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풍경일 줄은 차마 몰랐다. 비교적 이른 시각에 아무 작정도 하지 않은 채 출발해 무심히 들어선 도봉산 도봉천 계곡은 등산객이라기보다 행락객이라 해야 할 사람들로 너무 소란스럽고 너저분했다. 산에 들어서기도 전 냇가에는 벌써 돗자리를 깔고 삼삼오오 둘러앉아서 소주에, 삼겹살에 거나한 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들 앞을 지나 길이 끊어진 곳에 다다랐다. <출입 금지> 표를 매단 밧줄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망설이지 않고 나는 밧줄을 넘어 직진했다. 물과 바위, 철조망과 콘크리트 벽이 계속해서 돌아가라 윽박질렀지만 나는 그대로 앞을 향했다. 마침내 제법 높다란 다리가 보이고 그 다리가 이어주는 큰길이 눈에 들어왔다.

 

큰 계곡 길은 더욱 소란스럽고 너저분했다. 안전하게 잘 정돈된 길을 걷는데도 왜들 그렇게 스틱으로 땅을 찍어대는지, 산에 와서까지 구태여 돈 얘기를 떠들썩하게 지절거려야 하는지, 여성끼리만 있다 싶으면 미팅하자고 들이대는 놈팡이 표정은 왜 그리 게걸스러운지··· 능선 코밑에 이르러서야 고요가 깃들기 시작했다.

 

능선에 이르자마자 나는 원통사를 거치지 않고 무수천 계곡으로 바로 가는 길을 찾았다. <출입 금지> 표를 매단 밧줄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망설이지 않고 나는 그 길로 들어갔다. 물론 처음부터 길을 잃었다. 스마트폰으로 방향을 확인하며 직진했다. 이번에는 절벽에 가까운 경사와 바위 낭떠러지가 돌아가기를 강요했다.

 

되돌아오고 다시 나아가기를 반복했다. 중심 시각으로 헤매다 비 중심 시각으로 발견한 버섯들을 사진에 담을 때, 또 때늦은 각성이 들이닥치며 안심했다. , 이들이 나를 불렀으니 갈 길도 알려주겠구나. 바위틈을 이리저리 빠져나오다 보니 길 아닌 듯하나 인기척을 간직한 소로가 나타났다. 대뜸 어디쯤인지 알아차렸다.



원통사로 올라가는 길과 갈라지는 곳에 이르러보니 길을 잃었다기보다 아예 길이 지워진 상태임이 틀림없었다. 원통사 쪽은 누가 봐도 길처럼 생겼는데 내가 내려온 계곡 꼭대기 길로 진입하는 초입은 전혀 길처럼 보이지 않아 사람들이 쉽게 들어서지 못함으로써 이곳저곳 인적이 지워진 결과였다. 길이 지닌 운명 아닐는지.

 

길만 그렇지는 않다. 우리 삶도 그렇다. 누군가 먼저 살아갈 때 다른 누군가가 인기척을 듣든지 인적을 보든지 뒤따라가야 공생 서사가 형성돼간다. 먼저 사는 사람은 더불어 살 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뒤따라 사는 사람은 먼저 산 사람에게 고마워하며 그 삶을 뒤 사람에게 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살림 없이 삶은 없다.

 

이 단순한 이치가 무너질 때 길이 사라지듯 인간 공동체도 사라진다. 대한민국을 공동체라 할 수 있는가? 특권층 부역 집단이 틀어쥔 사회 모든 분야가 식민지 본성을 중첩적으로 지니고 있다. 본디 길을 찾는 일이 없는 길을 새로 내는 일과 같은 숲으로 우리는 깊숙이 들어왔다. 길 없는 숲에서 바른 방향으로 직진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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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00. 나는 피아노를 칠 수 있다. 정식으로 배우지는 않았고 홀로 깨쳐 독학자 한계에 갇힌 수준에서 뚱땅거린다. 왼손으로는 화음을 오른손으로는 멜로디를, 화음은 세 손가락만 써서 친다. 악보는 C장조, A단조 이외에는 읽지 못한다. 엄밀히 말하면 그 둘도 악보를 읽는다기보다 계명을 찾아 노래를 알고 나서 악보 없이 그 노래를 친다고 해야 한다. 노래만 알면 악보 없이 그냥 자동으로 손가락이 가서 멜로디와 화음을 두드려준다. 외워서 하는 동작이 아니다. 피아노를 전혀 칠 줄 모르는 사람은 악보도 없이 능숙하게 치니까 제법 잘 친다고 속을 정도다. 모든 노래를 장조는 C, 단조는 A로 바꾸어 치므로 조에 따른 느낌 차이를 내지 못한다. 복잡하고 큰 음악은 손댈 수 없다. 여기가 끝이다.

 

이 고착 상태를 깨뜨릴 수 있을까? 딸아이가 소개한 피아노 선생님에게 사연을 이야기했다. 솔루션은 간단했다. 피아노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치는 수업으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얼른 알아차렸다. 내 특수성은 고려 대상일 수 없으며,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 말이다.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 시간이라면 거문고산조나 판소리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음악 부역 서사를 쓰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다.

 

일본어로 엔카도 부르고, 이탈리아어로 오페라 아리아도 부르면서 정작 아리랑조차 우리 음률과 창법으로 부르지 못하는 내 현실이 새삼 뼈아프게 다가왔다. 나는 민족주의 심지어 국뽕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한의학도가 6년 내내 양의학까지 배우는 동안, 양의학도는 6년 내내 한의학을 무시하는 부조리에 관해 이야기한다. 문화는 결핍을 따라 흐른다고 누가 말했나. 한국인에게 피아노가 결핍일 때 미국인에게는 거문고가 왜 결핍이 아닐까. 거문고는 음악이 아니라는 말 이외에 답이 없다. 양의학이 한의학을 의학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치와 같다. 우리가 무심코 클래식하면 신쾌동 <거문고산조> 아닌 쇼팽 <녹턴>을 떠올리는 일은 문화 다양성 현상이 아니고 식민지 부역 현상이다. 여기가 시작이다.

 

애써 배웠든 부지불식간이든 구전 동요에서 클래식까지 통속과 우아를 가로지르며 우리 감성과 이성, 심지어 의지마저 좌우하는 제국 음악이 얼마나 쉽게 어떻게 은밀히 일상으로 들어와 있는지 개인 경험만으로도 실감한다. 문제는 당최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특권층 부역 집단이 음악계를 이토록 강고하게 지배하는 한 우리 음악은 관광상품으로나 소비되는 지경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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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1. 강영철 계정식 고종익 김관 김기수 김동진 김생려 김성태 김영길 김원복 김재훈 김준영 김천애 김해송 남인수 박경호 박시춘 반야월 백년설 서영덕 손목인 안익태 이규남 이면상 이봉룡 이인범 이재호 이종태 이철 이흥렬 임동혁 장세정 전기현 조두남 조명암 조백원 최승희 최팔근 최희남 한상기 함화진 현제명 홍난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음악인은 43명으로 미술인보다 두 배 이상 많다. 대중음악인까지 포함한 숫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제가 식민 통치 선전·선동 수단으로 음악을 특히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리라. 식민 통치 초반부터 조선총독부는 음악으로 제국주의를 주입하고 민족혼을 빼앗는 여러 작업을 진행해왔다. 교과 과정에 일본 음악 교과서를 넣는가 하면, 일상 풍습에까지 이른바 황음(皇音)이 파고들도록 관리했다. 음악이 공동체 정서 형성에 기축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벌인 치밀한 통치술이었다.

 

통치 말 전쟁 정국이 되면서부터는 광적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김창욱 논문 <일제 팟쇼체제기의 친일음악운동>에 따르면 1936년 부임한 제7대 총독 미나미는 강력하게 황민(皇民)화정책을 시행했는데, 그중에서도 파급 효과가 큰 음악 운동을 지속 반복적으로 벌였다: 가요정화운동, 신체제운동, 음악보국운동, 후생음악운동, 국민개창운동. 이 운동에는 조선문예회, 경성음악협회, 조선음악협회, 대화악단, 경성후생실내악단 같은 음악 단체가 동원되었고 홍난파, 현제명을 위시한 서구 음악 제1세대 인물들 대부분이 참여했다. 이들 부역 음악인은 물론 음악계를 구성하는 각종 조직과 체제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이 기득권 세력은 교육, 공연, 단체는 물론 미국이나 유럽 유학을 매개로 특권층 부역 인맥을 재생산하면서 오늘날까지 승승장구하고 있다.

 

2.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본다. 요즘 아이들도 부르는지 잘 모르는데, 내 또래 사람들은 의심 없이 우리 (전래) 동요라고 알고 불렀던 이런 노래들이 죄다 일본 동요다.

 

학교 종이 땡땡땡···아침 바람 찬 바람에···여우야~ 여우야~ 뭐하니···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 누구십니까···꼬마야~ 꼬마야~ 뒤를 돌아라···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 사실을 다 자라서 어른이 되고 제국주의 공부를 하기 전까지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이렇다면 내 벗들 상황은 더하지 않을까. 그들 대부분 이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으리라. 이런 현실은 우리 공동체 진실에 뚫린 구멍인가, 부역 국가 거짓이 은폐된 장벽인가. 대체 우리는 여태 뭘 하며 살아왔는가. 어디 이뿐일까. 아래 내용은 2019820일 자 한겨레신문 기사다.

 

경기도가 삼각산 솟은 아래 고을고을이 긴 역사 아로새긴 전통의 터전으로 시작되는 도 노래(도가)를 새로 만들기로 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은 올해,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반일감정이 확산하는 상황에서 친일 음악가인 이흥렬이 작곡한 도 노래를 바꾸는 것은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이라는 이유에서다. 친일 음악가인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와 친일 음악인들이 만든 교가를 바꿔야 한다는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경기도는 작곡자 친일 논란을 빚은 도 노래 사용을 중단하고 전국민을 대상으로 새로운 경기도 노래 공정한 공모전118일까지 연다고 19일 밝혔다. 이성호 경기도 문화종무과장은 새로운 도가 제정은 경기도의 친일 잔재 청산 노력의 하나로 시작됐으며 도민의 삶과 애환을 담은 경기도 대표 노래가 탄생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경기도 노래는 친일 작곡가 이흥렬의 곡이다. ‘섬집 아기등의 동요·가곡 수백 곡을 쓴 그는 일제강점기 친일 음악 단체인 대화악단경성후생악단에서 활동한 친일 인사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강점기에 민족 반역, 부일 협력 등 친일반민족행위를 자행한 4,389명의 목록을 정리해 2009<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는데, 여기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다.

 

애국가도 교체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곡을 쓴 이가 친일 작곡가인 안익태라는 점 때문이다. 애국가는 1930년대 그가 쓴 한국환상곡’ 4악장의 일부다. 작사가는 독립운동가 안창호라는 설과 친일파 윤치호라는 설로 나뉜다. 안익태는 1965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지만,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애국가 논란은 <친일인명사전>이 나온 뒤 꾸준히 제기되다, 최근 들어서는 정치권으로도 번지는 상황이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지난 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안익태 곡조 애국가 계속 불러야 하나라는 제목의 공청회를 열기도 했다.

 

일선 학교에서는 일제 잔재가 남은 교가 퇴출 운동이 활발하다. 서울 구로중은 올해 초 일제 잔재 퇴출 티에프(TF)팀을 꾸려, 이흥렬이 작곡한 교가를 바꾸기로 결정했다. 학교 관계자는 학부모와 동문, 학생, 교사 등이 참여해 교가를 바꾸기로 했고 내년쯤 새로운 교가를 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전북도교육청은 올해 예산을 확보해 도내 학교 10곳의 교가를 교체할 방침이다. 2020년에는 학교 15곳의 교가를 추가로 바꾼다. 광주광역시에서는 광덕고, 대동고 등 3곳이 친일 음악가가 작곡한 교가를 바꿨다. 광주일고, 숭일고, 서강고 등 11곳도 교가를 교체하고 있다. 부산시교육청은 지난 3월부터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학교 속 일제 잔재 청산지원팀을 꾸려, 교가 등 학교 속 일제 잔재를 찾아 청산하는 활동을 펼치는 중이다.

 

문제는 애국가나 교가 등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애국가 등 국가 상징을 담당하는 행정안전부는 애국가 교체 운동이 지금보다 더 강하게 일어야 교체를 검토할 수 있다는 태도다. 차호준 행안부 의정담당관은 국민 대다수가 애국가를 국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바꾸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애국가를 바꾸기 위한 법적 절차는 없다. 남북통일 등이 이뤄져 애국가를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형성되면 바꿀 수 있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교가 등에 남아 있는 친일 잔재 청산은 처음부터 낙인찍기가 아니라 공론화의 과정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국제관계학부)애국가를 부르면 안 되는 핵심적 이유는 비애국적, 반애국적이기 때문이라며 애국가와 관련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공적으로 확인하고 국민이 판단하게 해야 하는데, 정부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이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특권층 부역자 음악인이 만든 국가, 도가, 교가를 바꾸는 일은 사실 신문에 날 일이 아니라 그냥 당연하고 진즉 끝냈어야 할 일인데 광복 80년 다 된 지금에야 무슨 이벤트처럼 벌이는 상황이 안타깝다. 내가 다른 시선으로 이 상황을 보는 곡절은 사실 따로 있다.

 

이미 교육 부역 서사 원석학원 성남중·고등학교 예에서 보았듯 부역 역사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악용할 소지가 다분하다. 일제 잔재를 없애는 사업으로 위장해 세금 지원까지 받으려고 부역 집단이 부리는 협잡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음모론이 아니다. 특권층 부역 집단 본디 행태가 그렇다. 저들은 일상을 일생을 그렇게 살아간다. 그런 권모술수로 부와 명성을 쌓아 제 근본으로 삼는다. 부역 음악사 두 태두 인생이 그 전형이니 그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3. 홍난파는 해방 이전 식민지 부역 음악계 대부였다.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에 따르면 그는 조선인에게 대동아건설을 목표해 일본 국민으로서 음악보국운동을 펼치자는 논리로 친일 창작활동을 벌였고, 언론 활동과 악단 활동에 앞장섰다. 그는 스스로 황도 정신을 설파하는 사도를 자처했으며, 조선총독부 각종 조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방송에 출연해 군국가요 창작과 보급에 앞장서기도 했다. 해방 후 가족과 측근이 부풀리고 날조한 자료에 의거 민족음악가 또는 애국지사로 둔갑시켰다.

 

노동은 중앙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현제명은 홍난파와 더불어 일제 중반까지 양악으로 '민족개량운동'을 전개하다가 후반부터는 음악과 관련한 모든 조선총독부 관제 친일 단체 지도자로 활발하게 활동한 대표적 인물로서 가장 뚜렷한 친일 전력을 가진 음악인이다. 그는 1941년 홍난파가 죽자 부역 음악계 최고 권좌에 올랐다. 해방 후에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창설한 주역으로 국내 음악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되었다. 부역에 대한 반성이나 사죄도 없이 음악계 대부로 군림하면서, 음악인은 오직 미적 평가 대상이지 윤리적·역사적 평가 대상이 아니라고 정당화하는 가소로운 특권을 행사했다.

 

극소수 미국 유학파였던 홍난파·현제명을 위시해 특권층 부역 음악인은 거의 예외 없이 개신교도며 일본·미국 유학파였다. 이 배경은 해방 후 음악계가 개신교·친일·친미·반공 이데올로기에 고착되는 데 공헌했다. (홍난파와 현제명 내용은 https://dklee.tistory.com <우리 안의 친일 문화>에 있다.)

 

이 경향의 대표적인 증거가 개신교 복음성가 속에 들어 있는 <부럽지 않네> <성경목록가>. <부럽지 않네><용감한 수병>이라는 일본 군가고, <성경목록가><철도창가>라는 관제 가요다이 문제에 관해 장신대 홍정수 교수는 정식 찬송가에서는 일본 군가가 이미 삭제되었고, 구전되는 복음성가는 강제할 방법이 없어서 그대로 두었는데 문제가 된 이상 자연스럽게 빨리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어쩐지 변명처럼 들린다.

 

여전히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다. 대표적인 특권층 부역자 김활란이 작사한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와 주요한이 작사한 <어머니의 넓은 사랑>은 그대로 불린다. 심지어 전자에는 김활란을 미화하는 해설까지 붙여 놓았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보건대 이 땅 개신교, 특히 복음주의라 일컫는 보수 교단에 속한 음악인들은 거의 모두 홍난파나 현제명이 이루어 놓은 음악 부역 전통에 진심이라 할 만하다. 이들이 하는 음악이 교회를 매개로 대중 정서에 끼치는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누군가는 반드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끌어안고 반제 서사를 써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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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관악산이다. 여느 날보다 조금 일찍 출발해 서울대 교정 깊숙이 들어가는 마을버스를 탔다. 종점에서 내려 서울대 저수지가 있는 골짜기로 걸어 들어갔다. 조금 들어가다 개울가에 버드나무 가지를 심었다. 큰절 올렸다.



서울대학교 정문은 서울대학교 교표 조형물이다. 왼쪽부터 읽으면 국립서울대학교고 오른쪽부터 읽으면 경성제국대학이다.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 경성제국대학 출신 특권층 부역 집단이 지닌 자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국립 서울대학교는 경성제국대학 연장선에 있다. 아니. 이름만 바꾼 제국대학, 그러니까 특권층 부역 집단을 재생산하는 식민 통치 미래 본진이다. 일요일이라 인적이 거의 없는 교정을 걸으며 나는 무겁게 슬프게 빌었다: 서울대학교를 정화해주소서. 내가 개울가에 버드나무 가지를 심고 큰절 올린 제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골짜기로 올라가면서 이상하리만치 나는 여러 번 길을 잃었다. 마지막에는 무엇에 홀린 듯 스마트폰 지도로 방향을 확인하는 일조차 까맣게 잊은 채 개울을 넘나들며 마침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되돌아올 수 없는 곳에 다다르고 말았다. 그제야 스마트폰 지도로 확인하고 남들에게는 길 아닌 길을 걸어 연주대 코밑 능선에 도착했다. 능선길에서 나는 특별한 인연과 마주했다. 길가, 아니 길 위에서 삶을 시작한 버섯이 행인 발에 차여 부서진 채 흩어져 있었다. 대부분 으스러졌는데 가장 작은 몇 개체가 뿌리는 뽑혔지만 제법 성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그들을 수습해 속이 비어가는 고목에 심어주었다. 버섯을 심기는 처음이었다.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그들 목소리에 끌려 길을 잃지 않았나 싶었다. 길을 잃지 않았다면 갈 생각이 전혀 없었던 러시아워처럼 붐비는 능선길에서 여차하면 짓밟혀 흔적으로만 남았을 그들을 만났으니 말이다.



나는 부드럽게 떨리는 가슴을 도닥이며 내려가는 길, 그러니까 관악산 속 지리산 골짜기로 향했다. 처음부터 헷갈리더니 마침내 또 완전히 길을 잃고 말았다. 이때도 스마트폰 지도 보는 일을 잊고 한참을 나아갔다. 더 나아가면 본디 가려던 길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판단이 서는 순간 나는 길에서 이탈해 관악·지리산 골짜기를 향해 직선으로 내 길을 내기 시작했다. 찔리고 긁히고 미끄러지고 빠지고 가던 길을 되돌아오기를 되풀이하며 가던 어느 순간 시야에 본디 가려던 길 풍경이 쑥 하고 들어왔다. 다행히 이번에도 낭떠러지가 길을 막지는 않았다. 개울가로 내려가 옷매무새를 고치고 얼굴과 손을 씻은 다음 서울대 저수지 가까이 서 있는 커다란 버드나무에서 모셔 온가지를 안전한 곳에 심었다. 큰절 올렸다.



관악산은 백악산 객산으로 외세, 그러니까 제국을 뜻한다. 버드나무 심고 큰절 올린 내 제의에는 제국과 특권층 부역 집단이 자기 풍요를 위해 더는 식민지를 착취·살해하지 말고 지구 생태계 전체가 공생 네트워킹 되게 하는 일로 나아가기를 비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제의를 숲에서 행하는 뜻은 이렇다: 제국주의 살해는 결국 옴니사이드에 이를 텐데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에코사이드가 임계점을 넘지 말아야 하고 에코사이드가 임계점을 넘지 않으려면 숲이 반제국주의 전선에 으뜸 주체로 참여해야 한다.

 

관악사 운동장 가까이 이르자 포크 로더 기계음이 거세다. 크고 작은 테라포밍에 영일 없는 이 식민지 땅, 이젠 정말 징글징글하다. 제국주의 공부와 부역 서사 쓰기에 깊이 잠길수록 우울과 침묵이 육중해진다. 익사하지 않으려면 나무가, 풀이 내게 전하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부디 이 초록 만신 귀 좀 열어주시기를 빈다.

 

서울대학교 교정을 떠나면서 생각에 잠긴다. 서울대학교를 관악산으로 옮긴 이유가 뭘까? 당시 들려왔던 유언비어는 서울대 학생들이 반독재 시위를 자주 하니까 관악산 드센 기운으로 학생들 저항기를 꺾으려고 박정희가 시켰다, 뭐 이런 얘기였다. 이 유언비어가 다만 유언비어는 아닐 테다. 나는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간 주술을 상상한다. 제국 첨병, 식민지 특권층 부역자를 낳고 키워내기 위해서 객산 자궁과 품에 앉혀 놓았다, 이렇게 말이다. 웃자고 하는 말 아니다. 실제로 오늘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엄연한 사건 아닌가. 소름 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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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2 13: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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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3 08: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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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0. 미술 애착과는 달리 내 음악 애착은 학교와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부모가 유년기 내게 미친 이상한 영향에서 시작된 듯하다.

 

열 살 이전 이미 엄마와 나는 영 생이별했지만, 길지 않은 시간 함께 살면서 내게 남긴 선명한 기억 가운데 약간 비음 섞인 미성으로 기막히게 잘 불렀던 박재란 노래 <>(1959)과 이미자 노래 <황포돗대>(1964)가 있다. 이혼 상태인데도 할머니 당부로 집에서 나와 함께 살았던 엄마는 일 년에 한 번 정도 내려오곤 했던 아버지한테 새 유행가배우는 일에 이상하리만큼 진심이었다. 그런 엄마 심사를 아직도 잘 이해하기 어렵지만 엄마 노래 솜씨 하나는 그만이었다고 기억하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다.

 

아버지는 엄마보다 딴따라유전자가 더 많은 사람이었다. 하모니카를 포함해 악기 몇을 능숙히 다루었고 노래 또한 절창이었다. 작고 직전까지 남인수급 고음 미성이 쇠하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젊은 날 인기가요 대부분을 완벽하게 불렀으며, 마지막 무렵에는 은방울 자매와 문주란을 심하게 아꼈다. 아버지와 산 10년간 나는 그 노래들을 허구한 날 들었다. 그렇게 기억에 저장된 노래들을 앉은자리에서 끊지 않고 200곡 정도 부를 수 있었다. 특히 문주란 노래는 지금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부른다.


대학에 와서 내 애착에는 서양음악이 보태진다. 기숙사 룸메이트가 지닌 작은 라디오에서 어느 날 들은 경음악한 곡이 내게 다른 귀 하나를 더 선물했다. 그때부터 나는 분홍빛 음악 노트에 음악 이름, 작곡가, 악단, 주선율, 느낌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영화음악을 포함한 당대 경음악을 주름잡았던 폴 모리아, 헨리 맨시니, 퍼시 페이스, 제임스 라스트, 엔니오 모리코네, 빌리 본, 그 누구보다 만토바니가 노트를 빼곡하게 채웠다. 경음악에서 클래식 소곡으로, 관현악으로, 실내악으로 내 음악 애착은 진화해 갔다.

 

클래식에 심취해 한껏 귀가 열렸을 때는 오케스트레이션만으로 베토벤과 다른 음악을 구분할 수 있었으며, 베토벤은 단 한음을 듣고서도 곡명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바흐 <무반주 첼로 파르티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일 없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이 절정에서 <함동정월류 가야금산조>가 벼락같이 나타나는 바람에 내 애착은 단박에 전복됐다. 이수자 김해숙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고 직접 그 연주를 들었다. 녹음테이프를 구해서 늘어져 들을 수 없을 때까지 들었다. 다른 음악은 더는 음악이 아니었다.

 

이 전복은 느닷없이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이 사건 전후해 신학 공부를 거두고 한의학으로 돌아섰다. 그 변화를 추동한 각성이 음악 애착 변화에까지 미쳤다고도 할 수 있고 반대라고도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뽕짝에서 시작해 클래식을 거쳐 국악으로 돌아온 내 개인 여정은 우리 근현대사 축소판이다. 일본 제국 음악, 서구 제국 음악에 성찰 없이 빠져든 내 음악 편력은 여지없는 부역이다. 무지렁이 내가 이 정도면 특권층 부역자는 말할 나위조차 없다. 저들은 여전히 거기서 환호하고 있지 않은가.

 

임영웅이란 아이콘으로 대변되는 대한민국 뽕짝아니 트로트 열풍에 묵직한 긍정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마저 그 대열에 합류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내 생각은 그러나 다르다. 나는 이 떠들썩한 문화 현상을 조선일보 정치 프로젝트 소산으로 해석한다. 내 눈에는 통시적으로도 공시적으로도 정확하고 치밀한 좌표 운동이 보인다. 황국신민으로 태어나 이승만과 박정희를 추앙하며 살아온 어르신들이 미야코부시(都節) 선율을 들으며 어떤 정서에 젖어 들겠는가.

 

내 음악 감수성은 매우 복잡하나 슬플 때 뽕짝에 빠져든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반제국주의로 벼려진 지성이 단박에 무너진다.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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