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1. 강영철 계정식 고종익 김관 김기수 김동진 김생려 김성태 김영길 김원복 김재훈 김준영 김천애 김해송 남인수 박경호 박시춘 반야월 백년설 서영덕 손목인 안익태 이규남 이면상 이봉룡 이인범 이재호 이종태 이철 이흥렬 임동혁 장세정 전기현 조두남 조명암 조백원 최승희 최팔근 최희남 한상기 함화진 현제명 홍난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음악인은 43명으로 미술인보다 두 배 이상 많다. 대중음악인까지 포함한 숫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제가 식민 통치 선전·선동 수단으로 음악을 특히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리라. 식민 통치 초반부터 조선총독부는 음악으로 제국주의를 주입하고 민족혼을 빼앗는 여러 작업을 진행해왔다. 교과 과정에 일본 음악 교과서를 넣는가 하면, 일상 풍습에까지 이른바 황음(皇音)이 파고들도록 관리했다. 음악이 공동체 정서 형성에 기축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벌인 치밀한 통치술이었다.

 

통치 말 전쟁 정국이 되면서부터는 광적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김창욱 논문 <일제 팟쇼체제기의 친일음악운동>에 따르면 1936년 부임한 제7대 총독 미나미는 강력하게 황민(皇民)화정책을 시행했는데, 그중에서도 파급 효과가 큰 음악 운동을 지속 반복적으로 벌였다: 가요정화운동, 신체제운동, 음악보국운동, 후생음악운동, 국민개창운동. 이 운동에는 조선문예회, 경성음악협회, 조선음악협회, 대화악단, 경성후생실내악단 같은 음악 단체가 동원되었고 홍난파, 현제명을 위시한 서구 음악 제1세대 인물들 대부분이 참여했다. 이들 부역 음악인은 물론 음악계를 구성하는 각종 조직과 체제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이 기득권 세력은 교육, 공연, 단체는 물론 미국이나 유럽 유학을 매개로 특권층 부역 인맥을 재생산하면서 오늘날까지 승승장구하고 있다.

 

2.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본다. 요즘 아이들도 부르는지 잘 모르는데, 내 또래 사람들은 의심 없이 우리 (전래) 동요라고 알고 불렀던 이런 노래들이 죄다 일본 동요다.

 

학교 종이 땡땡땡···아침 바람 찬 바람에···여우야~ 여우야~ 뭐하니···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 누구십니까···꼬마야~ 꼬마야~ 뒤를 돌아라···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 사실을 다 자라서 어른이 되고 제국주의 공부를 하기 전까지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이렇다면 내 벗들 상황은 더하지 않을까. 그들 대부분 이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으리라. 이런 현실은 우리 공동체 진실에 뚫린 구멍인가, 부역 국가 거짓이 은폐된 장벽인가. 대체 우리는 여태 뭘 하며 살아왔는가. 어디 이뿐일까. 아래 내용은 2019820일 자 한겨레신문 기사다.

 

경기도가 삼각산 솟은 아래 고을고을이 긴 역사 아로새긴 전통의 터전으로 시작되는 도 노래(도가)를 새로 만들기로 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은 올해,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반일감정이 확산하는 상황에서 친일 음악가인 이흥렬이 작곡한 도 노래를 바꾸는 것은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이라는 이유에서다. 친일 음악가인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와 친일 음악인들이 만든 교가를 바꿔야 한다는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경기도는 작곡자 친일 논란을 빚은 도 노래 사용을 중단하고 전국민을 대상으로 새로운 경기도 노래 공정한 공모전118일까지 연다고 19일 밝혔다. 이성호 경기도 문화종무과장은 새로운 도가 제정은 경기도의 친일 잔재 청산 노력의 하나로 시작됐으며 도민의 삶과 애환을 담은 경기도 대표 노래가 탄생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경기도 노래는 친일 작곡가 이흥렬의 곡이다. ‘섬집 아기등의 동요·가곡 수백 곡을 쓴 그는 일제강점기 친일 음악 단체인 대화악단경성후생악단에서 활동한 친일 인사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강점기에 민족 반역, 부일 협력 등 친일반민족행위를 자행한 4,389명의 목록을 정리해 2009<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는데, 여기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다.

 

애국가도 교체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곡을 쓴 이가 친일 작곡가인 안익태라는 점 때문이다. 애국가는 1930년대 그가 쓴 한국환상곡’ 4악장의 일부다. 작사가는 독립운동가 안창호라는 설과 친일파 윤치호라는 설로 나뉜다. 안익태는 1965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지만,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애국가 논란은 <친일인명사전>이 나온 뒤 꾸준히 제기되다, 최근 들어서는 정치권으로도 번지는 상황이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지난 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안익태 곡조 애국가 계속 불러야 하나라는 제목의 공청회를 열기도 했다.

 

일선 학교에서는 일제 잔재가 남은 교가 퇴출 운동이 활발하다. 서울 구로중은 올해 초 일제 잔재 퇴출 티에프(TF)팀을 꾸려, 이흥렬이 작곡한 교가를 바꾸기로 결정했다. 학교 관계자는 학부모와 동문, 학생, 교사 등이 참여해 교가를 바꾸기로 했고 내년쯤 새로운 교가를 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전북도교육청은 올해 예산을 확보해 도내 학교 10곳의 교가를 교체할 방침이다. 2020년에는 학교 15곳의 교가를 추가로 바꾼다. 광주광역시에서는 광덕고, 대동고 등 3곳이 친일 음악가가 작곡한 교가를 바꿨다. 광주일고, 숭일고, 서강고 등 11곳도 교가를 교체하고 있다. 부산시교육청은 지난 3월부터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학교 속 일제 잔재 청산지원팀을 꾸려, 교가 등 학교 속 일제 잔재를 찾아 청산하는 활동을 펼치는 중이다.

 

문제는 애국가나 교가 등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애국가 등 국가 상징을 담당하는 행정안전부는 애국가 교체 운동이 지금보다 더 강하게 일어야 교체를 검토할 수 있다는 태도다. 차호준 행안부 의정담당관은 국민 대다수가 애국가를 국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바꾸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애국가를 바꾸기 위한 법적 절차는 없다. 남북통일 등이 이뤄져 애국가를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형성되면 바꿀 수 있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교가 등에 남아 있는 친일 잔재 청산은 처음부터 낙인찍기가 아니라 공론화의 과정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국제관계학부)애국가를 부르면 안 되는 핵심적 이유는 비애국적, 반애국적이기 때문이라며 애국가와 관련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공적으로 확인하고 국민이 판단하게 해야 하는데, 정부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이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특권층 부역자 음악인이 만든 국가, 도가, 교가를 바꾸는 일은 사실 신문에 날 일이 아니라 그냥 당연하고 진즉 끝냈어야 할 일인데 광복 80년 다 된 지금에야 무슨 이벤트처럼 벌이는 상황이 안타깝다. 내가 다른 시선으로 이 상황을 보는 곡절은 사실 따로 있다.

 

이미 교육 부역 서사 원석학원 성남중·고등학교 예에서 보았듯 부역 역사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악용할 소지가 다분하다. 일제 잔재를 없애는 사업으로 위장해 세금 지원까지 받으려고 부역 집단이 부리는 협잡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음모론이 아니다. 특권층 부역 집단 본디 행태가 그렇다. 저들은 일상을 일생을 그렇게 살아간다. 그런 권모술수로 부와 명성을 쌓아 제 근본으로 삼는다. 부역 음악사 두 태두 인생이 그 전형이니 그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3. 홍난파는 해방 이전 식민지 부역 음악계 대부였다.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에 따르면 그는 조선인에게 대동아건설을 목표해 일본 국민으로서 음악보국운동을 펼치자는 논리로 친일 창작활동을 벌였고, 언론 활동과 악단 활동에 앞장섰다. 그는 스스로 황도 정신을 설파하는 사도를 자처했으며, 조선총독부 각종 조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방송에 출연해 군국가요 창작과 보급에 앞장서기도 했다. 해방 후 가족과 측근이 부풀리고 날조한 자료에 의거 민족음악가 또는 애국지사로 둔갑시켰다.

 

노동은 중앙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현제명은 홍난파와 더불어 일제 중반까지 양악으로 '민족개량운동'을 전개하다가 후반부터는 음악과 관련한 모든 조선총독부 관제 친일 단체 지도자로 활발하게 활동한 대표적 인물로서 가장 뚜렷한 친일 전력을 가진 음악인이다. 그는 1941년 홍난파가 죽자 부역 음악계 최고 권좌에 올랐다. 해방 후에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창설한 주역으로 국내 음악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되었다. 부역에 대한 반성이나 사죄도 없이 음악계 대부로 군림하면서, 음악인은 오직 미적 평가 대상이지 윤리적·역사적 평가 대상이 아니라고 정당화하는 가소로운 특권을 행사했다.

 

극소수 미국 유학파였던 홍난파·현제명을 위시해 특권층 부역 음악인은 거의 예외 없이 개신교도며 일본·미국 유학파였다. 이 배경은 해방 후 음악계가 개신교·친일·친미·반공 이데올로기에 고착되는 데 공헌했다. (홍난파와 현제명 내용은 https://dklee.tistory.com <우리 안의 친일 문화>에 있다.)

 

이 경향의 대표적인 증거가 개신교 복음성가 속에 들어 있는 <부럽지 않네> <성경목록가>. <부럽지 않네><용감한 수병>이라는 일본 군가고, <성경목록가><철도창가>라는 관제 가요다이 문제에 관해 장신대 홍정수 교수는 정식 찬송가에서는 일본 군가가 이미 삭제되었고, 구전되는 복음성가는 강제할 방법이 없어서 그대로 두었는데 문제가 된 이상 자연스럽게 빨리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어쩐지 변명처럼 들린다.

 

여전히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다. 대표적인 특권층 부역자 김활란이 작사한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와 주요한이 작사한 <어머니의 넓은 사랑>은 그대로 불린다. 심지어 전자에는 김활란을 미화하는 해설까지 붙여 놓았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보건대 이 땅 개신교, 특히 복음주의라 일컫는 보수 교단에 속한 음악인들은 거의 모두 홍난파나 현제명이 이루어 놓은 음악 부역 전통에 진심이라 할 만하다. 이들이 하는 음악이 교회를 매개로 대중 정서에 끼치는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누군가는 반드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끌어안고 반제 서사를 써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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