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00. 나는 피아노를 칠 수 있다. 정식으로 배우지는 않았고 홀로 깨쳐 독학자 한계에 갇힌 수준에서 뚱땅거린다. 왼손으로는 화음을 오른손으로는 멜로디를, 화음은 세 손가락만 써서 친다. 악보는 C장조, A단조 이외에는 읽지 못한다. 엄밀히 말하면 그 둘도 악보를 읽는다기보다 계명을 찾아 노래를 알고 나서 악보 없이 그 노래를 친다고 해야 한다. 노래만 알면 악보 없이 그냥 자동으로 손가락이 가서 멜로디와 화음을 두드려준다. 외워서 하는 동작이 아니다. 피아노를 전혀 칠 줄 모르는 사람은 악보도 없이 능숙하게 치니까 제법 잘 친다고 속을 정도다. 모든 노래를 장조는 C, 단조는 A로 바꾸어 치므로 조에 따른 느낌 차이를 내지 못한다. 복잡하고 큰 음악은 손댈 수 없다. 여기가 끝이다.

 

이 고착 상태를 깨뜨릴 수 있을까? 딸아이가 소개한 피아노 선생님에게 사연을 이야기했다. 솔루션은 간단했다. 피아노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치는 수업으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얼른 알아차렸다. 내 특수성은 고려 대상일 수 없으며,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 말이다.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 시간이라면 거문고산조나 판소리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음악 부역 서사를 쓰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다.

 

일본어로 엔카도 부르고, 이탈리아어로 오페라 아리아도 부르면서 정작 아리랑조차 우리 음률과 창법으로 부르지 못하는 내 현실이 새삼 뼈아프게 다가왔다. 나는 민족주의 심지어 국뽕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한의학도가 6년 내내 양의학까지 배우는 동안, 양의학도는 6년 내내 한의학을 무시하는 부조리에 관해 이야기한다. 문화는 결핍을 따라 흐른다고 누가 말했나. 한국인에게 피아노가 결핍일 때 미국인에게는 거문고가 왜 결핍이 아닐까. 거문고는 음악이 아니라는 말 이외에 답이 없다. 양의학이 한의학을 의학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치와 같다. 우리가 무심코 클래식하면 신쾌동 <거문고산조> 아닌 쇼팽 <녹턴>을 떠올리는 일은 문화 다양성 현상이 아니고 식민지 부역 현상이다. 여기가 시작이다.

 

애써 배웠든 부지불식간이든 구전 동요에서 클래식까지 통속과 우아를 가로지르며 우리 감성과 이성, 심지어 의지마저 좌우하는 제국 음악이 얼마나 쉽게 어떻게 은밀히 일상으로 들어와 있는지 개인 경험만으로도 실감한다. 문제는 당최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특권층 부역 집단이 음악계를 이토록 강고하게 지배하는 한 우리 음악은 관광상품으로나 소비되는 지경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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