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문제를 잘 제시하는 것과 그 문제가 사전에 해결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별개라고 믿는다. 마지못해 나는 여기에 '문제'라는 말을 쓴다. 솔직히 말한다면, 예술에는 문제 같은 것은 없다. 예술 작품이 그 문제의 충분한 해결인 것이다. ˝ - 앙드레 지드
오늘날의 독자들은 작가가 어떤 행위를 그리면 거기에 대한 작가의 찬성이나 반대를 분명히 밝히기를 요구한다며 앙드레 지드가 「배덕자」의 머리말에서 했던 말이다. 이 '문제'는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며, 작품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며 작가는 승리도 패배도, 기정사실로 제시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요컨대 나는 아무것도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잘 묘사하고 나의 묘사를 분명하게 드러내도록 노력했다.˝ - 앙드레 지드
「배덕자」는 「좁은 문」과 서로 대극을 이루는 작품으로 지드가 오래전부터 2부작으로 구상했었다고 한다. 「배덕자」가 악덕을 중심으로 기성 종교로부터 해방된 과도한 개인주의의 위험을 경고한다면, 「좁은 문」은 미덕을 중심으로 지나친 신비주의적 신앙의 위험을 고발한다는 것이다. 지드의 정신 속에선 두 주제가 경쟁적으로 자라고 있었으며, 한 쪽의 과잉이 다른 쪽의 과잉 속에서 은밀한 허락을 발견하며 둘 다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일기를 통해 고백했다고 한다.
주인공 미셸이 지난 3년간 겪은 일을 세 명의 친구에게 고백하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배덕자」는 앙드레 지드와 아내 마들렌의 자전적 요소를 담고 있다. 지드 최초의 비극적 소설이자 심리소설의 걸작이라는 평을 받고 있지만 출간 당시엔 엄청난 스캔들을 야기하며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죽음의 날개가 스친 뒤에는, 중요하게 보이던 일도 이미 그렇지 않게 된다. 중요하게 보이지 않던 것, 또는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것이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 우리 머릿속에 쌓여 있던 온갖 지식이 분칠처럼 벗어져 곳곳에서 맨살이, 숨어 있던 진정한 존재가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그때부터 내가 발견하려고 마음먹은 '인간'이었다. ˝ (p369)
온통 학문 연구에만 심취했던 병약한 미셸은 책 외엔 거의 아무것도 보지 않은 채,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 스물다섯살이 되었고, 죽음이 임박한 아버지에게 기쁨을 드리기 위해 별 애정도 없는 마르슬린과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 후 떠난 여행 중 폐결핵이 발병된 미셸은 거의 빈사 상태가 되어 알제리의 비스크라에 도착한다. 마르슬린의 극진한 간호로 몸을 회복시키는 동안 아랍 소년들의 모습을 보며 '건강'에 반하게 된 미셸은 살고 싶다는 절박함을 느끼게 되었고 마침내 살게 된다. 그동안 많았던 생각에 비해 느끼는 일이 너무 적었던 그는 예전과는 달리 새로운 감각이 깨어남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자신을 팔랭프세스트에 비유했다. 나는 학자가, 같은 종이에서 최근에 쓰인 글자 밑에 있는 그보다도 훨씬 귀중하고 매우 오래된 원문을 발견했을 때 느낄 법한 기쁨을 맛보았다. 그 숨겨져 있던 원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읽기 위해서는 우선 최근에 쓴 글자를 지우는 게 급선무 아니었을까? ˝ (p370)
지워진 글씨가 다시 나타나게 하기 위해 미셸은 과거의 교육과 최초의 윤리관에서 얻어졌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의도적으로 멸시하거나 일소시켰다. 마르슬린은 미셸을 사랑했지만 그녀에겐 이미 새로운 존재가 되어가는 자신을 숨겼고, 그는 자신의 기만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지드의 「좁은 문」과 마찬가지로 「배덕자」 역시 인용되는 성경 구절이 있다.
˝지금은 네가 스스로 허리띠를 두르고 원하는 곳으로 다니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 - 요한복음 21장 18절
각주에 의하면 젊을 때 자유롭게 살던 베드로가 늙어서 때가 되면 손이 묶여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형을 당하리라는 예언의 말씀이라고 한다. 전체 3부로 이루어져 있는 「배덕자」에선 예수를 세 번 거부한 베드로 대신 미셸이 마르슬린을 세 번 거부한다. 1부에선 그녀를 거의 하루 종일, 매일, 혼자 내버려 두는 정도였지만 2부, 3부에선 가장 중요한 순간들에 그녀를 거부하게 된다. 이미 미셸에겐 마르슬린과의 일상이 몸에 맞지 않게 된 옷과 같은 행복이었다. 이런 미셸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며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치닫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소설이 바로 「배덕자」인 것이다.
˝오늘날 왜 시가, 특히 철학이 죽은 글자가 되었는지 자네는 아나? 시와 철학이 삶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야. 그리스는 삶을 그대로 이상화했어. 그래서 예술가의 삶은 그 자체가 이미 시의 실현이었거든. 철학자의 삶은 자기 철학의 실천이었어. (...) 오늘날에는 아름다움은 이미 행동하지 않고, 행동은 이미 아름다워지려고 애쓰지 않아. 그리고 지혜는 그것들과는 별도로 움직이네. ˝ (p433)
종교, 철학, 예술, 사랑, 개인의 이상 등 추구하는 것과 실제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에서 사람들은 불행해지고, 한편으론 그에 더 집착하게 되는 것 같다. 특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지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성장기의 결핍 또는 과잉은 스스로를 자각하는 순간부터 그것의 크기만큼 다른 쪽의 과잉을 향해 치닫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어느 쪽이든 한 쪽의 과잉은 삶의 균형을 잃게 만든다. 극단적인 과잉의 원인은 극단적인 결핍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미 잃었기에 좀 더 잃는 것이라고 말이다. 치우침은 자유가 아니다. 그 자체로 속박이라 여겨진다.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영웅적인 금욕주의 모두의 결말은 쌍둥이처럼 꼭 닮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성실하면서 동시에 성실한 체할 수는 없는 법이다. ˝ (p410)
우리가 어떤 기만으로 자신을 속이든, 우리는 자신의 결핍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대개의 사람들이 가장 증오하는 대상은 자신과 완벽히 다른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자신과 같은 기만을 타인에게서 발견하게 될 때, 그를 증오하며 자신의 기만에 화를 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에게 그것이 없으면 타인의 그것도 정확히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좁은 문」, 「전원교향곡」, 「배덕자」는 지드의 자전적 요소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훌륭했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을 깊이 있게 파고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고 있는 것을 수단으로 삼아 타인을 비판하거나 계도하며, 자신의 지성과 양심을 상대적 우위에 놓으려 했다면 지드 역시 평범한 개인에 불과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앙드레 지드는 문학이란 도구를 통해 다만 묘사함으로 자기기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기만에서 스스로 놓여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 쪽의 과잉이 다른 쪽의 과잉 속에서 은밀한 허락을 발견할 수 있으려면 그 둘 모두를 회피하지 않아야 하는 것 같다. 내면의 결핍을 모른 채 스스로를 속이고, 자신의 삶을 기만하지 않으려면 나를 슬프게 하고 화나게 하는 것들을 통해 나를 좀 더 잘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문학이 좋다. 모든 이에게 같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답을 스스로 찾게 하니 말이다..
˝나는 공감이 무섭다. 온갖 전염병이 모두 그 속에 숨어 있다. 사람들은 단지 강자들하고만 공감하게 되어 있다. ˝ (p467)
˝자신을 자유롭게 할 줄 아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어려운 건 바로, 자유로운 상태를 유지할 줄 아는 거야. ˝ (p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