적 요소 하나가 바로 '성경'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드는 성경을 소설이나 시를 읽듯 읽었다고 한다. 마치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그는 「좁은 문」의 알리사처럼 인간 스스로 각고의 노력으로 자아를 완성하면 신성과 구원에 도달한다고 믿었단다. 기독교회의 정통 교리와는 별개로 스스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했지만 이를 모태로 한 그만의 문학세계는 여러모로 골똘히 생각해보게 만드는 풍부한 깊이가 있다. 내용이나 인물에 대한 호감을 떠나 한 소설에서 열 개쯤의 감상이 떠올려질 만큼 이런저런 상념들이 자라나기 때문이다.



특히 인물마다 개인의 히스토리를 생각해보게 되는 특징적인 인간성을 적나라하게 묘사해서 보여준다. 그래 봐야 인물 간의 대화나 일기, 편지 등을 통한 묘사가 전부지만 문장을 길게 할애하지 않는데도 어떤 특정한 인간성이 그려지니 말이다. 한 사람의 적나라함을 통해 나의 내면 역시 다시 바라보게 된다. 이러쿵저러쿵 가르치려 들지 않지만 멈칫하며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도 문학이 살아남는 이유는 사람들이란 늘 여전하기 때문인 것도 같다.



자기완성의 도구이자, 앙드레 지드가 선택한 또 다른 구원의 길은 바로 글쓰기 또는 완벽한 예술 작품의 창조에 있었다고 한다. 그가 얻은 구원은 무엇이었을지 모르지만, 문학적 구원과 자기완성은 지드의 작품을 읽는 사람들로 인해 여전히 진행 중인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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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9-03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지 오래되었지만 그 예리하게 벼른 감각을 잊을래야 잊을수는 없죠.

물고기자리 2015-09-03 20:58   좋아요 1 | URL
공감합니다^^ 편안하게 이어가는 글인데도 그 깊이가 남달라서 읽는 걸 멈출 수가 없더라고요. 앙드레 지드의 다른 작품들도 궁금해져서 장바구니가 가득 찼습니다 ㅎ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소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 - 마태복음 7장 13절 (p32)

 

 

 

제롬에게 사랑이 시작된 순간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 년 뒤, 부활절 방학을 맞이해 외삼촌 댁에 갔을 때였다. 외숙모의 불륜으로 상심하고 있는 외사촌 누나 알리사의 눈물을 보며 그 순간 제롬은 사랑과 연민에 도취되었고, 그때부터 인생의 목적은 오직 알리사를 지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급기야 외숙모는 도망쳐 버렸는데 마침 주일 날 교회에선 '좁은 문'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다.



온갖 고행과 슬픔을 넘어 순수하고 신비롭고 거룩한 기쁨이 될 사랑. 제롬에겐 그 '좁은 문'이 알리사의 '방 문'이 되었던 것이다. 제롬은 스스로를 얽매어 놓는 것이 오히려 즐거울 수 있는, 청교도적 규율에 익숙한 환경에서 자랐다. 행복과 덕행을 혼동한 채로 말이다.



알리사는 어땠을까? 그녀는 어머니의 불륜으로 상심했고, 그로 인한 아버지의 슬픔 역시 지켜봐야 했다. 제롬에게 감정적으로 이끌리면서도 사랑이란 그녀의 아버지가 받아보지 못한 애정과 존경, 신뢰와 뒷받침인 희생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녀는 어머니처럼 가족에게서 도망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살아야 할 진짜 삶으로부터 도망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그 사람의 인생 초반부의 성장환경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것들로부터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될지를 학습하게 된다고 말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에 반발하는 자신과 끊임없는 전쟁을 벌이거나 때론 일정 부분 포기하고 타협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매 순간하고 있는 자신의 선택이 주어진 가치관이나 습관이 아닌, 순수한 자기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것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은 개인이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 같다. 자아를 인지하려면 자신을 비추어 줄 거울이 필요하니 말이다.

 

 

 

˝정작 이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부터다. 아마도 상을 당했기 때문에, 비록 나의 슬픔만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어머니의 슬픔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감수성은 지나치게 자극받아 새로운 감정에 흔들리기 쉬운 상태가 되었다. 나는 조숙했다. ˝ - 제롬 (p19)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는 동안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을 구분 짓는 문턱을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나, 우리, 그리고 타인과 그들의 경계엔 서로 다른 가치관이란 울타리가 생기고 그 턱을 넘나드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타인의 문턱이 높은 것이 아니라 나의 문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한 걸음이 무겁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우리가 다시 만나려면, 서로가 온갖 노력을 다해야만 할 것 같았어. ˝ - 알리사 (p53)

 

 

 

˝나는 죽음이 다시 만나게 해 줄 거라고 생각해. 그래, 살아서는 갈라서 있던 것들을 다시 만나게 해 줄 거야. ˝ - 제롬 (p53)

 

 

 

제롬과 알리사는 소설의 초반부에 이미 알고 있고, 예견하고 있었듯이 그들 스스로의 문턱이 너무 높았던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는 제롬과 알리사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흔히 상대를 잘 안다고 착각하곤 하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 형편이니, 편의대로 추측하기를 반복하며 그것이 상대를 위한 것이라고 위안할 때가 많으니 말이다.

 

 

 

˝우리가 주고받은 모든 편지가 하나의 커다란 신기루에 지나지 않으며, 아! 슬프게도, 우리는 저마다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썼을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제롬! 제롬! 아! 우리는 언제나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 - 알리사 (p131)

 

 

 

˝나는 네 사랑이 무엇보다 머릿속 사랑이고, 애정과 신뢰에 대한 근사한 지적 집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 - 알리사 (p132)

 

 

 

알리사는 그녀의 어머니와는 달리 희생하는 삶을 살고 싶어 했지만 어머니와 달라야 한다는 문턱 안에 스스로 갇혀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제롬을 좋아했던 여동생 쥘뤼에트에게 희생하려 했지만 자신의 희생이 가치 없다 느껴지자 그녀는 마음 아파하기 때문이다.

 

 

 

˝그 애가 자기 행복을 내 희생 위에서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찾았다는 것, 그 애가 내 희생 없이도 행복해질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내 마음속에 되살아난 끔찍한 이기주의가 분개하고 있다는 것을 나 스스로 잘 알아차릴 수 있다. ˝ - 알리사 (p175)

 

 

 

˝나는 언제나 그의 앞에서 나의 덕을 과장하는 것일까? 나의 온 마음이 인정하지 않는 이 덕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 - 알리사 (p198)

 

 

 

어쩌면 그녀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또 다른 제롬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어머니와 알리사가 달아난 방향만이 달랐을 뿐, 머릿속에서 드높여진 이상적인 사랑이 그만 현실과 만나 추락해버린 것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종교와 상관없는 나의 주관적인 관점으론  '좁은 문'의 비유 역시 문이 작고 좁아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나의 에고가 강하기 때문에 그 문이 좁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보게 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갖게 된 가치판단의 기준들이 나의 문을 열지 못하게 하는 속박의 끈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그녀를 올려놓았던 그 높은 곳에서, 그녀를 만나 함께 하려는, 그 미덕에 대한 힘겨운 노력은 얼마나 터무니없고 공상적인 것 같았는지. 조금이라도 자부심이 덜했던들, 우리 사랑은 수월했을 것이다. ˝ - 제롬 (p159)

 

 

 

나의 문도 너의 문도 아닌, 문턱이 없는 곳에서 서로를 마주 보려면 때로는 자신이라 규정짓는 모든 것들 속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올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주어진 환경들로부터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나의 가치관은 내가 원하는 것과는 다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나올 수 있을 때 '좁은 문'은 더 이상 문이 아닐지도 모르니 말이다..

 

 

 

˝자! 이젠 잠에서 깨어나야 해..... ˝ - 쥘리에트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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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9-01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10000km>란 영화가 개봉했던데, 물고기자리님이 인용하신 <좁은문>대화들을 보니 앞의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화상으로 나누는 무수한 대화들이 생각나요. 이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나 정서는 변함없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당연히 인간이라서...
저도 동영상만 봤기 때문에 영화 추천은 아닙니다(정색)

좁은 문, 전원교향곡, 적과 흑....이런 고전 읽던 때가 무려 몇 십년이 흘렀는지! 다시 제대로 읽어봐야 하는데...아.

물고기자리 2015-09-01 20:28   좋아요 1 | URL
영화 추천은 아닌 걸로 알겠습니다^^ <좁은 문>을 처음 읽은 건 중학생 때였던 것 같은데 어떤 이미지만 떠오를 뿐 제대로 이해한 것도, 기억나는 것도 없었어요. 확실히 문학이란 경험의 데이터가 많아야 읽히는 것들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책 읽는 사람들에겐 나이 들어가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은 게 앞으론 읽는 것이 더 재밌어질 거란 기대감이 들어서인 것도 같고요^^ 학생일 때와는 달리 정답 찾기에 연연해하지 않아도 되고 말이죠 ㅋ
 

 

 

J. D. 샐린저의 소설 프래니와 주이 일어판을 무라카미 하루키가 번역했다고 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루키는 이런 추천사를 남겼는데 그의 번역은 어떤 느낌일지 새삼 궁금해진다.

 

 

 

˝『프래니와 주이』가 이렇게 재미있는 얘기였다니! 하고 탄복했다. 일어판 번역자로서 앞으로도 시대를 넘어 『프래니와 주이』가 고전으로, 또 동시대성을 지닌 작품으로 오래도록 읽히기를 바란다. 젊은 독자들에게는 젊은 대로, 성숙한 독자들에게는 성숙한 대로 읽히는 수준 높은 문학작품이라고 믿는다. 나이브하면서 기술적으로는 고도로 숙련돼 있고, 원리적이고 근원적이면서 동시에 부드러운 영혼을 지닌 매력 있는 소설이다. 인상적이고 자상한 세부 묘사에는 그만 마음을 뺏기게 된다.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인생에서 한 번쯤, 혹은 두 번쯤 읽을 만한, 그것도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매우 드문 작품이다. ˝ - 무라카미 하루키

 

 

 

이 책을 읽기 전 너무 오래전에 읽어 느낌이 옅어진 「호밀밭의 파수꾼」을 다시 읽어 보았는데 읽는 내내 영상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홀든의 체취까지도 맡을 수 있을 것 같은 생생한 캐릭터 묘사가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다. 의식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세부적인 묘사로 농축된 당시의 시대와 열여섯 살 홀든의 위태롭고 중요한 순간을 함께 공유한 기분이 든다. 1951년에 출간되었는데도 전혀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 이 소설을 그동안 쟁쟁한 영화감독들이 얼마나 영화화하고 싶어 했을지, 그 마음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저 홀든이 말하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한 편의 영화가 될 것 같은, 캐릭터 자체가 곧 소설인 것 같으니 말이다.



「프래니와 주이」역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을 때처럼 잡념 없이 집중하게 되는 소설이었다. 샐린저의 저서를 연달아 읽고 보니 그의 책이 여전히 매력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쓰려고 애쓰지 않는' 문장에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말하듯 부르는 노래처럼, 단어 하나하나를 되새김질할 필요 없이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을 자연스레 공유하게 된다. 그도 이를 유념하고 있는지 책의 본문 중엔 이런 부분이 있다.

 

 

 

˝나는 내가 훌륭한 작가들, 그러니까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셰익스피어 중 그렇게 단어를 쥐어짠 인간이 누가 있었냐고 지적한 것이 완벽하게 정당하다고 생각해. 그 작가들은 그냥 썼거든. ˝ (p24)

 

 

 

「프래니와 주이」는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깊이 있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진지하긴 하지만 샐린저 특유의 시니컬한 위트 덕분에 꽤 익살스럽게도 느껴지는, 여유를 가지고 읽게 되는 소설이었다. 현학적임을 뽐내고 싶어 하거나 치장이랄 것이 없는 그의 문장은 부담스럽거나 무겁지 않아서 하루키의 추천사처럼 '나이브하면서 기술적으로는 고도로 숙련돼 있고, 원리적이고 근원적이면서 동시에 부드러운 영혼을 지닌 매력 있는 소설'이란 말에 동의하게 된다. 이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프래니와 주이편으로 나뉘는 이 소설의 주요 장면에선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대화를 이어나가는데 그들의 대화 자체가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좀 더 인상적이었던 대화는 주이가 등장하는 65쪽부터 였는데 글래스 가의 일곱 남매 중 가장 어린 두 남매인 주이(25세)와 프래니(여동생, 20세),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인 베시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글래스 가의 남매들은 특출나게 똑똑한, 그래서 지적인 고민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어떤 것들인지 조금 옮겨 보려고 하는데 남매들의 어머니 베시는 이런 말을 한다.

 

 

 

 ˝아무리 아는 게 많고 기가 막히게 똑똑한들, 그러고도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구나. ˝ (p152)

 

 

 

프래니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저 에고에, 그놈의 에고, 에고에 신물이 나는 것뿐이야. 내 에고에, 모든 사람의 에고에. 어딘가에 이르고 싶어 하고, 뭔가 탁월한 일을 이루고 싶어 하고, 흥미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에 신물이 나. 혐오스러워. 정말 혐오스럽다고. ˝ (p44)

 

˝난 그냥 내 의견을 단 하나도 마음속에 담아만 둘 수 없었어. 모든 것을 할퀴고 할퀴고 할퀴어댔어. ˝ (p176)

 

˝그냥 사람들을 비판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어. ˝ (p186)

 

˝때때로 나는 지식이 - 게다가 지식을 위한 지식일 때 - 그중 최악이라고 생각해. 어쩌다 한 번이라도, 정말 어쩌다 단 한 번이라도, 지식은 지혜로 이어져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혐오스러운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는, 좀 겉치레로라도 정중한 조그마한 암시라도 있었다면, 내가 그렇게까지 우울해지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 ˝ (p186)

 

 

 

주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겐 <지혜로운 어린이> 콤플렉스가 있어. 우리는 평범하게 얘기를 못하고 말을 장황하게 하지. 우리는 대화를 나누지 않고 설명을 늘어놔. 나는 빌어먹을 예언자가 되거나 인간 모자핀이 되어 사람들을 찔러대지. ˝ (p178)

 

˝너는 그들이 대변하는 것을 경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 자체를 경멸하지. ˝ (p205)

 

"넌 대학 캠퍼스를, 세상을, 정치를, 여름 공연 한 시즌을 보고, 멍청한 대학생들의 대화를 듣고, 아주 쉽게 결론을 내렸지. 모든 것이 에고. 에고. 에고라고. ˝ (p210)

 

˝무엇이 에고이고 무엇이 에고가 아닌지 결정하려면 그리스도가 직접 와야 될 거야. 이건 신의 우주야, 친구, 네 우주가 아니라.˝ (p211)

 

˝그를 생각해, 오직 그만을, 있는 그대로의 그를, 그가 그랬더라면 하고 네가 바라는 모습 말고. 너는 어떤 사실과도 직면하지 않아. 사실을 직면하지 않는 그 빌어먹을 태도가 바로 애초에 네 정신 상태가 엉망이 된 원인이야. ˝ (p214)

 

˝프래니. 예술가의 유일한 관심은 어떤 완벽함을 달성하는 것이고,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의 완벽함이야. 너는 다른 것들에 대해선 생각할 권리가 없어. ˝ (p250)

 

 

 

J. D. 샐린저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거의 모든 장면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어 읽는 내내 목이 칼칼한 느낌이 든다. 프래니도 주이의 시가에 대해 불평을 하는데 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 시가는 평형추란다. 순수한 평형추. 주이가 시가를 붙잡고 있지 않다면 그 애의 다리는 바닥에서 위로 날아오를 거고, 우리는 다시는 주이를 보지 못하게 되지. ˝ (p242)

 

 

 

매캐한 담배연기가 피어오르는 틈 속에서 가끔씩 한 팔로 공기를 휘저어 가며 남매의 대화를 듣고 있는 기분이 드는 이 소설은 내게도 그런 평형추가 있음을 돌아보게 만든다. 한동안 어떤 생각이나 감정에 빠져 있다가도 다시 스스로를 정화시키고자 할 때 원동력이 되어주는 것들을 말이다. 이들 남매의 대화를 일종의 글로 쓴 홈비디오라며 옮긴 글 속의 화자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지금 제공하는 것은 신비주의적인 이야기도, 종교적으로 신비화된 이야기도 전혀 아님을 밝힌다. 나는 이것이 복합적이거나 다각적인, 순수하면서도 난해한, 사랑 이야기임을 밝힌다. ˝ (p68)

 

 

 

이 책의 마지막 장까지 다 읽은 후 나는 그 의미를 나의 뜻대로 받아들였다. 어떤 종교이든, 사상이든, 철학이든, 하다못해 독한 냄새를 피우는 시가가 됐든, 누구에게나 자신의 평형추를 필요로 하지만 스스로 균형을 잡을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절실하고 근원적인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들을 말이다. 하지만 나는 평형추에 의존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한다. 내가 나이기를 바라는 것과 진정한 나와는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이는 타인에게도 마찬가지라며 늘 되새기게 된다. 그리고 프래니와 주이에겐 그들의 대화가 무엇보다도 든든한 평형추가 아닐까 싶었다. 진지한 관심이 있어야 진지한 대화도 가능하니 말이다.



드라마틱한 서사를 좋아한다면 최소한의 배경에서 주로 대화를 통해 이어가는 이 소설이 달갑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이 소설의 형식을 샐린저의 실력이라 생각할 수도, 단점이라 여길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야기의 구조물을 올리는 걸 중요시하는 작가가 있는 반면 배경들은 흐릿하게 놓아둔 채 의식의 흐름에만 집중하고 싶어 하는 작가도 있다. 이도 저도 가리지 않는 나의 성향으론 J. D. 샐린저를 좀 더 알게 된 것 같은 소설이었다. 결국 책이란 사람을 알게 되는 일이고, 한 사람을 알게 될 때마다 그를 통해 나와 세상을 인식하게 되는 과정이라 생각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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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8-27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년 전에 제가 알라딘 중고매장에 <프래니와 주이> 구판을 구했을 땐 책이 절판된 상태였어요. 시중에 구하기 힘든 책이었어요. 새 표지, 새 번역의 책으로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

물고기자리 2015-08-28 11:34   좋아요 1 | URL
이 책이 좀 이상한 매력이 있는 게 같은 페이지를 다시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져요^^ 사실 이보다 더 심오한 이야기들도 다른 책을 통해 충분히 읽을 수 있지만 남매의, 특히 주이의 말을 통해 듣는 게 굉장히 매력 있더라고요. 사실적이면서 직설적이지만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처럼 미워할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그만의 부드러움이 있거든요. 전 하루키가 추천사를 왜 저렇게 썼는지 공감하고 있어요^^ 다시 읽어 보시면 또 다른 느낌이실 거예요 ㅎ

[그장소] 2015-09-03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자기 스타일이 확실히 살아있어서 참 좋군요!^^잘 보고갑니다.^^ Agalma 님 글을
제가 좋아하는 이유도 그런 이유인데..오늘 또 하나 보물을 찾은 듯하군요!^^

물고기자리 2015-09-03 14:32   좋아요 1 | URL
격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AgalmA 2015-09-07 00:17   좋아요 1 | URL
깜짝...부끄러움 뒤...어떻게 해야 될 지 몰라 ((((줄행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