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0. 미술 애착과는 달리 내 음악 애착은 학교와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부모가 유년기 내게 미친 이상한 영향에서 시작된 듯하다.

 

열 살 이전 이미 엄마와 나는 영 생이별했지만, 길지 않은 시간 함께 살면서 내게 남긴 선명한 기억 가운데 약간 비음 섞인 미성으로 기막히게 잘 불렀던 박재란 노래 <>(1959)과 이미자 노래 <황포돗대>(1964)가 있다. 이혼 상태인데도 할머니 당부로 집에서 나와 함께 살았던 엄마는 일 년에 한 번 정도 내려오곤 했던 아버지한테 새 유행가배우는 일에 이상하리만큼 진심이었다. 그런 엄마 심사를 아직도 잘 이해하기 어렵지만 엄마 노래 솜씨 하나는 그만이었다고 기억하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다.

 

아버지는 엄마보다 딴따라유전자가 더 많은 사람이었다. 하모니카를 포함해 악기 몇을 능숙히 다루었고 노래 또한 절창이었다. 작고 직전까지 남인수급 고음 미성이 쇠하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젊은 날 인기가요 대부분을 완벽하게 불렀으며, 마지막 무렵에는 은방울 자매와 문주란을 심하게 아꼈다. 아버지와 산 10년간 나는 그 노래들을 허구한 날 들었다. 그렇게 기억에 저장된 노래들을 앉은자리에서 끊지 않고 200곡 정도 부를 수 있었다. 특히 문주란 노래는 지금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부른다.


대학에 와서 내 애착에는 서양음악이 보태진다. 기숙사 룸메이트가 지닌 작은 라디오에서 어느 날 들은 경음악한 곡이 내게 다른 귀 하나를 더 선물했다. 그때부터 나는 분홍빛 음악 노트에 음악 이름, 작곡가, 악단, 주선율, 느낌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영화음악을 포함한 당대 경음악을 주름잡았던 폴 모리아, 헨리 맨시니, 퍼시 페이스, 제임스 라스트, 엔니오 모리코네, 빌리 본, 그 누구보다 만토바니가 노트를 빼곡하게 채웠다. 경음악에서 클래식 소곡으로, 관현악으로, 실내악으로 내 음악 애착은 진화해 갔다.

 

클래식에 심취해 한껏 귀가 열렸을 때는 오케스트레이션만으로 베토벤과 다른 음악을 구분할 수 있었으며, 베토벤은 단 한음을 듣고서도 곡명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바흐 <무반주 첼로 파르티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일 없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이 절정에서 <함동정월류 가야금산조>가 벼락같이 나타나는 바람에 내 애착은 단박에 전복됐다. 이수자 김해숙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고 직접 그 연주를 들었다. 녹음테이프를 구해서 늘어져 들을 수 없을 때까지 들었다. 다른 음악은 더는 음악이 아니었다.

 

이 전복은 느닷없이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이 사건 전후해 신학 공부를 거두고 한의학으로 돌아섰다. 그 변화를 추동한 각성이 음악 애착 변화에까지 미쳤다고도 할 수 있고 반대라고도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뽕짝에서 시작해 클래식을 거쳐 국악으로 돌아온 내 개인 여정은 우리 근현대사 축소판이다. 일본 제국 음악, 서구 제국 음악에 성찰 없이 빠져든 내 음악 편력은 여지없는 부역이다. 무지렁이 내가 이 정도면 특권층 부역자는 말할 나위조차 없다. 저들은 여전히 거기서 환호하고 있지 않은가.

 

임영웅이란 아이콘으로 대변되는 대한민국 뽕짝아니 트로트 열풍에 묵직한 긍정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마저 그 대열에 합류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내 생각은 그러나 다르다. 나는 이 떠들썩한 문화 현상을 조선일보 정치 프로젝트 소산으로 해석한다. 내 눈에는 통시적으로도 공시적으로도 정확하고 치밀한 좌표 운동이 보인다. 황국신민으로 태어나 이승만과 박정희를 추앙하며 살아온 어르신들이 미야코부시(都節) 선율을 들으며 어떤 정서에 젖어 들겠는가.

 

내 음악 감수성은 매우 복잡하나 슬플 때 뽕짝에 빠져든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반제국주의로 벼려진 지성이 단박에 무너진다.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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