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고 싶으면...입 다물라.
이 한마디는 군주의 권력아래 가장 폐쇄적이고도 억압된 삶을 살아야 했던 궁녀들의 강요된 규칙이자 동시에 그들의 처절한 생존전략이었을 것이다.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벌어지는 치열한 암투, 그 속에서도 사랑을 갈구하는 금지된 욕망은 궁녀들에게 비밀 아닌 비밀이 되어 그들의 삶을 옭아맨다. 드러난 비밀을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아야 하는 궁녀의 세계를 다룬 영화 "궁녀"는 한 궁녀의죽음 앞에 펼쳐지는 궁궐 안 사람들의 꿈틀거리는 욕망과 스멀거리는 권력욕을 그려내고 있다.
영화는 내의녀 천령(박진희)이 희빈이 8년간 데리고 있던 월령의 죽음을 파헤쳐 나가는 현재와 천령과 월령, 월령과 같은 방을 쓰는 옥진의 과거가 맞물려 돌아가면서 진행된다. 여기에 유일하게 왕의 아들을 낳은 희빈과 그렇지 못한 중전사이의 팽팽한 힘겨루기도 하나의 이야기축으로 등장한다. 초반부 목매달아 죽어있는 월령의 시체를 검시하며 사인을 규명하는 내의녀의 모습은 나름 과학적이고 치밀해 보여 이야기의 전개가 흡족스러웠다. 하지만 작가와 감독은 후반부로 갈수록 내용전개에 힘을 잃어버리고 결국 <전설의 고향>의 정서에 기대기로 결심한듯 했다. 죽은 월령의 원혼에 의지해 결말을 살짝 마무리해 버리고 만것은 못내 아쉬운 감이 들었다. 차라리 아들을 원자로 책봉시키고자 했던 희빈의 욕심을 극대화 시겼더라면 더 긴박감 있는 추리 스릴러가 될 수 있었을텐데....아니면 궁녀들을 농락하는 왕의 조카 김남진의 캐릭터를 더 강하게 묘사하는것도 괜찮았을 것이다. 권력을 향한 희빈의 욕망과 여자를 품고자 했던 왕의 조카의 욕망이 궁녀들의 삶을 제대로 헤집어놨어야 영화의 묘미가 더 살지 않았을까...?

"죽은자는 말이 없다. 그것이 죽음의 미덕이지..." 하지만 그녀는 죽은 후 그녀의 입속에 중요단서를 숨겨놓는다. 죽은 자의 암시는 영화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관람 포인트다.
아쉬운점은 남자배우들의 연기에도 나타난다. 궁녀들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나쁜 남자로서 김남진은 그닥 어울리는 배우가 아니었다. 느물거리며 "사랑해~"라고 뇌까리는 <사랑>의 김민준처럼 파격적인 변신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아뭏든 궁녀를 그저 품기만 하고 버리는 바람둥이 왕족으로서 그의 표정연기와 대사톤은 밋밋하기 그지 없었다. 또 왕으로 등장하는 이름모를 남자배우에게도 불만이 생긴다. 희빈의 처소에서 희빈의 베갯머리 송사를 들어주는 짧은 장면이었지만 그의 어색한 대사처리에 어찌나 짜증이 나고 어이가 없던지... 감독은 "우정출연"이나 "특별출연"을 해 줄 만한 남자배우를 찾지 못했던 것일까....?
하지만 한 김 빠지는 이야기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게 만든 힘은 각 역할을 맡은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와 영화 전반에 걸쳐 볼거리가 풍부했던 의상과 미술이라고 생각한다. 열정적인 모습의 박 진희, 카리스마가 물씬 풍기는 김 성령, 권력과 생존을 갈구하면서도 연약한 듯 이중적인 모습의 윤 세아, 금지된 사랑을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하는 임 정은등 주요 배우들의 연기가 모두 좋았다고 칭찬해 주고 싶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감찰상궁으로 나오는 김 성령의 절제되고도 안정적인 모습은 조용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며 주연인 박진희 못지않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죽은 월령의 친구 옥진을 취조하는 감찰상궁.
궁녀들의 생활모습과 중전, 후궁들이 입고 나오는 고급스러운 한복과 머리장식등을 구경하는 재미도 꽤 쏠쏠했다. 화려하면서도 색의 화사함을 한 톤 눌러놓은 듯한 느낌의 한복들이 무표정한 중전과 다른 후궁들의 얼굴과 묘한 조화를 이루며 억눌린 궁중 여인들의 욕망을 표출하는 듯 하였다. 또 궁녀들의 입단속을 위해 행한 "쥐부리글려"라는 의식이 있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쥐부리글려"는 섣달 그믐날 그 해 입궁한 어린 궁녀들에게 입단속을 시키는 의미에서 그녀들의 입에 밀떡을 물리고 젊은 내시들이 횟불로 위협하며 "쥐부리 지져, 쥐부리 글려"라고 말하며 입을 지지는 흉내를 내는 의식이다. 이 영화에서는 영화 전반에 흐르는 궁녀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키포인트이며, 과학적 수사에서 원혼이 개입되는 중요한 반전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궁녀들의 입단속과 행실이 바르지 못한 궁녀를 처형하는 의식 "쥐부리글려"
이 영화로 데뷔를 한 김 미정 감독은 상상력과 고증을 재해석해서 보여주는 시각적 면에서는 어느정도 성공을 거둔듯 하다. 하지만 스토리로 관객을 끌고 들어가는 강한 흡입력면에서는 아직 내공을 더 쌓아야 할 듯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친구와 내가 한 말은 "아~조조로 보길 잘했어."였으니까... 하지만 관객들 앞에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궁녀"라는 소재를
택해 이야기로 버무려 낸 그녀의 대담함과 노력에는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